600년 영욕을 지켜본 침묵의 증인

북악산 정상 동쪽, 청운대 부근에서 바라본 경복궁과 서울 중심가. 경복궁의 중심라인이 북악산 정상과 약간 엇나가 있음을 알 수 있다. 한양도성의 남단이던 남산은 이제 서울의 중심에 섰고 오른쪽 멀찍한 관악산이 서울의 남단을 이룬다    
북악산 정상 동쪽, 청운대 부근에서 바라본 경복궁과 서울 중심가. 경복궁의 중심라인이 북악산 정상과 약간 엇나가 있음을 알 수 있다. 한양도성의 남단이던 남산은 이제 서울의 중심에 섰고 오른쪽 멀찍한 관악산이 서울의 남단을 이룬다    

청와대 앞에서 바라본 북악산. 경복궁과 마찬가지로 청와대 역시 북악산에 기대고 있다. 중간중간 암반이 드러난 데서 보듯, 산 전체가 화강암 덩어리다 

벌써 오래 전 일이다. 상경 후 서울과 주변 지리 파악을 위해 수도권의 산들을 섭렵하고 다녔는데 유일하게 오르지 못한 산이 있었다. 바로 청와대 뒤에 삼각뿔로 우뚝한 북악산(342m)이었다. 저기에 오르면 서울시내가 한눈에 들어올 테니 조선이 왜 여기에 도읍을 정했는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출입이 금지되어 방법이 없었다. 그나마 북악스카이웨이를 통해 북악팔각정에는 오를 수 있었지만 북악산에 가려 사대문 안은 잘 보이지 않았다. 그렇게 서울의 진산을 언제나 올라가볼 수 있을까 마음에만 남았다. 간혹 대통령이 측근이나 출입기자단과 북악산에 올랐다는 기사를 보면 한편 부럽고 또 한편 울화가 치밀었다. 북악산에 오르자면 대통령이 되거나 최소한 청와대 출입기자가 되는 수밖에 없는가.

마침내 북악산도 열렸다. 2006년부터 청와대에서 가장 먼 등산로가 일부 개방되기 시작하더니 22년 5월에는 청와대 바로 뒤를 통해 정상으로 오르는 코스마저 완전 개방되고 북악산을 지나는 한양도성도 전면적으로 열렸다. 개방 직후 호기심으로 몰리는 인파가 잠잠해질 때를 잠시 기다렸다가 어느 맑은 날, 북악산으로 향했다.

한양도성 서북향에 자리한 창의문. 반대편 성벽은 인왕산으로 이어진다. 왼쪽 멀리 남산이 보인다

 

1968년 북한 무장게릴라가 청와대를 기습한 1.21 사태 때 몸을 던져 막은 최규식 경무관 동상 

1.21 사태 때 순직한 정종수 경사 흉상과 순직비

지금은 서울이 확대되어 북한산(836m)을 진산(鎭山)으로 여기지만, 한양도성 4대문 안쪽만 서울이던 조선시대에 한양의 진산은 경복궁 뒤의 북악산(342m)이었다. 풍수지리적으로 혈(穴) 자리 뒤에 솟은 옹골찬 산을 뜻해서 주산(主山)이라고도 하며 옛날 서울의 혈자리는 경복궁 터였으니 북악산이 진산인 것은 자명하다. 이때 북한산은 주산이 흘러내리는 시원이 된 할아버지산 조산(祖山)이 된다. 개성의 주산이 궁궐이 있던 만월대 뒤의 송악산(488m)이고 천마산(757m)이 조산이듯이. 또 진산은 산진제를 지내는 사당이 있기 마련인데 북악산에도 있었다.

조선시대부터 궁궐이 내려다보이는 산이라고 해서 사찰과 민가를 철거하고 출입을 금했고, 근세에는 청와대가 산밑에 자리 잡으면서 금단의 산이 되었으니 대도시 지척에 있으면서 참으로 오랫동안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은 곳이다.

창의문에서 곧장 가파른 오르막이다. 급사면을 따라 쌓은 성벽은 엄청난 난공사였을 것이다  

왼쪽 비봉에서 오른쪽 가장 높은 보현봉까지 북한산의 남부 능선이 독수리 날개처럼 펼쳐져 있다. 그 아래 평창동의 단독주택들이 안겨 있다

북악산 정상까지 최단 코스인 창의문에서 산행을 시작한다. 창의문은 북악산과 인왕산 사이의 안부 고개에 있으며 한양도성이 지난다. 창의문 아래에는 1968년 1월 21일 청와대를 기습하기 위해 산을 타고 내려온 북한 무장 게릴라를 저지하다 사망한 최규식 경무관 동상과 정종수 경사 순직비가 서 있어 들뜬 마음을 서늘하게 가라앉힌다. 31명의 무장 게릴라가 청와대 코앞까지 침투했다는 것 자체가 경악할 일이다. 맞은편에는 윤동주문학관이 아담하다.

창의문에서 성벽 길을 따라 오른다. 입구 안내소에는 개방시간을 지정하고 있지만 출입문이 상시 개방되어 있어 사실상 자유롭게 출입이 가능하다. 한때는 신분증 검사까지 했다는데 지키는 사람도 없다. 곳곳에 감시카메라 렌즈만이 번뜩일 뿐이다.

마침내 도착한 북악산 정상 백악마루. 20평 남짓한 평지로 이뤄져 있고 '白岳山 342m’라고 새겨진 작은 비석이 서 있다. 나무에 가려 조망은 잘 트이지 않는다   

북악산 정상 서쪽 조망. 인왕산 줄기 너머로 차례로 서대문구, 은평구 시가지고 펼쳐지고 맨 뒤로는 고양과 김포 일대가 아득하다   

평지는 그나마 낫지만 가파른 산악지대에 성벽을 쌓는 것은 지난한 일이다. 한양도성은 1396년 98일 동안 전국에서 19만7400여명을 동원해 97개 구간으로 나눠(1구간 600척=약 180m) 완성했다. 전체 길이는 18.6km, 성벽 높이는 5~8m이다. 현존 구간은 13.7km이며, 북악산이 최고의 난공사였을 것이다.

급사면을 따라 단단하게 쌓아올린 석축의 바탕은 600년이 훌쩍 지나도록 강건한 모습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하지만 20만 백성을 동원해 힘들게 쌓아놓고도 임진왜란, 병자호란 때 활용해보지도 못하고 성을 버렸으니 실제 역할은 전투용이 아니라 경계용 담장에 그친 셈이다.

가파른 대신 고도가 금방 높아지니 북으로 북한산 남단의 준봉인 비봉~보현봉 능선이 한눈에 들어오고, 그 아래 평창동의 단독주택가가 안겨 있다. 세검정 방면 부암동 일원의 복잡한 골짜기에도 빈 틈 없이 집들이 들어찼다. 조선시대만 해도 경치 좋고 한적한 교외여서 선비들이 음풍농월을 즐기던 곳이다.

정상 동쪽 청운대에서 바라본 성북동 일원. 고급 주택이 밀집한, 서울의 대표적인 부촌이다  

1.21 사태 당시 총탄 흔적이 남은 소나무. 15발이나 맞았다는데 용케도 살아남았다 

동쪽 방면의 조망은 정상보다 청운대가 더 좋다 

청운대에서 뒤돌아본 정상부 

여전히 철조망과 출입금지 표시가 난무하고, 수시로 CCTV가 노려보는 금단의 땅을 걷는 기분이 각별하다. 평일 늦은 시간이라 마주치는 사람이 몇 없다. 그렇게 호흡이 가쁘고 허벅지 근육에 알이 박힐 즈음 정상인 백악마루에 닿았다. 조선시대에 북악산은 백악산(白岳山)으로 불렸다. 숲에 덮여 잘 보이지 않으나 기실 북악산은 전체가 화강암 덩어리여서 숲이 없으면 하얀 산체가 드러났을 것이다.

정상에는 ‘白岳山 342m’라고 쓴 작은 정상비가 서 있다. 바로 옆에 높이 3m 정도의 바위가 있으니 실제 높이는 345m쯤 되겠다. 이곳을 얼마나 오고 싶었던가. 처음 눈도장을 찍은 후 여기에 서기까지 40년 가까운 세월이 흘렀다. 하지만 기대와 달리 나무가 주위를 둘러싸고 있어 조망은 잘 트이지 않는다. 바위에 올라서야 그나마 원경을 볼 수 있지만 그마저 신통치가 않다. 주변의 나무를 베거나 옮겨 심든지, 높직한 전망대를 따로 세우는 방법밖에 없겠다. 그래도 오랫동안 그리던 곳이라 조금 머물고 싶었는데 젊은 커플이 사진을 찍느라 부산을 떨어 발길을 돌린다.

청운대에서 동북쪽으로 성벽이 이어진다. 오른쪽 가운데에 북악스카이웨의 정상인 북악팔각정이 보인다. 왼쪽 고봉은 보현봉(714m)   

계속 성곽을 따라 숙정문을 거쳐 성북동이나 삼청동으로 갈 수도 있지만 그러면 복귀가 곤란해져 능선 따라 북쪽으로 200여m 떨어진 청운대를 거쳐 북사면으로 하산하기로 한다. 도중에는 1.21사태 당시 15발의 총탄 흔적이 남은 ‘1.21사태 소나무’가 있다. 상처 부위를 시멘트로 막고 빨간 점으로 표시해놓았는데 총탄의 충격 때문인지 55년이나 지났어도 나무가 별로 자란 것 같지 않다. 저 정도 총탄 세례면 사람이나 동물은 즉사했을 테지만 이 나무는 아무렇지도 않게 살아남아 앞으로도 수백 년을 더 버텨낼 것이다.

청운대쉼터에서 북사면으로 하산한다. 왼쪽 철조망 문은 상시 열려 있다. 사각형으로 잘 다듬은 성돌은 600년 풍상에도 한치 흐트러짐이 없다   

정상보다 살짝 낮은 청운대(293m) 일대가 조망이 더 잘 트여 발밑으로 펼쳐진 거대도시를 내려다본다. ‘내려다본다’고 표현했지만 더 높은 롯데타워(555m)를 비롯해 일부 고층빌딩들은 올려다봐야 한다. 4대문 안이 고작이던 ‘한양’은 이제 그 수십 배로 늘어났고, 위성도시까지 더하면 시가지의 끝이 가물거릴 정도로 광대해졌다. 바로 밑으로는 경복궁을 필두로 남산을 거쳐 관악산까지 일목요연하다. 이제 보니 경복궁의 광화문-근정전-향원정으로 이어지는 중심라인은 북악산 정상이 아니라 약간 동쪽으로 치우쳐있어 법흥사터로 이어진다. 폐사된 법흥사는 신라 진평왕 때 나옹스님이 창건했다고 하지만 경북궁 중심선과 북악을 잇는 어떤 연결고리 역할을 하지 않았을까 짐작해 본다. 청와대 대통령 관저를 이 라인에 둔 것도 의미심장하다. 하지만 그런들 무엇하리. 그곳을 거쳐간 사람들의 운명을 보면 자연에 복록을 기댄다는 것이 얼마나 허망한가.  

북악산 아래 왕조가 터 잡은 이래 조선시대 500년의 빈곤과 문약을 딛고 세계적인 대도시, 10대 대국으로 우뚝 섰으니 한양도성은 결국 성공한 택지였을까.

남쪽 상공에서 바라본 경복궁과 북악산 북한산 일원. 경복궁 중심선은 북악산을 살짝 비껴나 청와대 대통령관저와 법흥사터로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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