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경의 이중 두물머리, 처녀뱃사공은 어디에

용화산 반구정 느티나무 고목 뒤로 낙동강이 도도하다. 남지읍내와 남지교도 살짝 드러났다  
용화산 반구정 느티나무 고목 뒤로 낙동강이 도도하다. 남지읍내와 남지교도 살짝 드러났다  

처녀 뱃사공의 치마폭을 날리던 강바람은 어디서 불어오는가.

강물의 서정은 대개 두 강이 모여드는 합수점에서 극대화된다. 2차원 수평면이 세 갈래가 되면 입체감이 더해지고, 지역과 풍물을 가르는 멀티 경계선이 수렴하면서 이별과 만남의 전설도 극적으로 집중된다. 낙동강에서 가장 극적인 합수점은 최장 지류인 남강과 본류가 만나는 함안 대산면과 창녕 남지읍 일대일 것이다. 남강-낙동강 합수 직전에 함안천이 남강과 합류하면서 실제로는 이중 두물머리의 진풍경이다.

지류라고 하지만 남강은 보통 강이 아니다. 남쪽의 강(南江)이란 직관적인 이름은 ‘남쪽’이 은유하고 상징하는 ‘따뜻함’ ‘먼 곳’ ‘희망’에서 일말의 동경심을 자아낸다. 길이가 186km에 달해 영산강(116km)보다 길고 섬진강(212km)에 육박해 다양한 지역과 지형을 거친다. 덕유산에서 발원해 지리산 청정수을 곁들이니 진주까지는 섬진강처럼 맑고 산간 풍경은 주옥 같다. 진주를 지나면 평야지대가 나오면서 흐름은 느려지고 사행(蛇行)도 심해진다. 이윽고 본류와 만나기 직전인 함안에 접어들면 들판은 한층 넓어지고 강물에 기대 사는 마을도 늘어난다. 마을이 많다는 것은 사연과 전설도 많다는 뜻. 현대판 전설의 하나인 ‘처녀뱃사공’ 무대가 바로 여기다.

처녀가 아니라 그냥 뱃사공이었으면 그다지 심금을 울리지 못했을 것이다. 힘들고 천시 받는 뱃사공 일을 처녀가 하는 데는 필시 곡절이 있을 테고, 강바람이 펄럭이는 치마와 머릿결은 상상 이미지만으로도 남심(男心)을 흔들고 만다.

 '처녀뱃사공 노래비'에 있는 영화의 한 장면. 자매가 나룻배 앞뒤에서 노를 젓는 모습이다  

코스의 출발점인 악양생태공원. 남강 변 둑길에는 금계국이 만발했다 

남강과 낙동강 합수점 일대를 돌아오는 여정은 함안천이 남강과 합류하는 악양루에서 시작한다. 악양루 바로 옆이 ‘처녀뱃사공’의 배경이 된 악양나루터였다. 악양루 북쪽에는 악양생태공원이 조성되어 기점으로 잡기 좋다. 관광지로는 알려지지 않았으나 인근 주민들의 휴식과 산책 공간으로는 인기가 있는 듯, 평일 아침인데도 찾는 이가 적지 않다. 공원 옆으로는 약간의 단차를 두고 남강이 흐르고, 강 건너는 의령 정곡면 들판이 마주한다.

생태공원 남단 절벽지대에는 데크산책로가 나 있다. 계단은 자전거를 끌 수 있도록 바퀴 통로를 설치해 놓아 다행이다. 산책로 중간쯤에 악양루가 남강과 함안천 합수점을 바라보며 우뚝하다. 1857년 처음 건립되었으며 현 건물은 1963년에 수축한 것이다. 하동 악양처럼 중국의 명승지 악양(岳陽)에서 따온 이름이니 모화사상의 흔적이지만 남강-함안천 함수점에 자리한 입지는 걸출하다. 정면으로는 자연공원으로 조성된 악양둑방과 남강이 마주 보인다. 함안천은 수평으로 흘러가고 남강은 정면으로 흘러오며, 둔치 꽃밭은 널찍한데 들판 저편 마을은 멀찍이 물러나 있고… 강촌 서정이 물씬하다. 옛사람들도 이 풍경에 매혹되어 정자를 세운 것이니 인간의 미적 감각은 200년 시차 정도에는 요지부동이다.

악양생태공원에서 악양루 가는 데크로. 절벽을 따라 위태롭지만 조망이 탁월하다. 오른쪽 강줄기는 남강 합류 직전의 함안천

 

남강과 함안천 합수점을 바라보는 절벽 중간에 자리한 악양정

악양루에서 바라본 함안천-남강 합수점. 바로 아래 함안천은 가로로 흐르고 남강은 정면으로 닥쳐와 강수면이 입체화되고 악양둑방의 서정풍경까지 더해져 실로 절경이다  

악양루에서 내려오는 데크로는 좁은 데다 돌출바위까지 있어 끌기도 쉽지 않다. 데크로를 내려오면 매운탕과 생선회를 파는 악양루가든이 있다. 30년 전쯤에도 있었는데 건재하니 반갑다. 당시 주인장은 ‘처녀뱃사공’ 노래의 모티브가 된 ‘처녀’를 알고 있었는데 부산으로 시집갔다는 얘기를 해준 것으로 기억한다. 혹시 그 ‘처녀’가 살아 있다면 90 전후의 고령일 것이다. 모든 할머니가 한때는 처녀였음을 새삼 깨닫는다. 사람 일생의 한 구간만을 표현하는 말을 두고 별개의 존재처럼 받아들일 만큼 우리는 부질없는 소망을 붙들고 산다.

악양루가든 입구에서 조금 내려간 강변에 처녀뱃사공 노래비가 외롭다. 비석에 기재된 사연은 이렇다.

1953년 9월 유랑극단 단장인 윤부길 씨(가수 윤복희, 윤항기의 父)가 6.25 피난을 끝내고 서울로 가는 길에 함안읍 가야장에서 공연을 마치고 대산장으로 가던 중 악양을 지나게 되었다. 악양에서 대산으로 가려면 함안천을 건너야 하는데 나루터에는 군에 입대한 후 소식이 끊긴 오빠(박기준 씨, 6.25 중 전사)를 대신해 두 여동생이 교대로 나룻배 노를 젓고 있었다. 오빠 소식을 기다리며 노를 젓고 있다는 애절한 사연을 들은 윤부길 씨가 노랫말을 짓고, 한복남 작곡가가 곡을 붙여 1959년 가수 황정자의 목소리로 발표된 곡이 ‘처녀뱃사공’이다. 노래비는 강을 건너간 대산쪽에 있다.

1절 ‘낙동강 강바람이 치마폭을 스치면~’에 이어 2절 첫구는 ‘낙동강 강바람이 앙가슴을 헤치면~’으로 공감각적 구상이 한발 더 나아가 살짝 에로틱하다. 노래비도 나신의 처녀상을 형상화해 애절한 사연에 이미지화를 도와주니, 그리움과 동경심이 배가된다. 가공의 소설이나 영화가 아니라 실제 있었던 사연이라 공감과 연민의 심정이 더한다.

노래비 앞 함안천은 폭 40m 정도로 작지만 그래도 나룻배가 없었다면 건널 수 없는 단절이다. 지금이야 바로 곁에 악양교가 놓였고 나루터는 흔적도 없다.

사라진 악양나루터에 외롭게 서 있는 처녀뱃사공 노래비

 

초가집 두 채와 나룻배, 나신의 여인상을 형상화한 노래비 

악양교를 건너면 함안천 자전거길이 나 있는 둑이 아득하게 이어진다. 악양교에서 가야읍내를 거쳐 함안면(함안은 군청이 있는 읍은 ‘가야읍’이고, 옛날 함안의 중심지였던 ‘함안면’이 따로 있다) 무진정까지 9.5km나 된다. 가을에는 코스모스가 만발해 예쁘고 로맨틱한 꽃길로 변신한다. 가을 꽃길은 꼭 한번 달려봐야 할 매혹의 코스다. 이번에는 양포교까지 2km 정도 맛만 봐야 한다. 멀리 가야읍내가 보이고 그 뒤로 함안의 진산이라고 할 수 있는 여항산(770m)~서북산(739m) 줄기가 험상궂은 장벽으로 펼쳐져 있다.

양포교를 건너 옥렬리의 좁은 산간지대로 들어선다. 폭 200~300m의 좁은 들판이 산줄기 사이로 길게 뻗어나고 골짜기에는 작은 마을들이 적막하다. 농번기 직전인데 들에도 마을에도 인기척이 없다. 노인들마저 하나둘 떠나면서 시골마을에는 빈집이 급속도로 늘고 있고 인구 감소는 급전직하로 치닫는다. 머지않아 공동화된 농촌은 심각한 문제가 될 텐데 딱히 대책은 없으니 절벽 아래에 뭐가 있을지 두렵다. 과학기술과 세태의 급변으로 일어난 사회변동은 정책 같은 인위적 조작으로 흐름을 바꾸는 것이 극히 어렵다. 격랑 속에서 허우적댈 때 공감이 확산되는 틈을 보아 새 길을 찾는 수밖에 없다.

일반 민가를 사찰로 꾸민 미래사에서 고개를 넘으면 취무마을이고 앞으로는 대산 들판이 광활하다. 대산면소재지는 1021번 지방도를 따라 2km 이상 길게 이어진 특이한 가도(街道) 마을이다. 전국적인 수박 산지여서 면소재지 치고는 큰 규모와 다채로운 시설에서 풍요를 엿본다.

함안천을 따라 가야읍 방면으로 아득히 뻗어나는 함안천 자전거길 

넓다는 대산들판이지만 길이 8km, 최대폭 3km에 지나지 않는다. 낙동강 유역에는 큰 평야가 드물어서 이 정도만 해도 넓은 편에 든다. 들판을 가로질러 낙동강변 용화산(193m)으로 향한다. 남강과 낙동강 합수점에 솟은 산으로 강변으로는 급사면을 이루고 합수점과 창녕 남지읍을 조망하기 좋은 위치다. 선조들도 용화산의 탁월한 입지에 주목해 반구정과 합강정을 세워 풍광을 아꼈다.

용화산 줄기로 올라서면 낙동강 건너 남지읍과 너른 둔치가 보인다. 남지 둔치는 매년 봄 전국최대의 유채밭으로 변하고 거창한 축제도 열린다.

낙동강이 구비치는 흐름을 맞아 용화산 북안은 안쪽으로 살짝 만곡하며 가파른 절벽으로 물살에 대응한다. 남지 둔치가 잘 내려다보이는 언덕에 ‘갈매기와 노닌다’는 뜻의 반구정(伴鷗亭)이 숨어 있다. 갈매기가 여기까지 올까마는 바다를 그리는 소망의 반영일까, 700년 묵은 느티나무 그늘에서 바라보는 낙동강은 강변 경치의 백미다. 임진왜란 후 의병장 곽재우도 이 경치를 아껴서 함께 거병한 조방(趙垹, 1557~1638)과 더불어 낙동강 남쪽과 북쪽에 각자 정자를 세우고 뱃놀이를 즐겼다고 한다. 조방이 세운 정자가 반구정으로 원래는 남지대교 근처의 말바위에 있던 것을 홍수 위험이 없는 이곳으로 옮겼다. 곽재우가 은거했던 망우정은 강 북안인 창녕 우강리에 있다.

15년 전 처음 찾았을 때는 8순의 함안 조씨 후손이 풍산개 한 마리와 외롭게 지키고 있었다. 사별한 아내를 그리며 세운 비석과 시비의 유래, 용화산 골골과 낙동강 굽이굽이의 사연을 반추하던 노(老) 정자지기의 친절은 이제 찾을 길이 없다.

반구정에서 상류로 조금 올라가면 강변 낮은 곳에 합강정(合江亭)이 숨듯이 앉아있다. 조선 중기에 처음 지은 합강정은 400살을 헤아리는 거대한 은행나무가 강렬한 인상을 남기지만 너무 외진 데다 조망도 시원하지 않고, 바로 앞 강물까지 깊고 거칠어 어딘가 스산하다.

용화산 초입에서 바라본 낙동강과 남지교. 남지교까지 뻗어난 용화산 줄기는 낙둥강 흐름에 맞서느라 절벽을 이룬다

   

이정표와 시멘트 포장이 잘 되어 있지만 때때로 급경사가 나타나는 용화산 임도  

반구정 입구 전망대에서 바라본 남지읍. 강변의 광활한 둔치는 매년 봄 전국최대의 유채밭으로 변한다 

강변 낮은 곳에 은행나무 고목과 함께 있는 합강정 

용화산을 내려서면 바로 남강과 낙동강 합수점이고 그 옆으로 서정적인 둑길이 길게 이어진다. 낙동강 건너는 예로부터 있는 벼랑길인 ‘개벼리길’을 품은 마분산(180m)이 용화산에 댓구를 이루듯 길게 뻗어 있다.

이제 둑길을 타고 남강을 따라간다. 5월 들꽃의 아이콘, 노란 금계국이 지천으로 피어 여왕의 군림을 찬미하니 두 손은 저절로 벌어지고 두 바퀴는 알아서 달려준다.

구혜리에서 옛 송도교로 남강을 건너면 의령 지정면이다. 강변에는 마늘과 양파 밭이 즐비하고 산이 많아 마을과 경작지는 많지 않다. 적곡리에서 다시 둑길을 타면 출발지인 악양생태공원과 악양루가 마주보인다. 이제 둑길은 완전한 서향이고, 강 건너로는 꽃밭이 조성된 악양둑방이 정겹다.

용화산 북단에서 직관하는 남강(왼쪽)-낙동강 합수점. 오른쪽 낙동강 건너의 강변 산줄기는 '개벼리길'과 낙동강 자전거길이 지나는 마분산(180m)

장암리 둑길에서 뒤돌아본 용화산. 둑길과 직결되는 산허리 임도가 보인다

노란 금계국이 환상적인 남강 둑길

남강 건너로 가야읍내와 봉화산(가운데 첨봉, 676m)~서북산~여항산이 선명하다

 

함안과 의령을 연결하는 백곡교 뒤로 의령의 명산 자굴산(897m)~한우산(836m)이 가깝다  

백곡교를 건너기 위해 도로로 올라서니 도로명이 ‘호암이병철대로’다. 세계적인 기업으로 우뚝 선 삼성의 창업자 이병철의 생가가 인근 중교리에 있어서 붙여진 이름다. 나라의 경제와 위상, 혁신을 선도하는 기업이 이곳에서 시작됐으니 남강의 복락은 미래진행형이다.

이제 전국의 둑길 중 가장 매혹적인 곳 중 하나인 악양둑방이다. 둔치에 들어선 파크골프장은 만원이다. 고령의 주민들에게 파크골프는 소일 겸 사교, 운동으로 최적이다. 이 좁은 국토에서 강변둔치 말고는 파크골프장을 수용할 수 없으니 강물의 미덕은 참으로 다채롭다. 둔치 한켠에는 경비행장도 들어섰고, 악양루 가까이 갈수록 풍차가 도는 화원과 산책로가 그림 같다. 처녀뱃사공은 사라졌으나 꽃길에는 어여쁜 아가씨들이 넘쳐나니 강바람은 심심치가 않겠다.

경비행장과 풍차가 목가풍을 더해주는 악양둑방  

악양 둔치 꽃밭은 여심을 유혹한다 

악양둑방에서 바라본 악양루. 한폭의 산수화다   

 

tip

악양생태공원에서 악양루~악양루가든 방면 데크로는 길이 좁고 일부 계단이 있어서 무거운 전기자전거는 무리다. 이 구간은 도로로 우회해도 된다. 대산면소재지(구혜리)에 식당, 편의점, 마트 등이 다수 있다.

글/사진 김병훈 발행인 

 

함안 남강 악양둑방 45k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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