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강과 섬진강 발원하는, ‘무진장’ 최고 산악지대

해발 700~800m에 약 5만평의 고랭지밭이 펼쳐진 신광치 일원. 뒤쪽 뾰족한 봉우리는 덕태산 시루봉(1145m). 이정표가 선 곳이 고개 정상(740m)이다
해발 700~800m에 약 5만평의 고랭지밭이 펼쳐진 신광치 일원. 뒤쪽 뾰족한 봉우리는 덕태산 시루봉(1145m). 이정표가 선 곳이 고개 정상(740m)이다

호남내륙 최고의 산간지대 ‘무진장(무주, 진안, 장수)’에서도 특히 높고 깊은 곳은 진안과 장수 경계에 남북으로 길게 이어진 산군이다. 북단의 성수산(1059m)을 시작으로 덕태산(1113m), 선각산(1141m), 천상데미(1095m), 팔공산(1151m)까지 이어지며 이 산들에 딸린 1000m급 봉우리도 많다. 이미 해발 300~400m의 진안고원과 장수고원을 바탕으로 하고 있어 비고(比高)에서 다소 손해를 보지만 그래도 산 아래 서면 까마득히 하늘로 솟구친 준봉들의 대제전을 이룬다. 게다가 5대강 중 금강과 섬진강이 이 산악지대에서 발원하니 인간마저 살찌우는 그 공덕이 얼마나 대단한가. 발길 빤질한 백두대간에서 벗어나 있는 것도 가치를 더해준다.

등산을 꽤 다닌 사람도 생소한 이름이 많을 정도로 아직 덜 알려져서 언제나 조용하고 자연이 잘 보존되어 있기도 하다. 울주 가지산(1241m)을 필두로 모인 7개의 고산지대을 통틀어 ‘영남알프스’라고 하듯이 이 산악지대도 ‘호남알프스’나 ‘무진장알프스’ 같은 이름을 붙이는 게 어떨까 싶다.

이 산줄기를 넘는 두 개의 큰 고개, 신광치(740m)와 서구이재(850m)를 일주하며 산악미와 오지풍경을 감상해본다.

의암호를 중심으로 차분한 분위기로 조성된 의암공원 

장수읍 남쪽에 광대하게 조성되어 있는 의암공원이 기점이다. 의암(義巖)은 임진왜란 중 2차진주성 전투 직후 왜장을 끌어안고 남강에 투신한 논개(?~1593)를 말한다. 논개가 뛰어내렸다는 진주 촉석루 아래 바위에 그녀의 의거를 기리기 위해 의암이라고 새겼는데 언젠가부터 논개의 호(號)처럼 불리게 되었다. 논개의 성은 주씨(朱氏)이며 장수군 장계면 대곡리에서 태어났으니 장수군이 거창한 의암공원을 조성한 데는 근거가 있다. 사후 논개의 시신을 고향으로 운구했으나 험한 육십령을 넘지 못하고 함양 서상면에 남편 최경회와 함께 영면하고 있다.

의암호를 중심으로 논개사당과 의암루, 산책로가 조성되어 공원에는 논개의 성품처럼 단아한 격조가 어려 있다.

장수읍 서쪽을 흐르는 하천길을 따라 출발한다. 작은 개울 같지만 신무산에서 발원해 이제 막 천리길을 시작한 금강 본류다  

읍내 옆을 흐르는 개울은 금강의 최상류다. 금강의 발원지 뜬봉샘이 읍내 남쪽 신무산(898m) 기슭에 있으니 이제 막 천리 장도를 시작한 물줄기다. 읍내 주변에는 팔공산과 천상데미, 장안산(1237m) 같은 고봉이 둘러싸고 있어 천혜의 고원분지를 이룬다.

읍내 서쪽 봉황산(863m) 기슭으로 접어들면 다양한 말 조형물과 함께 말을 테마로 한 포니랜드와 승마체험장이 연이어 있다. 육십령 아래에 광대한 목마장이 있어서 생겨난 말 테마다. 마지막 민가를 벗어나면 임도는 ‘승마 코스’를 겸하고 있어 폭이 넓고 잔디로 덮여 있다. 길은 계속 고도를 높여가 해발 680m까지 올라가지만 별로 높게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이미 지독한 산간이다. 어느 순간 조망이 트인 북동쪽으로 쌍봉을 이룬 남덕유산(1507m)이 짠하고 모습을 드러낸다.

승마체험장 입구의 말 조형물. 육십령 아래에 있는 광대한 목마장을 필두로 장수는 말과 승마를 주요 테마로 내세우고 있다 

봉황산 임도는 승마 코스를 고려해 잔디를 입혀 놓았다. 능선 저편으로 섬진강 발원지 데미샘이 있는 천상데미(1095m)가 살짝 보인다

봉황산 임도에서 바라본 남덕유산(1507m) 쌍봉(오른쪽 동봉이 살짝 더 높다). 그 왼쪽으로 정상인 향적봉(1614m)도 희미하다

산을 내려가면 선각산과 천상데미 북사면 골짜기에 자리 잡은 와룡자연휴양림 입구로 나온다. 도로를 따라 조금 내려가다 중상마을에서 서쪽 계곡으로 진입하면 드디어 신광치 업힐이 시작된다. 계곡 입구가 해발 500m, 고개정상이 740m이니 고도차는 240m밖에 되지 않으나 인적 없는 협곡은 시야를 좁혀서 공간적 위압감을 준다.

마지막에 급경사 업힐이 잠시 있으나 곧 이정표가 선 고갯마루에 올라선다. 고개 일대에는 넓은 고랭지밭이 펼쳐진다. 고개 주변의 완경사지를 이용해 800m 높이까지 경작지가 있는데 처음 개간할 때는 대단히 힘들었을 것이다. 고랭지밭은 5만평 정도이고 고개 남쪽은 덕태산, 북쪽은 성수산 기슭에 기대고 있다. 그나마 험로라도 길이 나 있어 경작이 가능하겠지만 오가는 것부터 보통 일이 아니다. 신광치는 성수산 동남쪽에 자리한 신광사(新光寺)에서 유래한 명칭으로, 원래는 현 고갯마루의 동쪽 신광사 방면 능선을 넘는 길목이지만 이 길이 사라지면서 지금의 위치로 정착되었다. 신광치 서쪽은 진안 땅이다. 

신광치 오르는 길. 구불대는 협곡이라 공간을 가늠할 수 없다   

목가적인 신광치 고랭지밭

농민들은 자동차로 이 외진 고지대까지 와서 경작한다 

신광치에서 서쪽 아래 노촌호까지 거리 4.5km, 고도차 300m의 기나긴 다운힐이다. 깊은 산답게 산판작업이 진행 중이고 고도가 조금 낮아지면 민가가 하나둘 나타난다. 화창한 봄날에 보는 골짜기라 밝고 명랑하지만 해가 극히 짧고, 겨울에는 혹독한 추위에 꽁꽁 얼어버릴 협곡의 삶은 녹록치 않을 것이다.

덕태산을 배경으로 한 노촌호는 아름다운 산중호수다. 2014년 완공했으니 채 10년도 되지 않아 호반에는 수몰로 말라죽은 나무들이 화석처럼 서 있다.

노촌호에서 흘러내린 물은 들판을 파고 들어 기이한 평지계곡을 이루는데 고목이 우거진 곳에 영모정(永慕亭)이 숨어 있다. ‘영원히 사모한다’는 뜻의 작은 정자는 푹 꺼진 계곡 옆에 지하처럼 앉아 있고 지붕을 얇은 돌너와로 덮은 것이 특이하다. 임진왜란 때의 효자 신의련을 기리기 위해 1869년 세웠다고 한다. 주변에는 신의련 유적비와 효자각 등이 모여 있는데, 병든 아버지를 돌보던 신의련은 이곳까지 쳐들어온 왜적에게 아버지만은 살려달라고 애원하자, 왜장이 그의 효성에 감동해 마을 입구에 ‘효자가 사는 곳’이라는 방을 붙이고 왜적이 들어가지 못하게 했다고 한다. 이후 이곳으로 피난 와서 살아남은 사람이 5만 명에 이른다고 하니 약간의 과장이 있다고 해도 왜장까지 감동시킨 신의련의 행적은 각별하고, 정자와 주변 풍경도 대단히 기이하고 아름답다. 평지 계곡에 낮게 자리한 이런 정자는 예천 초간정(草澗亭)과 영주 금선정(錦仙亭)뿐이다. 게다가 돌너와는 전국의 정자를 많이 본 나로서도 금시초문이다.

신광치에서 노촌호 방면으로 다운힐 도중 만난 산판작업장. 굵은 목재가 생산된다는 것은 그만큼 산이 깊다는 뜻

 노촌호 뒤로 덕태산 북사면의 신록이 울창하다

특이하게도 평지에서 깊이 파여 흐르는 개울 변에 서 있는 영모정. 돌너와를 이은 것도 희귀하며 주변 풍광이 매우 운치 있다 

길 저편으로 홀로 우뚝한 내동산(888m)이 마주보이면 내리막이 끝나고 30번 국도가 지나는 평장마을에 이른다. 이제 마지막 장벽인 서구이재를 넘어야 한다. 30번 국도를 타고 가도 되지만 약간의 지름길이기도 하고 마을 뒤의 작은 고개풍경이 정겨워서 평장고개를 시작으로 배우개재, 은안이고개를 차례로 넘어 서구이재로 이어지는 742번 지방도로 들어선다.

번듯한 지방도인데 차량이 아예 없다. 팔공산 주릉을 넘는 고개는 저 멀리 까마득하니 언제 넘을지 아득하기만 하다. 섬진강 발원지 데미샘 초입의 신암리에서 본격적인 고갯길이 시작된다. 이미 해발 500m나 되어 고도차에 대한 부담은 확 줄었지만 산자락 따라 거대한 지그재그를 그리는 길을 올려다보면 여전히 아득하다. 쉬엄쉬엄 오르다보니 어느새 저 아래서 까마득히 올려다보았던 백운교에 이른다. 해발 710m인데 지나온 계곡이 길게 흘러내리고, 팔공산은 여전히 한참 높다.

평장리에서 반송리까지, 마을 뒤편의 낮은 고개 3개를 넘어간다. 웬지 눈물이 날 만큼 반갑고 정겨운 시골길이다

 

작은 고갯길은 걷기코스인 '진안고원길'에 포함되어 있다. 이정표가 예쁘다

 

서구이재 업힐 도중 지나게되는 데미샘자연휴양림 입구. 휴양림은 맞은편 골짜기 안에 있고, 섬진강 발원지인 데미샘은 오른쪽 천상데미 중턱 해발 930m 지점에 있다  

협곡을 지나는 이 다리 남쪽 능선 어디쯤에 ‘만육 최약선생 돈적소(晩六 崔瀁先生 遯蹟所)’가 있다. 최양(1351~1424)은 이성계의 역성혁명에 따르지 않고 두문동으로 숨은 고려충신 72현 중 한사람으로, 포은 정몽주의 조카이기도 하다. 이성계와는 동문수학한 벗이지만 끝내 따르지 않고 이곳으로 내려와 산중 석굴에서 3년간 은둔했다고 한다. 원래는 작은 절터였는데 만육이 돼지처럼 살았던 굴이라고 해서 ‘돈적소’라고 했단다. 지금도 깊고 높은 오지인데다 북사면이라 겨울이 긴 곳인데 그 옛날 이런 곳에서 3년을 보냈다는 것은 목숨을 건 결기가 아니면 불가능하다.

이제 서구이재 정상이 멀지 않았다. 고지대답게 공기는 폐부 깊이 서늘하도록 맑고 차갑다. 서구이재는 높이 850m나 되는 큰 고개로, 전북에서는 남원 정령치(1172m), 장수 무룡고개(920m)에 이은 3위 높이다. 유래를 알 수 없는 이름은 옛지도에 ‘서구이치(西九耳峙)’로 나오고, 어떤 설에는 옛날 행인이 쥐 아홉 마리가 줄지어 가는 것을 본 데서 유래했다며 서녘 서(西)가 아니라 쥐 ‘서(鼠)’자라고도 한다. 이는 너무 황당하고, ‘서구리재’라고도 하는 걸 보면 그냥 서쪽 9리(약 3.6km)에 있다는 ‘서구리(西九里)’가 아닐까 싶다. 기준점은 고개 아래 구락(九洛) 마을로 생각되는 것이, 이 마을 이름 역시 (고개에서) ‘9리 떨어진 곳’이라는 의미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서구이재를 오르며. 경사는 심하지 않으나 꾸준한 오르막이라 힘겹다  

백운교 아래에 있는 '만육 최선생 돈적소' 안내판. 백운교 뒤로 통신탑이 서 있는 팔공산 정상이 보인다

  

백운교에서 그동안 올라온 서쪽 방면을 내려다 본다. 계곡 중간쯤 신암저수지가 보이고 그 오른편으로 선각산(1141m)이 고고하다. 맨 뒤에는 내동산(888m)이 수문장처럼 막고 섰다  

일단 고갯마루에 올라서면 마음이 푸근하다. 읍내까지는 내리 다운힐이라 걱정 제로. 내려가는 도중 장수고원을 조망할 수 있고 사두봉(1017m)에 가려 보이지 않던 장안산의 둔중한 정상부도 잘 보인다. 아득히 멀리는 지리산 주능선도 희미하다. 

마침내 의암공원에 도착해 호반 산책로를 잠시 거닐었다. 잘 꾸민 공원이고 산책하기 좋은 저녁 시간인데도 사람은 몇 보이지 않는다. 워낙 산간지방이라 서울(605㎢)에 육박하는 면적(533㎢)에도 인구는 고작 2만1천명이니 도시의 동(洞) 하나 규모다. 덕분에 자연이 보존되는 측면도 있지만 다른 곳과 마찬가지로 지방의 몰락을 절감한다. 이러다 나중에는 누가 남을 것인지…. 떠도는 나그네도 마을이 있어야 기댈 데가 있는 법인데, 돌아서는 발길이 가볍지 않다.

진안과의 경계를 이루는 서구이재. 정상에는 생태통로가 조성되어 있다 

서구이재 다운힐 도중 만나게 되는 풍경. 왼쪽 뒤 장수에서 가장 높은 장안산(1237m)과 금강 발원지 뜬봉샘을 품은 신무산(898m, 오른쪽 끝) 사이에 장수고원이 펼쳐져 있다. 두 산 사이로 지리산 천왕봉(1915m)이 희미하게 보인다

다운힐 도중 뒤돌아본 서구이재(왼쪽 옴폭한 부분). 기슭에는 전원주택이 많이 들어서 있다 

 

tip

장수읍을 벗어나면 식당과 편의점이 없다. 신광치 하산 후 서구이재 오는 길에서 조금 벗어난 백운면소재지에 식당과 가게가 있기는 하다. 임도와 도로 모두 장거리 업다운이 많아 상당한 체력적 경험을 요한다.

글/사진 김병훈 발행인 

 

장수 신광치(740m)~서구이재(850m) 47k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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