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옛날 이곳에는 대체 무슨 일이? 평야 곳곳 신비의 고대 무덤

뒤편으로 자미산(정상 전망대가 살짝 보인다)을 바라보는 덕산리고분군 8호, 7호, 12호분(가까운 곳부터)
뒤편으로 자미산(정상 전망대가 살짝 보인다)을 바라보는 덕산리고분군 8호, 7호, 12호분(가까운 곳부터)

나주평야의 고장, 나주에 아득한 그 옛날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평야 일원에 산재한 거대한 고분들의 주인은 과연 누구일까. 다른 지역과 구분되는 이곳만의 특징은 고분 형태가 원분뿐 아니라 정사각형 방분, 장방형 방분, 마름모꼴, 심지어는 고대 일본의 전형적인 묘제로 알려진 전방후원분까지 분포하는 점이다.

위치상 백제 영역으로 알기 쉽지만 고분의 형태와 유물은 백제와 계통이 다르고 신라, 가야, 왜와도 다른 독자적인 고대국가의 존재를 웅변하고 있다. 삼국이 성립하기 전 삼한시대 마한(馬韓) 중심지로 추정되어 나주시는 마한 고도로 홍보하기도 한다. 중국 사서인 <삼국지>(소설 삼국지와는 다름) 동이전에는 마한에 54개의 소국이 열거되어 있고, 큰 나라는 1만여 가(家), 작은 나라는 수천 가였다고 하며 지배자는 ‘신지(臣智)’라고 부른다고 기록하고 있다. 시기적으로는 기원전 1세기에서 6세기까지 잔존한 것으로 보인다.

코스의 기점으로 잡은 국립나주박물관. 탐방 전에 관람을 하면 고분의 위치와 성격을 이해하는데 큰 도움이 된다 

박물관 맞은편에 있는 덕산리고분군 3호분. 현재 발굴조사 중으로, 분구 주변을 에워싸고 있는 주구가 확연히 드러나 있다. 주구는 성곽의 해자와 비슷하게 분구를 보호하고 영역을 표시하기 위해 판 것으로 보인다. 고대 일본의 전방후원분에 흔히 있다 

마한의 맹주인 목지국(目支國)은 지금의 천안, 아산 지역으로 비정되고 백제 고이왕에게 246년 이곳이 복속되자 중심세력이 남하해 나주 일대에 터를 잡은 것으로 추정된다. 이때의 중심지는 지금의 나주시내가 아니라 영산강 지류인 삼포천을 끼고 있는 반남면 일대다. 그중에서도 평야 가운데 우뚝한 자미산(97m) 인근으로 영역이 좁혀지는데, 이곳에 거대 고분이 밀집해 있기 때문이다. 일대에 산재하고 있는 주요 고분들을 돌아보며 당시를 상상해 보는 것이 이번 여정의 목표다.

고작 97m 높이로 무슨 산일까 싶겠지만 저지대 평야에서는 이 정도 높이만으로도 주변을 아우르는 제왕처럼 느껴진다. 자미산(紫微山) 이름부터 범상치 않은 것이, 고대 천문학에서 별들의 제왕이자 중심으로 인식하는 자미성(紫微星, 북극성 인근 별자리)에서 유래한 이름이니 세상의 중심이라는 자부심의 표현이다. 일대를 지배한 마한왕의 궁궐도 자미산 아래 성내마을에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국립나주박물관은 이 성내마을에 자리 잡고 있으며 바로 옆에 신촌리고분군과 덕산리고분군이 분포한다.

나주평야를 내려다보는 언덕 위에 자리한 신촌리고분군 9호분. 방대형(方臺形, 분구 바닥이 사각형이고 위쪽에 사각의 평탄한 대가 있음) 고분으로 남북 35m, 높이 5.46m의 대형급이다. 위세품인 금동관과 옹관 11기, 영산강유역 대형고분에서 가장 오래된 원통형토기가 발견되어 지역의 수장 무덤으로 보인다  

고분의 크기는 경주를 필두로 가야 고도인 고령과 함안, 창녕이 압도적인데 시각적으로 더욱 대단해 보이는 것은 한 자리에 모여 있는 이유가 크다. 반면 나주와 영산강 유역 일대 고분은 크기가 조금 작고 10기 내외로 흩어져 있어서 규모감이 덜한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막상 고분 앞에 서면 대평원 중에 돌출해서 존재감이 대단하다. 박물관 바로 앞 덕산리고분군의 3호분은 직경 45m에 높이 9m의 거대한 원분(圓墳)으로 매장시설은 3기의 옹관(독)이 확인되었다.

특이한 것은 분구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도랑(周溝) 흔적으로 일본 고분시대(3~7세기)를 대표하는 무덤 형태인 전방후원분(前方後圓墳, 앞은 사각형, 뒤는 원분이 붙어 있는 모양)에서 흔히 발견되는 것과 같다. 일본 전방후원분과 마찬가지로 의례를 위한 원통형토기가 매립되어 있는 것도 주목된다. 그 옆의 1, 2호분은 원분과 장방형 방분으로 나뉘어 있으나 원래는 전방후원분 형태로 알려져 있다. 박물관 뒤편 신촌리고분군 6호분도 전방후원분과 흡사하다. 신촌리과 덕산리 고분군의 조영 시기는, 옹관묘는 3~5세기, 석실분은 6~7세기로 추정된다. 전방후원분은 일본에서 붙인 명칭이라 국내학계는 ‘장고봉’ 혹은 ‘전방후원형 무덤’으로 호칭하는데 여기서는 한일 양측의 유사 형태 이해를 위해 그냥 전방후원분이라 칭한다.

일본 오사카에 있는 다이센고분(닌토쿠 릉). 물이 찬 주구 안쪽에 길이 486m의 최대 전방후원분이 있다. 쿠푸왕 피라미드, 진시황릉과 함께 세계 3대 거대 고분으로 꼽힌다. 인덕천황릉이라고 알려져 있지만 누가 왜 이렇게 거대한 고분을 만들었는지 지금도 미스터리다    

여기서 한일고대사에서 가장 비밀스런 열쇠를 쥔 전방후원분을 잠깐 살펴보자. 3세기말부터 7세기까지 일본 전역으로 확산된 전방후원분은 한일고대사에서 가장 미스터리하고 중요한 화두다. 알본에만 있는 것으로 알려졌던 전방후원분이 영산강 일원에서 이미 15기가 발견되었고 최근에도 추가로 발견되고 있다(가장 최근은 22년 광주강진고속도로 공사 중 나주 유곡리에서 확인됨). 문제는 일본의 전방후원분은 최대 길이 486m의 오사카 다이센고분을 비롯해 규모가 압도적으로 크고 시기적으로도 다소 앞선다는 점이다. 그렇다고 일본측이 주장하는 고대 한반도 남부를 직접 지배했다는 임나일본부의 근거가 될 수 없는 것은, 임나는 낙동강 하류의 가야를 지칭했고 영산강 유역과는 무관하기 때문이다.

선사시대부터 한반도에서 열도로 사람들이 건너가 문명을 전파하고 정착했다는 것은 이미 유적과 유물, DNA 분석 등으로 밝혀지고 있고,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육지에서 섬으로 사람과 문화가 전파되는 순서는 당연하다. 한반도와 가까운 규슈 사가현에서 발견된 요시노가리(吉野ケ里) 유적은 기원전 3~1세기 야요이 초기에 형성된, 약 12만평에 달하는 거대한 취락 유적으로 500기의 옹관묘와 각종 한반도 계통 유물이 쏟아져 한반도 도래인 흔적임을 뒷받침하고 있다. 특히 옹관묘는 나주 일대 고분과 일맥상통한다.

필자는 관련분야 학자는 아니지만 한일 현장을 답사하며 오랫동안 이 문제를 천착해 왔는데, 최대한 객관적이고 상식적인 견지에서 앞에 소개한 사전지식을 바탕으로 나주와 영암 일대 고분들을 차분히 탐방해 보자.

영산강 유역에서 발견된 옹관묘(국립나주박물관). 어린이용부터 성인용까지 다양하다 

박물관 주변의 신촌리고분군과 덕산리고분군(1~6호분)을 둘러보고 농로를 따라 남동쪽으로 조금 가면 덕산리고분군 9~14호분과 신촌리고분군 8, 9호분이 도톰한 언덕 위에 모여 있다. 신촌리고분군 9호분은 언덕 정상에 있는 방대형(方臺形, 분구 바닥이 사각형이고 위쪽에 사각의 평탄한 대가 있음) 고분으로 남북 35m, 높이 5.46m의 대형급이다. 위세품인 금동관과 옹관 11기, 영산강유역 대형고분에서 가장 오래된 원통형토기가 발견되어 지역의 수장 무덤으로 보인다.

길 건너 덕산리고분군은 4기가 방형(정사각형) 혹은 장방형(직사각형)이다. 장방형은 여러 기의 옹관을 매장하면서 점점 길이가 늘어나서 이뤄진 형태다. 전국 다른 데서는 볼 수 없는 특이한 고분에 흥미가 더하고, 주인이 누군지, 도대체 이곳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더욱 궁금해진다.

자미산 북쪽으로 작은 고개를 넘어 중대마을로 들어서면 12기가 마을 주변에 산재하는 대안리고분군이 나온다. 가장 큰 9호분은 긴 변이 39m, 높이 5.1m이며 9기의 옹관이 발굴되었다. 자미산을 바라보는 곳이라 지역 수장(신지)의 가족묘일 것이다. 역시 자미산을 중심으로 분포하는 수십기의 고분은 자미산 아래가 중심지였음을 강력하게 뒷받침한다.

중대마을은 재치 있는 벽화와 글씨로 장식해 놓았다. 추억어린 '점빵'이 아직도 남아 있나 했더니 개점휴업이다 

이제 자미산을 벗어나 월악리 구릉지와 평야 사잇길을 따라 서쪽으로 향한다. 들판 저편으로는 삼포천이 흐르고 있다. 구릉지라고 해도 해발 20m 정도로 낮고 마을이 기대고 있거나 밭으로 경작되어 평야의 일부로 느껴진다. 나주평야는 완벽한 평지가 아니라 이처럼 군데군데 구릉지가 분포하는 준평원에 가깝다.

삼포천은 자미산과 가장 인접한 하천으로 지금은 경지정리가 되어 개울 정도로 느껴지지만 고대에는 배가 다닐 정도가 되어 영산강을 거쳐 백제와 가야, 왜와 소통하는 교통로였을 것이다. 멀지 않은 곳에 남해당(南海堂) 터가 전하는 것을 보면 삼포천이 고대부터 항로였던 것이 분명하다. 남해당은 고려시대부터 남해 바다의 신에게 항해 안전과 풍어를 기원하는 제당이었다. 현재 남해당지 일대는 마한문화공원으로 꾸며져 있다.

크고 작은 방대형고분 2기가 붙어 있는 대안리고분군 8호분(앞)과 9호분. 확실히 다른 지역 고분과 모양부터 다르다

 대안리고분군 9호분과 자미산. 입지와 규모에서 일대의 수장임을 웅변한다. 오른쪽 비석군 뒤 일반 민묘와는 거리차를 감안하면 엄청난 차이가 난다

들판 옆 이월저수지에 낚시대만 남고 강태공은 어디 갔을까

마한문화공원에서 멀지 않은 신연리고분군을 들린다. 이곳부터는 영암 땅이다. 고분군은 구릉을 따라 9기가 분포하며 모두 방형이나 장방형이고 불규칙한 마름모꼴도 있다. 길이 10~29m, 높이는 2m 내외로 낮다. 4군데 집터도 발견되어 취락이 생긴 다음 조성된 것으로 보이며 조성시기는 4세기로 추정된다. 사다리꼴의 긴 분구는 여러 기의 매장시설을 추가하면서 확장된 형태다. 자미산에서 꽤 떨어져 있으나 삼포천과 남해당에서 가까운 것으로 보아 항해와 관련 있는 집단의 수장급 무덤이 아닐까 싶다. 일대의 내동리, 옥야리에는 100여기의 옹관묘가 밀집해 있어 이를 뒷받침한다.

농번기 준비가 끝난 나주평야

비옥한 평야지대도 빈집은 어쩔 수가 없다. 어린이도, 노인도 사라져가는 농촌 현실   

신연리고분군의 방형분. 불규칙한 마름모꼴을 이룬 것은 여러 기의 매장시설이 차례로 들어서면서 확장되었기 때문이다 

삼포천 옆, 남해당지를 중심으로 광대한 부지에 조성된 마한문화공원은 놀랍게도 내부가 파크골프장으로 이용되고 있다. 유명 관광지는 아니어서 사람들이 별로 찾지 않고 주민들에게는 필요한 체육시설이니 수긍이 가지만 2년 전에도 없던 것이고 역사공원이기도 해서 조금 당황스럽다. 남해당지를 보려면 많은 사람들이 게임 중인 공간을 통과해야 하는데, 대부분 노인분들이라 방해가 될 것 같아 그만 두었다.

마한문화공원 입구에 자리한 옥야리고분군은 일부가 발굴중이다. 원분과 방분이 뒤섞여 있으며 매장시설은 역시 옹관이고 시기는 3~4세기로 추정된다. 여기서 801번 지방도를 타고 조금 남하하면 옥야리 방대형고분이 언덕 위에 우뚝하다. 밑변 40m, 높이 5m 정도의 거대한 크기로 수습된 토기 파편으로 볼 때 옹관묘로 보인다. 막상 앞에 서면 작은 산 같아서 주민들이 ‘동산’이라고 부를 만하다. 일대의 고분 중 가장 크고 상징적인 위치여서 수장의 무덤일 것이다. 중장비도 없던 시절, 이런 거대고분을 축조하려면 얼마나 많은 인력이 동원되어야 했을까.

광대한 면적의 마한문화공원. 잔디밭은 주민들을 위해 파크골프장으로 활용하고 있다 

옥야리 방대형고분이 언덕 위에 우뚝하다. 밑변 38, 높이 5.5m의 거대한 크기로 수습된 토기 파편으로 볼 때 옹관묘로 보인다. 작은 산 같아서 주민들은 ‘동산’이라고 부른다

여기서 농수로를 따라 남하하면 시종면이다. 마을 초입 언덕사면에 거대한 내동리쌍무덤이 있다. 이름처럼 두 기의 대형 고분이 눈에 띄지만 원래는 7기의 고분이 있었다고 하며 지금은 3기가 남았다. 가장 큰 1, 2호분이 근래에 발굴되었는데 위쪽에 있는 길이 53m, 높이 4~7m의 1호분에서는 석실, 석곽, 옹관 등 7기의 매장시설이 확인되었고 금동관이 발견되어 대단한 권력자의 무덤으로 추정된다. 원분인 2호분도 지름 35m, 높이 10m의 상당한 규모다.

1호분은 원분 옆에 평탄한 탁상 형태가 덧붙어 전방후원분으로 추정되었으나 발굴팀은 이를 부인하고 있다. 위에서 보면 늘어진 타원형이고 옆에서 보면 전방후원분과 흡사하며, 봉분 주위에 파인 주구와 발굴된 원통형토기도 주목된다. 함평 예덕리 신덕고분군은 전방후원분과 원분이 인접해 있는데 이 구조와 매우 닮았고, 방분 쪽에 원분이 붙어있는 배치도 똑 같다.

내동리쌍무덤을 중심으로 주변에는 수십기의 고분이 분포해서 자미산쪽과는 또 다른 세력의 거점이 아닐까 싶다. 남쪽에는 주변을 살피기 좋은 태봉산(84m)이 솟은 것도 자미산 입지와 비슷하다. 마한에는 54개국이나 있었다고 하니 나라별 영역은 그리 넓지 않았을 것이다.

내동리쌍무덤. 왼쪽 1호분은 길이가 53m로 전방후원분과 흡사하고, 뒤편 2호분은 지름 35m, 높이 10m의 거대한 원분이다 

시종면소재지를 관통해 태봉산 동쪽으로 가면 이번 여정의 마지막 고분인 태간리자라봉고분이 들판 가운데 외롭다. 지금껏 모든 대형 고분은 주위보다 높은 언덕 위나 언덕 사면에 자리하는데 이 고분은 들판 가운데 저지대에 위치한 것이 특이하다. 하지만 완전한 평야지대는 아니고 살짝 고지대여서 홍수 피해는 없었을 것이다.

자라봉고분은 무덤 모양이 자라처럼 생겼다고 주민들이 붙인 이름이고, 누가 봐도 확연한 전방후원분이다. 길이 37m, 높이 4.6m로 국내 발견 전방후원분 중에서는 작은 편이다. 주구가 둘러져 있고 원통형토기도 발견되었다. 매장시설은 옹관이 아니라 횡혈식석실(앞트기식돌방)로 보인다. 영산강유역에서 발견되는 전방후원분은 대부분 일본 규슈계통의 횡혈식석실을 채용하고 있어 두 지역 간의 밀접한 연관성을 엿볼 수 있다. 시기는 5세기말~6세기초로 추정된다.

완연한 전방후원분인 태간리자라봉고분. 모양이 자라를 닮았다고 해서 주민들은 자라봉이라 부른다. 분구 아래쪽에 주구 흔적이 완연하다. 길이 37m, 높이 4.6m로 국내 전방후원분 중에서는 작은 편이다   

자라봉고분 뒤로 태봉산에 늦은 오후 햇살이 비껴나고 있다. 이제 돌아갈 시간이다. 구릉지대에 불규칙하게 나 있는 농로와 도로를 따라 북동쪽으로 방향을 잡는다. 중간 거점으로 삼은 삼봉산(56m)이 저 앞으로 뚜렷해서 방향 잡기는 어렵지 않다. 본격적인 파종을 앞두고 속살을 드러낸 황토밭이 곳곳에 질펀하다. 삼봉산을 지나 북쪽으로 방향을 틀면 자미산이 멀지 않다.

힘은 좀 들겠지만 자미산을 올라보기로 한다. 능선 따라 길이 잘 나 있어 정상까지 올라섰다. 과연, 사방으로 나주평야의 전모가 드러나지만 미세먼지 탓에 원경은 흐릿하다. 맑은 날에는 광주 무등산과 목포 유달산을 함께 볼 수 있을 것이다.

가만히 살펴보니 자미산 주변으로 산재한 고분들을 하나둘 알아볼 수 있다. 주변으로 펼쳐진 드넓은 광야, 비옥한 토지, 어느 방향이든 접근하는 적을 미리 알 수 있는 전략적 고지, 삼포천~영산강을 통해 바다로 나갈 수 있는 교통로까지 고대인이 이곳을 지상에 구현된 자미성으로 생각한 것도 이상하지 않다. 덕분에 6세기까지 백제에 흡수되지 않고 독자적인 세력을 유지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고대 왜와 통하는 묘제와 유물, 전방후원분은 무엇을 뜻하는 걸까. 이 문제는 비슷한 고분이 다수 있는 함평에서 다시 생각해보자.

귀로에 만난 아름다운 황토밭  

자미산을 오르는 숲길

자미산 정상 전망대

자미산 전망대에서 바라본 남쪽 조망. 낮은 산줄기가 일대에서 가장 높은 호산(156m)까지 연면히 이어지고 있다
자미산에서 내려다본 대안리고분군. 가장 큰 방대형고분은 9호분이다

자미산 북동쪽에 자리한 국립나주박물관(왼쪽 중간 노란색 건물)과 구릉지가 듬성듬성한 나주평야

 

자미산성의 식수원이었을 용왕샘. 1960년대까지 주민들은 이 물을 사용했다고 한다  

 

tip

고대사, 특히 한일관계사에 관심 있다면 아주 흥미로운 여정이 되겠지만 이 분야에 관심이 없다면 비슷한 고분을 순례하기에 지루할 수도 있다. 반남면과 시종면 소재지에 슈퍼와 식당이 있으나 시종면이 조금 더 크다.

 

나주 고분 탐방 35k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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