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 살고 있구나! 저 대평원

예당평야 한가운데 예산 중예리의 어느 버스 정류장. 길은 소실점으로 사라지고 사람도 차도 없는 텅 빈 공허만이 감돈다  
예당평야 한가운데 예산 중예리의 어느 버스 정류장. 길은 소실점으로 사라지고 사람도 차도 없는 텅 빈 공허만이 감돈다  

매혹의 근거가 애매하지만 어쨌든 그립다. ‘예쁘다’의 ‘예’를 연상시키는 이름과 발음 때문일까, 고만고만한 산과 강을 낀 입지 때문일까.

그곳은 예당평야다. 예산과 당진 사이에 걸쳐 있다는, 단순하고 직관적인 명칭이지만 내게 예당은 ‘예쁘당~’으로 들린다. 호남평야 정도는 아니지만 충청도에서 가장 넓은 들판으로 남북 35km, 동서 10km 크기다. 평야 가운데로는 삽교천이 흐르고 남북 선상으로는 간혹 지평선이 가물거리지만 동서로는 서산·홍성 간 가야산(678m)과 예산 도고산(482m) 등이 먼 하늘금을 그린다.

예당평야는 북쪽은 당진군과 아산시, 남쪽은 예산군에 걸쳐 있으며 평야를 끼고 있는 두 개의 큰 고을을 꼽으라면 북은 당진 합덕읍, 남은 예산 삽교읍이다. 둘 다 지명이 특이해서 한번 들으면 기억에 남고 어떤 곳일까 호기심을 일으킨다.

합덕제 외곽을 도는 흙길 산책로. 여린 나뭇가지가 실바람에도 살랑이며 봄 춤을 춘다. 오른쪽은 늪처럼 변한 합덕저수지  

이제 합덕에서 삽교까지 예당평야를 종주한다. 들판 속 농로와 삽교천 강둑길을 주로 이용할 것이다. 기점은 합덕제 수변공원. 합덕제는 김제 벽골제, 제천 의림지, 밀양 수산제처럼 삼국시대에 축조한 저수지다. 합덕제를 증개축할 때 인근에서 모인 수 만 장정이 합심해서 덕을 쌓았다고 해서(合心積德) 합덕지(合德池) 혹은 합덕제(合德堤)로 불렸고, 지역명으로 정착했다고 한다. 저수지는 농사에 필수적이니 농경사회에 꼭 필요한 상부상조 정신의 구현 현장이 아닐 수 없다.

옛날보다 농경지가 더 넓어졌는데도 더 이상 합덕제 물이 필요 없는 것은 완벽해진 수리시설 덕분이다. 삽교천와 예당호를 중심으로 들판에는 사방으로 물길이 흐르고, 바둑판처럼 정리된 경지는 골고루 물을 공급받는다. 합덕제는 이제 얕은 늪으로 변했고, 호반 흙길에는 수양버들 흐느적대는 아름다운 수변공원으로 남았다.

합덕제 한켠에는 농촌테마공원이 조성되어 있으나 디테일이 부족하고 조형물도 좀 휑하다 

합덕제에서 삽교천으로 흐르는 석우천을 따라 들판 가운데로 들어선다. 하얀 농로가 직선으로 뻗고 직각으로 교차하며 지상의 기하학을 그린다. ‘버그내 순례길’ 이정표를 가끔 마주친다. ‘버그내’는 합덕의 구전 지명으로 순례길은 최초의 신부 김대건 생가가 있는 솔뫼성지와 합덕성당, 무명 순교자 묘역 등을 도는 천주교 순례길이다. 이 지역은 김대건을 비롯해 한국 역사상 가장 많은 천주교 순례자를 배출한 곳이니 신자들에게는 성스럽고, 일반인 관점에서도 특별한 역사의 무대다. 고유 지명이 있는데도 가끔 보이는 ‘내포(內浦)’라는 명칭은 가야산 주변의 예산, 당진, 서산, 홍성 지역을 일컫는 통칭이다. 이중환은 <택리지>에서 “충청도에서는 내포가 가장 좋다”고 했는데 들이 넓고 물도 좋으니 농경시대에는 일리 있는 말이다.

합덕읍 일대 천주교 성지를 연결하는 버그내순례길 이정표. 우리는 신리성지 방면으로 향한다    

아, 대평원! 말문이 막히고 눈이 번쩍 뜨이는 직선로가 아득히 뻗어나고 지평선이 아득하다 

지도도, 방향도 필요 없다. 처음 확인한 그대로 직진이다. 저편으로 화성 송산 ~ 홍성 간 서해선 철도가 마무리 공사중이다(24년 6월 개통 예정).

해발 5m나 될까. 이 저지대 평야에도 곳곳에 마을이 형성되어 있다. 풍수지리의 영향으로 우리의 전통 마을은 산을 끼고 자리 잡기 마련인데 완전한 들판에서 사는 건 어떤 느낌일까. 수리시설이 잘 되어 있으니 홍수 걱정은 없겠고 맹수도 올 일이 없는데다 탁 트인 개방감에 도둑이나 강도도 엄두를 내지 못할 테니 ‘안전’이 먼저 떠오른다.

들판 저쪽에 신리성지의 첨탑이 보인다. 광야 중의 잔디밭과 이국적인 건물이 단연 눈에 띄며, 조선말 제5대 조선교구장인 다블뤼 주교가 거처하던 곳이다. 프랑스인인 다블뤼 주교는 1845년 김대건 신부와 함께 강경에 상륙해 1866년 순교하기까지 21년간 조선에서 활동했다. 선교사들의 비밀 입국처이자 조선에서 가장 큰 교우 마을이었던 신리성지는 ‘조선의 카타콤바(로마시대 비밀교회)’로도 불린다. 선교사들의 입국이 쉬웠던 것은 아산만과 삽교천 수계 덕분이다.

교인은 아니지만 넓은 잔디밭과 탁 트인 개방감, 이국적인 건축물은 아늑한 산책지로 좋고, 젊은이들은 특별한 사진 배경으로 많이 찾는 것 같다. 신리성지 앞의 도로는 완벽한 직선이 11km나 이어지는 특별한 길이지만 과속 차량이 다소 있어 자전거는 편치 않다.

신리성지의 첨탑과 십자가. 높지는 않으나 전망대를 겸하고 있고 대평원이어서 멀리서도 잘 보인다  

잔디밭으로 잘 가꿔진 신리성지  

들판을 가로질러 삽교천 둑길로 올라선다. 실제 물길은 좁지만 둑 간의 거리가 300m나 되어 어엿한 하천의 면모다. 준설을 하지 않아 둔치에는 토사가 많이 쌓였고 수풀이 무성하다. 그런데 저편으로 검은 연기가 뭉텅뭉텅 피어오르고 있는 게 심상치 않다. 논두렁 태우기도 아니고 어디 공장에 불이 난건가 싶었지만 가까이 다가서니 당진영덕고속도로 삽교천교 아래 둔치에 불이 났다. 둔치가 넓고 수풀이 무성하니 불의 기세가 대단하다. 매캐한 연기가 자욱이 피어올라 둑 위까지 덮쳐 호흡이 불편해지니 덜컥 겁이 난다. 화재 시 치명적인 사고는 화상보다는 연기에 의한 질식이라는 걸 실감한다. 그렇다고 코스 gpx 파일을 기록 중이라 돌아갈 수도 없어 얕은 호흡으로 급하게 빠져나오니 그제야 마을 사람 몇몇이 구경하고 있고 다리 옆에는 소방차도 보인다. 둔치가 아니라 거의 들불이다. 위험 속에서 일하는 소방관에게 저절로 경례가 올라간다.

서쪽에서 삽교천으로 흘러드는 효교천을 지나 다시 둑길에 오르면 들판 저편으로 삽교읍내가 보인다. 낮은 구릉지를 안고 있는 이 들판 고을은 이름과 입지에서 묘한 끌림이 있다. 삽교(揷橋)라는 기이한 지명은 ‘섶다리-삽다리’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삽교로 시집 온 새아씨가 친정어머니의 부음을 들었으나 물을 건너지 못해 애태우자 마을 사람들이 섶(잎사귀가 달린 땔감)으로 다리를 만들어줬다는 데서 섶다리가 삽다리가 되고, 삽다리가 한자로 삽교로 변했다는 것이다.

예당평야의 젖줄인 삽교천. 둔치에 수풀이 울창하다

장대한 고가도로를 이용해 농지 잠식을 줄인 서해선 철길. 24년 개통 예정으로 화성 송산에서 홍성까지 연결되어 고속열차가 운행하게 된다

 

예당평야에서 이런 길은 지천이지만 직선이 드문 이땅에서는 드문 모습이라 자주 발길이 멈춘다

 

합덕과 삽교 중간 쯤에 있는 구만포구 터. 옛날에는 아산만에서 여기까지 배가 운행했다고 한다. 지금은 돛 모양 기념물만이 옛날을 말해준다

삽교천 둔치에 들불이 났다. 화마의 기세가 상당해서 소방대원이 출동해 진압하고 있다. 오른쪽은 당진영덕고속도로 삽교천교

장항선의 전철화로 옛 삽교역 일대는 삽다리공원으로 변했다. 주민에게 물어보니 야외무대 자리에 역사가 있었다고 한다. 입구에는 윤봉길 의사가 삽교역에서 열차를 타고 떠났다는 작은 비석이 서 있다. 윤봉길 의사의 생가는 여기서 8km 떨어진 가야산 아래 덕산면이고 삽교역이 가장 가까우니 이곳을 통해 다시 못 올 길을 떠났을 것이다. 이미 보이지 않는 고향 마을과 가야산을 보고 또 보며 얼마나 애끓는 심정이었을까. 옛날 역사(驛舍)와 플랫폼 일부라도 남겨놓았다면 공원이 더 멋질 것 같은데 좀 아쉽다. 그나마 ‘삽다리 총각’ 노래비(추식 작사·작곡, 오세자 노래)와 총각 석상이 정감을 준다.

삽교읍내를 관통해 다시 삽교천 둑길을 타고 북상한다. 남서풍이 뒤에서 밀어주니 페달링은 한껏 가볍고 풍경은 빨리 스쳐 지난다.

지류인 성리천을 건너 원포마을에서 농로를 타고 들판 속으로 향한다. 이 작은 마을에도 어김없이 교회당이 있으니, 천주교 성지가 많고 일찍부터 포교가 이뤄진 지역 특성을 실감한다. 하포리에서 중예리까지 직선로는 4km나 되어 길은 점이 되어 사라지고 지평선이 아른거린다.

이제 둑길 저편으로 야산과 함께 삽교읍내가 보인다

삽다리공원 입구에 있는 '삽다리 총각' 노래비

옛날 삽교역 자리에 조성된 삽다리공원

'섶다리'의 유래를 설명하고 있는 벽화(섭다리공원)

중예리에서 둑길로 올라서면 이번에는 거대한 철탑이 동행한다. 방향으로 보아 당진화력발전소에서 내륙으로 송전하는 라인 같다. 높이가 100m는 되어 보이는 거탑이 500m 간격으로 평야를 가로지르는 모습은 거인들의 행렬처럼 웅장하고 경이롭다.

예림리에서 들판 동쪽으로 보이는 용산(74m)을 향해 길을 돌린다. 추사 김정희(1786~1856)의 생가가 있는 곳이다. 예당평야의 인물로는 대표적으로 김정희와 김대건을 들 수 있을 텐데, 이 광야 중에 기이하게도 용산이 이름처럼 용의 몸통마냥 길게 흐르고 있다. 높이 74m로 산 이름을 가진 것은 저지대 평원에 자리한 입지 덕분이다.

용산 일대는 온통 김정희 일가의 자취로 가득하다. 완만한 구릉지는 조선시대에 최고의 명당으로 쳤던 비산비야(非山非野)의 전형이다. 북쪽 자락에는 용궁리 백송의 하얀 줄기가 우아하다. 김정희가 25세 때 청나라 연경을 다녀오면서 가져온 씨앗을 고조부 김흥경의 묘 앞에 심은 것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210살이 넘었는데 나이에 비해 몸통이 그리 두텁지 않다. 본체는 죽고 곁가지가 이렇게 큰 것 같다.

삽교천 옆 어느 들판 마을의 오후. 삼륜자전거로 마실을 다여오시는 듯. 가뭄에 흙은 바싹 말랐다

 예당평야 일대의 웬만큼 큰 마을에는 교회당이 꼭 있다

거대한 송전탑과 잠시 동행한다. 높이 100m의 거구가 500m 간격으로 도열한 장관이다

백송에서 조금 내려가면 영조의 둘째 딸이자 김정희의 증조모인 화순옹주(1720~1758)의 열녀문이 있다. 남편인 김한신이 39세의 젊은 나이에 죽자 화순옹주는 14일을 굶어 남편 뒤를 따랐다. 영조는 자신의 말을 듣지 않고 곡기를 끊은 화순옹주는 불효라며 열녀문을 내리지 않았지만 정조가 열녀문을 내렸으니, 조선 왕실에서 유일한 열녀(烈女)다. ‘열녀’는 지금의 기준으로는 터무니없지만 유교적 사회질서와 성리학이 법이던 당시 열녀는 충신, 효자와 더불어 국가 차원에서 선양한 삶의 모범이다. 남편을 따라 죽거나 남편을 위해 목숨을 바친 열녀는 절대적 가부장시대의 어두운 이면이다. 열녀문 옆에는 김한신과 화순웅주가 함께 묻힌 무덤이 평화롭다.

김정희가 청나라에서 씨앗을 가져와 심었다는 백송

조선왕실에서 유일하게 열녀문을 받은 화순옹주(추사의 증조모)와 김한신의 합장묘. 추사 고택 옆에 있다   

추사 고택은 개인적으로 가장 놀라운 조선시대 사대부 가옥이다. 왕실의 피가 흐르는 귀족 가문답게 대문을 들어서면 나타나는 ㄱ자 형태 사랑채부터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기품과 격조가 흐른다. 추사의 귀족적인 외모와 깔끔한 성품이 그대로 드러나는 듯하다. 사랑채 앞에는 추사가 만들었다는 해시계 돌기둥이 건재하다. 아녀자가 거주하는 안채는 겨울 추위를 막고 사생활 보호를 위해 폐쇄형 ㅁ자 형태로 웅크려 있다.

추사는 자신이 창안한 새로운 글씨체인 추사체로 유명하지만 나는 금석문을 포함한 그의 실증적 학문태도에 주목하고 싶다. 북한산 비봉에 서 있던 비석이 신라 진흥왕의 순수비라는 것을 밝혀낸 것도 그다. 천문학, 지리학, 불교학 등 다방면에서 시대를 앞서는 식견을 발휘했다. 서예와 그림에도 탁월했으니 르네상스 시절 레오나르도 다빈치 같은 만능 천재였던 것 같다. 하지만 다빈치와는 400년의 시차가 나는데, 19세기 중엽이면 이미 서구에서는 학문이 다양한 분야로 세분화되어 눈부신 발전을 거듭할 때인 것을 감안하면 그만큼 조선에서는 아직도 학문의 분화가 이뤄지지 않아, 한 사람의 현자가 전 분야를 석권할 수 있는 미몽의 시대였음을 말해준다. 추사(秋史)는 호(號)가 많았는데, ‘시암(詩庵)’과 ‘천축고선생(天竺古先生)’에서는 불교에 대한 깊은 이해와 애정이 느껴진다.

착 가라앉은 차분함과 기품, 격조가 느껴지는 사랑채. 왼쪽 돌탑은 추사가 만든 해시계다 

부인이 거주하는 안채는 ㅁ자 형태의 폐쇄 구조다 

다시 나선 들에는 햇살이 뉘엿하다. 구암교를 통해 삽교천을 건너면 예당평야에서도 가장 넓은, 합덕읍~당진 우강면 일대의 광야가 펼쳐진다. 이 땅에 산이 워낙 많다보니 이런 광야에 서면 그냥 이국에 온 듯 정취와 감흥이 배가된다. 대평원, 아득한 직선로, 가물대는 지평선, 섬처럼 흩어진 마을…. 인구도 얼마 없고 작은 마을뿐인 이런 광야에도 버스가 다니는 듯, 어느 정류장에서 발길을 멈췄다. 사람도, 버스도 없는 공허가 광야에 번져나간다. 난생 처음 오는 곳, 어딘지도 잘 모르는 길가에 멍하니 서 있는데 그림자는 길어지고 바람에는 찬 기운이 짙어간다. 나그네는 황혼에 가장 처연한 법. 그래도 정처가 없지는 않으니 마음은 느긋하다.

구암교 직전의 강변길은 둑 아래로 내려서서 친수감이 각별하고 구비치는 모습도 아름답다 

텅 빈 들판에는 황혼이 어리고, 거대한 철탑만이 건너고 있다 

김대건 신부 생가가 있는 솔뫼성지 정문. 항상 열려 있는 개방감이 좋다

김대건 신부의 생가. 그를 성인으로 서품한 교황 요한 바오로2세의 좌상이 함께 있다

​​​​​​​고딕 양식으로 아름답고 웅장한 합덕성당. 합덕제 바로 옆 언덕 위에 있다    

광야를 횡단해 솔뫼성지로 들어선다. 우리나라 최초의 신부인 김대건 생가가 있는 곳으로 성지 규모가 대단하다. 아무런 제약 없이 열린 개방감이 좋다. 낮은 구릉에 솔밭이 운치 있고 그 아래 김대건 생가가 조촐하게 복원되어 있다. 생가 앞에는 1984년 한국 천주교 200주년을 기념해 내한해 김대건 신부를 성인으로 올린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의자에 앉아 생각에 잠긴 동상이 있다. 솔밭에는 ‘십자가의 길’이 그윽해서 종교와 관계없이 차분하고 사색적인 산책로로 좋다. ‘솔뫼’는 ‘소나무산’을 뜻하는 것 같다.

솔뫼성지에서 구릉을 따라 남하하면 합덕성당이 우뚝하다. 1929년 건축된 고딕 양식의 성당은 아름답고 웅장하다. 이런 소읍에 자리한 성당 중에서는 규모와 미감, 역사성에서 전국 최고일 것이다. 합덕제는 성당 바로 아래에 있고, 산책로에는 희미한 불이 들어왔다. 저 광야에서, 추사 고택에서, 솔뫼성지에서 듬뿍 받은 영감 때문일까. 나는 바로 떠나지 못하고 어두워진 합덕제를 마냥 거닐고 있다.

 

tip

합덕읍내와 삽교읍내에 식당, 편의점이 다수 있다. 삽교천 둑길과 농로를 이용하는 코스이며, 어디든 길이 이어지므로 큰 목표지만 정하고 마음 내키는 대로 방랑하는 것도 좋다.

글/사진 김병훈 발행인

 

저작권자 © 자전거생활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