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대 불상 서 있는 홍길동 은거지

무성산 북서사면을 돌아가는 임도. 조망이 탁 트이고 빛이 잘 들어 명랑한 분위기다
무성산 북서사면을 돌아가는 임도. 조망이 탁 트이고 빛이 잘 들어 명랑한 분위기다

“저 엄청난 불상은 도대체 뭐지?”

공주시내와 유구읍 사이에 솟은 무성산(614m)에 주목한 것은 공주 외곽을 지나다 바라본 대형 불상이 계기였다. 하얗게 칠한 불상은 멀리서도 위용이 느껴질 정도로 거대했다. 자세히 보니 거대 불상은 한 기가 아니라 여러 기가 모여 있다. 유명한 거찰이 아닌데 저런 대불을 몇 기나 조성한 것은 대단한 일이다. 알아보니 그곳은 성곡사(聖谷寺)였다. 관음종 사찰로 1983년 창건했다니 고찰은 아니다. 성곡사는 갈미봉(고불산, 311m) 아래 계곡 상류에 자리 잡고 있고, 서쪽의 약산(278m)과 동쪽의 갈미봉 줄기가 포근히 감싼 아늑한 공간이다.

갈미봉의 주산이 바로 무성산(武城山)인데 정상에는 홍길동의 근거지였다는 홍길동성이 남아 있다. 홍길동이라면 임꺽정과 함께 조선시대 의적의 대명사로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알고 매혹되는 인물이다. 얼마나 유명한 이름이면 불특정 인명을 쓸 때 그냥 ‘홍길동’이라고 표현하는 데서도 알 수 있다. 홍길동은 전남 장성 출신으로 알려져 장성 아곡리에 생가와 대규모 테마파크까지 조성되어 있다. <조선왕조실록>에는 1500년(연산 6) 홍길동(洪吉同)을 잡았다는 기록이 처음 나오고, 이후 홍길동의 뒤를 봐준 관리 엄귀손의 문책을 주청하는 내용이 등장하지만 그 후 홍길동에게 어떤 처벌이 내렸는지, 그의 동향에 대한 기록은 없다. 하여튼 실존인물인 것은 분명하다.

성곡사의 대불을 보고, 무성산을 일주하며 홍길동의 흔적을 따라가 본다.

사곡면소재지에서 유구천 둑길을 따라 남하한다. 당진영덕고속도로 새들교가 까마득히 높이 지나간다. 다리 아래로 작은 물을 건너야 하는데 물이 많을 경우 왼쪽 풀숲으로 우회하면 된다  

당진영덕고속도로 마곡사IC를 나오면 바로 사곡면소재지다. 유구천을 끼고 있고 천변에는 주차장과 패러글라이딩 착륙장이 조성되어 있어 이곳을 기점으로 잡는다.

유구천 둑길은 가을이면 코스모스가 만발하는 꽃길로 변신해 ‘코스모스 십리길’이란 이름이 붙었다. 꽃 핀 둑길은 화사하고, 꽃이 없는 둑길은 단아하다.

동천교를 건넌 직후 강을 버리고 좌회전하면 길은 고속도로 아래 굴다리를 거쳐 방문리로 내려선다. 작은 마을이 점점이 안겨 있는 편안한 골짜기를 따라 상류로 올라가면 이윽고 거대한 불상이 모습을 보이면서 성곡사(현재는 성공사로 이름을 바꿈)로 접어든다. 성공사는 해발 200m 정도에 있어서 급경사 산길을 조금 올라야 한다. 몇 구비 돌다가 갑자기 드러난 거대한 불상들에 입이 딱 벌어진다. 이렇게 거대한 불상이 한 기도 아니고 사방에 흩어져 있다.

성공사(구 성곡사) 안으로 들어서면 거대한 약사불이 먼저 맞아준다. 대를 포함해 30m는 되는 거불이다     

문제는 종무소에는 사람이 없고 일주문이나 불이문도 없으며 전통사찰과는 구조가 판이하고, 경내 도로와 시설물 관리가 방치 상태여서 빈 절 같다는 점이다. 내막은 알 수 없으나 사찰명이 바뀐 걸 보면 심각한 곡절이 있는가 보다. 그래도 대불들의 크기는 가히 압도적이다. 가장 먼저 보이는 약사불은 대를 포함해 30m는 될 것 같다. 약사불 옆 언덕에는 길이 37m 와불과 높이 33m의 미륵불이 하늘 높이 아득하다. 지난번 공주에서 본 하얀 대불은 저 미륵불상이다.

미륵불 맞은편 언덕에는 주불이라는 청동좌불이 웅장하다. 높이 12.5m이며 좌대를 포함하면 18m나 된다. 손 길이 2.1m, 무릎과 무릎 사이 9m로 앉아 있는 좌불이어서 육안으로 보는 크기는 엄청나다. 무게는 100톤이 넘는다고 한다. 불상 뒤쪽에는 10대 제자가 반원형으로 줄지어 있고, 그 뒤로는 <금강경>을 새긴 60매의 동판이 둘러싸고 있다.

불상 좌우로는 길이 210m에 달하는 계단에 높이 1.9m의 불상 1,000기가 10줄로 도열해 있다. 그 뒤편 유리벽에는 작은 야광여래불 33만3,333기가 빼곡하다. 규모와 숫자에 어안이 벙벙할 따름이다. 이 엄청난 일을 어떻게 해냈는지, 투입된 비용과 공역에 절로 고개가 숙여진다. 불교 신자가 아니더라도 어마어마한 불상들을 보는 것만으로도 흥미진진하다.

길이 37m의 와불과 총높이 33m의 미륵불. 공주 외곽에서 보이는 불상은 저 미륵불이다. 오른쪽 아래 자전거는 훨씬 시점에서 가까운데도 너무 작다. 오른쪽 중간에 사찰의 주불인 청동좌불과 금빛 불상 1천기가 보인다

  높이 12.5m의 청동좌불. 좌대를 포함하면 18m에 이르고 손 길이만 2.1m에 달하며 무게는 100톤을 넘는다. 뒤에는 10대 제자가 도열해 있고 그 뒤편은 금강경을 새긴 동판 60매가 빼곡하다. 위쪽의 유리벽면에는 야광여래불 33만3,333기가 모셔져 있다

청돌좌불 좌우로 길이 210m의 계단을 따라 1천기의 불상도 서 있다. 이 엄청난 일을 어떻게 해냈는지 놀랍다. 다만 외부에 노출된데다 관리가 잘 되지 않아 노후화가 급속히 진행중이다

  

영화의 거인처럼 머리를 내민 거대한 약사불. 뒤쪽으로 공주 외곽의 사마산(308m)이 뾰족하다 

성공사를 내려와 성서면소재지를 거쳐 도천을 따라 북상한다. 당진영덕고속도로와 논산천안고속도로가 만나는 공주JC를 지나가고, 공주의 곰나루 전설이 어린 ‘제비꼬리산’ 연미산(238m)이 저편으로 가깝다.

성공사를 안은 갈미봉 동쪽을 지나면 한천저수지가 기다랗다. 호반길에 선 ‘홍길동 마을’ 간판은 심하게 바래 글씨를 알아보기 어렵다. 홍길동이 잊혀간다기보다 그 유산을 이어갈 사람들이 없다는 뜻이다.

한천리 마을 끝에서 산으로 올라서면 ‘무성산임도’ 안내판이 나온다. 정상부의 무성산성은 아예 ‘홍길동성’으로 표기되어 있다. 홍길동성은 둘레 525m의 장방형 석축산성으로 유물이 없어 축성시기를 알 수 없으나 위치로 보아 백제 웅진시대 외곽 방어성이 아니었나 짐작해본다. 주민들은 홍길동이 쌓았다고 해서 홍길동성이라고 부른다.

옛 기록에는 홍길동이 충청도 또는 황해도에서 활동했다고 되어 있는데, 무성산이 무대가 된 것은 <홍길동전>을 지은 허균(1569~1618)이 공주목사를 지내며 당시로는 신분차별을 받던 서자(庶子)들과 어울렸다는 데서 일단의 추정이 가능하다. 신분 차별 없이 사람들과 어울린 허균은 그들의 울분을 알았을 테고, 시대를 앞선 혁명적 생각을 가졌던 허균으로서는 주자성리학 원리주의로 꽉 막힌 당시가 참으로 답답하고 암담했을 것이다. 그 결과 앞시대의 실존인물인 홍길동을 소재로 신분질서 타파를 비롯해 조선의 사회모순을 비판하는 소설을 쓴 것으로 추정된다. 공주목사 당시 무성산이 홍길동의 근거지였다는 소문을 들은 것이 집필의 계기가 되었는지도 모른다.

조선의 시대정신을 거스르는, 가장 논쟁적인 인물이자 시대의 이단아로 정여립(1546~1589)과 허균을 들 수 있는데 두 사람 다 고위직을 거친 유력 사대부지만 주자성리학 원리주의에 꼼짝 없이 포획된 시대정신과 어리석은 전제정치를 타파하고 싶어 했다. 정여립은 대동계를 조직해 실제 몸으로 움직였다면 그보다 20여년 어린 허균은 글로써 내면의 사상과 울분을 드러냈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계란으로 바위치기가 되어 둘 모두 비참한 최후를 맞고 만다.

한천저수지 호반을 따라 점점 산속으로 들어간다. 2014년 준공되어 호반에는 아직 말라죽은 나무들이 보인다

 

한천리 마을 끝에 있는 '홍길동산성 가는길' 안내판. 여기서부터 본격적인 임도가 시작된다 

해발 390m의 고지대인데도 물이 풍부한 한천약수터, 홍길동도 필시 이 물을 마셨을 것이다  

무성산 중턱에서 멀리 내려다보이는 공주시내

임도로 진입해 보림사를 지나면 해발 350m 지점에 삼거리가 연속으로 나온다. 두 번째 삼거리에서 좌회전, 300m 가면 한천약수터가 있다. 작은 골짜기를 끼고 있으나 바위틈으로 흘러내리는 수량이 제법 많고 작은 샘까지 만들어 놓았다. 홍길동이 이 산에 은거했다면 필시 이 물을 마셨을 것이다.

시원한 약수를 한 모금 마시고 다시 북쪽으로 향한다. 무성산 주능선을 북으로 크게 돌아가는 길이다. 논산천안고속도로 정안알밤휴게소가 동쪽 산줄기 저 어디쯤엔가 있다. 북으로 뻗어나는 고속도로 저편으로는 ‘닭 쫒던 개 지붕 쳐다보는’ 조형물이 인상적인 닭 가공공장이 아스라하다. 그동안 고속도로를 타고 무성산 자락을 수없이 지나다녔건만 이제야 알아본다. 역시 이름을 불러줘야 의미가 된다.

신록이 우거진 무성산 동사면 

무성산에서 동쪽으로 내려다보이는 논산천안고속도로(우측)와 왼쪽 멀리 국사봉(403m) 아래 정안논공단지

 

무성산 서사면의 다운힐 구간. 세상을 내려다보는 숲길이 매혹적이다  

무성산 임도를 벗어나면 천지암 입구 표지판이 있는 도화동고개 정상에 닿는다 

서쪽 기슭으로 돌아들면 숲이 성긴 조림지가 사면을 가득 채우고, 산 아래로는 산줄기가 첩첩한 원경이 펼쳐진다. 늦은 오후지만 서쪽으로 기운 햇살이 그대로 비쳐 숲도, 길도 환하다.

정상 북서쪽 능선에서 이번 코스의 최고지점(해발 510m)에 다다른다. 이제부터는 약간의 기복이 있긴 해도 꾸준한 다운힐이다.

정상 남쪽에는 말굽모양의 긴 골짜기가 있는데 여기에는 중앙소방학교를 비롯해 정부기관이 여럿 들어서 있다. 입구는 좁고 안은 넓어 외부에서는 잘 보이지 않는 천혜의 우복동(牛腹洞) 지형이라 터를 잡은 모양이다. 숲이 짙어 산중에서도 건물 일부만 살짝 보일 정도로 잘 엄폐되어 있다.

임도를 벗어나면 도화동고개(140m)로 내려선다. 인근의 고당고개에서 출발지인 사곡면소재지까지는 629번 지방도를 따라 내내 다운힐이다.

 

tip

사곡면소재지와 우성면 상서리에 식당과 마트가 있다. 성공사는 내부 도로를 따라 각각의 불상 아래까지 진입할 수 있다.

 

공주 무성산 일주 44k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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