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왜, 어떻게 저 거대한 바위무덤을 만들었나

고인돌공원 최대의 핑매바위고인돌. 길이 7m, 높이 4m, 무게 200톤 이상의 초대형급이다
고인돌공원 최대의 핑매바위고인돌. 길이 7m, 높이 4m, 무게 200톤 이상의 초대형급이다

한반도 고대 유산 중에 가장 특이하고 신비로운 것 중의 하나는 고인돌이다. 지금까지 확인된 전세계 고인돌이 5만기 정도인데 그 중 절반에 가까운 2만기가 한반도 일원에 분포하는 압도적인 숫자부터 놀랍다. 고인돌은 기원전 15세기부터 기원전 4세기까지 청동기시대를 대표하는 유물로 역사적으로는 고조선시대와 겹친다. 유럽과 북아프리카, 서남아시아에서도 발견되지만 한반도의 고인돌과는 별개의 계통으로 추정된다.

고인돌은 선돌(立石), 열석(列石), 환상열석(環狀列石), 석상(石像)과 함께 거대한 돌을 이용해 축조한 거석기념물의 일종으로 큰 돌을 받치고 있는 ‘괸돌’ 또는 ‘고임돌’에서 유래한 말이다. 흔히 ‘고인(古人) + 돌’로 오인하기 쉬운데 그냥 ‘고여 놓은 돌’이란 뜻으로 지석(支石)의 순우리말 식 표기다. 출토 유물로 보아 대부분 무덤이지만 의식을 행하는 제단(祭壇) 역할도 했을 것으로 보인다.

대규모 고인돌은 축조에 엄청난 인력과 경제력 동원이 필요해 분화된 계층과 지배자가 등장하고 조직화된 사회가 발달하는 시대의 변화를 말해주는 증거이기도 하다. 크기와 완성도에서는 황해도와 평안도 지방이 가장 앞서서 고조선의 후기 중심지를 추정케 하며, 초기에는 요동지역에서 출발해 점차 중심지가 한반도로 옮겨온 것도 반증한다. 최초의 고인돌은 청동기시대 초기 혹은 신석기시대에 출현해 철기시대가 시작되면서 사라진 것으로 보인다.

화순천에서 바라본 화순읍내와 무등산(1187m)

노란 금계국이 만발한 지석천 둔치 자전거길. 나주에서 영산강 자전거길과 연결된다 

남한에서는 강화도와 고창, 화순에 특히 밀집해 있고 이 세 지역의 고인돌은 2000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되기도 했다. 그 중에서도 단일 지역에 고인돌이 가장 많이 모여 있는 곳은 고창과 화순이다. 특히 화순고인돌공원에는 무려 596기가 모여 있어 고창고인돌공원(447기)을 능가한다(강화도는 섬 전역에 160여기 분포).

이제 국내 최고 최대 규모의 고인돌나라를 돌아보며, 고대인들이 왜 어떻게 이곳에 터 잡았는지 상상해 보기로 한다. 출발지는 화순읍내 외곽의 화순공설운동장으로 잡는다. 넓은 주차장과 화장실 등 편의시설이 충분히 갖춰져 있고 화순천을 끼고 있어 강둑길을 따라 가기도 좋다.

화순은 광주 지척에 있지만 무등산 줄기가 가로막아 위성도시로 크게 발전하지는 않아 읍내도 인구 4만으로 시 규모가 되지 않는다. 시가지 외곽으로 나서면 바로 한적한 전원지대가 펼쳐진다.

영산강 지류인 화순천 둑길을 타고 남쪽 하류방면으로 향한다. 남하할수록 화순읍 뒤편으로 우뚝한 무등산은 멀어지고 들판은 넓어진다. 지석천에 합류하면 물줄기는 나주평야 쪽으로 서향하고, 신덕리에서 남쪽으로 들판을 가로지르면 효산리 화순고인돌공원 입구가 나온다. 일대는 세계거석테마파크와 고인돌선사체험장이 거창하게 조성되어 고인돌나라에 왔음을 말해준다.

고인돌공원 입구에 조성된 고인돌선사체험장. 청동기시대 주거지인 움집을 복원해 놓았다

지배자가 거주하던 장방형의 대형 움집. 아득한 원시시대 같지만 유럽에서는 그리스 로마 문명이 시작된 시기다  

고인돌선사체험장은 고인돌이 축조된 청동기시대의 주거지가 다양한 현태로 복원되어 있다. 원형 또는 사각형 반지하 구조로 둘레에 기둥을 세우고 벽과 지붕은 갈대와 억새를 덮어 만든, 아주 초라하고 원시적인 집이다. 이를 보고 대단한 원시시대로 생각하기 쉬운데 구덩이를 판 ‘수혈주거(竪穴住居)’ 방식은 신석기시대에 등장해 삼국시대 초기까지 사용됐다. 비슷한 시기 그리스와 로마에서는 거대하고 아름다운 석조 건물이 생겨났음을 생각하면 참담한 격차다. 솔직히 내가 어렸을 때인 1970년대까지만 해도 시골에는 초가집이 흔했다. 지금은 민속촌에나 가야 볼 수 있는 초가집은 사실 움집에서 조금 더 발전한 구조로, 개화기 조선을 방문한 외국인들의 기록을 보면 목불인견의 원시적인 집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움집 중에 장방형의 대형 건물은 지배자의 거처로 보이는데, 지배자만 단상에 앉아 있고 나머지 사람들은 맨바닥에 앉은 인형을 배치해 놓았다. 금관가야를 세운 김수로왕도 검소한 모범을 보이기 위해 최초의 궁전을 띠집으로 지었다는 기록이 있다(1세기 중엽). 소박해다고 해야 할까, 검소하다고 해야 할까. 지금도 시골지역에 가면 낙후된 집이 굉장히 많은데 대개 내부는 현대적으로 꾸며놓았다. 전통적으로 보면 우리는 주거환경 개선에 큰 관심이 없었던 것 같다. 이는 도로도 마찬가지여서 조선말까지 국가 간선도로도 우마차가 지나갈 정도였고, 198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도로는 대부분 비포장이었다. 안전하고 안락한 거처와 사통발달 교류를 위한 도로가 없으면 문명은 발달하기 어렵다.

현대문명의 원형이 된 로마의 성공은 곧 도로와 건물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급속 근대화를 위해 추진한 새마을운동이 마을길 넓히기와 도로 포장, 초가집 지붕개량으로 시작한 것은 우연이 아니었고 그 목표와 과정이 적확했다.

고인돌 사이로 나 있는 탐방로. 아무런 제약 없이 활짝 개방된 관람방식이 마음에 든다

비교적 작은 덮개돌이 밀집한 구역

고인돌공원은 만지산(275m) 남서쪽 보검재(189m)를 따라 약 5km에 걸쳐 있다. 워낙 방대한 영역이라 공원을 관통하는 도로를 따라 자동차로 이동하면서 관람할 수 있게 해놓았고 입장료도 없다. 내부 산책로까지 자전거 출입금지 같은 규제 없이 완전히 개방된 관람 방식은 정말 칭찬하고 싶다. 큰 바위로 이뤄진 고인돌을 누가 옮겨갈 수도, 훼손할 수도 없을 것이란 믿음도 읽힌다.

골짜기를 따라 야트막한 사면에 분포하는 고인돌은 일단 숫자에서 압도적이다. 경계선은 없지만 진입로부터 차례로 괴바위 고인돌군(47기), 관청바위 고인돌군(190기), 달바위 고인돌군(40기), 핑매바위 고인돌군(133기), 감태바위 고인돌군(140기), 대신리 발굴지(46기) 등으로 지구를 구분하고 있다. 만지산 중턱에는 고인돌 축조를 위해 바위를 절개한 마당바위 채석장과 핑매바위 채석장도 잘 남아 있어 고인돌 축조과정을 짐작할 수 있다.

이렇게나 많은 고인돌이 밀집해 있다는 것은 인근에 대규모 거주지가 있었다는 뜻이다. 고인돌 축조에는 많은 인력과 시간, 노력이 필요한 만큼 일반인은 묘지로 쓰기 어렵고 지배자나 경제적 능력을 갖춘 부유층의 묘로 추정된다. 골짜기 북쪽의 월곡리와 효산리, 남쪽은 대신리와 화림리 일대에 큰 고대마을이 있지 않았을까 생각해 본다. 대부분의 고인돌 밀집지는 수렵과 식용에 필요한 물을 끼고 있어서 지석천이 젖줄이 되었을 것이다.

보검재 아래 잔디밭에 야외 조각품처럼 분포하고 있는 고인돌. 구역이 워낙 방대해 자동차로 이동하며 볼 수 있다 

크고 작은 고인돌 사이를 지나며 왜 고대인들이 이렇게 무겁고 단단한 바위로 무덤을 덮는 용도로 썼는지 상상해 본다. 중요한 단서는, 산 사람과 죽은 사람 사이에 깊은 인간적 정서적 유대를 전제로 한다. 그것은 권력에 의한 강압과 통제가 아니라 사랑과 정(情)이 분명하다. 권세를 과시할 정도로 압도적으로 거대한 고인돌은 극히 드물고 장정 5~6명 정도면 옮길 수 있을 법한 작은 덮개돌이 훨씬 많은 것도 이를 뒷받침한다.

덮개돌이 바닥에 거의 닿아 있는 전형적인 남방식이라 얼핏 널찍한 바위들이 흩어져 있는 것처럼 보인다. 자세히 보면 바닥에는 굄돌이 반드시 있어서 덮개돌은 조금이나마 지상에 떠 있다.

고대인들이 이 무겁고 단단한 바위로 무덤을 덮은 것은 죽은 이에 대한 존경과 애정의 연장선상이다. 고대인들이 생각하기에, 가장 단단하고 변하지 않는 바위를 무덤 위에 덮어 영원한 안식을 기원하고 짐승들이 시신을 훼손하는 것을 막으며, 각양각색의 크기와 형태의 덮개돌은 위치 파악을 위한 지표로도 효과적이었을 것이다. 공역이 들어가는 무덤을 조성했다는 것은 사후(死後) 관념이 있었음을 말해주고, 삶과 죽음의 의미를 설명하고 현실 도덕을 제시하는 종교도 있었다는 뜻이다. 덮개돌의 반듯한 윗면은 종교적 제의의 공간이기도 했을 듯하다.

고인돌은 형태와 크기가 제각각이고, 때로는 줄을 짓기도 하지만 일률적인 분포 패턴은 없어 보인다. 계곡 아래쪽 완경사지에 주로 자리하고 있는 것은 산 위쪽에 있는 채석장에서 떼어낸 돌을 굴리거나 해서 옮기기 쉬웠기 때문일 것이다.

 

핑매바위 뒤 언덕에 있는 채석장. 거대한 암벽에서 바위를 잘라내 고인돌 덮개돌로 사용했음을 알 수 있다. 아래는 경사지여서 굴려서 운반하기도 쉬운 입지다채석장에서 내려다본 핑매바위(가운데 길가)

고인돌공원을 양분하는 보검재를 넘어가면 가장 큰 핑매바위 고인돌이 바로 길가에 있다. 길이 7m, 높이 4m로 무게는 200톤이 넘는 초대형 덮개돌이 압도적이다. 고창에 있는 300톤급 고인돌에 이은 두 번째 크기다. 바로 뒤쪽 산중턱에 채석장이 있어서 잠시 올라가 본다. 바위를 떼다 만 흔적이 곳곳에 남아 있다. 두터운 육면체 형태부터 납작한 형태까지 인간의 손길이 닿은 흔적이 역력하다. 이제 갓 청동기를 쓰게 된 고대인들이 이 거대하고 단단한 바위를 쪼개내기 위해서는 엄청난 노역을 들여야 했을 것이다. 생계와 무관하게 이런 일에 매진할 수 있었다는 것은 농경을 통해 생산력이 크게 확대되었음을 말해준다.

거대한 암벽에서 개별 고인돌로 사용할 덮개돌을 거의 다 떼어낸 상태에서 방치했다는 것은 어느 순간 갑자기 고인돌 조영이 멈췄다는 것을 말해준다. 고인돌을 조영하던 주민들이 다른 곳으로 옮겨갔거나 전쟁으로 몰살당했거나 새로운 지배세력이 들어와 고인돌을 금지시켰거나 셋 중 하나일 것이다.

핑매바위는 채석장에서 떼어낸 후 지렛대를 활용해 언덕 아래로 굴려 내린 것이 틀림없다. 그러고 보면 고인돌의 입지는 먼저 채석장을 확보하는 것이 우선이니 언덕 위에 암벽이 돌출해 있는 이곳이 최적의 장소로 선정된 듯하다. 돌을 떼어내 굴려 내려도 원하는 방향과 위치를 잡고 굄돌 위에 놓으려면 엄청난 노역이 들었을 것이다. 조선시대 사람이 고인돌의 의미를 알았을 리 없으니 핑매바위 전면에는 만지산 정상 아래 여흥민씨 묘지 입구를 표시하기 위해 ‘여흥민씨세장지’라는 글귀가 새겨져 있다.

채석장에서 다소 떨어진 감태바위 고인돌군은 좁은 공간에 작은 고인돌이 빽빽하게 밀집해 있어 평민 계층이나 어린이의 무덤으로 추정된다. 고인돌은 자연바위와 어딘가 다르다. 수천년을 지났으면 그냥 자연바위로 돌아가도 이상하지 않은데 어딘가 ‘인간적’ 향기가 어른거린다. 저 바위 하나에 생명 하나, 온 우주가 스며들어 있는 까닭에 고인돌은 바위로서 ‘늙어가되’ 자연바위처럼 무심히 풍화되지 않는다.

얇은 판석으로 떼어낸 덮개돌. 청동기뿐이던 당시 어떤 기술로 저렇게 바위를 잘라냈을까. 돌연 고인돌 축조가 중단되어 채석장에 방치된 것 같다

지동마을로 내려서면 ‘대신리 발굴지’ 고인돌이 발굴 상태 그대로 보존되어 있지만 관리인이 없고 문이 잠겨 있어 내부를 볼 수는 없었다.

대신리 발굴지에서 북쪽으로 꺾어들면 작은 계곡을 따라 내리의 산간마을 거쳐 능주로 들어서게 된다. 지금은 화순군에 속한 면소재지이지만 조선시대에는 능성현(綾城縣)을 거쳐 능주목(綾州牧)이었고 1914년 화순군에 포함되기까지 능주군이 별도로 있었을 정도로 유서 깊은 고장이다. 인조의 생모인 인헌왕후의 관향(貫鄕)이어서 인조가 즉위한 뒤 목(牧)으로 승격되면서 목사골로 불리기도 했다. 조선시대의 행정단위에서 목은 ‘부(府)-목(牧)-군(郡)-현(縣)’ 체제에서 군이나 현보다 높은 위상으로 지역의 소중심지 역할을 했다.

고개를 넘어 마을로 들어서자 말자 나타나는 대규모의 능주향교가 능주의 옛 영화를 말해준다. 조선시대 공립교육기관인 향교는 지금도 많은 지방에 남아 있는데 능주향교만큼 큰 규모를 본 적이 없다. 목(牧) 단위 향교의 정원은 90명으로, 16세 이상의 양반 자제가 입학할 수 있고 소과에 합격하면 성균관에 진학할 수 있었으니 지역인재의 요람이었다.

향교에서 조금 내려가면 마을 가운데에 ‘정암조광조선생유배지’가 있다. 조선을 안에서 뒤흔든 문제적 인물 중 하나인 조광조(1482~1519)는 이곳 능주로 유배왔다가 한 달만에 사사(賜死)되었다. 조선 초기, 주자성리학 원리주의를 현실정치로 실현하고자 당시로서는 급진개혁을 시도하다 기존 훈구파의 반발로 좌초한 인물이다.

웅장함마저 느껴지는 능주향교

정암 조광조 유배지. 이곳으로 유배 온 지 한 달만에 사사되었다

 

유배지에 모셔진 조광조 초상화. 그림은 다소 나이가 들어보이지만 조광조는 겨우 37세에 죽었다  

유배지에는 조광조 사후 149년 뒤인 1667년 능주목사 민여로가 세운 ‘정암조광조선생적려유허추모비’가 남아있고 유배 생활을 한 초가집이 복원되어 있다.

조광조가 시도한 도학정치 정치 개혁은 무엇일까. 조광조는 성균관 시절부터 학문과 언행에서 탁월함을 인정받아 일찍부터 성균관 유생들을 중심으로 한 사림파(士林派)의 거두로 떠올랐다. 중종의 신임을 바탕으로 도학정치를 실현하기 위해 앞장 선 그는 주자성리학을 바탕으로 한 왕도정치를 구현하기 위해 왕과 백성의 교화, 신진 사림파의 등용, 기존 훈구파의 척결을 급진적으로 추진했다. 여기서 도학(道學)은 주자성리학을 말한다.

성리학을 체계화한 주자에 따르면, 공자와 맹자가 주창한 유학은 불교의 심오한 심법(心法)와 도교의 자연주의 확산으로 사실상 도통이 끊어졌다가 11세기 송나라 정호·정이 형제에 와서 부흥했다. 주자는 정호·정이 형제가 실천윤리 위주의 유학을 형이상학적으로 재해석한 내용을 토대로 백성들의 일상생활 지첨부터 사대부의 학문 자세, 왕의 치세 방법까지 체계화해 성리학적 체계를 집대성했다. 이렇게 다시 공맹의 도통(道統)이 이어졌다고 해서 성리학을 도학(道學)이라고도 하며, 정치적으로는 공자가 최고의 치세로 꼽은, 까마득한 고대의 요·순·우·탕·문·무·주공 치세를 모범으로 삼아 현실에 재현하는 것이다. 구체적으로는 학문과 수행을 통해 인격을 완성시킨 ‘군자’들에 의해 정치가 수행되어야 사심 없는 정치를 펼칠 수 있고 그 결과 백성들도 평안해질 수 있다는 것이다. 일종의 ‘학자정치’, ‘철인정치’인 셈이다. 지금은 고리타분하게 느껴질 수 있으나 당시에는 이 외에 기댈만한 정치이념이 없었다는 점을 인정할 필요가 있다.

조선은 건국 후 성리학을 국시로 삼았지만 100년이 지나도록 완전히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있어 권력을 잡은 ‘성리학 근본주의자’ 조광조가 급진적이고 강압적인 방식으로 성리학적 개혁을 추진한 것이다. 그는 37세에 죽었으니 당시 기준으로도 너무 젊었다. 후에 이이(李珥)는 학문을 완성하기 전에 너무 일찍 세상에 나와 경륜을 펼친 것이 문제였다고 조광조의 실패를 평했다.

능주 동헌터에는 한옥 행정복지센터와 능주면역사관이 옛 영화를 말해준다  

능주 마을 뒷골목은 좁지만 한옥과 돌담이 더러 남아 유서 깊은 품격을 자아낸다. 조선시대 지방관의 집무처였던 동헌(東軒) 터에 자리 잡은 한옥 행정복지센터와 능주면역사관, 2층 누각인 봉서루(鳳棲樓)는 능주의 위상을 잘 말해준다. 지금도 면소재지 치고는 상당히 큰 마을이고 초중고교가 다 건재하다.

경전선 재래철도가 지나는 능주역은 작은 간이역 수준으로 속절없이 퇴락하고 있다. 역무원도 보이지 않는 역사에는 평일 하루 5번 정차하는 열차시간표만 덩그러니 걸려 있다.

능주마을 앞으로는 경전선 철도와 더불어 고속화된 29번 국도가 지난다. 국도와 철길을 통과해 동쪽으로 가면 연주산(269m) 아래 절벽지대를 깊푸르게 흐르는 지석천 변으로 나선다. 강변에 우뚝한 영벽정(映碧亭)은 이름 그대로 푸른 산이 물에 비치는 절경을 마주본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에 정자로는 드물게 2층 20평의 큰 규모다. 1500년 경 창건되었으나 1871년 중건했고 1층 기둥을 현대적으로 가공한 화강암으로 대체해 고졸한 맛은 떨어진다. 영벽정 진입로는 고목이 우거져 그늘에서 여유를 즐기는 사람들이 많다.

능주를 벗어나 822번 지방도를 타고 동쪽 한천면으로 향한다. 도중에 금전저수지 남안을 돌아가는데 호반길이 고즈넉하고 뒤쪽으로 우뚝한 용암산(544m) 암릉의 기세가 좋다.

고풍이 감도는 능주 뒷골목

한때는 붐볐을 능주역은 평일 하루 4번 열차가 정차하는 간이역의 서정이 물씬하다

지석천 변에 우뚝한 영벽정(映碧亭)은 이름 그대로 푸른 산이 물에 비치는 절경을 마주본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에 정자로는 드물게 2층 20평의 큰 규모다  

고즈넉한 금전저수지

한천면소재지에서 북쪽으로 가다 응봉터널을 지나 옥호리로 내려가면 화순천을 다시 만난다. 화순천을 따라 화순읍내로 가는 도중에 임진왜란 때의 의병장 최경회(1532~1593) 장군을 기리는 충의사(忠毅祀)가 있다. 화순 출신인 최경회(崔慶會) 장군은 영해군수를 지내다 상을 당해 화순 본가에 있던 중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형 경운(慶雲)·경장(慶長)과 함께 의병을 일으켰다. 금산, 무주 방면에서 큰 공을 세워 경상우병사에 임명되었다.

1593년 6월, 왜군 대군이 1년 전 진주대첩의 패배를 설욕하기 위해 다시 진주성을 공격해오자 김천일(金千鎰), 황진(黃進), 고종후(高從厚) 등과 함께 방어에 나섰다. 하지만 중과부적으로 9일만에 성이 함락되자 김천일, 고종후와 함께 남강에 투신, 자결한다. 촉석루에서 투신 직전 읊었다는 그의 투강시(投江詩)는 죽음을 앞둔 비분강개와 용맹이 잘 드러난다.

 

矗石樓中三壯士(촉석루중삼장사) 촉석루의 3장사는

一杯笑指長江水(일배소지장강수) 한 잔 술에 웃으며 장강을 가리키네

長江之水流滔滔(장강지수류도도) 장강물 도도히 흐르니

波不渴兮魂不死(파불갈혜혼불사) 강물이 마르지 않는 한 혼은 죽지 않으리

 

최경회 장군을 기리는 충의사. 오른쪽 비는 진주성전투 후 최경회 장군을 비롯한 세 장수가 순절한 후 7주갑(7×60=420년)에 맞춰 2013년에 세운 ‘촉석루삼장사순절칠주갑기념비’

화순천 둔치 자전거길을 타고 읍내로 돌아가는 길 

사당 입구에는 세 장수가 순절한 후 7주갑(7×60=420년)에 맞춰 2013년에 세운 ‘촉석루삼장사순절칠주갑기념비’가 서 있다.

또 충의사 본당 아래에는 진주성 전투 후 왜장을 끌어안고 남강에 투신한 논개(朱論介, 1574~1593)의 영정을 모신 의암영각(義庵影閣)이 있다. 의암은 논개의 호이기도 한데, 최경회 장군의 후실이었던 그는 전투 후 촉석루에서 열린 왜장의 연회에 기생 차림으로 참석해 왜장 하나를 껴안고 남강에 투신했다. 이후 의병이 남강 변에서 두 사람의 시신을 수습해 고향으로 운구 중 육십령을 넘지 못하고 함양 금당리에 안장했다.

화순천을 따라 읍내로 들어가면서 절개와 충의를 위한 자발적 죽음에 경의를 품는다.

글/사진 김병훈 발행인  

 

tip

화순읍내와 능주면소재지에 식당과 편의점이 다수 있다. 고인돌선사체험장과 거석테마파크, 고인돌공원을 차분히 돌아보려면 충분한 시간 여유를 갖는 것이 좋다.

 

화순 고인돌공원 41k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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