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 많고 사연 깊은 산줄기

흑성산 북동쪽 용연저수지를 지나 성거산 방면으로 가는 호반길. 왼쪽 태조산과 오른쪽 화면 밖의 성거산 사이에 동그마하게 솟은 400m봉이 수면에 예쁜 그림자를 드리웠다 
흑성산 북동쪽 용연저수지를 지나 성거산 방면으로 가는 호반길. 왼쪽 태조산과 오른쪽 화면 밖의 성거산 사이에 동그마하게 솟은 400m봉이 수면에 예쁜 그림자를 드리웠다 

천안 동쪽에 우뚝한 흑성산(519m)은 고대에는 백제의 방어선이었고 인근에서 수많은 구국 열사가 태어났으며, 지금은 거대한 독립기념관을 품고 있으니 인문지리적 가치가 특별하다. 북쪽으로 서운산(548m)~위례산(523m)~성거산(579m)과 이어지며 안성평야 동쪽을 경계 짓는 남단을 이룬다. 평야지대에 솟은 500m급 산은 덩치와 높이가 만만치 않아 천연의 장벽처럼 느껴진다. 이들 산에는 백제 산성이 도열해 있어서 삼국시대에는 안성평야를 지키고 동쪽 신라 방면을 감제하는 역할을 했을 것이다.

 

 

위례산은 백제의 최초 도읍지와 이름이 같아 이곳을 위례성(慰禮城)으로 보기도 하지만 그러기에는 산꼭대기의 입지와 작은 규모가 도읍과는 어울리지 않는다. <세종실록지리지>에는 온조왕 먼저 이곳(직산 위례성)에 도읍했다가 광주 남한성(남한산성)으로 옮겼다고 기록되어 있다. 개인적인 느낌으로는, 서기 475년 고구려 장수왕의 공격으로 한성 위례성(서울 풍납토성으로 비정)이 함락되고 개로왕이 전사했을 때 아들 문주가 공주로 후퇴하는 도중에 잠시 머문 사연으로 위례성이라는 이름이 붙지 않았나 싶다. 이 역시 그 옛날 온조왕의 사연이 있었기 때문일 수도 있다.

은석산 아래 고령박씨 종중재실 입구에 있는 박문수 동상. 그의 이름 앞에는 '암행어사'가 호처럼 따라붙어야 어울린다  

흑성산(黑城山)도 산정에 있는 산성에서 유래한 이름이다. 원래는 ‘검은 성’이던 것이 한자화된 이름인데, 정상의 KBS중계소는 이름에 걸맞게 현무암과 검은 벽돌로 조성했다. ‘검은 성’은 현무암 성돌 때문에 유래한 이름이 아닌가 싶다.

흑성산 주변에서는 역사적 인물이 많이 배출되었다. 임진왜란 진주대첩의 명장 김시민, 실학자 홍대용, 암행어사 박문수 그리고 근세에는 이동녕, 유관순, 이범석, 조병옥 등등. 특히 흑성산 동쪽 은석산(455m)은 암행어사의 대명사인 박문수의 무덤과 재실이 있고 그와 관련된 전설이 다수 전한다. 은석산 아래 병천면은 유관순 열사의 고향이자 그가 3.1만세운동을 이끈 아우내장터의 현장이다.

이제 흑성산과 은석산을 오르고 아우내장터를 돌아오는 여정을 시작한다. 출발지는 은석산 아래 고령박씨 종중재실. 박문수와 고령박씨 선조들을 재향하는 재실로 입구에는 ‘박문수 선행 유허’라는 작은 비석이 서 있다. 이곳이 그의 생가인지, 거처였는지는 따로 설명이 없지만 뒷산 꼭대기에 묘터를 직접 잡은 것을 보면 각별한 인연이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고령박씨는 흔한 성씨는 아니나 박문수 외에도 근래 두 명의 대통령을 배출했다.

고령박씨 종중재실. 왼쪽 아래에 '박문수 선생 유허' 비가 보인다

종중재실을 돌아 나와 들판을 건너 독립기념관으로 향한다. 흑성산 동남쪽 광대한 영역에 터 잡은 독립기념관은 이제 찾는 이가 많지 않은 듯, 휑한 느낌이다. 나라의 ‘독립’을 기념하는 것은 당연하지만 이토록 거창하게 만들 필요가 있었을까 싶다. 게다가 우리는 ‘해방’과 ‘독립’을 혼동하는 경향이 있어서 일제로부터의 해방을 곧 독립이라고 생각한다. 지금의 독립기념관은 내용과 형식에서 사실상 ‘해방기념관’이다. ‘광복(光復)’ 역시 식민지배에서 해방되어 빛을 되찾았다는 뜻인데 광복과 건국 역시 혼동하고 있다.

독립(獨立)은 말 그대로 ‘혼자 서는 것’이며 현실적인 독립은 독자적인 건국으로 완성된다. 해방 후에도 3년 간 미군정을 거쳤으니 해방과 독립이 같을 수 없다. 하지만 해방과 독립은 완전히 혼동되고 있고, 초기에는 엄연히 구분해서 기념했던 광복절과 건국절마저 뒤섞이고 말았다.

독립을 국가적 목표로 공공연히 내세운 것은 구한말 설립된 최초의 사회정치단체인 독립협회(1896~1898)일 것이다. 독립협회가 말하는 독립은 장구한 기간 중국(당시는 청나라)의 간섭에 시달려온 조선의 진정한 독립국을 지향했다. 독립협회가 서울 서대문 외곽에 세운 독립문은 국왕까지 나가서 중국 사신을 영접하던 모화관(慕華館)과 영은문(迎恩門) 자리에 있으며, 중국(당시는 청나라)으로부터의 독립을 염원하고 선포한 기념물이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독립’이라고 하면 일제로부터의 해방이라고 생각해 이 독립문마저 일제로부터의 독립을 상징한다고 알고 있다.

당시 서구열강이 밀려들어 조선과 중국 모두 혼란한 격변기를 겪고 있었는데, 자국도 지킬 여력이 없었던 청나라지만 조선을 끝까지 속방으로 두려고 애썼다. 조선에 파견된 원세개(위안스카이)는 식민지 총독처럼 행세했고 왕과 중신은 그 앞에서 쩔쩔 맸다. 조선이 구미 제국과 수교를 하고 외교 사절을 보내면 청나라 대사는 조선은 청의 속방이라 자신들의 허락 없이는 조선 외교관이 현지 관료를 만날 수 없도록 막았다. 이러니 청일전쟁에서 패한 청나라가 조선에서 물러나자 독립문을 세우고 잠시 환호한 것도 사실이다. 결국 조선은 일제에 패망하고 말지만, 독립의 시작은 ‘from 중국’이었고, 독립의 쟁취는 건국이란 점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독립기념관보다는 ‘대한민국 건국기념관’으로 폭을 넓혀 자부심과 희망을 심는 공간이 되었으면 좋겠다.

독립기념관의 상징 건축물인 겨레의탑(앞)과 겨레의집 뒤로 주산처럼 솟아 있는 흑성산  

독립기념관에서 조금 북상하다 교촌1리에서 산으로 접어든다. 왼쪽 산기슭에는 국립중앙청소년수련원이 거대한 규모로 들어서 있다. 길은 점점 가팔라지지만 덩달아 고도 역시 훌쩍 높아진다. 짙은 숲이라 조망은 거의 트이지 않으나 어느 순간 길이 평탄해지면서 KBS중계소 앞에 섰다. 중계소는 수원성을 모티브로 꾸민 흑성문과 성벽, 공심돈, 노대(弩臺) 등이 이채롭지만 노후화가 심해 전망대는 폐쇄한 상태다. ‘빠른 시일 내 보수작업 후 개방한다’는 안내문이 붙었으나 상태를 보아 기약이 없는 것 같다.

산 정상에는 KT중계탑이 있어 출입이 안 되고, 그 아래에 작은 정상석이 있다. 정상석 옆에는 고려말 이곳까지 쳐들어온 왜구를 섬멸한 김사혁(1320~1385) 장군 전적비가 서 있다. 이 전적비로 고려말 왜구가 얼마나 준동했는지를 알 수 있는데, 해안을 넘어 내륙 깊숙이까지 들어와 약탈과 살인을 일삼았고 김사혁 장군은 여러 번 왜구를 섬멸하는 전공을 세웠다. 전적비 주변이 좀 어수선한 것이 안타깝다.

KBS중계소에서 남쪽능선을 따라 400여m 가면 전망대가 나온다. 발아래 독립기념관이 광대하고, 경부고속도로와 나란한 21번 국도가 아스라이 뻗어나는 장관이다. 잠시 후 오를 은석산도 건너편으로 가깝다.

정상 남쪽에 자리한 KBS중계소와 주차장. 중계소는 수원성을 모티브로 전망대를 겸하게 조성되었으나 노후화로 인해 폐쇄중이다

 

흑성산 정상부. 뒤쪽 숲이 정상이지만 KT중계소 영역이라 출입금지여서 왼쪽 아래에 작은 정상석이 서 있다. 오른쪽은 고려말 왜구를 무찌른 김사혁 장군 전적비 중계소 남쪽 능선에 있는 전망대

전망대에서 내려다본 독립기념관 일원. 오른쪽 도로는 21번 국도이며 경부고속도로는 조금 더 우측에 있다 

흑성산을 내려와 북으로 방향을 잡는다. 호젓한 용연저수지 호반을 지나면 길은 성거산으로 이어진다. 성거산 저편은 안성평야가 광활한데 이쪽은 첩첩산중이다. 성거산(聖居山) 역시 성인(왕?)이 살았다는 이름에서 인근 위례성과의 연계성을 짐작하게 한다. 일설에는 왕건이 지나다가 신령이 산다고 성거산으로 부르고 제사를 지내게 했다지만 믿기 어렵다. 성거산 역시 정상에 백제산성이 남아 있어 위례성과 관계가 깊을 것이다.

성거산 남동릉을 넘는 석천고개(305m)는 아스팔트 포장이 되어 있으나 높이가 상당해서 넘기가 쉽지 않다. 고개 이름이 따로 없어 가장 가까운 마을 이름을 붙였는데, 이 정도 고개라면 정상에 안내판과 고도라도 표시해두면 좋을 텐데 아쉽다. 매번 느끼지만 이처럼 고개, 반도, 고원, 곶, 만, 제도, 군도 등등 지리 포인트의 이름이 사라지고 있는 것은 우리 땅에 대한 관심의 깊이를 그대로 반영한다.

고개를 넘으면 천안 북면이고, 다운힐 중간에서 사담리 방면 농로로 우회전한다. 골짜기 따라 불규칙한 다랑이 논에 물이 그득하니 모내기가 멀지 않았나 보다.

병천천을 따라 달리는데, 북면행정복지센터 일대가 시끌벅적하다. 마침 어버이날 즈음이라 경로잔치를 열고 있어 사람들이 모여들고 있다. ‘경로잔치’가 아니라 그냥 ‘주민잔치’를 해도 노인들만 있을 테니 마찬가지 아닐까. 그래도 초등학교가 건재할 걸 보면 젊은 층이 꽤 사는가 보다.

매송리에서 은석산과 작성산 사이 개목고개로 진입한다. 산 중턱은 제2경부고속도로 공사가 한창이라 혹시 길이 막혔을까 걱정되었는데 다행히 열려 있다. 고속도로가 생기더라도 작은 터널을 남겨둘 모양이다.

석천고개를 넘어 북면으로 내려가는 사담리 골짜기 다랑이논

 

개목고개로 올라가는 은석산 임도. 25년 완공 예정인 제2경부고속도로(서울세종고속도로) 공사가 한창이다. 임도는 고속도로 아래 굴다리를 통과할 것으로 보인다  

개목고개 정상의 유래비

개목고개(245m)도 꽤 높아서 넘기가 쉽지 않다. 개목이라는 이름이 붙은 데는 전설이 있다. 옛날 효성이 지극한 정동철이라는 사람이 개를 데리고 부모님 약을 짓고 오는 길이었다. 허기에 지쳐 고갯길에서 정신을 잃고 쓰러졌는데 하필 그때 산불이 났다. 개는 꼬리에 물에 적셔 주인에게 불이 가지 않게 하고 자신은 지쳐 죽었다는 전설이다. 그래서 고개 아래는 개목마을, 고개는 개목고개가 되었다고 한다. 원래는 이런 사연을 적은 의구비(義狗碑)가 서 있었다지만 지금은 찾을 길이 없고 개목마을 주민들이 세운 석비가 서 있다. 이런 의구(義狗) 전설이 전국 곳곳에 남아 있는 것을 보면 지금의 ‘애견 문화’는 전통이 유구하다.

개목고개에서 은석사까지는 편안한 숲길이다. 간간이 조망이 트이고 작은 쉼터에는 시비(詩碑)와 벤치가 있어 아늑한 운치를 더해준다. 이런 ‘인간적 흔적’은 딱히 근거가 없으나 내심 멧돼지 걱정을 덜어준다.

뒤쪽 개목고개를 조금 내려서면 은석산 기슭으로 본격적으로 접어든다  

중간중간 시비와 벤치가 있는 은석산 임도. 편안한 산책로 분위기지만 꽤 높고 깊은 산속이다 

정상 턱밑 해발 300m에 자리한 은석사는 550년 묵은 팽나무가 인상적은 작은 절이다. 박문수묘는 바로 뒷봉우리에 있으며 400m 정도 걸어가야 한다. 은석산 정상 능선 해발 400m 지점에 자리한 박문수묘는 본인이 정했다고 한다. 주능선에서 살짝 비껴나 작은 등성이 위에서 남향하고 있는 묘는 뭔가 근거를 담아 자리를 정한 것이 확연해 보인다. 묘 앞의 무인상 2기는 인상이 험상궂어서 깊은 산속에 자리한 묘를 지키는 수문장답다. 주능선과 연결되도록 봉분 뒤를 길게 이은 형태는 풍수지리적 영향이 농후하다.

박문수가 후손들이 찾기 힘든 이런 산꼭대기에 묘를 정한 이유가 뭘까. 전설에는 원래는 현재 독립기념관 자리로 정했다가 200~300년 후 이장될 수 있으니 이곳으로 정했다는 설, 하인과 함께 명당 터를 찾다가 더 좋은 자리는 하인에게 주고 본인은 이곳으로 정했다는 설이 전한다. 어느 경우든 본인이 묘터를 잡은 것이니, 한때 어사로 떠돌던 삼남지방을 멀리서나마 바라보고 싶어서일까.

팽나무 고목이 멋진 은석사

은석사 뒤 주능선에 있는 박문수묘  

암행어사의 대명사로 탐관오리들을 징벌하고 어려운 민생을 돌보는 이미지로 전설화된 박문수(1691~1756)지만 실제로 암행어사로 활동한 기간은 충청과 영남 지방을 대상으로 한 6개월에 지나지 않는다(1727년 10월 ~ 1728년 3월). 1731년 도승지 자격으로 충청지방을 돌아본 것을 포함해도 1년 남짓인데 마치 평생을 암행어사로 활동한 것처럼 느껴지는 것은, 그가 진심으로 민생을 돌보고 탐관오리를 척결했기 때문이다. 당쟁이 극심하던 당시 아무리 어명을 받은 어사라고 해도 당파에 줄을 대고 있는 지방관을 파직하는 것은 간단한 일이 아니다. 18세기 초중반 주로 영조 연간에 활동했으니 시대적으로는 근세 인물이다. 정조대는 서인(西人)이 정권을 잡고 있었고 서인은 다시 노론과 소론으로 나뉘어 있었는데 박문수는 소론에 속했다. 소론은 서인의 정적인 남인(南人)에 관대한 입장이어서 박문수는 노론의 심한 견제를 받았다.

놀라운 것은 그가 영조의 탕평책에 호응해 붕당을 가리지 말고 인재를 고루 등용할 것을 건의한 점이다. 그보다 더욱 대단한 것은, 조선후기 경제 몰락의 가장 큰 원인 중 하나인 재정부족을 메우기 위해 양반에게도 군역(軍役)을 부담하게 하자고 주장한 것이다. 조선조 양반은 군역의 부담이 없었고 세금도 내지 않았는데 양반이 꾸준히 늘어나고 양반 소유 농토가 확대되면서 국가재정은 갈수록 궁핍해지고 있었다. 하지만 양반(사대부) 세력이 워낙 강해 왕권조차 어쩔 수 없었고, 양반가를 제외하고 나라와 민생은 대책 없이 곤두박질치고 있었다. 나라가 무너지든 말든 자신의 기득권을 포기할 사대부는 없었는데 박문수가 이 문제를 정면으로 들고 나온 것이다. 군역은 실제로 복무하기보다 호포로 대신 내기 때문에 국가 재정을 키울 수 있는 방법이지만 앙반의 조세저항으로 박문수의 제안은 좌절되었다. 이 하나만 보아도 박문수의 애민 정신과 강직함, 경세에 대한 식견을 짐작할 수 있다.

세밀하게 조각된 무인석은 깊은 산속의 묘를 지키는 수문장답다

은석사에서 산 밑까지는 유쾌한 다운힐이다. 산을 벗어나면 한국기술교육대학교 앞이다. 아우내장터가 있는 병천면소재지는 1.5km 거리. 평일인데도 평천순대거리는 자동차와 사람들로 북적인다. 작은 면소재지로 이렇게 붐비고 번화한 곳은 드물다. 유관순 열사의 만세운동으로 유명한 아우내장은 18세기부터 있었고, 1960년대에 돈육공장이 생기면서 순대요리가 유행했다고 한다. 만세 소리 우렁차던 아우내장터는 이제 순대장터가 되었으나 일자리가 많이 생기고 거리에는 생기가 넘치니 다행스런 변천이다.

다시 병천천을 만나 상류로 향한다. 도중에 실학자 홍대용 묘와 진주대첩의 영웅 김시민 장군 생가터가 가깝다. 유관순 열사 생가도 아우내장터 동쪽 매봉산(170m) 아래에 있다. 과연 기대 살기 좋고 죽어 영면하기도 좋은 은석산의 미덕이다. 그러고 보면 흑성산~성거산 줄기는 들판 앞에 갈무리된 은석산의 서쪽 장벽으로 느껴진다. 옛사람들이 은석산 일대에 모여 산 이유를 알만하다. 박문수가 은석산 꼭대기에 영면한 것도 이해가 간다.

아우내 독립만세운동 기념공원. 병천순대거리에 있다

 

고령박씨 종중재실(오른쪽 아래 숲속) 입구에서 올려다본 은석산. 왼쪽 가장 높은 주능선에 박문수묘가 있다 

 

tip

고령박씨종중재실 300여m 전에 화장실을 갖춘 주차장이 있다. 흑성산 정상 입구에서 KT중계소와 KBS중계소 방향이 나뉜다. KT중계소 방면으로 가면 중계탑 아래 헬기장까지 갈 수 있고 서쪽 조망이 트인다. KBS중계소 내 전망대가 폐쇄되어 능선 따라 남쪽으로 400여m 가면 나오는 전망대에서 독립기념관 방면 동쪽 조망이 트인다. 개목고개 업힐 도중 제2경부고속도로 공사장 통과에 주의한다. 박문수묘는 은석사에 자전거를 두고 7~8분 걸어 오르면 된다. 식사는 병천순대거리가 편하다.

글/사진 김병훈 발행인 

 

천안 흑성산~은석산 48k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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