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련한 ‘향수’의 고장, 구비치는 금강 줄기 따라

경율당 근처의 예쁜 농로. 코스 이정표는 부실한 편이다  
경율당 근처의 예쁜 농로. 코스 이정표는 부실한 편이다  

‘향수’의 시인으로 잘 알려진 정지용 시인의 고향인 옥천으로 떠난다. ‘옥천향수자전거길’은 여러 빛깔의 테마로 자전거여행을 즐길 수 있는 곳으로 이미 많은 동호인들이 찾는 곳이기도 하다.

테마별로 금강향수100리길, 대청호향수200리길, 옥천읍싱글트랙길, 향수300리 장령산‧이백리‧환산길 등 총 8개의 테마길이 조성되어 있다. 그 중 가장 대표적으로 잘 알려진 ‘금강향수100리길’을 찾아 나섰다. 출발은 옥천 읍내에 있는 정지용 시인과 육영수 생가 옆에 조성된 '옥천전통문화체험관'으로 잡는다. 

소 등에서 피리 부는 소년 상이 서 있는 정지용생가

 

향수

 

넓은 벌 동쪽 끝으로

옛이야기 지줄대는 실개천이 회돌아 나가고,

얼룩백이 황소가

해설피 금빛 게으른 울음을 우는 곳,

그 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리야.

 

질화로에 재가 식어지면

뷔인 밭에 밤바람 소리 말을 달리고,

엷은 졸음에 겨운 늙으신 아버지가

짚베개를 돋아 고이시는 곳,

그 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리야.

… 중략 …

 

정지용생가~장계관광지

정지용의 시 ‘향수’는 이동원과 박인수가 노래로 불러 대중으로부터 많은 사랑을 받아 온 애창곡으로도 잘 알려져 있다. ‘넓은 벌 동쪽 끝으로 옛이야기 지줄대는 실개천이 휘돌아 나가고’에서 알 수 있듯이 생가 앞 실개천은 그때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흐르고 있다.

시에 나오는 실개천이 지금의 생가 앞 실개천인지는 알 수 없지만 그것은 해석하기 나름이다. 다만 지금의 청석교 실개천은 잘 다듬어진 돌로 축대를 세워 덜 정겨울 뿐이다. 바짝 말라버린 실개천에는 잡초만 무성하고 지금의 모습에서는 향수의 감정을 느낄 수 없지만 눈을 지그시 감고 이곳에서 뛰어 놀았을 어린 지용을 그려본다.

청석교를 건너면 ‘정지용 생가터’를 알리는 입간판과 초가집의 생가가 보인다. 생가는 두개의 사립문이 있다. 하나면 족할 것을 두개씩이나 문을 낸 뜻은 방문객의 동선을 고려해, 또는 한 개의 문으로 드나드는 번잡함을 피하기 위해 그랬는지는 모르겠다. 또 생가의 원형 그대로 복원했다 하니 물레방아 쪽 사립문은 텃밭 드나드는 용도로 원래부터 있었는지도 모른다.

생가의 방문은 항상 열려 있다. 안방에 한약재를 넣어두는 한약장이 있는 것으로 봐서 그의 아버지는 한약방을 했던 것 같다. 시선가는 곳마다 정지용의 싯귀를 걸어놓아 차분히 음미할 수 있도록 배려해 놓았다.

‘질화로에 재가 식어지면 뷔인 밭에 밤바람소리 말을 달리고’, ‘흐릿한 불빛에 돌아 앉어 도란도란거리는 곳…’ ‘향수'의 시처럼 방안에 있는 질화로와 등잔은 자연스럽게 ‘향수'를 다시금 음미하게 만든다.

장계관광지의 기품 어린 정원

장계관광지에는 추후 출렁다리와 전망타워가 들어설 예정이다  

향수100리길의 첫 구간은 정지용 생가에서 장계관광지에 이르는 향수30리길이다. 정지용 생가에서 육영수 생가 방향으로 400여m 가면 좌측에 ‘개나리어린이집’ 옆으로 교동저수지로 올라가는 길이 나온다. 교동저수지를 거슬러 왼쪽의 작은 다리를 건너면 옛 37번 국도와 합류하게 되는데, 국원교차로까지 직진해서 약 400m 지점의 석호삼거리에서 우측길로 접어들면 소정리로 이어진다. 소정교 고가 밑에서 37번 국도와 합류하면 장계관광지로 가는 길이다. 향수30리길은 대부분 도로이고 언덕이 많아 오르내림을 반복해야 하지만 경사가 그리 심하지 않다.

옛 37번 국도는 차량이 그리 많지 않지만, 갓길이 거의 없거나 또는 좁아서 간간히 지나가는 차량의 흐름에 주의할 필요가 있다. 도로의 가로수는 아름드리 벚나무 터널을 이뤄 녹음이 무성하다. 벚꽃이 피는 4월이면 환상적인 코스가 되겠다.

정지용 생가에서 11㎞ 지점의 장계교 입구에서 왼쪽으로 가면 장계관광지가 나온다. 거피전문점과 인포가든 사이의 길을 따라 진입해 장계관광지를 둘러보고 나와도 2.5㎞밖에 되지 않아 꼭 둘러보는 것이 좋다.

정지용 생가와 장계관광지에서는 ‘멋진 신세계’라는 조형물을 접하게 된다. ‘멋진 신세계’는 옥천의 구읍 정지용 생가에서 장계관광지를 잇는 아트벨트 30리길을 이르는 말이며, 이미 오래되고 방치되어 사람들에게 잊혀진 장계관광지의 새로운 이름이기도 하다. ‘향수’와 ‘멋진 신세계’는 옥천의 문화예술브랜드로 자리잡아가고 있다.

장계관광지는 1980년대에 조성된 유원지로, 낡은 놀이시설과 방치된 공원을 기존의 건물과 놀이시설을 재활용해 시인과 아티스트가 꿈꾸고 주민이 만들어가는 ‘멋진 신세계’를 열었다.

대청호를 배경으로 주옥같은 시를 감상할 수 있는 ‘일곱걸음산책로’는 아름답고 호젓한 길이다. 길가에는 가로수와 함께 시비와 시를 담은 조각품, 조형작품 등이 세워져 있다.

한가로이 호숫가를 산책하면서 사색에 잠겨도 보고, 고요한 수면을 바라보며 천천히 걷는 것도 좋다. 벤치에 마냥 앉아 호수를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행복감과 함께 마음이 정화되는 느낌이 듣다.

초입에 자리한 옥천향토전시관에서는 옥천의 과거와 현재를 돌아 볼 수 있고, 세련된 건물의 카페에서는 편안하게 쉬어가기 좋다.

강변 언덕에 높직이 앉아 조망이 멋진 독락당   

장계관광지를 되돌아 나오면 바로 장계교가 시작된다. 장계교를 건너 약 2㎞ 가면 나오는 인포삼거리에서 우회전 하면 안남면 가는 길이다. 인포삼거리에서 안남면 가는 길 주변은 전형적인 시골 풍경이다. 딱히 내세울만한 것은 없지만 학촌고개를 넘어 내려가면 안남면 화학리로 탑석과 커다란 느티나무 노거수가 눈에 들어온다. 이 지점에 '엽승골 15㎞'라는 이정표가 있다.

내리막길을 계속해서 달리면 안남면 삼거리인데, 왼쪽이 향수100리길이다. 그러나 우측 마을길로 진입해 옥천의 명소인 둔주봉(384m)에 올라 한반도 지형을 봐야 한다. 한반도 지형을 축소해 놓은 듯한 영월 선암마을의 한반도 지형은 많이 알려져 있다. 그러나 이 지형과 거의 대칭을 이루는 한반도 지형이 옥천군 안남면 연주리에 있다는 사실은 그리 많이 알려져 있지 않다.

둔주봉으로 오르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다. 안남면사무소와 안남초등학교 사이의 마을 어귀에는 둔주봉 등산로를 알리는 이정표가 세워져 있다. 여기서 산골정취가 물씬 풍기는 길을 따라 1.4㎞ 올라가면 등산로 입구인 점촌고개가 나온다.

점촌고개에서 둔주봉 능선을 따라 800m 가면 높이 275m 지점의 주능선에 전망대를 겸한 정자가 세워져 있다. 등산로 주변은 솔향기가 물씬한 소나무 숲이 인상적이다. 고만고만한 소나무들이 대나무처럼 곧게 자라고 있는 숲 사이로 운치 있게 난 길을 따라 오르니 마음마저 상쾌해진다.

둔주봉 전망대에서 바라본 한반도 지형. 좌우 방향이 뒤바뀐 모습이다. 능선 뒤편 최고봉은 일대에서 가장 높은 탑산(532m)

둔주봉 정자에 오르면 거짓말처럼 펼쳐지는 한반도 지형이 발아래 펼쳐진다. 정확히는 한반도가 좌우로 반전된 모습이지만, 이 모습을 마주하는 순간 절로 나오는 탄성과 함께 말로 표현하기 힘든 감동이 몰려온다. 한반도 형상을 따라 휘돌아 나가는 강물은 바다가 된다. 가을의 문턱에 들어 선 9월초, 둔주봉에서 바라본 한반도 지형은 아름다운 녹색의 향연으로 평화롭고, 해맑은 금강이 휘돌아 나가는 주변은 초록의 숲이 병풍처럼 에워싸고 있어 한 폭의 산수화를 보는 듯하다.  

둔주봉에서 돌아나와 안남면사무소에서 연주교를 건너 도로를 따라 1.4㎞ 가면 ‘경율당’ 이정표가 서 있는 작은 삼거리다. 우회전하면 바로 종미리다. 종미마을회관을 조금 지나 왼쪽의 작은 다리를 건너면 경율당 가는 길이다.

종미마을 어귀에서 경율당 가는 농로는 정지용의 ‘향수’가 생각나는 길이다. 한적한 시골길에서 느낄 수 있는 포근함과 풍요로움, 그리고 숲과 들에서 살포시 불어오는 바람의 살랑거림에서 옛 추억의 향수가 그려지는 듯하다.

길모퉁이를 돌아설 즈음 조선후기의 문인이었던 경율 전후회(全後會)가 세운 경율당(景栗堂)이 강물을 향해 서있다. 전후회는 평소 율곡의 학문과 덕행을 매우 존경해 자신의 호를 경율이라 하고 서당 이름도 경율당이라 지었다고 한다. 경율당 마루에 잠시 앉아 쉬어간다.

노송이 그윽하고 금강 조망이 훌륭한 경율당  

경율당을 조금 지난 곳에서 우측의 농로로 들어서면 곧 금강변이다. 이곳 안남면 종미리 경율당 금강변에서부터 동이면 금암리 금강2교까지는 감입곡류하는 아름다운 금강과 나란히 달릴 수 있는 구간으로 19.6㎞나 된다. 안남면, 동이면, 청성면 등 3개 면에 걸쳐 8개의 강마을을 잇는 길은 잠시라도 강변을 벗어나지 않는다.

경율당 인근의 금강변에서 2.3㎞ 가면 지수리 마을 앞 강변에 ‘1박2일’ 촬영지를 알리는 표지판과 수영금지 경고판이 서 있다. 마침 비로 수위가 높아져 입구에는 강변 진입을 막는 바리케이드가 서 있다.

크게 지그재기를 그리는 강줄기 모래톱에는 텐트를 치고 캠핑을 하며 낚시를 즐기는 여행객들의 모습이 부럽기만 하다.

지수리에서 합금리로 가는 강변길 중간에 있는 잠수교는 입구를 막아 통행을 금지하고 있다. 원래 코스는 잠수교를 건너 가덕교로 되돌아 나오는 것인데, 아무래도 물이 불어나면 위험해 폐쇄한 것 같다.

가덕교를 지나 강변의 절벽길을 돌아 나가면 합금리다. 마을과 마을을 잇는 강변길을 천천히 달리노라면 마냥 행복하다. 느리게 곡선을 그리며 유유히 흘러가는 금강과 그 언저리의 산, 그리고 강 건너 마을과 들판들, 이 모든 것이 잘 어우러져 아늑하면서도 변화무쌍한 풍경을 만들어 낸다.

호젓한 강변길에는 비포장 구간이 일부 남아 있다 

가덕교 옆의 잠수교. 물이 넘쳐 길이 끊겼다 

천천히 흘러가는 강물의 속도처럼 자전거도 거기에 맞춰 풍경을 즐기며 유유자적 달려야 한다. ‘빨리 빨리’의 습관을 버리고 ‘느리게 느리게’ 달리다 보면 길 위의 모든 것이 아름답게 느껴진다. 길 위에서 만나는 모든 것이 나에게 말을 걸어온다.

강변길은 자고로 흙길이 제맛이다. 울퉁불퉁한 노면에 적당히 깔린 자갈과 흙, 그리고 그 사이로 약간의 풀이 자라는 시골길은 정서적으로 평온함을 준다. 현재 이 구간은 흙길이 남아 있어 강변의 호젓한 정취를 더해준다. 

펜션과 민박집이 많아 휴양하기 좋은 합금리를 지나 원당교를 건너면 경부고속도로의 거대한 교각이 보인다. 교각을 지나 우측의 우산리 농로로 진입해 강변을 따라 가면 금강유원지로 연결된다. 금강유원지는 경부고속도로 금강휴게소 일원으로, 고속도로를 지나며 늘 스쳐보던 풍경이었는데 그 속에 들어가 있다니 마치 늘 보던 풍경화 속으로 뛰어든 것만 같은 특이한 느낌이다.

금강유원지 잠수교를 건너면 바로 금강휴게소다. 휴게소로 계단길이 연결되어 있어 휴게소의 화장실이나 편의시설을 이용할 수 있다.

잠수교 양편에는 노점에서 여흥을 즐기며 휴식을 취하는 사람들, 한낮의 태양 아래서 강태공을 자처하는 여인들의 낚시질로 한가롭기 그지없다.

금강휴게소를 지나 경부고속도로 교각 밑을 벗어나면 다시 호젓한 강변길이다. 강변길은 동이면 금암리 금강2교 밑을 지나 삼거리에서 끝나고 길은 내륙으로 접어든다.

경부고속도로 금강휴게소 아래의 잠수교. 물이 넘쳐 통행이 막혔을 때는 인근의 구금강4교로 우회하면 된다

  

물이 빠졌을 때의 잠수교

 

금강휴게소 아래 도로에 물이 넘친 모습. 깊지는 않아 라이딩은 가능하다 

원래는 노면과 수면 높이가 비슷해 친수감이 각별한 강변길이다 

이 구간은 강변길이 끝나고 옥천읍 구읍으로 이어지는 구간으로 한적한 농촌 마을과 산간의 전원풍경을 감상할 수 있다.

동이면 금암리 금강2교 밑 삼거리에서 우측의 ‘옥천동의로’ 방향으로 진입하면 곧 복잡한 사거리다. 직진하듯이 이정표의 ‘금암’ 방향으로 가다가 오른쪽으로 굴다리를 통과하자마자 마을 입구에서 왼쪽으로 가면 된다. 여기서부터 종점인 정지용 생가까지는 산과 들을 넘나들며 아기자기한 시골의 잔잔한 풍경이 펼쳐진다.

꿈엔들 잊힐 리 없는 질그릇 같은 시골의 정취가 느껴지는 마을을 돌고 돌아가는 길은 정지용 시인의 ‘향수’가 그대로 떠오른다. 마을길과 농로를 지나다 보면 비닐하우스와 논밭이 번갈아 펼쳐지고 때로는 산언덕을 넘는 흙길도 만나게 되는데, 길이 복잡해 자칫 ‘향수100리길’ 이정표를 놓치면 헤매기 십상이겠다.

안터선사공원의 고인돌과 입석. 입석의 원형 각석이 인상적이다

옥천선사공원의 입석군. 옥천 지역에서는 유난히 입석(선돌)이 많이 발견되어 주목된다

99칸 규모의 육영수 생가. 규모와 구성에서 양반가의 격조와 기품이 각별하다. 많은 관람객은 육 여사의 식지 않는 인기를 말해준다 

안터선사공원과 옥천선사공원을 지나면 산골 전원풍경은 끝나고, 시원하게 뻗은 길은 금강을 살짝 스치고 지나 수북리 고개를 넘어 천천히 옥천의 옛 중심지였던 구읍으로 접어든다. 구읍 시가지 초입의 길가에는 육영수 생가가 말끔히 단장되어 있다. 육영수 생가는 99칸 전통가옥으로 육 여사가 나고 자란 집이다. 허물어진 채 방치되어 있다가 복원을 마치고 2011년 5월 공개됐다. 1998년 방문했을 때는 몇 동의 허름한 건물만 있었는데, 지금의 복원 건물은 규모가 정말 어마어마하다. 조선시대, 일반인이 가장 크게 지을 수 있는 집 규모인 99칸 저택의 위엄이 시야를 압도한다.

이 집은 조선초기 김정승이 처음 집을 지어 살았다가, 이후 송정승, 민정승 등 삼정승이 살았던 집으로 알려져 있다. 육 여사가 태어나기 전, 부친이 민정승의 자손에게서 사들여 고쳐 지으면서 조선후기 충청도 양반가의 전형적인 양식으로 탈바꿈했다.

생가는 육 여사 서거 이후 관리가 소홀해졌고, 1979년 박정희 대통령이 서거한 이후에는 방치되어 오다결국 폐가의 길을 걷는다. 이후 옥천군에서 생가 복원계획을 세우고 2003년부터 2010년까지 건물 13동을 복원했다. 집의 후원과 과수원을 합치면 8000평에 달하고, 대지만 3000여평 규모다.

육영수 생가에서 구읍우체국 방향으로 600m 가면 정지용 생가가 나오면서 ‘향수100리길’은 끝난다. 다시한번 생가를 둘러보고 정지용문학관에 들러 그의 일대기와 시세계에 젖으면서 여정을 마무리한다.

글 이윤기 이사 / 사진 김병훈 발행인 

 

tip

경부고속도로 금강휴게소 옆 잠수교는 폭우로 강물이 불면 통행이 금지된다. 이때는 구금강4교로 우회하면 된다. 옥천읍내를 벗어나면 안남면소재지와 금강휴게소에 식당과 마트가 있다. 

 

옥천 향수백리길 54k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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