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통과 굴욕이 추억이 되기까지

폐쇄된 연무대역. '연무대' 이름만으로 아련한 추억과 차마 잊지 못할 긴장감이 교차한다  
폐쇄된 연무대역. '연무대' 이름만으로 아련한 추억과 차마 잊지 못할 긴장감이 교차한다  

지금도 그것은 악몽의 주요 테마다. 가끔씩 내무반 배경의 꿈을 꾸면서 ‘아직 제대 전인가’ 하고 전율하곤 한다. 육체적 고통은 대개는 쉽게 잊힌다. 그래야 위험천만한 이 삶을 지속할 수 있고 여성은 다시 출산을 감내할 수 있다. 하지만 2년이 넘는 군(사병 기준) 시절은 그렇게 쉽게 잊기에는 다소 길고, 예민한 청춘시절에 겪는 굴욕과 고통이라 영원한 각인이 되어 때때로 되살아난다.

그래도 시간은, 세월은 흘렀다. 입대한 지 30년이 훌쩍 넘었으니 당시로는 고통과 굴욕으로 점철됐던 그 현장을 무심하게 마주할 수 있을 것 같다. 하기야 동생을 보내고, 자식까지 보냈으니 세대를 지난 아득한 과거다.

아주 어린 시절 아버지와 어른들은 “네가 클 때쯤이면 군대 안 가도 될 거다”하고 많이들 얘기했다. 그때쯤이면 통일이 되거나 모병제로 바뀌지 않겠는가 하는 막연한 기대심리에서 한 말일 것이다. 그분들도 어린 시절에 같은 말을 듣지 않았을까. 나 역시 아들에게 그렇게 얘기하고 소망했던 기억이 난다. 하지만 현실은… 손자 대에서도 이 악연의 사슬은 끊어지지 않을 것 같다.

세월과 망각의 힘에 기대 논산으로, 연무대로 향한다. 아득히 먼 옛날 일이지만 곳곳의 장소와 순간이 선명한 사진처럼 각인되어 있어 현장에 가면 다시 기억과 경험이 되살아날지도 모르겠다. 그것이 정서적 고통을 동반하더라도 이제는 한번쯤 다시 가보고 싶다.

코스의 기점으로 잡은 견훤왕릉. 후백제가 도읍한 전주를 그리워했지만 30km나 떨어진 이곳에 영면하고 있다. 아들의 배신으로 왕국을 잃은 비운 때문일까 웬지 쓸쓸하고 처연하다   

출발지는 연무대에서 가까운 견훤왕릉으로 잡는다. 후백제를 세운 견훤(?~936)은 문경 출신이지만 백제의 부흥을 내걸고 완산(전주)에 도읍했다가 아들 신검과의 내분으로 인해 왕건에게 투항했고, 결국 후백제는 왕건에게 멸망당했다. 임종 시 견훤은 완산이 그립다고 해서 이곳에 무덤을 썼다고 하며, 조선중기 지리서인 <동국여지승람>에는 ‘은진(恩津, 논산 은진면) 남쪽 12리에 견훤의 무덤이 있다’고 기록되어 있어 이곳으로 추정된다. 완산이 보고 싶다고 유언했음에도 30km나 떨어진 이곳에 묻힌 것은 완산지역 민심을 자극할 것을 우려한 왕건의 견제 때문일 것이다. 역시 왕건에 투항한 신라 경순왕도 견훤보다 1년 앞서 개성에서 죽어 경주로 운구하던 도중 왕건의 제지로 임진강변 언덕에 쓸쓸히 묻힌 선례가 있다.

논산평야를 내려다보는 언덕 위에 높직한 무덤은 직경 18m, 높이 5m로 자못 위용을 갖추었지만 아들의 배신으로 왕국을 잃은 비참한 운명을 담아 외롭고 처연하다.

상징 타워가 들어서서 대학교 정문 같은 느낌을 주는 연무대 정문   

견훤왕릉에서 1번 국도로 나오면 곧 연무대(鍊武臺) 정문이다. 정문 맞은편에는 ‘육군훈련소 체험문화공원’이 조성되어 퇴역한 무기들이 몇 점 전시되어 있다. 정문에는 대학교처럼 화려한 상징탑을 세워놓아 군부대가 아니라 캠퍼스 같기도 하다. 정문을 드나드는 기간병들은 자유롭고 당당해 달라진 시간을 실감한다.

정문 근처에 있는 신연무대역은 훈련을 마치고 자대배치를 위해 열차를 타는 곳이다. 터질 듯 가득 채운 더블백(원래는 더플백-duffel bag)을 메고 플랫폼에서 동료들과 헤어지던 순간이 떠오른다. 단 5주지만 심신이 고된 상황을 함께 견딘 동료들과의 이별은 뼈아팠고, 새롭게 마주칠 다음 시간이 두려웠다. 공포스러웠던 연무대가 처음으로 푸근하게 느껴진 순간이기도 하다. 차창을 가린 열차는 밤 세워 가다서다를 반복하며 중간중간 사람들을 떨궈놓았다. 얼핏 남행하는 열차에 다행스러워했고, 최종적으로는 후방에서 행정병으로 나름 편하게(?) 복무하면서 전방으로 간 동료들에게 미안하기도 했다. 

훈련을 마치고 전국으로 뿔뿔이 헤어질 때 열차를 탔던 신연무대역. 더블백을 메고 플랫폼에서 대기하던 순간이 지금도 생생하다      

훈련소 외곽에는 ‘선샤인랜드’라는 특이한 테마파크가 들어섰다. 드라마 ‘미스터 선샤인’ 촬영세트를 기반으로 밀리터리 체험관과 1950년대 거리풍경 등을 갖췄다. 훈련소 바로 옆에 밀리터리 체험관이라니… 지역의 테마 개발 노력이 가상하다.

선샤인랜드 동쪽으로 길게 퍼져있는 함박봉(403m) 줄기는 기억에 새롭다. 저 산자락 곳곳에 다양한 훈련장이 분포했고, 훈련을 나갈 때는 무조건 뛰어가느라 고역이었다. 덕분에 나약했던 체력이 점차 향상되었다는 점은 부인할 수 없다.

훈련소에 입대해 총을 지급받고 총검술과 사격 훈련을 하면서 우리는 가공할 ‘국가권력’을 실감하며, '국가'라는 시스템에 대한 본질적인 의문을 갖게 된다. 국가는 군인에게 (적군에 대한) ‘살인면허’를 주고 이는 당연시된다. 007만 살인면허를 가진 것이 아니라 전세계 모든 군인은 군복을 입는 순간 이미 살인면허를 부여받은 것이다. 저기 산 아래 흩어져 있는 사격장과 각개전투훈련장을 오가면서 나의 고통과 자유에 아무런 관심이 없는 국가권력과 시스템에 전율했다.

연무대 외곽에 드라마 '미스터 선샤인' 세트장을 중심으로 테마공원이 들어섰다. 훈련소 옆 밀리터리 체험관이 재미있다   

사람의 삶에는 일련의 단위가 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나 자신, 그리고 가족 그 다음 중요한 단위는 국가다. 이 3중의 단위에서 나는 선택권이 아예 없다. 지금의 몸으로, 지금의 부모 아래, 지금의 국가에서 태어난 것은 내 선택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고 그냥 주어진 것이다. 이 셋은 순서대로 집단이 확대되고 다음 순위를 위한 희생과 의무를 져야 하며, 그 과정에서 미덕과 도덕이 개입한다. 최후단계인 국가는 개인들의 요청과 동의에 의해 만들어진 무소불위의 권력체계인 대신, 나와 가족의 자유, 안전을 보장해준다. 그러기 위해서는 세금을 내야하고 징집도 받아들여야 한다. 징집을 ‘신성한 국방의 의무’라고 하는 것은 대집단을 위한 희생 차원을 강조한 레토릭이다.

17세기 영국의 철학자 토마스 홉스는 그의 대작 <리바이어던>에서 무소불위의 국가권력이란 개인이 갖는 죽음의 공포와 안전, 자유를 보호하기 위한 필요에서 탄생했다고 분석했다. 하지만 그것은 최초의 국가를 말할 뿐, 후대의 개인은 국가를 선택한 적이 없고 이 체계를 보호하기 위해 생명까지 바치고 타인을 살해해야 한다는 데 동의한 적도 없다. 그러나 국가의 구성원으로 나고 자란 이상 이 명령을 거부할 수는 없다. 어떤 내면의 자유를 외치든, 현상세계에서 개인은 국가의 틀을 벗어날 수 없다. 그래서 국가는 거대한 괴수, 리바이어던(leviathan)이다.

논산은 딸기가 유명해서 비닐하우스 대부분은 딸기 재배용이다. 요즘은 작업이 편하게 탁상에서 재배한다  

만약 국가권력이 사라진다면? 홉스는 ‘만인 대 만인의 투쟁’으로 점철되는 자연상태가 될 것이라고 했다. 국가가 등장하기 전 원시시대가 그랬다. 한때는 원시시대가 서로 상부상조하고 공평하게 나누는 평화시대라고 생각했지만 실제는 일상이 전쟁과 약탈의 연속이고 죽음의 공포가 상존했음이 원시부족을 연구한 인류학자들에 의해 밝혀졌다. 결국 나의 살인면허는 내가 살기 위한 정당방위의 논리다.

개인 간에는 희생과 양보, 배려가 미덕이지만 국가 간에 그런 일은 최악의 패배의식이다. 모든 개인의 총합으로서 국가는 오직 이기심과 이익의 논리로만 움직인다. 원래 집단이 커질수록 공통의 가치와 행동 패턴은 점점 말초적인 이기심으로 수렴하기 마련이다. 이는 각종 단체행동에서 흔히 보는 그대로다. 국가는 곧 인간 집단의 궁극적인 형태이자 절대다수 개인 간의 최대공약수이고, 그것은 곧 양보 없는 이기심이 토대다.

각개전투훈련장 가는 길. 왼쪽 숲 뒤에 훈련장이 있으며, 긴장감에 이 길을 지나면서도 풍경을 볼 겨를이 없었을 것이다

 

연무대 동쪽 산줄기 아래에 사격장이 있다. 첫사격 때 소총의 위력에 경악했던 기억이 난다 

각개전투훈련장을 오가는 길목은 평화로운 전원풍경이다. 비닐하우스에는 딸기가 익어가고 산자락에는 다락논이 정겹다. 호남고속도로를 따라 북향하면 훈련병 시절 수없이 지나치며 자유롭게 오가는 차량들을 부러워했던 육교(소룡육교)를 거쳐 간다. 일대에는 ‘피가 나고 알이 박히고 이가 갈리는’ PRI(사격예비훈련, Preliminary Rifle Instruction) 훈련장이 있다. 첫사격 때 M16 소총의 엄청난 위력에 경악했던 기억이 난다. 작은 총탄 하나가 빚어내는, 귀가 멍해지는 폭음과 전신을 밀어내는 반동, 250m 과녁까지 꿰뚫는 파괴력은 충격이었다. 영화에서 보던 것과는 실감이 달랐고, 이런 총탄을 맞는다면 어떻게 될까 아찔했다

호남고속도로 위를 지나는 소룡육교(이 이름은 이번에 알았다). 훈련장으로 갈 때 수없이 지나다니며 오가는 차량을 부러워했다 

교관과 조교가 가장 겁(?)을 많이 준 화생방훈련장 가는 길은 주변마을이 더욱 정겹고 한가롭다. 걱정과는 달리 잠시만 견디면 되어서 화생방훈련은 생각보다 싱거웠다.

화생방훈련장을 끝으로 연무대 영역을 벗어나 논산 외곽으로 향한다. 마지막 관문이던 철야 행군의 행로를 정확히 알 수는 없으나 멀리 대둔산 봉우리가 얼핏 보였던 것 같아 그 방향으로 가보기로 한다. 당시 행군 도중 나는 놀라운 경험을 했다.

앞사람과 1m 정도 거리를 두고 길가를 걷고 있는데 키 큰 미루나무 위에 하얀 소복을 입은 처녀귀신이 앉아 있는 게 아닌가. 나와 눈이 마주치자 그 귀신은 갑자기 하늘로 날아올라 이리저리 움직이더니 급기야는 내게로 다가왔다. 나는 놀라서 소리를 질렀지만 주위 누구도 신경 쓰지 않았고, 순간 정신을 차려 보니 그것은 바람에 날리는 비닐 조각이었다. 극도의 피로에 비몽사몽 걷고 있다가 환영을 본 것인데, 대개의 귀신 목격담도 이런 식일 것이다. 우리의 감각도 상황에 따라서는 100% 믿기 어렵다.

화생방훈련장 가는 길목. 잔뜩 긴장하며 가느라 이 평화로운 풍경은 눈에 들어오지 않았겠지 

들판 끝을 따라 뻗어있는 산줄기 속으로 들어서서 강청저수지를 지나 작은 고개(사송재)를 넘으면 오른쪽 야산 언덕에 조선 최고의 충신으로 꼽히는 성삼문 묘가 있다. 성삼문(1418~1456)은 조카 단종을 내쫓은 세조의 왕위 찬탈을 반대하며 반정을 꾸미다 발각되어 죽은, 사육신의 리더격이었다. 세종 때는 한글 창제의 바탕이 된 음운연구서를 낼 정도로 대단한 수재여서 세종의 총애를 받았다. 세종과 문종의 특별한 부탁을 받아 어린 단종을 보필했으나 세조에게 왕위를 찬탈당했으니 강직한 그는 이를 용납할 수 없어 반정을 도모했지만 함께 모의한 김질의 밀고로 발각되어 처형당했다.

세조는 친국을 하며 회유를 시도했지만 성상문은 세조를 “나으리(進賜, 왕실 종친의 일반 호칭)”라고 부르며 절개를 굽히지 않았다. 절대왕조 시절 어쨌든 이미 왕이 된 세조의 면전에서 태연히 “나으리”라고 부른 성상문의 용기와 절개는 참으로 놀랍다. 세조가 “그동안 내가 준 녹을 먹지 않았느냐”고 다그치자 “나으리가 준 녹은 창곡에 쌓아두었으니 모두 가져가라”고 일갈했다. 격노한 세조가 불에 달군 쇠로 다리를 지지고 심지어는 팔을 잘라냈으나 성삼문은 안색도 변하지 않았다. 처형 당시 겨우 38세였는데 문신 중에 이런 기개를 보여준 이는 세계사에서도 드물다.

처형을 앞두고 그가 읊었다는 절명시(絶命詩) 역시 너무나 처절하면서 한편 여유롭기도 해서 필자는 이를 소재로 단편소설을 쓰기도 했다(필자의 단편집 <천사 같은 그녀> 중 ‘죽음의 노래’).

단종복위를 추진하다 발각되어 모진 고문을 받고 처형된 성삼문묘 입구. 성삼문은 논산과 연고가 없으나 운구 도중 한쪽 다리만 묻었다고 해서 일지총(一肢塚)이라고도 한다  

노량진에서 처형을 당해 사육신묘도 노량진에 남아 있지만 거열형을 당한 성상문의 육신은 팔도로 흩어졌고 그 중 다리 하나를 이곳에 묻었다고 한다. 시신을 운반하던 사람들이 지쳐 투덜대자 어디선가 “아무데나 묻어라”고 해서 이곳에 장사를 지냈다는 전설이 전해온다. 성삼문 다운 일화다.

동향의 긴 골짜기 안에 자리한 묘는 풍수지리설을 따르지 않은 것이 분명하다. 입구에는 사당과 유래비, 하마비가 서 있고, 골 따라 150m를 가면 지름 13m의 꽤 큰 봉분이 나온다. 다리 하나만을 묻어 일지총(一肢塚)이라고도 한다. 멧돼지 같은 짐승들이 훼손하지 못하게 주위에 경보장치를 설치하고 직물로 봉분을 덮어놓은 것이 특이하다. 고개 숙여 진심어린 경의를 표하니 어디선가 산비둘기가 구슬피 운다.

산짐승을 막기위해 경보장치를 설치하고 봉분을 직물로 덮은 성삼문묘

들과 산이 만나는 접경을 따라 구불대는 산모롱이 길. 논산천을 향해 북향하는 중이다논산천에서 바라본 대둔산(878m). 일대에서 가장 높은 산으로, 행군 당시 멀리 바라본 기억이 있다

논산천 좌우에 편안히 자리잡은 강태공 

성삼문묘에서 내려가는 도중 대둔산의 암봉들이 모습을 드러낸다. 그렇다면 당시 이 길을 따라 행군한 것일까. 귀신으로 둔갑해 휘날리던 비닐이 걸린 나무도 여기 어디쯤에 있었을까.

산간을 벗어나 도평리 들판을 지나면 탑정저수지로 흘러드는 논산천이 나온다. 대둔산 계류가 모여든 논산천은 물이 맑고 수량도 넉넉해 낚시꾼들이 즐비하게 터 잡고 있다. 둑길을 타고 하류로 내려가면 이윽고 광대한 탑정저수지와 만난다. 예산 예당저수지에 이어 충남에서 두 번째로 큰 저수지로 길이 4.5km, 폭 1.7km 크기다. 논산천을 막아서 만든 인공저수지이며 길이 573m, 높이 17.8m의 작은 댐으로 만들어냈으니 물을 가두는 효율성이 각별하다. 1944년 완공되어 일종의 적산으로 볼 수 있지만 1974년과 2013년 증설공사를 거쳐 지금은 논산평야를 적시는 농업용수와 동시에 관광지로 각광받는다. 호반에는 길이 19km의 종주코스 ‘소풍길’이 조성되어 있고 국내최장의 600m 출렁다리도 들어섰다. 연무대의 살풍경은 탑정저수지 하나로 무마하고도 넘친다.

저수지 북쪽 수락산(167m) 자락에는 계백장군묘와 사당인 충장사, 백제군사박물관 등이 넓은 영역에 조성되어 있다. 인근에는 수변생태공원도 있어 일대를 제대로 보려면 따로 하루를 잡아야 한다.

탑정저수지 북안 고정산(146m)에 있는 조선 중기의 문신이자 학자 김장생(1548~1631)의 묘(맨 안쪽). 일대에 조성된 가문의 묘원 규모가 대단하고 기품 있다

계백장군을 제향하는 충장사와 장군의 묘(오른쪽). 김유신이 이끄는 신라군과 결전한 황산벌은 인근의 연산면 일대다

 

탑정저수지 호반 산책로 

탑정저수지의 새 명물이 된 출렁다리는 길이 600m로 국내 최장을 자랑한다. 왼쪽 멀리 대둔산이 보인다

탑정저수지에서 들판과 구릉지를 거쳐 남서향 하면 연무읍내로 들어선다. 외곽에는 표지판조차 없는 버스터미널이 허름하다. 입대 당시 대전에서 버스를 타고 왔으니 이곳으로 도착했을 텐데 위치가 그대로인지는 모르겠다.

읍내를 관통해 연무대역 앞에 섰다. 앞서 훈련을 마친 후 자대로 배치 받을 때 타는 신연무대역은 이곳에서 1km 남쪽에 있다. 1980년대까지는 강경역에서 연무대역까지 면회객을 위해 일반 열차가 운행되었다지만 지금은 군전용이어서 폐쇄된 상태다. 성신양회(천마표 시멘트) 논산공장이 역과 접해 있지만 공장건물은 페인트가 벗겨지고 낡아서 방치된 듯하다. 역사 앞에는 녹슨 오토바이가 그래도 같은 두 바퀴라고 슬쩍 옆자리를 내준다. 까까머리로 입대한 지 30여년이 훌쩍 지났듯이, 오늘 지나온 59km도 금방 같다. 세월은 시간뿐 아니라 공간적 축지법과도 동행한다.

 

tip

각종 훈련장은 군사시설이라 사진촬영은 삼가야 한다. 여기서도 훈련장 입구 표지판만 소개했고, 지도 역시 위성사진 대신 일반지도를 이용했다. 논산훈련소 출신이라면 현장에 서는 순간 기억이 새록새록 할 것이다. 연무대 주변에 식당과 편의점, 숙박업소가 많이 있다.

 

                         논산 연무읍 일주 59k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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