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산군 유배지의 상전벽해

화개정원 정상 스카이워크 전망대. 아래로 고구저수지와 바다 건너 북녘 땅이 희미하다
화개정원 정상 스카이워크 전망대. 아래로 고구저수지와 바다 건너 북녘 땅이 희미하다

10년 전만 해도 엄중한 민통선 이북이어서 출입조차 쉽지 않던 교동도가 특별한 관광지로 면모를 일신하고 있다. 2014년 교동대교 개통으로 사실상 육지가 되면서 교동도의 변신과 발전 속도는 급가속을 타고 있다.

다리가 놓이면서 도로가 확장, 포장되었고 사실상 방치되었던 유적이 재단장되었으며, 일주 자전거길과 트레킹 코스도 조성되었다. 섬 최고봉인 화개산(259m)은 한강 하구와 북녘 땅이 바라보이는 입지 때문에 산행지로도 각광받고 있다.

이 화개산 중턱에 수목원 형태의 대규모 ‘화개정원’이 조성되어 올해 5월 문을 열었다. 14만6천913㎡(약 4만4500평) 규모로 5색 테마정원과 스카이워크 전망대, 모노레일(민자) 등을 갖추었다. 약 18만 본의 다양한 수목과 관목류, 초화류가 식재되어 사실상 수목원 모습이다.

필자가 주목한 것은 정상 바로 옆에 세워진 스카이워크 전망대와 이곳까지 올라가는 모노레일이다. 케이블카 정도는 아니지만 모노레일은 느린 속도로 지면에 붙어 움직여 근경과 원경을 함께 즐기기 좋고 산정까지 힘들이지 않고 오를 수 있다.

원래 산 중턱에 있던 연산군 유배지는 어느덧 화개정원 한 가운데 자리하게 됐다. ‘폭군’의 유배지가 화사한 수목원 겸 최신식 관광지로 급변한 것이다.

화개산 북쪽 기슭에 조성된 화개정원. 가운데 초가집이 연산군 유배지의 교동도유배문화관이고 오른쪽 위는 스카이워크 전망대. 개장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수목이 울창하지는 않다   

교동도는 역사적으로도 특별한 섬이다. 한강 하구를 막고 있어 천혜의 해상 교통 요지이자 전략적 거점이다. 한강하구라고 했지만 정확히는 황해도의 젓줄인 예성강과 한강, 임진강 세 강이 모여든다. 북측 강원도를 거쳐 남류하는 임진강은 환경부 고시에 따르면 한강의 제1지류이지만, 합수점에서는 두 강이 비슷한 규모로 만나 김포반도 북단을 거쳐 강화도 북쪽에서 바다와 접한다. 이 구간을 두 강의 할아버지라는 뜻에서 조강(祖江)이라고 한다.

강화도와 교동도는 고려시대부터 중시되었는데 해상에서 개성으로 접근하는 길목이었기 때문이다. 고려 때의 유명한 무역항인 벽란도는 교동도에서 마주보이는 예성강 하구에 있었다. 한양도 한강 하구를 통해 진입해야 해서 조선시대에도 특별히 관리되었다.

개성과 서울을 방어하는 거점은 염하(강화해협)까지 통제할 수 있는 강화도에 자리 잡았지만 교동도에도 봉수대와 수군기지를 두었다. 임진왜란 후에는 이순신이 역임한 삼도수군통제사(충청, 전라, 경상도 수군 관할)와 마찬가지로 경기, 황해, 충청도 수군을 관할하는 삼수군통어사(三道水軍統禦使)를 교동도에 둘 정도로 군사적으로 중요시되었다.

화개정원을 관통해 정상까지 올라가는 모노레일. 길이 1.1km를 20분 간 느리게 운행한다  

모노레일에서 내려다본 화개정원. 저 아래로 교동평야가 질펀하다 

화개정원을 통과해 숲속을 지나는 모노레일

수도와 가까운 교동도는 군사요지인 동시에 고려와 조선에 걸쳐 왕족의 유배지였다. 중신이나 관리는 개성과 서울에서 멀리 떨어진 북쪽 국변경지대나 남해안의 섬으로 유배를 보냈지만 왕족만은 수도에서 가까워 감시 감독이 쉽고, 접근과 탈출은 어려운 교동도가 고려~조선 천년 간 전용 유배지였다. 고려에는 희종, 강종, 고종, 충정왕, 우왕, 창왕 등 주로 폐위된 왕들이 유배 왔고, 조선시대에는 폐위된 연산대군과 광해군을 비롯해 안평대군, 능창대군, 영창대군 등 주로 왕자들이 유배되었다.

유배형이 사형보다 낫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원칙적으로는 죽을 때까지 고향으로 가지 못하고 유배지에 머물러야 하며, 엄중한 감시를 받아 활동이 자유롭지 못한데다 숙식 사정도 나빠 심신의 고초가 극심했다. 대부분의 왕족은 왕위 계승을 둘러싼 갈등 끝에 쫓겨난 경우여서 일단 유배를 오면 다시 살아나가기는 난망했다. 왕족은 바로 죽이기가 정치적으로 정서적으로 부담스러워 일단 유배를 보낸 다음 사약을 내리거나 암살하는 경우가 많았다.

교동도에 유배 온 수많은 왕과 왕족 중에 특히 눈에 띄는 이는 우리 역사상 최악의 폭군으로 꼽히는 연산군이다. 하필이면 연산군의 유배지가 화개동산에 ‘교동도유배문화관’과 함께 복원되어 있다.

화개정원에 복원되어 있는 연산군 유배지

수레를 타고 가는 연산군 유배행렬  

연산군(재위 1494~1506)은 즉위 초에는 선정을 베풀었으나 이듬해부터 마음 속 깊은 상처였던, 부왕에게 버림받고 사사당한 생모 폐비 윤씨의 왕후(王后) 복권을 추진한다. 비통하게 죽은 어머니에게 자식으로서의 도리를 다하고 싶었을 것이다. 하지만 부왕이었던 성종은 “앞으로 100년 간 폐비 윤씨 문제는 거론하지 말라”는 유언을 남겼고, 이를 근거로 중신들이 복권을 반대하자 연산군은 이성을 잃기 시작했다. 무오사화(1498), 갑자사화(1504)를 일으켜 수많은 사림파를 숙청하고 죽였으며, 폐비 윤씨의 사사(賜死)를 유도한 할머니 인수대비는 병으로 누워있다가 손자(연산군)에게 머리로 들이받혀 그 후유증으로 사망했다. 충효가 근간이던 당시 아무리 왕이라고 해도 용서할 수 없는 만행이었고, 이후 연산군은 더욱 난폭해졌다. 결국 박원종과 성희안 등이 연산군의 이복동생인 전성대군을 옹립하고 반정을 일으켰다(중종반정).

반정 당일, 술에 취해 잠든 연산군은 바깥의 소란에 일어났으나 측근 중 아무도 반란군에 맞서지 않아 순식간에 포박당하면서 반정은 성공했다. 연산군에 이어 즉위한 진성대군(중종)은 거사 때부터 연산군을 죽이지 말 것을 당부했고, 결국 교동도로 위리안치(圍籬安置) 유배를 보냈다. 위리안치는 거처 주위에 가시나무를 심어 집 출입마저 막는, 가장 가혹한 유배형이다.

기록에는 울타리가 높아 해가 들지 않았고 음식을 간신히 넣을 수 있는 작은 문뿐이었다고 한다. 복원된 울타리는 사람 키보다 낮지만 원래는 훨씬 더 높았고 마당도 없었던 모양이다. 호화롭게 지내던 연산군이 이런 열악한 환경을 견디는 것은 불가능했을 터. 결국 유배 2달만에 역질에 걸려 죽고 만다. 사후 교동도에 분묘와 사당을 두었으나 연산군의 왕비인 폐비 신씨의 간청으로 지금의 서울 방학동으로 이장했다.

가시나무 울타리에 둘러싸여 꼼짝도 못하는 '위리안치'를 재현한 연산군 유배지. 혹독한 환경을 이기지 못하고 연산군은 유배 2달만에 역질에 걸려 죽었다  

평일인데도 방문객이 상당히 많아 주차장이 거의 만원이다. 화개정원만으로는 이처럼 많은 사람들을 불러들이기는 어렵고, 관광 포인트는 역시 모노레일이다. 이는 방문객 중에 노년층이 많은 데서도 알 수 있다. 자제가 노부모를 모시고 온 경우가 많은데 모노레일이 없다면 이렇게 올 수 없는 곳이다. 내가 케이블카와 모노레일을 찬양하는 이유 중 하나다.

모노레일은 길이 1.1km이며, 9인승 캐빈이 5분마다 운행하고 정상까지 20분 걸린다. 평균속도가 시속 3.5km도 안되어 거의 걷는 것과 비슷하다. 고도차는 150m 정도. 화개정원을 거쳐 지대가 높아지면 면적 47㎢의 작은 섬이라고 믿기지 않을 정도로 넓은 교동평야와 고구저수지가 훤하고 북쪽으로 좁은 바다 건너서는 북녘의 산야가 흐릿하다.

모노레일은 전망대를 겸한 스카이워크 바로 옆 해발 230m까지 올라간다. 스카이워크는 화개산 정상 서쪽 300m에 있으며 전망대는 지면에서 최고 40m 떠 있다. 바닥이 투명 유리로 된 원형 스카이워크는 절벽 위로 돌출해 있어 고도감이 아찔하고 조망이 탁 트인다. 바로 옆 능선에는 교동봉수대 기단이 복원되어 있다. 대기가 흐려 북녘 산야는 흐릿하고 강화도 산들도 분명하지 않다.

화개산 정상이 지척이고 봉수도대 옆에 있는데 출입 금지다. 화개동산 밖이라 울타리를 넘어갈 수 없기 때문이다. 관리인에게 물어보니 화개동산이 유료 입장이라 울타리를 개방할 수 없다고 했다. 하기야 문이 열려 있다면 등산으로 화개산을 올랐다가 화개동산으로 진입할 수 있어 문제가 되겠지만 입장객에 한해 정상과 봉수대를 다녀올 수 있는 시스템을 갖춰야 하지 않을까.

모노레일 상부정거장. 왼쪽 뒤 산불감시초소가 서 있는 곳이 화개산 정상이지만 울타리에 막혀 갈 수가 없다 

스카이워크 전망대에서 내려다본 화개정원. 정원 내부에는 지그재그 산책로가 나 있다

복원된 화개산 봉수대 기단 역시 화개정원 울타리 밖이라 출입이 불가능하다. 바다 건너 석모도와 강화도가 중첩된다

 투명 유리 바닥의 스카이워크는 지상 40m 높이로 고도감이 아찔하다. 아래는 고구저수지스카이워크에서 바라본 북녘. 예성강하구와 고려시대의 국제항 벽란도, 송악산이 보인다  

지상 40m 높이의 스카이워크

스카이워크 한 켠에 앉아 북녘을 가만히 바라본다. 지척에 두고도 갈 수 없는 저 땅을 볼 때마다 울적해진다. 아주 어렸을 때는 “곧 통일이 되어 군대에 가지 않아도 될 거다”는 말을 어른들이 곧잘 했고, 나는 이 말을 아들에게 똑 같이 해주었지만 아들이 전역한 지도 한참을 지났다. 이제는 손자에게도 이 말을 섣불리 할 수 없을 것 같다.

옛날에도 10년이면 강산이 변한다고 했는데 지금이야 몇 년이면 바뀌는 세상. 해협 저편으로 아득한 북녘 땅은 가만히 보면 너무나 다르다. 일단 산에는 숲이 없고 들에는 도로가 없으며, 선전용으로 만든 집도 이제는 퇴락해서 흉가꼴인데다 무채색에 무표정의 사람들은 걸어서만 다닌다. ‘이렇게 달라졌는데 굳이 하나가 되어야 하나’ 하는 근원적 회의감마저 든다. 언제부턴가 제1의 당위이자 소원이라고 노래까지 불렀던 통일의 근거와 목적에 회의론이 고개를 들고 있다. 회의론의 정체가 정치, 경제, 도덕 어떤 것이든 지금 망원경으로만 볼 수 있다는 그 자체가 통일의 이유와 목적을 단적으로 말해준다.

한 마디로 더 이상 갈 수가 없다. 길이 막히고 시야마저 끊어져 저 해협과 강물은 강고한 국경선이 되어 이 절반의 땅을 기어이 섬으로 가두었다. 대륙의 끝자락에서 섬으로 전락한 이 땅의 운명을 복원하고, 대륙과 접해있으면서도 더욱 처절하게 단절되어 사람과 산야가 동시에 신음하는 북녘을 언제까지 두고만 볼 것인가.

조만간 저 좁은 바다와 강을 건너 나는 두 바퀴로 개성으로 치달을 것이다. 그 다음 평양으로 갈지 원산으로 갈지 고민해볼 것이다.

복선에 5분 간격으로 운행되는 모노레일. 레일 하부에 기어가 있어 급경사도 올라간다    

화개정원에서 올려다본 스카이워크와 모노레일  

 

tip

* 화개정원 운영시간(연중무휴) 0900~18:00(1시간 전 입장 마감)

* 화개정원 입장료 5,000원(전망대 포함)

* 모노레일 1만2,000원(왕복, 편도권 없음)

글/사진 김병훈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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