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전히, 지독한 오지 산수

적만만이 감도는 용담호 호반길. 구불구불 장장 11km나 이어지는 매혹의 호반 임도다
적만만이 감도는 용담호 호반길. 구불구불 장장 11km나 이어지는 매혹의 호반 임도다

설마 강이 막혔을까. 길은 당연히 막혔으되, 물길까지 막힌 듯 모퉁이 너머로 사라져 물의 행방조차 알 수 없다. 세상에 이런 기막힌 지형이 있었던가.

아름답고 우아한 이름의 ‘비단강’ 금강이지만 그건 군산~대청호 간 중하류에만 해당하고, 상류로 접어들면 전형적인 감입곡류(嵌入曲流, 평야지대를 구불거리던 하천의 지반이 융기해 산지를 흐르며 더욱 깊은 협곡을 만드는 현상)를 이뤄 곳곳에서 길이 끊어지고 협곡에는 S자 물돌이와 헤어핀이 연속된다.

협곡의 연속이니 손바닥만 한 들판도 드물고, 길이 막히고 물길이 험하니 사람들이 더욱 살기 어렵다. 이런 현상은 호남지방 최고의 산악오지인 ‘무진장’(무주, 진안, 장수)에서 절정을 이룬다. 무진장은 금강이 발원하는 곳으로(장수 뜬봉샘) 교통이 사통팔달한 지금도 인구가 희박하고 유명 관광지 외에는 언제나 한산하다.

이 무진장 지역에 2001년 용담댐을 건설해 거대한 산중 호수가 생겨나 풍경이 일변했다. 수위가 높아지면서 협곡을 잠식했지만 용트림 같은 극단적 구불거림은 용담호에도 그대로 남아 있어 주변의 어떤 산에 올라도 호수의 전모를 한눈에 볼 수 없다.

이제, 용담호를 돌아 산간 협곡을 휘감는 물길을 따라간다. 도중에는 거친 산줄기와 물돌이에 에워싸여 영원한 탈속과 접근 금지를 선언하고 있는 죽도도 거쳐 간다.

상전 망향의 광장에 우뚝 선 '고향 그리운 집'. 물에 잠긴 고향 땅을 보기 위해 3층으로 높게 지었다   

밀집한 망향비는 영원히 잊지 않겠다는, 향수의 응고물이다 

댐을 축조한다는 것은, 일부 사람들에게는 고향 상실을 뜻한다. 지난 수십 년 간 산업화와 더불어 용수 확보를 위해 전국 곳곳에 댐이 들어서면서 아주 기이한 ‘수몰(水沒)’이란 말이 평범한 단어로 자리를 잡았다. 전쟁이나 피난도 아닌데 어느 날 갑자기 고향이 사라진다…. 북녘 실향민이 평생을 고향을 그리워하고 죽어서도 북쪽 변경에 묻히는 데서 실향이 초래하는 정서적 가혹함을 실감한다. 나 역시 처음 고향을 떠나 도시로 나왔을 때 향수에 얼마나 괴로워했던가.

코스의 기점으로 잡은 진안 상전면 망향의 광장에는 절절한 애향을 담은 비석과 기념물이 즐비하고, 물에 잠겨버린 고향땅을 바라보기 위해 3층 높이의 전망대 ‘고향 그리운 집’도 서 있다. 우리의 정서에서 고향이란, 태어난 곳이라기보다 감수성 예민한 10대 시절을 보낸 곳이 아닐까. 즐겁고 행복했던 순간부터 비겁과 굴욕의 상흔, 절친했거나 사랑한 사람들과의 일상과 추억들이 응어리져 강고한 기억의 상자로 뇌리 깊숙이 남은 영원의 장소니까.
시골 출신인 내가 서울 토박이 친구들과 공감하지 못하는 부분 중 하나가 바로 이 ‘고향’ 정서다. 그들에게 고향을 물으면, 그냥 서울 아니면 00구라고 하거나 때로는 00동으로 답한다. 명절에 난리법석을 치며 귀향하는 모습을 부러워하거나 고생길을 동정하기도 한다. 반대로 나는 귀향 고생길을 피할 수 있는 그들이 부럽다. 초등학교부터 대학교까지 집에서 다니는 것은 인생의 한 행운이다(당사자는 별로라고 말하지만).

망향의 광장 옆으로 지나가는 월포대교. 성주봉 절벽지대를 우회하는 1050m의 장대교량이다  

용담호 호반 임도에서 바라본 용담호. 물이 빠져 침수 호안이 많이 드러났다  

망향의광장이 있는 대구평 마을 일대는 용담호 깊숙이 머리를 내민 반도여서 맞은편 구룡리와의 사이는 용담호 폭이 가장 좁다. 이곳을 건너는 용평대교가 551m이나 최단거리는 350m 정도로 옴폭하다.

근래의 가뭄을 반영하듯 수위가 훌쩍 내려가 호반에는 물에 잠겼던 하얀 속살이 성큼 드러나 있다. 다리를 건너자말자 대덕사 안내비가 있는 오른쪽으로 빠지면 사람이든 자동차든 통행 흔적이 거의 없는 호반 임도가 시작된다. 낚시꾼과 마을로 에워싸인 예산 예당호와 달리 산악으로 둘러싸인 호수는 저 아래로 깊푸르고 적막만이 감돈다. 이런 곳에서 조우하는 인적은 오히려 미지의 불안이다. 어쩌다 마주친 차량은 나를 보고 흠칫 놀라고, 새순을 따던 부부도 나의 등장에 긴장한다. 친근함의 상징인 자전거마저 위협과 불안으로 느껴지는 곳, 기댈 데 없는 진짜 오지의 반증이다. 나 역시 구비를 돌 때마다 긴장한 눈초리로 앞을 살피기는 마찬가지다. 이런 호반 임도가 끝도 없이 이어진다. 사방으로 뻗어 내린 고산(鼓山=대덕산, 876m)의 능선과 골이 꽤나 길고 깊다. 따지고 보면 죽도 역시 이 고산에서 흘러내린 산줄기의 하나다.

어느새 용담호도 상류로 접어들자 넓게 드러난 대지가 황량하다. 한때는 비옥한 농토였을 텐데 마치 서부나 만주의 황야를 닮았다. 멀리 마이산의 두 귀까지 쫑긋하니 비현실적인 무협지나 SF 무대 같다. 국내 다른 곳에서는 볼 수 없는 경관이다.

이윽고 저편으로 죽도교가 보이고 호반의 예쁜 카페까지 등장하면서 장장 11km를 구불거리던 임도는 끝나고 외송마을로 내려선다.

호반 임도는 자못 다채롭다. 봄이면 벚꽃터널이 될 구간

춤 추는 산길. 골짜기 깊숙이 들어와 호수는 저 멀리 동떨어졌다  

고산(876m) 자락은 자못 깊다

용담호 상류의 진풍경. 바닥을 드러낸 호수는 황야로 변했고 물줄기 멀리 쫑긋 귀를 세운 마이산이 지형의 이국풍을 더해준다

금강 저편에 대덕산(602m, 앞서 지나온 대덕산과는 다른 산)이 거대 절벽으로 솟아 험상궂게 내려다보고 그 허리춤에 걸린 경작지는 별세계처럼 아득하다.

이제 죽도가 가까워지고 있다. 오랫동안 궁금했는데 이제야 찾는다. 무진장 중에서도 가장 깊은 산간지대에 숨은 죽도는 약 58만㎡(약 18만평)의 반도지만 폭 20m 정도의 가느다란 암릉으로 육지와 연결되어 있어 아예 섬 이름이 붙었다. 지형이 특이하고, 조선시대 가장 문제적 인물 중 한 사람인 정여립(1546~1589)이 은거했다가 최후를 마쳐 묘한 비감도 어려 있다.

죽도에 은거할 생각을 했다는 그 사실만으로도 정여립이 보통 사람이 아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당시로서는 정밀한 지도도 없고 접근조차 어려웠을 텐데 이런 지형지세를 간파하고 은둔지로 점지한 안목에는 감탄할 수밖에 없다.

근처를 지나고 있는데도 지독한 감입곡류 사행천과 기세등등한 산줄기에 기막히게 가로막혀서 어디가 죽도인지 알아보기조차 어렵다. 강을 따라 가는 길인데 어느새 금강 본류가 아니고 지류인 구량천 옆을 가고 있다. 본류는 죽도 옆으로 해서 숨듯이 사라져버렸다. 일대의 강산이 오직 죽도를 빚기 위해 존재하는 것 같은, 산중 여의주라고나 할까.

워낙 복잡하고 험준한 지세여서 죽도를 한참 지나 거대한 장벽으로 막아선 천반산(647m) 아래에서 비로소 죽도로 진입하는 길이 시작된다. 길이라고 해야 사실상 구령천 둔치를 지나가서 물이 많으면 길이 막혀 죽도는 완전히 고립된다.

모래 둔턱과 자갈이 깔린 노면은 전신을 요동시키고, 자전거도 극심한 진동에 신음을 토해낸다. 그래도 날이 좋아 인근 마을 노인들이 한가롭게 산책을 즐기고 있다.

맞은편으로 대덕산의 험상궂은 봉우리와 죽도교가 보이면 호반 임도의 끝이 가깝다는 뜻이다

고산 줄기에서 단절된 죽도 초입. 구령천 물길을 금강으로 바로 빼서 나머지 구간을 경작하려고 했으나 수량이 많아 실패했다

천반산을 돌아 죽도 가는 길. 마주 보이는 천반산 자체가 암벽을 드리워 천연의 장벽을 이룬다. 죽도는 오른쪽에 있다 

날카롭게 뻗어난 천반산 북단을 돌아서야 비로소 죽도가 모습을 드러낸다. 죽도를 섬에서 살려낸(?) 잘록한 지협(地峽)은 충주 수주팔봉처럼 줄기가 30m 정도 잘려나갔다. 1970년대에 한 주민이 이곳을 발파해 구령천 물길을 금강 본류로 돌리고 죽도 동쪽 구령천을 육지화해 경작하려고 시도한 흔적이다. 수주팔봉도 같은 시도로 산줄기를 잘라 석문동천을 달천으로 곧장 빼내고, 나머지 석문공천 구간을 육지화해 개간에 성공했지만 죽도는 구령천 수량이 많아 결국 개간에 실패했다. 한때 죽도에는 20여 가구가 살았다는데 지금은 단 두 가구만 남았다.

천반산을 돌아들면 구령천 너머가 바로 죽도인데, 얼핏 봐서는 섬이라기보다 아주 가파른 산이다. 죽도산(401m)을 중심으로 남북으로 가파른 산세는 그대로 자연방벽이다. 죽도 자체가 접근이 어려운 산중 섬인데 다시 거대한 자연성벽까지 둘렀으니 난공불락의 천연 요새로 이보다 효과적일 수는 없다. 다만 땅이 좁고 경작지가 부족해 포위 공격 시에는 장기 농성이 어렵고, 퇴로 역시 막힌 배수진의 한계도 있다

비만 와도 잠길 것 같은 다리를 건너 죽도로 들어선다. 주능선을 넘어 남단에 두 가구가 살고 있고 아마도 정여립 역시 그 쪽에 은둔했을 가능성이 높다.

죽도 중턱에서 바라본 구령천 남쪽 방면. 앞쪽의 개간지 뒤로 구령천이 흐르는데 산이 겹쳐 물줄기가 어디로 사라졌는지 알 길이 없다

가파른 사면을 오르는 죽도 고개길. 왼쪽 뒤는 천반산이다

죽도에 진입하면 바로 급경사 길이 지그재그로 이어진다. 주능선 동쪽 비교적 완만한 산록에 7천평 정도의 경작지가 보인다. 이후 주능선 고개까지는 극심한 업힐이다. 거의 절벽에 가까운 경사면에 길을 냈으니 당연한 일이고, 길을 낸 것만으로도 신통스럽다. 해발 360m 고갯마루에는 죽도를 소개하는 작은 비석이 서 있다. 산죽밭이 많아서 혹은 마주한 천반산이 죽순 모양이라고 해서 죽도(竹島)라고 부른단다.

고개를 내려가면 앞서 보았던 대덕산이 절벽으로 막아서고 그 아래로 금강 본류가 감싸고 흐른다. 참으로 완벽한 단절이자 천연의 옹위다. 서사면에도 5천평 남짓한 경작지가 있고 길을 끝까지 가면 죽도 남단의 민가에 이른다. 민가 주변으로 경작 가능한 대지는 1만평 정도 될까. 주인은 없는 듯 적막한데 풀린 강아지 두 마리가 뒤늦게 불청객을 알아채고 요란하게 짖으며 달려든다. 풀린 개를 질색하지만 위압적인 표정으로 당당히 맞서면 대개는 슬금슬금 물러난다.

민가 두 채가 있는 이 일대가 죽도에서 가장 넓은 평지이고 주변은 금강과 구령천이 우선 감싸고 그 뒤는 천반산과 대덕산의 험악한 줄기가 천연방벽으로 막아준다. 금강 하류 방면으로 다음 마을인 가막리까지는 2km에 이르는 협곡이 막고 있다. 방금 들어온 임도 외에 외부로 이어지는 길이나 등산로도 없다. 그냥 완벽한 절연이다.

죽도 고개 정상에 있는 안내비. '이곳을 지나는 길손이여!' 시작이 정겹다. 아예 '그리운 섬'이라고 표현한 것과 기축옥사를 정여립의 '항쟁'으로 적시한 것이 눈에 띈다    

죽도 주능선을 넘는 고개 정상(해발 350m). 마주보이는 험준한 산은 대덕산이다

죽도 최남단의 민가와 주변 평지. 정여립도 이 일대에 머물렀을 것이다 

민가 앞을 흐르는 금강 본류. 강이 막은 데다 대덕산 줄기가 절벽을 이뤄 산을 넘기도 거의 불가능해 보인다

조선시대 최악의 왕 중 하나로 꼽히는 선조 대의 인물인 정여립은 전주 출신으로 학문이 뛰어났고 풍채도 우람한데다 급진적인 생각을 품은 시대의 이단아였다. 동인과 서인의 당쟁 속에 위험한 처세를 한 그는 결국 선조의 미움을 사 낙향해, 이곳에 숨어살며 전국적인 대동계(大同契)를 조직하고 사람들을 모아 활쏘기 연습을 하며 지내다 역모로 몰리게 된다. 임진왜란 3년 전인 1589년, 토벌군의 포위망이 좁혀오자 정여립은 결국 자결하고 만다. 이후 그와 연루된 사람, 특히 동인(東人) 계 인사 1000여명이 죽는, 조선시대 최대의 내부변란인 기축옥사(己丑獄事)가 벌어졌다. 이를 계기로 당쟁은 필사적인 투쟁이 되고 동인 서인은 다시 사분오열해 조선을 나락으로 이끌게 된다. 이때 옥사를 전담한 재판관은 좌의정이자 서인(西人)의 중추였던 송강 정철이었다. 그는 가혹한 연좌제 처벌로 동인을 쑥대밭으로 만들며 당쟁의 불씨를 깊이 남기고 말았다. 풍류와 미학이 넘치는 가사문학의 대가 정철의 이면은 실로 가공스럽다.

죽도 서사면의 경작지와 대덕산

문제는 정여립이 정말로 모반을 획책했는가인데, 여기에 대해서는 지금도 설이 분분하다. 그가 남긴 글 중에, 세상은 공동의 소유라는 천하공물설(天下公物說), 누구를 섬기던 임금이 아니겠는가 라는 하사비군론(何事非君論)이 빌미가 된 것은 사실이다. 천하공물설은 절대왕권을 부정하고 공화정이나 사회주의적인 느낌을 주기에 당시로서는 혁명적인 생각이지만 하사비군론은 일찍이 맹자가 했던 말이다.

지금, 정여립이 은거해 사람들을 모아 무예를 닦고 모반을 기도했다는 죽도에 직접 와보니, 그의 억울함이 바로 느껴진다. 이토록 외지고 좁은 곳에서 정권을 뒤엎는 준비를 한다? 나의 직감은, 그런 생각은 할 수 있겠다는 정도다. 모반이라기보다 혼자 혁명적인 생각을 했고 또 주변에 밝힌 것이 죄라면 죄겠다. 그 때문에 시대와 화해하지 못하고 이런 곳에 은둔했을 것이다. 지금이야 시대를 앞서가면 기업가나 예술가, 학자로 성공하지만 왕권이 절대적이고 당쟁이 극심하던 당시는 생각만 앞서가도 목숨이 위험했다. 비범한 능력을 가졌던 남이 장군, <홍길동전>을 쓴 시대의 풍운아, 허균 역시 마찬가지였다.

죽도를 나와 구령천을 따라 가다 뒤돌아본 천반산. 죽도는 저 능선 뒤에 있다. 천반산 능선 전체가 사람의 접근을 막는 절벽이다 

지금도 이토록 험하고 외진데 450년 전 그 미몽한 시절에도 지켜주지 못한 천혜의 요새가 허망하다. 이 좁은 국토에서 숨어살 곳은 정녕 없는가.

다시 구령천을 끼고 상류로 향한다. 내내 따라붙는 천반산의 기세가 참으로 놀랍다. 장구한 세월 강물이 파고들어 깎아낸 흔적인데 도대체 얼마나 긴 시간이 필요했을까. 인생 100년으로 단 1㎝라도 가능할까.

이윽고 천반산 자락에서 벗어나 13번 국도 변에 아늑한 용암마을이다. 작은 슈퍼 간판이 이렇게 반가울 수가. 심신의 피로는 허기로 바뀌어 조촐한 판매대를 휩쓸게 만든다.

13번 국도를 따라 잠시 북상하다 중노마을로 들어서면 아늑한 산간지대다. 하지만 중노고개가 450m나 되어 최후의 힘을 짜내야 한다. 고갯마루에서 30번 국도까지 3.5km는 거의 다운힐이라 천만다행이다.

이제 마지막 난관 불로치터널만 지나면 다시 용담호다. 길이 446m로 길지 않으나 간선국도여서 차량 통행이 다소 있고 갓길이 좁은데다 내부도 어두운 편이다. 상하 안전등을 켜고 차량이 없는 틈을 타서 쾌속으로 벗어났다. 터널을 나서니 어느새 햇살에는 기운이 빠져 있고 호수는 더욱 짙푸르다.

용암마을의 작은 슈퍼(간판은 수퍼)에서 허기를 달랜다

높이 450m의 중노고개를 넘으며 뒤를 돌아보았다. 왼쪽 멀리 장수 장안산(1237m)이 희미하다

 

tip

코스 전역에 걸쳐 식당과 편의점은 없고, 자산리 용암마을의 작은 슈퍼뿐이어서 행동식과 식수를 잘 챙겨야 한다. 가장 가까이는 안천면소재지에 편의점과 식당이 있다. 용평대교와 불로치터널 통과 때 차량 통행에 유의하고 후미등을 꼭 켠다.

 

진안 용담호~죽도 43.5k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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