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리도록 바라보는 노고단과 반야봉

지초봉(602m) 정상에서 바라본 지리산 서부 준봉들. 만복대에서 노고단까지 서북능선이 일목요연하다. 성삼재 뒤로는 반야봉까지 모습을 드러냈다. 저 봉우리들의 허리춤에 해당하는 높이에서 봐야 경사면이 정면으로 드러나 산체가 한층 웅장하게 느껴진다. 참고로 주요 봉우리의 이름과 높이를 표시해놓았다
지초봉(602m) 정상에서 바라본 지리산 서부 준봉들. 만복대에서 노고단까지 서북능선이 일목요연하다. 성삼재 뒤로는 반야봉까지 모습을 드러냈다. 저 봉우리들의 허리춤에 해당하는 높이에서 봐야 경사면이 정면으로 드러나 산체가 한층 웅장하게 느껴진다. 참고로 주요 봉우리의 이름과 높이를 표시해놓았다

거산(巨山)은, 오르면 교만해지고 바라보면 겸손해진다. 흔히 ‘산을 정복한다’는 표현을 쓰는데 정상에 잠시 올랐다고 ‘정복’이라니…. 1953년 영국인 에드먼드 힐러리와 네팔인 셰르파 텐징 노르가이가 세계최고봉 에베레스트(8848m)를 최초로 ‘정복’했다. 그렇게 정복당했으면 그 이후 에베레스트는 무릎이라도 꿇었나, 더 낮아졌나. 지금은 매년 수백명이 정상을 오를 정도로 접근이 편해졌을 뿐 여전히 산은 그곳에 그대로 있고, 고지대에는 등산 중 숨진 200여구의 시신이 방치되어 있다. 처음 올랐던 힐러리와 텐징도 이미 죽었으나 에베레스트는 단 1cm도 낮아지지 않았고 여전히 우주 속으로 머리를 내민 채 고고하다.

산정을 스치는 바람과 구름 혹은 철새처럼 인간 역시 잠시 지면을 스쳐갈 뿐이다. 좁은 산꼭대기라면 스치는 시간이 더 짧을 것이다. 다만 원자와 세포 수가 좀 더 많은 육신이라는 게 다를 뿐.

지리산호수공원에 있는 치즈랜드. 목장과 치즈를 테마로 꾸며 목가적이다. 중턱의 젖소는 실물이 아니라 모형이다    

산에 ‘정복(conquest)’의 개념이 도입된 것은 인간이 오를 수 없을 것 같던 알프스를 오르면서부터다. 특히 1865년 에드워드 웜퍼 등이 사방으로 1300m 이상 깎아지른 절벽을 이룬 마터호른(4478m)을 오르면서 ‘산악 정복’의 역사는 시작됐다. 그전까지 마터호른 같은 첨봉은 사람이 오를 수 없는 금단의 영역으로 받아들여졌다.

하지만 우리나라를 비롯해 동양의 산들은 알프스처럼 칼날 같이 날카롭지도, 까마득히 높지도 않고 무던해서 ‘유람’을 즐기는 대상이었다. 실존하는 진경(眞景)보다는 상상속의 이상적 풍경을 주로 그리는 동양의 산수화는 화폭에 반드시 집이나 사람을 포함시켜 인문지리적 공간으로 산을 품는다. 사람과 집이 산의 품에 안기기는 하지만 사람이 산꼭대기에 선 모습은 잘 묘사하지 않는다. 깎아지른 봉우리와 기암괴석, 구름을 뚫고 창공 높이 솟아오른 고봉은 ‘바라보는’ 것만으로 의미를 함축하고 동경심과 경외심 같은 정서적 감흥을 일으킨다. 그래서 산수화는 산을 보고(觀山), 물을 보고(觀水), 폭포를 보는(觀瀑) 그림이다.

구만저수지 반대편에서 바라본 치즈랜드와 출렁다리. 푸른 초원이 싱그럽다  

대자연을 한 발 물러나 바라보면 경외감이 인다. 공포와 존경심은 하늘 높이 치솟고, 나 자신은 하잘 것 없다는 겸손은 지면 저 아래로 가라앉는 극단의 대비가 오만해진 심사를 조율해 준다. 그래서 나는 지리산으로 간다.

지난 수십년 간 수십번을 오르고 지나간 지리산이지만 이번에는 800리 둘레를 돌며 외곽의 산야에서 멀찍이 바라보는 것으로 만족할 것이다. 대자연 앞에 옹색해진 자신을 돌아보며 장발처럼 늘어난 자만과 교만의 싹을 잘라낼 것이다. 그뿐이다. 그렇게 낮아진 자리에서 새로운 길이 보이든 보이지 않든, 머리를 자른 후 가뿐하고 시원한 느낌만으로 충분하다.

이 땅에서 가장 큰 자연은 내 생각에 지리산(1915m)이 압권이다. 알프스 같은 만년설도, 그랜드캐년 같은 협곡도 없지만 높이 2000m에 육박하는 산체가 저지대에 펼쳐져 있어 육안으로 보는 웅대함의 정도인 비고(比高)가 압도적이다. 해외의 큰 산들도 비고는 3000m 정도에 그치는 것이 흔해서 지리산의 덩치는 웬만해서 뒤지지 않는다. 2000m급 산이 수십 개나 있는 북한의 산 중에도 지리산의 덩치를 능가하는 것은 한반도 2위봉인 관모봉(2541m) 정도만 떠오른다. 백두산(2750m)과 한라산(1950m)은 광대하게 퍼졌으나 단순한 형태의 순상화산이어서 바라보기보다 직접 올라야 진면목을 볼 수 있는 산이라고 할 수 있다. 온통 바위산인 금강산(1638m)이나 설악산(1708m)은 외곽조차도 두 바퀴의 접근이 어려우니 여기서는 예외다.

지초봉 기슭에 광대하게 조성된 '지리산정원'을 지나며. 맞은편 산줄기는 나중에 지나올 깃대봉(691m)으로 산허리를 가르는 임도가 보인다 

첫 번째 행선지는 구례다. 화엄사와 천은사 아래 완만한 선상지는 노고단(1507m)의 숲과 골짜기가 빚어낸 산물로, 들판 가운데로 가장 맑은 강 섬진강도 풍요롭다. 노고단은 지리산 봉우리 중 높은 편은 아니지만 육안으로는 가장 웅장한 봉우리 중 하나다. 산 아래 구례읍이 해발 30m밖에 되지 않아 1500m 전체가 산 덩치로 시야를 압도한다. 옛사람들이 산정에 제단을 만들어 산신제를 모신 것도 하늘과 가장 가까이 솟은 고봉의 위용 때문일 것이다.

노고(老姑)는 도교와 민속신앙에서 세상을 만든 ‘마고할미’를 뜻하며, 무속의 국모신인 서술성모(西述聖母, 仙桃聖母)로 보기도 한다. 흥미로운 것은 지리산 최고봉인 천왕봉 아래에 성모상을 모신 성모사가 있었다는 점인데, 옛사람들은 지리산을 여신(女神)으로 감각했음을 알 수 있다. 높고 깊으나 사람을 품고 살리는 넉넉한 육산(肉山)의 미덕에 주목한 것 같다. 천왕봉에 성모사가 있었다면 노고단에는 제단이 있었으니 지리산에서 가장 중요시한 두 봉우리라고 볼 수 있다.

순천완주고속도로는 노고단을 마주보는 깃대봉(691m)~형제봉(622m) 기슭을 지나면서 최고의 노고단 전망대다. 하지만 휴게소는나 졸음쉼터마저 없어 고속으로 지나치다보니 제대로 산세를 감상할 틈이 없는 것이 늘 아쉬웠다. 이제 노고단 서단이자, 지리산의 서쪽 끝 봉우리라고 할 수 있는 지초봉과 깃대봉~형제봉 기슭에서 저 노고단을 지겹도록 볼 것이다.

활공장으로 조성된 지초봉 정상. 남쪽으로는 구례읍 일대의 선상지 들판이 펼쳐져 있다  

지초봉 서쪽, 구례화엄사IC에서 가까운 지리산호수공원이 기점이다. 길이 2km, 최대폭 400m 남짓한 구만저수지 일원은 공원으로 단장되어 있고, 언덕배기에는 목가적인 풍광의 지리산치즈랜드도 들어섰다.

길이 190m의 출렁다리를 건너 출발이다. 호수면이 해발 90m밖에 되지 않아 602m 지초봉도 고도차 500m 이상을 극복해야 하니 만만한 높이가 아니다. 지초봉(芝草峰)은 잔디나 풀밭이 많아서 붙은 이름일까. 

지초봉 남쪽 기슭에는 복합산림공원인 ‘지리산정원’이 넓게 자리하고 있다. 총면적이 281ha(85만평)에 달하며 야생화생태공원, 숲속수목가옥, 구례생태숲 등이 조성되어 있다. 구례생태숲에서 지초봉 정상 직전(해발 568m)까지는 길이 780m의 모노레일이 연결되고, 모노레일 상부정거장에서는 지리산정원을 가로지르는 길이 1.1km의 짚라인도 가설되었다. 짚라인은 고도차가 350m나 되어 속도감과 고도감이 엄청날 것이다.

구례생태숲을 가로질러 임도를 타고 지초봉 주능선을 넘는 구리재(490m)를 오른다. 이름(구렁이 고개)처럼 거대한 지그재그를 그려 경사는 심하지 않고, 저 아래로 선상지를 따라 완만히 펼쳐진 다랭이논이 정겹다.

지초봉 정상에서 동쪽 조망. 가까운 건조물은 모노레일 상부정거장 겸 짚라인 출발지다. 그 뒤로 간미봉(728m), 종석대(1361m), 노고단(1507m)이 차례로 중첩된다. 간미봉 오른쪽 뒤로 왕시리봉(1242m)도 머리를 살짝 드러냈다   

구리재 정상에서 지초봉 정상까지 800m는 상당히 가파르고 노면도 험하다. 모노레일 상부정거장을 지나 조금 더 가면 패러글라이딩 이륙장으로도 쓰이는 지초봉 정상이다.

“이야~!” 지초봉의 지리산 조망은 기대 이상이어서 감탄이 터진다. 낮지만 주능선에서 멀찍이 물러난 위치여서 지리산 서단과 구례 들판이 한눈에 대조된다. 북동쪽으로는 산수유마을로 유명한 산동면이 넓은 골짜기에 퍼져 있고, 그 뒤로는 만복대(1433m)가 웅장한 장벽으로 서 있다.

동쪽으로는 종석대(1361m)와 노고단이 겹쳐 보이고, 성삼재 위로는 반야봉(1732m) 쌍봉까지 모습을 드러냈다. 구례읍 일대 해발 30m의 저지대와 노고단과 반야봉을 동시에 보니 어마어마한 크기로 부풀어 오른 지리산 산체가 실감난다. 규모감 덕분에 나무가 삐죽삐죽한 능선은 고혹적이고 매끈한 곡선으로 흐르고 원근에 따라 농담을 달리하는 산줄기는 첩첩한 입체감을 만들어낸다. 원래 산은 인근의 다른 산에서 바라봐야 경사면이 정면으로 드러나 한층 웅장한 진면목을 드러낸다. 이론적으로는 바라볼 산의 절반 높이가 가장 좋은데 현재 높이 602m는 비고를 감안할 때 1400~1700m의 봉우리를 감상하기에 최적이라고 할 수 있다.

가히, 산은 지구의 주름이고 표정임이 분명하다. 산이 없는 무한 평면이라면 풍경이 생길 수 없고 강도 흐르기 어렵다. 지구가 지어 보이는 이 거대하고 특별한 돌출은 지역을 구분하는 지문이자 얼굴이 아닐 수 없다. 더욱이 이토록 높고 깊고 넓은 지리산이라면. 눈앞에 펼쳐진 조망이 아까워 지초봉을 차마 떠날 수 없어 한참을 머물렀다.

지초봉에서 북쪽으로 바라본 만복대(1433m)와 산수유마을 일대

 

지초봉 정상에는 돌탑이 있고 그 아래쪽에 이정목이 서 있다 

지초봉에서 구리재를 거쳐 구례수목원까지는 울창한 숲길 다운힐이다. 구례수목원에서 살짝 고개를 넘으면 구례산수유자연휴양림 입구가 나오고 그대로 하산하면 아름다운 다랭이논을 품고 있는 사포마을이다.

경사면을 따라 불규칙하게 조성된 다랭이논은 옛날에는 흔했지만 이제는 특별한 경관으로 남았다. 예전에는 작황을 하늘에 기대야 하는 천수답이면서 접근마저 힘든 고역의 현장이었는데 지금은 포장된 농로가 나 있고 상류에는 마르지 않는 저수지까지 있으니 해마다 풍년 예약이다.

지리산온천단지 상류 일대는 전체가 산수유마을이다. 매년 3월 중순 축제가 열릴 때면 골짜기 전체가 산수유꽃으로 노랗게 물든다. 이미 꽃은 졌으니 산수유마을 중심부에 자리한 ‘산수유사랑공원’만 돌아보기로 한다.

언덕을 이룬 공원 중심부에는 산수유꽃 조형물이 거대하고, 무동천 개울가에는 방호정(方壺亭)이 아늑하다. 정자는 1930년 지역 유지들이 뜻을 모아 세운 건물로 ‘방호(方壺)’는 고대 중국에서 동쪽 바다에 있다고 믿은 전설적인 삼신산(三神山)의 하나인 방장산(方丈山)을 뜻한다. 삼신산은 방장 외에 봉래(蓬萊)•영주(瀛州)가 있으며 우리나라에서는 방장은 지리산, 봉래는 금강산, 영주는 한라산으로 여겼다.

울창한 수림을 이룬 구례수목원

사포마을 다랭이논. 우아하게 만곡하는 곡선이 아름답다. 뒤편으로 지리산온천단지가 보인다

산수유사랑공원의 산수유 조형물. 산수유마을에서는 북쪽을 감싸고 있는 만복대가 내내 올려다 보인다

 

산수유공원 서단, 무동천을 끼고 날듯이 앉은 방호정 

산동면소재지를 통과해 861번 지방도를 타고 고산터널(고산령, 470m)로 향한다. 깨끗한 포장도로이고 차량통행이 드문 길이지만 끝없는 오르막에 기가 질린다. 경사가 심하진 않으나 가도 가도 끝이 없는 업힐은 터널입구까지 6km나 이어진다. 하지만 이 언덕만 오르면 깃대봉 기슭의 임도는 대체로 다운힐이라 큰 어려움이 없을 것이다.

드디어 고산터널 입구에서 임도로 들어선다. 임도 초반에 한동안 다운힐이 이어져 편하긴 한데, 다시 올라야할 걱정이 슬쩍 든다. 아니나 다를까, 둔기마을 입구까지 내려갔다가 한동안 가파른 업힐을 되올라야 한다. 그나마 이것이 마지막 힘든 오르막이다.

이제 길은 등고선을 따라 산허리를 감고 도는데 출발지인 지리산호수공원과 지초봉이 맞은편으로 가깝고, 터널을 들락거리는 순천완주고속도로가 저 아래를 지난다. 간간이 트이는 숲 사이로는 노고단과 반야봉이 숨바꼭질을 하고 구례들판은 발 아래 질펀하다. 고속도로에서 스쳐가며 보았던 노고단을 이제 실컷 감상한다.

임도는 구례읍내까지 이어지지만 구례화엄사IC 직전 신도리로 하산하면 지리산호수공원이 멀지 않다. 몇 시간이나 웅장한 산을 계속 바라봐서일까, 이제 봉우리 하나하나가 눈에 익은 얼굴이 되어 더욱 반갑고 친근하지만 저 산이 나를 알아보거나 의식할 리는 만무다. 저 거대한 산체를 가득 덮은 수림의 나무 한 그루보다 작은 존재감을 실감하며 바람처럼 스쳐 지날 뿐이다.

곡성 고달면으로 이어지는 고산터널 입구에서 임도로 진입한다. 터널은 해발 470m로 산동면소재지에서 6km를 올라야 한다   

산허리를 가르는 깃대봉 임도. 맞은편은 만복대

 

지리산호수공원이 바로 아래로 보인다. 왼쪽 아래 봉우리가 지초봉이고 그 뒤로 노고단이 웅장하다. 반야봉도 희미하게 모습을 보였다. 깃대봉 임도에서는 내내 노고단을 볼 수 있다

  저 아래로 구례화엄사IC가 보인다. 현 지점에서 조금 더 가다 IC 방면으로 하산하게 된다

산을 내려와서 바라본 지초봉(맨왼쪽)과 간미봉, 종석대, 노고단. 고지에서 보는 것보다 시각적 입체감이 훨씬 떨어진다  

 

tip

지리산치즈랜드 입구에 무료주차장이 있다. 치즈랜드는 입장료를 내야 한다(성인 3000원). 구리재에서 지초봉 정상까지는 노면이 거친 급경사 구간이어서 라이딩에 주의한다. 산동면 지리산온천단지 일대에 식당과 편의점이 다수 있다.

글/사진 김병훈 발행인

 

구례 지초봉 일주 43k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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