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김종성(자유 기고가)

조금 저급한 걸 논해보고자 한다. 부자 사귀기?

행복의 요건 중에 금전적 풍요를 절대 빠뜨릴 수 없다. 딴에는 돈이 더럽다느니, 늙어서 돈이 무슨 필요 있느냐 하며 초월한 척 해도 아파 보면 안다. 늙어서 돈이 없으면 아파 누울 권리가 없다. 손주들 재롱을 상대할 권리도 없다. 그래서 필자도 예전에 본지에다 젊었을 때는 돈이 전부인 줄 알았는데, 늙어보니 그게 맞더라.”(오스카 와일드)는 말을 인용한 적이 있다.

그렇다면, 비록 내가 돈이 없더라도 주변에 돈 많은 사람이라도 좀 사귀고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 때가 많다. 그러면 평소엔 나 이런 사람 알고 있다고 자랑하는 재미도 있고, 급할 때 급히 융통하는 식의 도움을 받을 수도 있으리라. 그런데 이렇게 쓸 만한 부자를 사귀지 못하는 것은 무슨 이유일까?

 

자비심을 퇴색시키는 거덜내기

대개의 사람들이 많이 겪는 경험인데, 한턱 낼 일이 있을 때 대접받는 사람이 대접하려는 사람의 예상치를 훨씬 초과하는 매상을 올려버려서 내심 불쾌했을 때가 있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대접받은 사람들은 부담 줘서 미안하다고 하지 않고 멋지게 거덜내줬다며 오히려 쾌재를 부르는 것도 많이 보았을 것이다,

아는 지인도 직장에서 새로운 곳으로 발령 받아 오래 전 알던 후배를 만나 오랜 만이니 식사를 대접하겠다고 했는데, 속으로 대충 1인당 2~3만원 언저리로 먹을 요량이었는데, 그 후배가 1인당 10만원 가까이 되는 것을 주문하는 것을 보고는 돌아서서 아주 불쾌했다고 한다. 그 다음부터 절대 그 후배와 대면하기 싫더란 거다.

 고급 요리 상 
 고급 요리 상 

부자들이 한턱 낼 때도 매 한가지다. 얻어먹는 자가 좀 좋은데 가서 괜찮은 것 먹읍시다라고 먼저 말한다. 그리고는 밥 살 사람의 예상액을 엄청나게 초과한 금액의 매상을 올려버리고는 묘한 승리감에 도취되고는 부자의 주머니 사정 걱정은 절대 안 해준다.

그럼 그 부자는 다시는 그 집단에게는 한턱 낼 마음이 사라지고, 향후 한턱을 사더라도 고마워할 집단을 찾게 된다. 어차피 한 턱 내는 것도 알고 보면 이왕 돈을 쓰는 것을 가지고 행여나 모를 미래를 대비한 비상업적 보험료 아닌가. 결국 부자 거덜 내고는 쾌재 부른 집단은 부자를 친구로 만들 기회를 스스로 날린 셈이다.

필자도 먼 곳의 친구들을 찾아가서 한턱 낸 일이 있었는데, 소주에 삼겹살 좀 시켰더니, 왜 이리 쪼잔하게 싼 것 시켰나며, 좀 비싼 것 사라는데 내심 불쾌했다. 그 당시엔 부동산 투자로 돈이 좀 있는 상태여서 그들이 말하는 비싼 것 사줄 형편은 되었지만, 왠지 그 태도에 기분이 나빴다. 나 없을 땐 지들끼리 비싼 것 먹느냐는 거다. 왜 먼데서 온 나에게 사주지는 못 할망정 오히려 거덜내려 하는 것일까? 내가 그들에게 무슨 은혜를 입었나, 죄를 지었나? 그저 친구 좋다고 이왕 그 동네에 볼일 보러 간 김에 사준 건데, 그걸 꼭 거덜내야만 했었나? 그날 삼겹살 한 접시 이후에 한우도 사주고, 2차까지 사주고 나서는 힘겹게 돌아왔는데 지금까지 연락도 안 하고 등 돌리고 산다. 그 이후 경제적 어려움도 원인이긴 하지만, 뭐니 뭐니 해도 그들의 저렴한 매너가 싫어서다.

필자 주변에도 가난한 사람들은 많은데, 그 사람들에게 살아오면서 부유한 사람으로부터 한턱 얻어먹어 본 적 있느냐니까, 대부분 그런 일이 있었다고 한다. 그렇다면 그 부자와 친하냐니까, 지금은 그렇지 않다고 한다. 그럼 그 부자가 한턱 낼 때 돈 걱정 해준 적 있냐고 하니까, 그런 적이 없다고 한다.

부자가 한턱 내주는 것은 같이 어울려 줄 기회를 주는 것인데, 이를 그냥 날려 버린 것이다. 부자가 가난한 자와 잘 어울려주지 않는 것은 바로 이런 면 때문이다. 경제적으로 가난해서 싫은 것보다는 성품이 저열(低劣)해서 싫은 것이다.

 

부자 주머니 걱정도 해줘라

부자는 만나본 사람이 많은 반면, 빈자는 들어본 이름만 많다. 만남에는 돈이 수반되기 때문이리라.

부자에게 대접을 받을 땐, 부자는 자기가 사겠으니 유리로 단장된 집으로 가서 식사를 하자고 하면, “그곳은 음식 값이 꽤나 비쌀 텐데요, 어디 좀 싼 데서 간편하게 하시죠라는 식으로, 설령 씨알이 먹히지 않을지언정 주머니 걱정이라도 해주어야 한다.

대접을 받을 때는 고맙다는 소리도 해야 하지만, 부자에게 유용한 정보도 알려줘야 하고, 더불어 음식값 걱정도 좀 해줘야 한다. 그렇게 해준 사람에겐 그 자리 이후 부자로부터 전화 걸려올 일이라도 있다.

좀 더 적극적으로 하자면, 비싼 1차분에 대한 답례로 식후에 1500원짜리 커피라도 뽑아서 디저트라도 차려주는 모습을 보여야 한다. 그 디저트조차 끝까지 부자에게 뜯어먹으려 한다면, 그 다음부터 부자가 1차조차 살 일이 없어지게 된다. 그럼에도 그 부자가 또 산다면, 그 부자는 자신과 동등한 인격으로서의 대화 상대라기보다는 자신이 내려다 볼 아랫것들 관리하는 것으로 보는 시선 때문이리라.

내 주변에는 박봉의 직장이 많은데, 몇 년 전 업무상 필자와 매일 접촉하는 그 직장 사람이 일하다가 다쳤다. 같은 직장은 아니지만 나는 최소한 체면치례 차원에서라도 약간의 위로금이라도 줘야 할 것 같아서 그 직장의 다른 여직원에게 봉투를 건넸는데, 대답이 가관이었다. 그 여직원이 말하길, “다친 사람은 송도에 살기 때문에 부자니까 위로금 안 줘도 된다는 것이다.

송도에 살든 말든 그 사람의 주수입원은 그 직장인데, 송도에 산다고 위로해서는 안 된다는 소린가? 그렇다고 다른 사람에게 그런 일이 생겼을 때 송도 사는 사람이 위로금을 내지 않아도 된다는 뜻은 아니지 싶다. 부자에게 일방적으로만 바라기만 하고 형식적인 걱정조차 전혀 안 해주는 것, 가난이 망쳐놓은 인성인지 그런 인성 때문에 가난한 것이리라 싶다.

 

가장 당당한 비즈니스 매너

아는 사람을 기쁘게 해주는 게 예절이라면, 모르는 사람을 기쁘게 해주는 건 친절이라고 한다.

예절이나 친절이라고 하니까 너무 저자세로 보이는가? 아니다. 상당히 실용적이고 중요한 것이다. 자신에게 힘이 되어줄 사람을 만드느냐, 자신에게 짐이 될 사람을 만드느냐 하는 것은 자신의 태도, 즉 예절과 친절에 달렸다고 본다.

또한 예절이나 친절은 알고 보면 가장 당당한 자세다. 당당하다는 것은 모르는 사람에게 혼자서 접근 가능한 용기 있는 자세를 말하지 (중공인들처럼) 집단화 되었을 때부터 시끄러워지는 것은 결코 아니다.

우리 주변에도 보면, 당당함이 떨어지는 사람들이 보통 지인들 위주로 영업한다. 그러다 그 지인마저 동나는 순간 그 지인에게 우려먹기 식 억지 재판매나 재계약을 강요한다.

그러므로 영업은 지인이 아닌 모르는 사람을 공략해야 하고, 이왕이면 있는 사람(부자)”을 끌어와야 한다. 부자에게 손을 뻗으려면 부자에게 거부감이 없는 모습을 보여야 한다. 그렇게 거부감을 덜어주는 게 예절과 친절이며, 그리하여 접근하는 게 당당함이며, 당당함은 공짜에 대하여 감사할 줄 알고, 남의 것에 대하여 아까워할 줄 아는 문화시민이어야 가능하다. 저열한 품성으로는 절대로 모르는 부자에게 접근할 수 없다. 부자도 인간이요, 인간은 위험에 민감하고 이익에 충실한 동물 아닌가.

보험영업 하다가 망한 사람들 대부분이 초기부터 지인을 끌어다 영업을 한 사람들인 점을 볼 때, 모르는 사람에게 접근할 당당함을 갖추지 못한 사람은 아는 사람에게조차 불편한 존재일 뿐이다. , 아는 사람이 보험 들어달라고 할 땐 들어주지 말아야 한다. 필자도 아는 사람이 들어준 자동차종합보험을 보면, 계약서도 깔끔하지 못하고, 전달과정도 대충 그렇게 하면 된다는 식으로 매우 무성의하고 부실했던 기억이 난다. 그런 계약서는 대부분 조수석 앞 서랍에 구겨진 채 보관되며, 무슨 일이 생겼을 때 연락처 찾기조차 어려울 정도로 지저분하다.

 

혼자 밥 먹으러 가지 못하는 사람들

우리사회에 당당함이 부족한 사례 중 가장 큰 것은 혼자 점심 먹으러 못 간다는 것이다. 혼자 점심 먹으러 가면 뭔가 결핍된 사람처럼 본다는 것이다.

심지어 혼자 점심 먹으면 옆에 가서 핀잔을 준다. “혼자 점심 먹으면 출세 못한다라고.

핀잔을 준 사람의 말뜻은 점심을 같이 먹는 것이 가장 좋은 대인관계 관리라는 뜻이다. 문제는 그 말을 들은 혼밥맨은 정년퇴직이 1년도 안 남은 사람인데, 그 상황에서 무슨 출세를 하라는 말인가 하는 거다. 그만큼 점심식사를 같이 하는 것에다 사회적 성공과 결부시키려는 집착을 심하게 하고 있다는 거다.

구내 식당 모습(출처 : 수원시 인터넷신문)
구내 식당 모습(출처 : 수원시 인터넷신문)

점심식사를 같이 하는 게 대인관계 관리라는 말이 틀린 말은 아닌데, 우리사회에서 점심을 같이 먹으러 가는 사람들 대부분이 아는 사람과 같이 가는 거지 모르는 사람과 같이 식사하는 게 아니더라는 거다. 아는 사람하고만 같이 식사하는 것을 대인관계의 확대라고 볼 수 있나? 아는 사람과 같이 밥 먹으며 떠드는 사람을 자세히 보면, 어쩌다 혼자 밥 먹게 되어 모르는 사람과 마주 식사할 땐 말 한마디도 못 꺼내는 모습을 보면 더더욱 그렇다.

 

거지도 사업자 등록을 해야 하나?

요즈음 지하철에서 소쿠리 놓고 동냥하는 거지가 거의 없다. 거지가 없어서일까? 그렇진 않다고 본다.(참고로 노숙자는 거지의 높임말이다.) 거래시 현찰이 아닌 카드를 사용하다 보니, 대부분의 사람들 주머니에 현찰이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거지가 사업자등록 하고 카드결제기 들고 다닐 수도 없는 일이다. 한국표준직업분류(KSCO)나 한국고용직업분류(KECO)구걸업이 있는지는 모르겠다.

구걸에 준하는 것이 성인이 된 자녀들의 용돈문제다. 부모 아플 땐 보여주지도 않던 다 큰 손자를 설날엔 꼭 데려와서 보여주는 이유가 뭘까? 게다가 그런 손자들은 어른이 주는 손보다 더 빠르게 내미는 받는 손을 가진 게 무섭더라. 예의상 사양이라도 좀 하고 받든지

 

얻어먹는 게 오히려 귀찮은 사람들

필자는 인천에 산다. 주변 사람들과 얘기하다보면, 윗사람의 식사초대를 거부한 사람들이 많더란 거다.

왜 그런고 하니, 윗사람이란 게 대부분 서울에 사는데 그 사람이 저녁식사 한 끼 사겠으니 서울로 오라고 하는데, 1인당 3만 원 짜리 식사대접 받고 이런저런 가르침 같은 소리 실컷 듣고는, 늦게 인천이나 김포, 강화 방면의 집으로 오는데 택시비가 더 들더란 거다. , 3만원어치 얻어먹으려고 5만원 쓰는 게 맞지 않더란 거다.

택시 미터(출처 : 교통신문)
택시 미터(출처 : 교통신문)

그러고 보니 필자도 그런 경험이 많다. 괜히 서울 모임 갔다가 밤늦게 돌아오는 차비가 더 무섭더란 거다. 특히 가족끼리도 맛집이라든지 분위기 좋은 집같은 용어가 없고, 오로지 싼집’, ‘많이 주는 집정도만 아는 필자 같은 사람은 먹어봐야 똥 밖에 더 되냐는 사고방식 때문에 비싼 음식이라고 별스레 달가워하지도 않는데, 안 먹어도 되는 식사에다 괜히 곁들인 술 때문에 귀가할 때 차비만 바가지 쓰고 다음날 일정만 피곤하게 만든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게다가 금전적으로 손해보고도 괜히 얻어먹었다는 생각 때문에 그 사람에게 코 꿰인 기분이 들어 도리어 불편하더란 거다.

세상엔 사양하는 가치도 실용적일 때가 있는가 보다.

첨언하건데 부자 사귀는 게 좋다고 생각하는 필자는 아직까지는 현장에서 모금하는 급한 푼돈 외에 따로 부자에게 돈을 빌린다거나 보증을 요구한 적이 없고, 법적으로 곤란할 때 권력을 가진 지인의 힘을 빌린 적이 없다. 아마 나중에 내 능력으로 상응해주기 힘든 잠재적인 빚이 될까봐 두려워하는 쪼잔한 심성 때문이리라.

필자 김종성(자유기고가)
필자 김종성(자유기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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