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개에는 언제나 쓸쓸한 바람이

추풍령 옆 황간의 명승 월류봉과 월류정. 금강의 지류인 초강천 뒤로 높이 250m 암벽이 아찔하다. 작은 정자 하나가 무심한 산수에 인간적 선경의 화룡점정을 이룬다    
추풍령 옆 황간의 명승 월류봉과 월류정. 금강의 지류인 초강천 뒤로 높이 250m 암벽이 아찔하다. 작은 정자 하나가 무심한 산수에 인간적 선경의 화룡점정을 이룬다    

이 고개는 언제나 쓸쓸하다. 풍경은 보는 이의 심사를 반영한다지만 추풍령은 항상 그렇다. 스산한 가을바람 같은 이름(秋風嶺)부터 그런 운명인걸까.

한국에서 가장 유명한 고개 중 하나인 추풍령이 이렇게 쓸쓸한 잔상을 남기는 것은, ‘스쳐가는 풍경’이기 때문이다. 경부고속도로가 개통된 이듬해인 1971년 국내최초의 고속도로휴게소가 생기면서 추풍령은 쉬어가는 곳이면서 동시에 스쳐가는 곳이 되었다. 고속버스든, 일반 차량이든 한번은 쉬어가지만 그야말로 잠깐. 고속버스라면 10~15분 내에 볼일을 보고 차에 올라야 하니 경치고 뭐고 볼 틈이 없다. 대전역에서 잠시 내려 뜨거운 가락국수를 허겁지겁 먹던 ‘길목의 정서’와 똑 같다.

고개라고는 하지만 해발 221m에 불과해 소백산맥을 관통하는 대전 방면에서 올 때는 고개로도 느껴지지 않고, 평야지대인 김천에서 올라설 때도 금방이라 언덕 정도다. 그렇게 스쳐 지난 길이 몇 번일까. 아마도 수백 번은 될 텐데 문득 이 스산한 고개에 깃들어 사는 사람들과 풍경이 궁금해졌다. 여행자에게는 잠시 지나치는 풍경이지만 주민들에게는 고향이자 일상의 터전일 것이다.

진짜 추풍령 고갯마루는 추풍령역과 추풍령휴게소 중간쯤인 4번 국도변에 있다  추풍령역 급수탑공원. 증기기관차에 물을 공급하던 탑으로 1939년 건립되었으며, 사각형은 이곳이 유일하다

급수탑 맞은편으로 보이는 현대화된 추풍령역. 전철 선로가 어지럽지만 무궁화 열차만 상하행 각 하루 8번 정차한다 

지금의 추풍령은 교통의 요지다. 경부속도로, 4번 국도, 경부선 철도가 동시에 좁은 고개를 통과한다. 경부선 KTX는 7km 남쪽의 황악산 아래 터널로 지나지만 크게 보면 추풍령권이다.

추풍령은 백두대간 상의 눌의산(744m)과 금산(384m) 사이 안부를 지나며 정확한 고갯마루는 추풍령역과 추풍령휴게소 사이 4번 국도로, 표지석과 작은 공원을 조성해 놓았다. 추풍령휴게소는 이곳보다 조금 높은 해발 230m 지점에 있다.

출발지는 추풍령역 급수탑공원으로 잡는다. 주차장과 편의시설이 잘 갖춰져 있으면서 늘 한적하고, 증기기관차가 운행하던 시절 물을 대던 급수탑이 남아 있다. 전국에 이런 급수탑이 여러 곳 있으나 모두 원통 모양이고 사각형은 이곳이 유일하다. 1939년 건립했으면 84년 밖에 되지 않았는데 등록문화재로 보존되고 있다. 맞은편으로 보이는 추풍령역은 현대적 건물로 바뀌었고 플랫폼은 전철 선로가 어지럽다. 원래 작은 마을이고, KTX까지 등장해 무궁화 열차만 하루 8번 정차한다.

마을을 벗어나 서쪽 황간 방면으로 향한다. 길은 눌의산과 지장산(772m) 사이 협곡으로 접어들고 협곡 초입에 임진왜란 때 활약한 장지현 장군 순절비와 사당이 있다. 장군은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이끌고 추풍령에서 왜군을 패퇴시켰으나 2차 전투에서는 중과부적으로 패해 순절했다. 처음 보는 신무기인 조총과 서슬퍼런 일본도로 무장하고 전국시대를 겪으며 전쟁귀신이 된 데다 병력도 훨씬 많은 일본군에 맞서는 것은, 죽음을 각오하지 않으면 안 되는 생사의 대결단이자 용기가 필요했다. 조선은 건국 후 200년 평화시기를 겪었고 명나라에 의지하면서 군사적 대비태세는 대단히 취약했으니 전력에서 상대가 될 수가 없었다. 이순신과 의병의 분전이 있었으나 솔직히 명나라 원군이 없었다면 이길 수 없는 전쟁이었다.  어쨌든 그런 전쟁귀신에 맞서 용전분투하다 전사한 장지현 장군의 불굴의 용기와 기개에 고개를 숙인다.   

지장산 남쪽 자락에 있는 장지현 장군 사당. 건너편은 눌의산   

장지현 장군 사당에서 1.2km 가면 매우 좁은 병목지대가 나온다. 폭 150m 남짓한 협곡에 경부고속도로와 경부선 철도, 4번 국도와 옛국도 4개 노선이 다닥다닥 모여서 통과한다. 이곳만 막거나 파괴하면 경부선 교통로가 마비되는 것이다. 전술적으로 매우 중요해서 협곡 양쪽 봉우리에 군부대가 주둔하고 대형 입간판을 세워 위치를 숨겼다. 지금은 도로와 철도가 많이 생기면서 군부대가 철수했지만 텅 빈 백색 입간판은 그대로 남아 있다.

병목을 지나면 산중 별천지 같은 황간이 지척이다. 지금은 작은 면소재지이지만 조선시대만 해도 군에 해당하는 황간현이었다. 소백산맥 깊은 산중에 형성된 작은 분지에 마을과 들판이 옹기종기 펼쳐진다. 황간 역시 추풍령과 마찬가지로 고속도로와 열차에서 수없이 바라본, ‘스쳐가는 풍경’이다. 수없이 지나다니며 바라본, 개울가 언덕의 정자가 항상 궁금했는데 이제야 올라가본다. 바람을 타고 비상하는 학에 올라탄 것 같다는 가학정(駕鶴亭)이다. 1393년(태조 2년)에 건립했고 임진왜란 때 불타 중건과 보수를 거듭했다지만 역사가 600년을 넘는다. 옆에는 황간향교가 잘 보존되어 있고 일대는 남성근린공원으로 조성되어 있다. 서쪽으로 마을 너머 황간의 명승인 월류봉 암벽이 보인다.

월류봉(400m)은 낮은 산이지만 초강천 쪽으로 250m나 되는 절벽이 병풍처럼 굽이쳐 웅장함이 압권이다. 거기다 강변 언덕에 월류정이 우뚝 자리하고 있어 현실의 신선경이자 도교풍의 산수화를 빚어낸다. 달조차 경치에 빠져 머문다는 월류(月留), 이름에는 풍류 정신이 농염하다. 하지만 관광객이 많아 조용히 선경을 감상하기는 어렵다. 사람들은 경치를 제대로 보지도 않고 사진 찍기에만 바쁘다. 사진은 추억을 간직하는 기념물이기도 하지만 요즘의 디지털 사진은 자랑과 인정을 위한 수단이다. ‘인증샷’이라는 말이 단적으로 내심을 말해준다.

추풍령~황간 사이의 협곡 병목지대. 좌우 봉우리에 선 백색 입간판 뒤에는 원래 군부대가 주둔했다. 두 봉우리 사이 협곡으로 경부고속도로, 경부선 철도, 4번 국도, 구국도 4개 노선이 통과한다   

월류봉 근처에서 초강천에 합류하는 석천을 거슬러 북상한다. 왼쪽 산줄기는 백화산(933m) 남단이다. 백화산은 대단히 특이한 산인데, 서사면은 골짜기가 거의 없는 맨듯한 면을 이루며 남북으로 11km나 뻗어나 천연의 장벽처럼 서 있다. 반대로 동사면에는 석천으로 흘러드는 골짜기가 많지만 거의 독립봉처럼 홀로 서서 거대한 경사면을 펼치고 있는 서사면은 정말 기이하다.

옛사람도 이 지형을 놓치지 않아서 정상을 중심으로 동쪽 골짜기를 따라 거대한 산성을 쌓았으니 이것이 금돌성(今突城)이다. 백화산 정상을 포함해 산줄기를 따라 쌓은 석성은 둘레가 3km나 되는 거성이다. 신라 입장에서는 백제 방면을 방어하는 최고의 입지다. 실제로 서기 660년 나당연합군이 백제 사비성을 공략할 때 태종무열왕(김춘추)은 여기서 대기하고 있다가 사비성 함락과 의자왕 생포 소식을 듣고 사비성으로 나갔다. 험준한 산꼭대기에 있어 지금도 접근이 쉽지 않은데 그 옛날에는 가공할 험지에다 난공불락이었을 것이다. 만약을 대비해 왕이 웅거하기에도 최적의 장소다.

석천을 따라가던 길은 반야사에서 끊어지고 만다. 협곡 바닥에 자리한 반야사는 예전에는 큰비가 내리면 바로 고립되는 단절의 땅이었다. 지금도 상류 방면에는 길이 없다. 개울가의 입지와 뒷산에 펼쳐진 호랑이 모양 너덜바위가 특이하며, 신라말 창건되었으니 1100년 역사가 깃든 고찰이다. 오대산 상원사와 똑 같은, 세조와 문수동자의 전설도 어려 있다. 절 뒤쪽으로 돌아가면 석천변 절벽 위에 문수전이 위태롭다.

공자 상을 중심으로 잘 단장되고 지금도 활용되는 황간향교는 한때의 영화를 말해준다  

초강천 언덕 위에 우뚝한 가학정. 주변 숲이 없다면 정말 학을 타고 날아가는 느낌일 듯. 고속도로와 열차에서 오랫동안 스치며 보았던 곳을 이제야 올라본다

가학정에서 바라본 황간면소재지와 절벽을 이룬 월류봉

반야사 안마당. 여말선초에 조성된 삼층석탑 뒤로 꼬리를 치켜든 호랑이 모양의 너덜지대가 보인다  

반야사를 돌아나와 49번 국지도를 타고 오도재(350m)를 넘으면 상주 모동면이다. 고개를 내려가면 모동들이 상당히 넓게 펼쳐진다. 해발 230m에 자리한 산중 들판이라 더욱 반갑고 특이하다.

여전히 서쪽에는 백화산이 웅장하고, 평야 초입에는 조선초의 명재상 황희를 모신 옥동서원이 있다. 1518년 건립되었으니 서원으로는 매우 오래되었고 유생(儒生)이 기거하는 기숙사인 동재(東齋)와 서재(西齋)가 따로 없는 대신 정문 겸 누각인 회보문(懷寶門) 2층 좌우에 방을 들이고 구들장을 놓은 것이 이색적이다. 아궁이가 외부로 나 있는 것도 특이한데, 2층 누각에 구들장이 있는 것은 처음 본다. 황희는 파주 사람으로 은퇴 후 파주에 은거했는데 이곳에 그를 모신 서원이 있는 것은 후손이 이주해온 것이 계기였다고 한다.

황희를 모신 옥동서원의 회보문. 2층에 좌우로 방을 넣고 아궁이를 외부로 뺀 것이 매우 특이하다

  

백옥정에서 바라본 백화산. 왼쪽 정상 주변 능선을 따라 3km의 금돌성을 쌓았다. 너무나 높고 접근이 힘든데다 지형이 험해 가히 난공불락이다 

옥동서원에서 조금 북상하면 석천 절벽 위에 백옥정이 우뚝하다. 옥동서원에 딸린 정자로 지금 건물은 최근에 지은 팔각정이다. 정자에 올라서면 금돌성을 품은 백화산이 정면으로 마주보이고, 반야사 방면 협곡으로 사라지는 석천이 발밑을 감아 돈다. 백화산 동사면은 대단히 경사가 급하고 곳곳에 암벽이 돌출해 있어 정상부의 금돌성은 하늘 위에 터 잡은 듯 가히 난공불락이다. 모동들에 가득한 비닐하우스는 대부분 포도를 재배용으로 이 땅에 기대 사는 사람들의 자족을 말해준다. 면소재지도 아닌 작은 마을에 초등학교가 건재하고 있는 것만 보아도 살기 좋은 땅이 분명하다.

포도재배 비닐하우스가 빼곡한 상주 모동들 

모동들을 횡단해 지장산 동쪽 골짜기를 따라 남하한다. 양떼를 방목하는 모동목장을 지나면 다시 영동군을 알리는 입간판이 나타난다. 기이하게도 ‘반진계’라는 마을 한가운데로 경북(상주)과 충북(영동) 경계선이 지난다. 골목을 사이에 두고 이웃 간에 경상도와 충청도로 나뉘는 셈이다. 같은 마을인데 소속에 따라 말씨가 어떨지 문득 궁금해졌지만 더운 날씨에 바깥에 나와 있는 사람이 없다.

방현고개(350m) 정상은 상신안리마을 한가운데에 있다. 이제 추풍령까지는 내리막이 뻗어나고, 지장산과 눌의산 사이에 삼각형으로 펼쳐진 추풍령 들이 아담하다. 모동들보다는 작지만 역시 산중의 꽤 넓은 들판이고 포도재배 비닐하우스가 가득하며, 마을들이 적지 않으니 바람은 쓸쓸해도 역시 추풍령은 사람을 살리는 땅이다.

양떼를 방목하는 모동목장

방현을 넘어가면 추풍령 들과 눌의산이 다시 반겨준다. 역시 추풍령도 사람이 살고 사람을 살리는 땅이다  

 

tip

추풍령면소재지와 황간면소재지에 식당과 편의점이 있다. 도로 구간이 많지만 차량통행은 적은 편이다. 반야사 문수전과 백옥정은 5분 정도 걸어 올라야 한다.

글/사진 김병훈 발행인 

 

영동 추풍령 47k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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