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관가야 구형왕이 은거한 지리산 준봉

왕산 북쪽 기슭에 있는 금관가야 구형왕릉. 나라를 신라에 넘기고 왕산에 은거하다 죽었다고 한다. 다른 가야고분에서는 볼 수 없는 특이한 피라미드형 적석총이다 
왕산 북쪽 기슭에 있는 금관가야 구형왕릉. 나라를 신라에 넘기고 왕산에 은거하다 죽었다고 한다. 다른 가야고분에서는 볼 수 없는 특이한 피라미드형 적석총이다 

광대한 지리산 자락의 북동단에 솟은 왕산(王山, 926m)은 지리산과 맥을 잇고는 있으나 독립봉처럼 고고한 첨봉으로 솟아 있다. 지리산에 딸린 ‘봉’이 아니라 ‘산’ 명칭을 가진 데서도 이 산의 특별한 존재감을 알 수 있다. 지리산 봉우리 중에서는 높이가 낮은 편인데 만인지상의 ‘왕’이라는 명칭유래가 궁금해진다.

왕산의 북쪽 기슭에는 금관가야의 마지막을 장식한 구형왕의 무덤으로 전해오는 적석묘가 있다. 전기 가야연맹을 이끌었던 금관가야(김해)는 제10대 구형왕 대에 이르러 신라의 압박에 세불리를 절감하고 백성들의 생명과 재산을 지키기 위해 532년 신라에 항복하면서 나라를 내주었다. 500년 왕업을 자신의 대에서 끝맺었으니 백성은 살렸으나 선대를 볼 면목은 없었을 것이다. 구형왕은 퇴위 후 이곳 지리산으로 들어와 지내다 죽었고, 무덤도 크게 쓰지 말고 돌로 만들라고 유언했다는 것이다. 일대에는 구형왕의 전설이 다수 전해지고 있고, 왕산 외에도 왕이 올랐다는 왕등재, 구형왕이 머물렀다는 수정궁터와 우물 등도 전해온다. 이 정도 흔적이면 전혀 근거가 없다고는 할 수 없을 것이다. 전설에 따르면, 금관가야를 세운 김수로왕도 서기 162년 아들 거등에게 양위하고 태후 허황옥과 함께 이곳으로 들어와 수정궁을 짓고 지내다 죽었다고 한다. 구형왕이 이곳에 온 것은 전혀 뜬금없는 일이 아니라 시조왕의 흔적을 찾아온 것이라고 봐야 한다.

구형왕 전설이 아니더라도 임천과 경호강변에 우뚝한 준봉은 고도감이 헌칠하고 서쪽으로는 깊고 긴 오봉계곡을 품고 있으며 일주임도까지 잘 나 있어 라이딩하기에 최적이다.

구형왕릉 아래에 조성된 사당인 덕양전. 가락국역사관을 비롯해 전각이 많아 행궁을 방불케 한다. 뒤쪽으로 왕산이 웅장하다 

기점은 구형왕릉의 사당인 덕양전(德讓殿)으로 정한다. 구형왕의 증손자인 김유신 장군이 왕릉 옆에 단을 쌓아 수정궁을 옮겨짓고 7년 간 시봉한 것이 시초다. 김유신은 신라의 대장군으로 삼국통일에 혁혁한 공을 세웠지만 멸망한 가야왕족임을 잊지 않았다. 삼국통일을 완수한 문무왕은 구형왕의 5대 외손(어머니 문명왕후는 김유신의 동생이며 구형왕의 증손녀), 능을 단장하고 왕릉 부근 땅을 하사해 제사를 지내도록 했다. 어떻게 보면 나라를 양도하면서 전란을 피하고 평화롭게 신라와 통합한 이후, 구형왕의 후손 김유신과 문무왕이 삼국통일을 이룬 셈이다. 구형왕의 존호가 ‘양(讓)’이어서 ‘양왕’이라고도 하며 덕양전에도 이 양자가 들어있다. 양보, 양위, 사양 등등 양의 미덕은 결과적으로 엄청난 효과를 발휘한 것이다.

현재의 덕양전은 1928년 지금의 장소로 옮겨와 차츰 증축해나간 것으로, 영역이 넓고 ‘가락국역사관’을 비롯해 전각이 많아 행궁을 방불케 한다.

임천을 따라 왕산을 돌아 지리산으로 향한다. 왼쪽 뒤에 왕산(926m)이 우뚝하고, 오른쪽 멀리 오봉계곡을 안은 왕등재(1049m)가 희미하다. 두 산 이름에 '왕'이 들어간 것은 구형왕과 관련이 있다

 

지리산 북사면 계곡물이 모두 모여 흐르는 임천. 물살에 다듬어진 강돌이 지천으로 널려 있다  

덕양전에서 임천 변으로 내려와 왕산 서쪽을 돌아나간다. 임천은 지리산 북사면으로 흘러내리는 모든 골짜기 물이 모여 흘러 강폭이 최대 200m에 달하지만 물이 맑고 광대한 강돌밭이 펼쳐져 있는데다 수심이 얕아 여전히 계곡 분위기다. 지리산 턱밑이지만 고도는 140m밖에 되지 않아 주변 산들은 더욱 웅장하고 까마득하다.

오봉천을 따라 남쪽으로 방향을 틀면 오르막이 시작된다. 수년 전 들렀을 때 공사중이던 방곡저수지는 물이 가득 차 멋진 산중호수가 되었다. 저수지 서쪽에는 ‘산청함양사건추모공원’이 크게 들어서 있다. 6·25 전쟁 중 지리산 일대에 암약하던 공비를 소탕하는 과정에서 무고하게 죽은 양민들의 묘역이다. 아무리 혼란한 전투 중이라 해도 국군이 저지른 일이라 더욱 가슴 아픈 상처다. 치유와 교훈을 위해 이런 추모공원을 건립한 것이 다행스럽다. 이 평화롭고 조용한 산간이 불과 70년 전에는 수많은 생명이 스러져간 전쟁터였음을 새삼 되새긴다.

오봉계곡 초입에는 짙푸른 물을 담은 방곡저수지가 있다. 저수지 뒤로 왕산이 솟아 있다 

방곡마을을 지나면 본격적인 계곡이 시작되고 경사도 급해진다. 지리산의 수많은 계곡 중에 그나마 덜 알려지고 사람들도 많이 찾지 않아 조용하면서 자연이 잘 보존된 골짜기다. 하지만 이렇게 길이 나있다는 것은 상류에 마을이 있다는 뜻. 오봉계곡은 동쪽의 왕등재(1049m)와 서쪽의 와불산(1214m) 사이에 패어 북으로 흘러내린다. 계곡 최상류는 이름조차 없는 1320m봉이 가장 높다.

해발 500m, 한참을 올라온 상류에 급한 비탈을 따라 오봉마을이 비밀스럽게 숨어 있다. 그래도 20가구는 되어 보이는, 어엿한 산촌이다. 산아래로 길은 열려 있으나 반쯤은 고립지다. 북사면이라 눈이라도 오면 상당기간 세상과 단절될 것이고, 폭우로 계곡이 넘쳐도 길은 막힐 테니.

방곡저수지 상류에서 바라본 왕등재. 오봉계곡은 왕등재와 와불산(1214m, 화면 바깥 오른쪽에 있음) 사이에 있다

방곡마을을 지나면 본격적인 계곡풍경이 시작된다. 바로 길가에서 폭포가 떨어지고 심산협곡의 기세가 대단하다

 

저 길 끝에는 과연 무엇이 있을까. 도로는 계곡 바로 옆으로 나 있다

 

해발 500m, 오봉마을 입구에 도착했다. 이제부터는 왼쪽 수철마을 방면 임도를 타야 한다 

오봉마을마저 지나면 이제 무인지경의 숲길이 시작된다. 저 모퉁이를 지나면 갑자기 곰이나 늑대가 나타나도 전혀 이상하지 않을 심산의 심림(深林) 속. 다행히 극심한 업힐은 끝나고 왕등재 북사면을 따라 해발 550m를 오가며 길은 최대한 등고선을 그린다. 간간이 조망이 트이면 왕산과 필봉 연봉이 반갑다.

이윽고 왕산~왕등재 간 주능선을 넘는 고동재(555m)에 도착해 한시름 놓는다. 고동재는 등산코스와 지리산 둘레길에서 중요 포인트여서 리본과 표지판 등이 어지럽다. 그래도 무인지경 심산에서 만나는 사람 흔적은 반갑고 안심감을 준다. 이제 수철리 방면으로 4.5km의 장대 다운힐이 기다린다. 다운힐 종점인 향양마을이 해발 150m이니 400m 이상을 급전직하 하는 셈이다.

임도에서 내려다본 오봉마을. 해발 500~550m 와불산 중턱에 20가구 정도가 오손도손 모여 있다 

오봉마을에서 수철리로 넘어가는 임도에 신록이 찬란하다

왕산~왕등재 능선을 넘는 고동재(555m). 무서운 인상의 천하대장군이 서 있지만 사람 세상이 가깝다는 신호여서 반갑다

 

고동재 다운힐 도중 내려다본 수철리와 산청읍(맨뒤). 왼쪽 첨봉은 왕산 필봉(848m), 그 뒤로 황매산(1113m)이 희미하고, 산청읍 뒤편은 정수산(841m)

수철리는 왕산과 왕등재, 웅석봉(1099m) 같은 높고 웅장한 산줄기 사이에 펼쳐진 산중 분지로, 사방으로 흘러내리는 초고층 다락논과 점점이 산재하는 마을들이 아름답다. 이런 지형이 지리산에 몇 곳 있는데 대표적인 곳은 하동 악양면이고 구례 관산리, 남원 산내면도 유사한 산중분지다.

산이 하도 가팔라 곰마저 굴러 떨어진다는 웅석봉 주릉을 넘는 밤머리재(585m)가 남쪽으로 까마득하고, 동쪽 트인 계곡 저편에는 산청읍내가 있다.

향양마을 뒤편으로 다락논을 잠시 올라 수철리 분지를 조망하고 동쪽 산지골로 해서 왕산 허리를 가르는 임도로 올라선다. 해발 300m 가파른 비탈에까지 전원주택이 들어섰는데 양지바른 남향에 조망이 탁 트이는 멋진 입지다.

수철리에서 올려다본 왕등재. 집어삼킬듯 흘러내리는 산줄기가 험악하다 

왕산 임도는 해발 430m까지 올라가서 한동안 힘든 업힐을 각오해야 한다. 이후에는 산청 동의보감촌까지 편안한 숲길이다. 왕산 동쪽 기슭, 해발 300~500m 사면에 광대한 규모로 들어선 동의보감촌은 호텔과 자연휴양림, 한의학박물관 등이 있고 산책로와 출렁다리까지 갖춰 관광객이 꽤 많다. 이곳에 동의보감촌이 들어선 것은 <동의보감>의 저자 허준(1539~1615)의 스승으로 알려진 유의태의 모티브가 된 유이태의 묘가 인근 갈전리에 있고 유이태가 사용했다는 약수터가 왕산에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숙종 때 어의를 지낸 유이태(1652~1715)는 광해군 때 어의였던 허준보다 후대 인물이고, 허준의 스승 유의태는 이 유이태를 모델로 만들어진 허구적 인물로 밝혀지고 있다. 유이태도 대단한 명의였으나 허준과는 무관하니 ‘동의보감촌’은 명분이 다소 퇴색했다. 그래도 2013년 산청세계전통의약엑스포를 개최한 지역적 특색을 살리고 유이태의 전설이 어린 왕산의 자연환경을 활용한 테마공원으로는 의미가 있다. 왕산 일주 임도(17.4km)에는 ‘동의보감 둘레길’이란 이름이 붙었다.

동의보감촌을 관통해 다시 숲길로 들어서서 왕산 북사면으로 돌아들면 구형왕릉으로 내려가는 갈림길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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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철리에서 동의보감촌으로 이어지는 왕산 임도

 

왕산 임도에서 바라본 산청읍. 읍내 옆으로 통영대전고속도로가 지나고 뒤편으로는 정수산(841m, 왼쪽)과 둔철산(823m)이 웅장하다 

동의보감촌 직전 갈림길에 '자전거길' 표지판이 반갑다

 

동의보감촌의 새 명물인 출렁다리(무릉교). 길이 211m, 최고높이 33m 

구형왕릉은 왕산 북사면의 그늘진 골짜기 한켠에 있는데 마치 선대 왕들을 볼 면목이 없다는 듯 일부러 이런 외진 곳을 택한 것만 같다. 경사면에 축조된 7단의 방형 적석분은 피라미드와 닮아서 초기 고구려나 백제 적석총과 유사하지만 다듬지 않은 돌로 엉성하게 쌓아 단아한 형태미와는 거리가 있다. 전면 높이 7.15m, 앞변 길이 25m로 상당히 큰 편이다. 죽은 이를 기억하고 기리는 무덤은 가장 완고한 전통성에 얽매이기 마련인데, 가야의 다른 고분과 판이하게 이런 적석총을 쓴 것은 나라를 내주고 은둔한 비운을 상징하는 것일까.

무덤 바깥에는 낮은 돌담을 둘러 영역을 표시했고 1500년 풍파에도 허물어지지 않고 원형을 유지한 것이 놀랍다. 무덤 아래에는 김유신 장군이 능을 보살피며 7년 간 지냈다는 시능지(侍陵址)가 있고, 시능지 맞은편 절벽은 비기(祕記)를 간직하고 있다는 장보암(藏譜巖)이 마치 문처럼 다듬어져 있다.

옆에서 본 구형왕릉. 7단의 적석총으로 전면 높이는 7.15m, 전면 길이 25m로 상당히 큰 편이다. 가공하지 않은 자연석으로 엉성하게 쌓은 듯 하지만 1500년 풍상을 뚫고 원형을 보존한 것이 놀랍다 

구형왕릉 아래 계곡가에 있는 김유신 장군의 활터 기념비. 김유신은 구형왕의 증손자로 7년간 무덤 옆에서 지내며 무예를 닦았다고 한다. 몰락한 가야왕족 출신으로 신라에서 살아남기 위해 절치부심했음을 알 수 있다  

왕릉에서 조금 내려오면 김유신 장군이 활쏘기 연습을 했다는 사대(射臺)를 기념하는 비석이 계곡 가에 서있다. 삼국시대를 다룬 정통 사서인 <삼국사기>는 주요 인물의 전기를 소개한 열전에서 48명을 다루고 있는데 그중 김유신 한 사람에게 할애한 분량이 전체의 1/4에 달한다. 한마디로 김부식은 삼국시대 최고인물로 김유신을 꼽고 그의 생애를 자세히 기록하고 있다. 하지만 김유신이 10대 후반에 화랑이 된 이후 30대 중반 낭비성 전투에 출전하기까지 근 20년간은 기록이 별로 없다. 아마도 이때 전국을 순회하며 무예를 닦으면서 증조할아버지인 구형왕 무덤에 와서 지내지 않았나 싶다.

왕산은 초대 김수로왕과 마지막 구형왕이 머물렀으니 가야인, 특히 김해김씨에게는 조상의 얼이 깃든 성산(聖山)으로 여겨지는 듯하다. 하늘을 찌르듯 고고한 왕산의 기세는 국내최다로 번성한 후광처럼 비친다. 나라를 양보한 양왕(讓王)의 미덕과 유산은 지금도 면면하구나.

 

tip

길고 가파른 업다운이 많아 산악라이딩 경험이 없는 초보자에게는 무리다. 덕양전 아래 금서마을에 마트와 식당이 몇 곳 있다.

글/사진 김병훈 발행인

 

산청 왕산(926m) 일주 30k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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