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산 허리춤에 걸린 고지평야

남쪽 공안저수지 둑에서 바라본 운봉고원. 해발 450~550m 고지에 펼쳐진 길이 10km, 폭 5km의 평야지대다. 오른쪽 정면으로 고남산(847m)이 우뚝하고 그 왼쪽으로 만행산(909m) 첨봉이 보인다  
남쪽 공안저수지 둑에서 바라본 운봉고원. 해발 450~550m 고지에 펼쳐진 길이 10km, 폭 5km의 평야지대다. 오른쪽 정면으로 고남산(847m)이 우뚝하고 그 왼쪽으로 만행산(909m) 첨봉이 보인다  

고원(高原)은 고지대에 펼쳐진 평탄지대를 말한다. 대개는 해발 300m 이상을 기준으로 삼지만 국내는 산악지대가 많음에도 고도가 낮아 고원이 드문 편이다. 대표적인 고원이라면 대관령 서쪽의 횡계고원, 무진장(무주 진안 장수)에 걸친 진안고원 그리고 남원 운봉고원을 들 수 있다. 이중 진안고원은 산간내륙에 있고 완만히 상승하는 과정 끝에 만나는 지형인데다 높이도 300~400m로 낮아 극적인 느낌이 덜하다.

반면 육안으로 가장 인상적인 곳은 횡계고원과 운봉고원이다. 횡계고원은 해안에서 가까워 대단히 높게 느껴지는 대관령(832m)을 넘자 말자 펼쳐지는 해발 750m의 평야지대여서 신기한 느낌마저 준다. 다만 평창 방면 내륙에서 접근하면 고도차가 크지 않아 고원 분위기가 덜하다.

운봉고원은 지리산 서북능선에 접하고 있으면서 완벽한 분지를 이룬데다 섬진강 유역인 남원방면에서 접근하면 고도차가 400m나 되어 산중 별천지로 느껴진다. 특히 남원 외곽의 육모정에서 구룡계곡을 거쳐 고원으로 진입하면, 험한 고갯길 너머에 펼쳐지는 평야가 참으로 신통스럽다.

낙동강 유역인 함양읍내 방면에서 진입해도 남원보다는 완만하나 고도차가 300m나 되어 고원의 격리감이 각별하다. 서북능선의 주봉인 만복대(1433m)에서 고리봉(1305m)~세걸산(1220m)~바래봉(1165m)~덕두산(1152m)에 이르는 산줄기가 고원의 한쪽을 막고 있어 주변 산세도 웅장하다.

옛사람들도 이곳을 특별하게 여겨 조선중기의 비결서인 <정감록>에서 꼽은 10승지에도 4번째로 포함되었다. 10승지는 경치보다는 난을 피하기 좋은 곳이라는 의미가 더 크다. 하지만 고려말인 1380년 왜구가 이곳까지 들어와 이성계가 물리친 황산대첩의 현장이기도 하니 역설적이다.

운봉고원 동쪽에 인접한 인월과 아영면 일대도 해발 400~450m의 고원지대다 

운봉고원 동쪽에 인접한 인월을 운봉고원 일주 코스의 출발지로 잡는다. 인월과 아영면 일대도 400~450m의 고원지대이면서 교통이 좋고 마을이 번화한데다 ‘달을 끌어당긴다(引月)’는 운치 있는 이름도 매혹적이다. 1380년(우왕 6) 왜구가 이곳까지 쳐들어와 이성계 장군이 토벌하던 중 날이 어두워졌다. 이성계 장군이 달이 뜨기를 기원하자 때마침 밝은 달이 비춰 승리를 거둔 데서 유래한 이름이라고 한다. 살벌한 전투에서 기원했지만 지명 자체는 참으로 서정적이다.

달을 끌어들인다는 인월은 이백의 시 중에서 음주 시의 걸작인 ‘월하독작(月下獨酌)’이 생각나게 한다. 이 시에서 이백은 혼자이되 달이 있어 혼자가 아닌, ‘주취 신선경’의 극치를 보여준다.

 

花間一壺酒(화간일호주) 꽃밭에 술 한 병 들고

獨酌無相親(독작무상친) 친구 없이 혼자 마시는 술

舉杯邀明月(거배요명월) 잔 들어 밝은 달 부르니

對影成三人(대영성삼인) 그림자까지 셋이 되었네

月既不解飮(월기불해음) 달은 원래 술 마실 줄 모르고

影徒隨我身(영도수아신) 그림자는 내 몸만 따라하니

暫伴月將影(잠반월장영) 잠시 달과 그림자 벗 삼아

行樂須及春(행락수급춘) 이 봄을 즐겨야지

我歌月徘徊(아가월배회) 내가 노래 부르니 달은 오락가락

我舞影零亂(아무영영란) 내가 춤을 추니 그림자는 어지러이

(중략, 필자 역)

 

여기서 ‘我歌月徘徊(아가월배회) 我舞影零亂(아무영영란)’은 실로 주선(酒仙)의 경지다. 이 구절 하나만으로도 세상의 애주가와 시인은 이백을 숭배하지 않을 수 없다.

운봉고원과 아영고원 사이의 방현고개(505m). 고원과 고도차가 크지 않아 야트막한 언덕 정도다. 500살 소나무 고목과 방현정이 그윽한 운치를 자아낸다     

인월은 지리산의 북쪽 관문이라고 할 수도 있는데 광주대구고속도로 지리산IC가 바로 곁에 있고 반야봉~노고단 방면의 달궁계곡, 천왕봉 방면 백무동과 칠선계곡도 인월을 거치는 것이 최근거리다. 등산객 외에 요즘은 지리산 둘레길을 걷는 트래커들도 인월을 거점으로 많이 찾는다. 운봉은 읍이고 인월은 면이지만, 인월이 더 번화하고 편의시설이 많다. 운봉에는 없는 고등학교까지 있는 것만 봐도 인월의 위상을 알만하다. 인구는 운봉이 3,700명 인월이 2,700명으로 운봉이 더 많기는 한데 이는 평야지대에다 영역이 더 넓기 때문이다.

출발지는 운봉고원에서 흘러오는 임천 변에 자리한 지리산 둘레길 안내소 앞. 작은 주차장이 있고 마을 외곽이라 주변이 한산하며 찾기도 쉽다.

출발지 고도는 420m. 인월면소재지를 벗어나 지리산IC 방면으로 가다가 외인마을 쪽으로 좌회전한다. 지리산휴게소 아래 아곡리를 거쳐 방현고개(505m)를 넘으면 이제부터 본격적인 운봉고원이다. 운봉고원 중심부는 구릉지가 아니라 그냥 질펀한 평야다. 길이 10km, 최대폭 5km이니 상당히 넓게 느껴진다.

방현고개 버스정류장 디자인이 세련됐다. 고개를 내려가면 바로 운봉고원이다  

방현고개 아래에서 바라본 운봉고원. 고지대 산간에 펼쳐진 평야여서 한층 넓어 보인다. 왼쪽 높은 산줄기가 지리산 서북능선이다  

이제 평야 외곽을 따라 반시계 방향으로 고원 일주를 시작한다. 스쳐간 적은 많지만 자세히 본 적은 없는 운봉고원은 어떤 모습이고, 지리산은 또 어떻게 보일까.

방현고개를 내려와 먼저 가산마을을 지난다. 고원 외곽의 산자락에는 주로 마을이 분포하고 평야 중심부에 운봉읍내가 있다. 따라서 외곽 일주는 마을과 마을을 잇는 연결로가 된다.

가산 다음은 매요, 그 다음은 임리 마을이다. 매요마을에서는 운봉고원 외륜산 중에 지리산 서북능선을 제외하고 가장 높은 고남산(847m)이 지척이다. 운봉고원은 상류인 서단이 해발 530m, 동단이 440m로 인월보다 조금 더 높다. 따라서 847m의 고남산은 고원에서는 400m급 낮은 산으로 보인다. 하지만 북쪽 섬진강 쪽에서는 아주 높고 웅장한 산체를 자랑한다.

주민들은 다랑이논과 밭을 경작하는데 비닐하우스도 적지 않다. 청정한 기온을 이용한 고랭지 화훼(안개꽃, 백합, 카네이션, 미스티블루)와 고랭지 작물(파프리카, 오미자, 사과, 상추, 포도)을 재배한다. 들은 넓고 토지는 비옥하며 기후도 적당하니 마을에는 고급차가 많이 보일 정도로 풍요가 느껴진다.

장수군으로 넘어가는 유치 고개. 퇴색한 길과 표지판에서 통행량이 별로 없음을 알 수 있다

 

수초가 드문드문 한 매요저수지. 낚시대는 부채살처럼 퍼졌거만 강태공은 어디 갔을까. 맞은편 산은 지리산 서북능선 최북단의 덕두산(1152m)

매요마을을 지나면 고원 북서쪽 외륜산 중 가장 높은 고남산(847m)이 가깝다. 고원지대라 400m급 낮은 산으로 보인다  

권포와 장교 마을을 지나면 24번 국도가 지나는 여원치(480m)다. 남원에서 함양으로 이어지는 간선국도여서 운봉고원 내에서 차량통행이 가장 빈번한 도로다. 고개 서편 도로 아래에는 마애불상이 숨듯이 있는데 원래 고갯길은 마애불상 앞을 지나간 것으로 보인다. 전설에는 이성계의 꿈에 한 노파가 나타나 황산전투에서 승리할 것이라고 예언하자 이성계가 노파에게 감사하는 마음으로 조성했다고 한다. 황산대첩 현장과 인접해서 생겨난 얘기일 것이다. 여원치는 예로부터 중요한 교통로여서 이순신 장군이 서울에서 합천의 권율 장군을 찾아간 백의종군로이기도 하다.

여원치 남북으로 이어지는 가느다란 산줄기는 백두대간이다. 고원에서 봐서 낮고 가는 능선이지만 남원쪽 산 아래에서 볼 때는 500~600m급 산줄기다. 백두대간은 바래봉 방면 서북능선이 아니라, 만복대에서 구룡계곡쪽으로 뚝 덜어져 운봉고원 서쪽 외륜산을 거쳐 함양 백운산을 경유, 덕유산으로 이어진다.

운봉고원 북부에서 바라본 인월 방면. 다랑이논이 아래로 흘러내리고 왼쪽 중간에는 황산대첩의 현장인 황산(699m)이 오똑하다. 그 뒤는 함양 삼봉산(1187m)  

24번 국도가 지나는 여원치(480m). 남원~함양 간 간선국도여서 운봉고원 내에서 차량통행이 가장 많다. 이순신장군 백의종군로이기도 하다

여원치 아래에 있는 마애불상은 이성계의 전설이 어려 있다 

여원치에서 준향리 일대 구릉지 들판을 지나면 운봉고원의 젖줄인 람천을 만난다. 만복대 북안에서 발원한 람천은 함양 마천에서 임천에 합류하고 이후 경호강, 남강을 거쳐 낙동강으로 흘러드니 운봉고원은 낙동강 유역에 든다. 운봉고원 동쪽 아영고원에서 가야 계통 고분이 발견된 것도 낙동강 줄기를 따라 가야세력이 진출해 왔기 때문일 것이다.

준향리 구릉지 들판을 지나다 길가에 작은 원두막이 눈길을 끈다. 바로 옆에 나무가 있어 그늘이 짙고 바닥을 대나무로 깔아 시원해 보여 잠시 여장을 풀었다. 난생 처음 보는 풍경과 길, 장소… 그 앞에 털썩 주저앉아 땀을 닦고 한숨을 돌리면 이내 ‘나그네 설움’이 엄습한다. 이건 아주 특이한 감정이다. ‘설움’이라고 했지만 부정적인 의미가 아니다. 시원하고 안락한 방과 음식, 내가 좋아하고 나를 좋아하는 사람들과 오순도순 보내는 시간이 부러운 것도 아니다. 당장의 불편과 고독을 한편으로는 수긍하고 심지어는 즐기면서도 사선으로 서러운 감정이 복받치고 막연한 그리움에도 젖어든다.

나는 낯선 길가에서 불편하고 초라하게 쉬는 이 순간의 복잡한 감정이 느껍다. 퍼질러 앉은 자세도 낮지만 마음도 낮아져 세상이 더 많이 보이고 ‘바닥’이 실감난다. 진정한 결핍이 아니면서 자발적으로 수긍하는 이런 누추, 비루, 초라는 어쩌면 여행의 진면목이다. 이 순간 작은 것에도 감사하는 마음이 저절로 체화된다.

하얗게 흘러가는 무인지경의 시골길, 그늘진 대나무 평상... 어찌 쉬어가지 않으리모내기를 끝내 초원처럼 느껴지는 구릉지 들판

구릉지 들판 저편으로 보이는 지리산 서북능선. 맨 오른쪽이 주봉인 만복대(1433m), 그 왼쪽이 고리봉(1305m)이고 그 사이 안부에 정령치(1172m)가 지난다

세걸산(1220m) 아래 공안저수지와 다랑이논이 궁금해 주촌천 둑길을 따라 가다 덕산리에서 다랑이논 사잇길을 오른다. 생각보다 경사가 완만하고 비닐하우스가 많아 다랑이논의 입체감이 두드러지지는 않는다. 정면으로 세걸산이 뾰족하고 오른쪽으로는 고리봉(1305m)과 정령치 일부가 보인다.

산자락에 바싹 올라붙은 공안저수지는 해발 570m로 읍내보다 100m 이상 높지만 산자락에 가려 고원의 전모는 볼 수 없다. 운봉고원 외곽에는 이처럼 저수지를 많이 축조해 수원으로 삼고 있다. 정령치 아래 고기저수지가 가장 크고 매요저수지, 행정저수지, 용산저수지 등이 고원을 둘러싸고 있다.

이제 읍내를 통과해 인월 방면에 우뚝한 황산(699m)으로 향한다. 황산 주변은 1380년 이성계가 왜구를 크게 무찌른 황산대첩의 현장이다.

고려말은 왜구가 엄청나게 들끓어 해안지방뿐 아니라 내륙까지 피해가 막심했다. 왜구는 단순한 해적집단이 아니라 정규군 수준이었는데 이는 당시 일본의 정치상황과도 관련이 있다. 당시는 교토를 중심으로 실권을 장악한 무로마치 막부(北朝)와 요시노를 중심으로 한 남조(南朝)로 양분되어 천황이 두 명 존재하는 남북조의 대혼란기였다(1336~1392). 극심한 내전으로 민생이 도탄에 빠지고 지방 통제가 느슨해지자 규슈지역을 중심으로 고려와 중국을 상대로 한 노략질을 시작하게 된다. 대병력에 편제까지 갖춘 왜구집단은 도적이 아니라 군량미와 전비 마련을 위해 침입한 정규군도 있었다.

공안저수지 가는 다랑이논 사잇길. 길 정면의 첨봉이 세걸산(1220m)이다  

해발 570m에 있는 공안저수지. 운봉고원 외곽 산기슭에는 이런 저수지가 여럿 있어서 고원의 수원이 되고 있다

읍내 외곽의 운봉향교는 운봉지역의 오랜 전통과 위상을 말해준다

아파트까지 있는 운봉읍이지만 규모는 조금 큰 면소재지 정도다. 뒤쪽 산은 수정봉(805m)

1380년 들어 왜구 침범은 절정에 이르는데 무려 500척의 선단을 이끌고 금강 하구로 침입해 온 것이다. 이에 맞선 고려군은 100여척에 불과했지만 최무선이 발명한 화포를 활용해 왜군을 대파, 500척 모두를 불살랐다. 하지만 살아남은 왜군은 내륙으로 도피해 온갖 피해를 입히며 휘젓고 다니다가 운봉고원 일대에 집결해 바다로 나갈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이때 이성계가 군사를 이끌고 내려와 토벌작전을 벌여 대승을 거둔다. 왜군은 70여명만 살아남아 지리산 방면으로 도피했고 노획한 말이 1600필이나 되었다. 양쪽의 병력에 대해서는 자세한 기록이 없으나 적군이 10배나 많았다고 한다. 이는 전공을 과장하려는 측면이 있을 수 있으므로 이성계군 2천 내외, 왜군 5천 정도가 아닐까 추정해 본다.

여기서 주목되는 것은 지리산으로 들어갔다는 70여명의 잔당이다. 지금도 넓은 지리산인데 당시에 지리산 깊이 숨어들었다면 수색이 불가능했을 것이다. 산속의 야생인간으로 생을 마쳤거나 은밀히 현해탄을 건너갔는지는 모를 일이다.

황산대첩으로 지리산에 온 이성계의 흔적은 자신의 뜻과 달리 했다는 지리산(智異山) 이름에서부터 곳곳에 남아 있다.

원래의 대첩비는 1577년(선조 10년) 세워졌으나 일제 때 파괴되어 1957년 다시 세웠다. 비신을 받친 거북 모양 귀부(龜趺)와 머릿돌인 이수(螭首)는 원래 것을 활용했고 총높이가 4.25m에 달해 매우 웅장하다. 비문이 훼손되고 파괴된 원래의 대첩비는 몇 조각으로 쪼개진 채 별도의 파비각(破碑閣)에 보존되어 있다.

운봉읍내에서 황산(오른쪽 첨봉) 가는 길. 아득한 직선로는 들판 크기를 말해준다  

황산 아래 작은 동산에 있는 황산대첩비. 차분한 공원으로 꾸며져 있다 

대첩비각 안에 보호되고 있는 황산대첩비는 높이 4.25m의 거대한 규모다. 비신은 1957년 다시 세웠지만 거북 모양 귀부(龜趺)와 머릿돌인 이수(螭首)는 1577년 세워진 원래 것 그대로이고, 일제 때 파괴된 비신은 파비각에 따로 전시되어 있다  

황산대첩비가 있는 곳은 들판 가운데 작은 동산으로, 바로 옆에는 조선말의 명창으로 가왕(歌王)으로 불리는 송흥록(宋興祿, 1780?~1863?)과 20세기 국창(國唱)이자 중요무형문화재인 박초월(朴初月, 1916~1983)의 생가와 ‘동편제마을’이 있다. 이를 기념해 황산 자락에는 ‘국악의성지’가 조성되었다. 고원지대의 맑고 희박한 공기가 판소리에 유리한 것일까.

황산은 운봉고원의 동쪽 끝이고 그 아래를 흐르는 람천은 고원지대에서 흘러온 물이 빠져나가는 수구(水口)를 이룬다. 그래도 해발 440m나 되는 고지이고 황산과 덕두산(1152m) 사이로 협곡을 흘러 운봉고원과 인월을 단절시키고 있다. 도로를 벗어나 옥계저수지 옆으로 산허리를 돌아가는 옛길을 따라 인월로 넘어간다.

황산대첩비 옆에는 조선말의 명창 송흥록(宋興祿, 1780?~1863?)과 20세기 국창(國唱)이자 중요무형문화재인 박초월(朴初月, 1916~1983)의 생가가 있다

람천 둑길을 따라 인월 가는 길. 왼쪽 황산이 우뚝하다

인월로 넘어가는 임도. 흥부골자연휴양림 입구로 연결된다    

흥부골자연휴양림에서 인월 방면으로 가면 원래의 인월인 '구인월' 마을이 나온다. 이성계의 전설이 어린 바로 그곳이다 

인월로 내려서기 전 덕두산 자락에는 흥부골자연휴양림이 있는데, 흥부전의 무대가 바로 이 근처다. 흥부전 ‘제비노정기’에 흥부의 집은 전라도와 경상도 접경의 남원 함양 간이라고 되어 있고 다양한 지명이 등장하는데, 지금의 인월면과 아영면 일대다. 인월면 성산리에는 원래의 흥부 집이 있었고, 아영면 성리는 흥부가 정착하고 부자가 된 마을이라고 한다. 실존인물인 박첨지와 박춘보 형제가 놀부와 흥부의 모델이 되었다고 하며 박춘보의 무덤도 전한다. 임꺽정, 홍길동, 춘향전 등등 조선시대 설화는 대부분 실존인물의 이야기를 모티브로 하고 있고 배경 지명이 구체적인 것도 이를 뒷받침한다.

언제부턴가 이 땅에는 제비가 더 이상 오지 않으니 제비뽑기(복권?)가 현대판 발복의 방법일까.

글/사진 김병훈 발행인  

 

tip

인월 지리산 둘레길 안내소 앞에 무료 주차장이 있다. 코스는 대부분 농로와 도로이고, 황산대첩비에서 흥부골자연휴양림 사이에 2.6km의 임도 구간이 있다(비포장 포함). 이 구간을 생략하려면 황산대첩비에서 24번 국도를 타고 곧장 인월로 가도 된다. 인월을 제외하고 운봉고원만 일주하고 싶다면 ‘국악의성지’ 주차장을 기점으로 잡으면 적당하다.

 

남원 운봉고원 41k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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