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군의 심장부를 격파한 ‘부산포 해전’, 이순신장군은 이 전투를 가장 높게 평가했다

430여 년 전 일본군의 본거지 ‘부산포’ : 470여 척의 왜선들이 가득 메우고 있던 포구로 80여 척의 조선 함대가 ‘기습전(奇襲戰)’을 감행했다. ‘한산도∙안골포 해전’에서 참패하면서 ‘해전금지’가 내린 상태에서 ‘어떠한 일이 있더라도 부산포는 반드시 지키라...!’는 특명까지 내렸는데도 일본군은 당했다. 4시간 동안의 전투에서 100여 척이 분멸되는 생지옥의 현장이 펼쳐졌다(부산항대교 북단, 부산 우암동과 감만동 일대)
430여 년 전 일본군의 본거지 ‘부산포’ : 470여 척의 왜선들이 가득 메우고 있던 포구로 80여 척의 조선 함대가 ‘기습전(奇襲戰)’을 감행했다. ‘한산도∙안골포 해전’에서 참패하면서 ‘해전금지’가 내린 상태에서 ‘어떠한 일이 있더라도 부산포는 반드시 지키라...!’는 특명까지 내렸는데도 일본군은 당했다. 4시간 동안의 전투에서 100여 척이 분멸되는 생지옥의 현장이 펼쳐졌다(부산항대교 북단, 부산 우암동과 감만동 일대)

글 사진 / 이홍희(전 해병대사령관)

 

1592년 7월, 일본군은 꽉 막힌 ‘해상 보급로’ 개척을 위해 일본 최고의 수군 부대를 투입하여 조선 수군과 ‘결전’을 벌였다. 대(大) 함대끼리의 결전인 ‘한산도 해전’에서 일방적으로 패배한 일본군은 이어서 벌어진 ‘안골포해전’에서도 참패하고 말았다. 연거푸 승리를 거둔 조선 연합함대는 일본군의 본거지 부산포 코앞까지 기동하며 펼친 ‘해상무력시위’를 통해 더 이상 바다로 나서지 못하게 엄중하게 경고조치했다.

한산도∙안골포해전에서 살아남은 일본군은 그들의 본영인 ‘부산포’로 숨어들었다. 연이은 패전에 충격 받은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아예 조선 수군과 전투를 금하는 ‘해전 금지’라는 특명을 내렸다. 일본 수군은 ‘부산포’에 틀어박힌 채, 거제도 일대에 설정(?)된 보이지 않는 ‘해상 경계선’을 한 발짝도 넘어서려 하지 않았다.

의주에 머물던 ‘선조’는 왜군들이 부산을 통해 빠져나갈 것이라 판단하여, 이순신에게 ‘일본군을 섬멸할 것’을 명령한다. 1592년 9월 1일 조선 연합함대는 일본군의 조선 침략 ‘전초기지’요 ‘소굴’인 부산포를 공격한다. 한 나절의 전투를 통해 470여 척의 왜선 중에서 100여 척을 파괴하는 대승을 거뒀다. 이순신장군은 해전 결과를 보고하면서 “그간 네 차례 출정하여, 10번의 해전에서 모두 승리했으나, 장수∙군사들의 공로를 논한다면 이번 부산의 싸움을 넘어설 수 없습니다”라며 부산포 해전을 ‘가장 큰 승리’로 평가했다.

이렇게 큰 전과를 거둔 해전임에도 불구하고, ‘부산포 해전’은 그렇게 널리 알려진 전투가 아니다. 전선 파괴라는 ‘눈’에 보이는 전과도 중요하지만, 적에게 미친 ‘심리적 전과’는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크다. 그러나 이런 전과는 인정하기가 쉽지 않다. 부산포(항)에 ‘정박’해 있는 전선 100여 척을 파괴한 전과가 ‘한산∙명량∙노량해전’ 등의 해전의 전과처럼 ‘화려하게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부산포 해전의 결과가 ‘적(일본) 지휘관’에게 끼친 심리적 영향, 전쟁의 흐름에 미친 영향은 오히려 타 해전의 결과를 능가한다.

가덕도(천성항)를 떠나 ‘부산포’로 향하는 길목 ‘몰운대’ 앞바다 : 3차 출정 때 ‘안골포해전’이 끝나고 이곳까지 조선 연합함대 60여 척이 무려 3km의 대형을 이루며 무력시위를 펼쳤다. 이번에는 ‘시위’가 아니다, ‘본때’를 보일 때다(아미산 전망대에서 조망)

 

현재의 전황(戰況)은 이렇다

일본군들이 평양을 향해 북상해오자, 선조는 6월 중순 평양을 떠나 ‘의주’로 피신하면서부터 ‘선위’(禪位. 왕이 살아서 임금의 자리를 물려주는 것)를 언급하기 시작했다. 저의(底意)는 복잡하겠지만, 이후에도 십 수차례나 선위파동을 일으켰다 전한다. 선조는 ‘선위’ 파동과 함께 ‘죽더라도 천자(天子)의 나라에서 죽겠다’며 ‘내부론’(內附論. 한 나라가 다른 나라 안으로 붙음. 즉 선조가 명나라에 망명하려는 의사를 피력한 것)을 본격적으로 제기하기 시작했다. 조정의 신료들이 ‘내부’를 강하게 반대했지만 선조의 고집을 꺾을 수 없었다.

1592년 6∙7월에는 조선으로 출병하겠노라고 약속했던 명나라는 내부 사정(반란군 토벌)으로 인해 파병이 지연되고 있었다. 6월 하순이 돼서야 약 5000명의 ‘원군(선발대)’이 압록강을 넘어 조선으로 입국했다(본진은 12월이 돼서야 입국했다). 이와 함께 전국 각지에서 봉기한 ‘의병’들의 활약상들이 전해지고, 조선 수군의 해전에서의 ‘승전’ 소식도 속속 전해진다. 자신감을 찾게 된 선조는 그간 명나라로 망명하겠다던 ‘내부론’을 철회하고 계속 의주에 머무르기로 결정했다. 

대한민국 1세대 장보고급 잠수함 ‘정운함’(2017년) : 해군 함정의 명칭 중 ‘구축함’은 역사적 영웅, ‘호위함’은 광역지자체의 명칭을 붙인다. ‘잠수함’ 중, ‘장보고급’(1200톤. 9척)은 해상에서 이름을 날린 역대 ‘해군 장수’들의 이름을 붙였다. 부산포해전의 영웅인 ‘정운’장군이 이에 해당된다. ‘손원일급’(1800톤. 9척)은 해군 초대 총장 손원일제독과 독립운동을 했던 애국지사들의 이름을 사용한다. 손원일급 잠수함 중 ‘유관순’함은 해군 70년 역사에서 처음으로 여성 이름을 사용해 화제가 됐다. 현재는 ‘도산 안창호급’(3000톤급)이 2018년에 진수된 이후 후속함이 계속 건조 중에 있다. 도산 안창호급에는 독립운동에 공헌했거나 광복 후 국가발전에 기여한 인물을 명명하고 있다

3차 출정(한산도∙안골포 해전)을 마치고 각 수영으로 귀환한 조선 수군은 하시라도 있을 ‘재출전’에 대비한 준비에 매진하고 있었다. 전쟁이 길어질수록 ‘전쟁 지원’ 분야에 대한 어려움이 가중될 수밖에 없다. 파손된 선박을 정비하고, 부족한 병력을 보충하고, 군량을 충당하는 것이 제일 큰 어려움이다.

그간의 해전을 통해 일본 수군의 전체 규모(함선의 수)가 만만찮음을 이미 파악했고, 해전의 규모도 점차 커질 것으로 판단하게 된다. 현재의 전선 ‘수’로는 일본 수군을 상대하기가 어려울 수 있을 것으로 판단하여 판옥선 추가 건조에 총력을 기울였다. 그 결과, 3차 출정 때 56척이던 함대가 약 1달 반이 지난 다음에는 약 50%가 증가된 81척 규모의 함대로 급성장했다. 함선 수가 증가하면 그만큼 병력이 더 필요하고 군량도 더 필요하게 된다. 후속하여, 함대 규모가 커지면서 대규모 적과 상대하기 위해서는 ‘훈련’을 더욱 강화해 나가야 한다.

 

부산포 해전의 경과

일본군의 특이동향을 파악한 전라 좌∙우도 수군들은 8월 1일부터 여수에 집결했다. 20여일 째 연합 진법 훈련을 실시하던 중, 조정으로부터 ‘출전 명령’을 받고 8월 24일 여수를 떠나 4차 출정에 나섰다. 전쟁이 길어지고 보급난에 직면한 일본군들이 부대배치를 조정하는 등 ‘후퇴 징후’가 여러 곳에서 목격되었기 때문이다. 연합함대는 사량도(통영)에서 ‘경상우도 함대’와 합류한 다음, 견내량과 진해만을 거쳐 낙동강하구에 있는 가덕도(천성보)까지 진출했다. 

부산포해전 전날, 최종 전투준비를 실시한 조선 수군의 최전방기지 가덕도 ‘천성항’ : 부산포해전이 끝나고 각 수영으로 복귀하기 전에도 이곳에서 휴식하며 긴 항해를 준비했다. 일제강점기 때는 물론, 현재의 ‘진해만’(해군기지)을 방호하는 최전방 방파제 역할을 하는 긴요한 곳이다

‘진해만’ 주변 육지에 머물던 일본군들이 사라졌고, 김해∙양산강(낙동강) 일대에 주둔하던 일본 함대가 사라졌다는 정탐결과와 첩보가 입수됐다. 이는 이순신 연합함대의 이동 상황을 탐지한 일본군들이 본영인 ‘부산포’로 숨어 들어간 것으로 추정됐다. 출전한지 6일 째인 8월 29일이 되어서야, 양산강 하구에 위치한 ‘장림포’에서 왜선 6척을 만나 모두 분멸했다. 그간 조선 연합함대가 부산을 향해 기동하는 동안 단 한 척의 왜선도 발견하지 못한 것은 ‘한산도 해전’ 이후 내려진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해전 금지’ 특명에 충실한 일본 수군들이 조선 수군과의 전투를 회피한 때문으로 추정됐다.

최종 출전준비를 마친 연합함대는, 9월 1일 새벽에 가덕도를 출항하여 악천후를 뚫고 부산포를 향해 동진을 계속해 나갔다. 부산포로 기동하는 중간에, ‘화준구미∙다대포∙서평도∙절영도’ 등지를 지나며 조우한 24척의 왜선 모두를 분멸했다. 기상악화와 중간에 있었던 교전들로 인해 늦은 오후(3시쯤)가 돼서야 부산포로 들어가는 초입인 ‘초량목’에 도착할 수 있었다.

연합함대는 ‘부산포’에 집결 중인 일본군에 대한 더 확실한 정보를 파악하기 위해 정탐선을 띄웠다. 정탐 결과, 약 470여 척의 왜선이 세 곳의 포구에 나눠 정박 중이고, 대부분의 병력이 육상에 배치되어 방어 중임을 보고했다.

일본군이 남하하여 모여든 ‘양산강∙김해강’ 하구 : 장림포구에 있던 정박해있던 왜선(6척)은 격파했으나 수심이 얕고 강폭이 좁아 ‘양강’(兩江; 양산강, 김해강) 깊숙이 숨어있던 왜선들에 대해서는 수색 및 격파를 할 수 없었다(아미산 전망대에서 조망)

적 상황을 파악한 연합함대는 공격에 앞서 최종 작전회의를 실시했다. 회의에서, 일본군 본영 공격에 필요한 가용(可用) 시간이 제한되고 장졸들이 피로한 점 등을 감안하여 다음 날 공격하자는 의견도 일부 개진됐다. 그러나 이미 일본 수군들이 ‘조선 수군을 두려워한 나머지 부산포에 회피∙집결해 있는 상황’은 일본군이 전의(戰意)를 상실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리고 조선의 대(大) 함대가 ‘일본 수군의 본영인 부산포 코앞까지 진출한 상황에서 회군(回軍)할 경우, 일본 수군들이 조선 수군을 우습게 볼 것’이고, 이는 적의 사기를 높여주어 오히려 배후 공격을 당할 우려가 있다는 결론을 내리고 부산포를 ‘총공격’하기로 했다. 

부산 초입 ‘초량목’∙영도다리 : ‘가덕도’를 출발한 조선 연합함대가 일본군의 본진을 공격하기 직전 적의 경계부대(왜선 4척)를 맞아 분멸시킨 ‘초량목 해전’의 현장이다. 1934년에 이곳에 국내 유일한 ‘도개교’인 영도다리를 세웠다. 도시 발전과 연계돼 약 40여 년간 다리를 들지 못하다가, 2013년 복원∙확장됐다. 과거에는 해상 교통량에 따라 하루 2~7회까지 다리를 들어 올렸으나, 복원 후 현재는 매주 토요일 1회만 오르내리고 있다. 6.25전쟁 때에 헤어진 가족들이 만나는 피난민의 애환이 서린 곳이기도 하다. 현인의 노래 <굳세어라 금순아>에도 ‘영도다리’가 무대로 등장하고 있다

2척의 거북선과 80여 척의 판옥선으로 구성된 조선 연합함대는 거북선을 앞세우고, 그간 20여 일간 연합훈련을 통해 숙달한 ‘장사진(長蛇陣)’ 진형으로 ‘부산포’로 진격해 들어갔다. 일본군은 함대를 세 곳의 포구에 분산 정박시킨 상태에서 병력들은 포구 뒤편 고지대로 올라가 응전태세를 유지하고 있었다.

조선 연합함대가 부산포로 접근하면서 조선 수군과 일본 수군 간에 치열한 ‘포격전’이 전개됐다. 임진년 최대 규모의 해전이 개시된 것이다. 연합함대가 보유한 다양한 총통과 불화살로 정박해 있는 왜선들을 향해 능수능란하게 집중 공격했다. 일본 수군도 조선 연합함대를 향해 화포(총통)와 조총, 화살로 대응해왔다. 어두워질 때(대략 7시, 7시 반 경)까지 계속된 4시간 동안의 전투에서, 연합함대는 100여 척의 전선을 격파하고 많은 사상자를 발생시키는 등 일본 수군에 큰 손실을 입혔다. 하지만, 조선 수군도 선봉에서 전투를 지휘하던 녹도만호 ‘정운’이 일본군이 쏜 ‘대철포’의 철환을 맞고 사망하는 등 전사 6명, 부상 25명의 인명 피해를 입었다. 부산포 해전에 참가했던 함대들은 가덕도로 귀한하여 정비한 후, 9월 2일 가덕도를 출발하여 각자 본영으로 귀환했다.

* 부산포 해전에서 일본군이 사용한 화기에는 조선 육군으로부터 노획한 다양한 종류의 총통은 물론, 대완구, 편전(아기살) 등도 있었다. 조선군 포로나 부역자들로 하여금 연합함대의 공격에 저항하게 한 것으로 추정된다. 

정운공순의비 : 임진년 해전의 또 다른 영웅 ‘정운’장군. 부산포에서 전투를 지휘하다 사망했다. 이순신장군이 ‘나라의 오른 팔을 잃었다’라고 통곡하면서 고인(정운)의 넋을 위로했다 전한다. 정운장군은 최초 해전 출정을 강하게 건의하였으며, 모든 해전에서 최선두에서 전투를 지휘했다. 1798년에 정운의 8대손 정혁이 다대포첨사로 부임하여 ‘정운 공’의 공덕을 추모하는 순의비를 세웠다

 

부산포해전의 결과와 의의

부산포는 일본 입장에서는 조선 점령을 위한 ‘전초기지’이고, 조선에 투입된 일본군 입장에서는 ‘본거지’인 곳이다. 어떤 경우에도 절대로 공격받아서는 안 되는 ‘불가침’의 핵심 지역으로, 어느 누구도 공격받으리라 생각하지 못했다. 그런데 조선 수군으로부터 불의의 한 방을 맞았다. 일본군은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이로 인한 영향 또한 엄청 컸다. 일종의 ‘마비현상’이 왔다고도 할 수 있다. 

다대포와 몰운대를 돌아서 부산포로 진입하는 바닷길. 남항대교와 초량목∙영도다리 일대(용두산 부산탑에서 조망)

① 부산포 해전에서 가장 확실하게 드러나는 전과는 이번 전투에서 깨뜨린 일본 측 전선의 ‘수’이다. 부산포해전에서만 100여 척을 분멸했지만 직전에 있었던 소규모 전투에서의 전과까지 합치면 130여 척에 이른다. 이는 7년 전쟁의 마지막 해전인 ‘노량해전’에서 ‘조∙명연합군’이 거둔 300여 척의 분멸∙나포한 전과에는 미치지 못하나, ‘조선 수군 단독’으로 싸워서 거둔 최대의 전과이다. 달포 전의 한산대첩 때의 전과 59척과 비교하면 두 배가 훨씬 넘는 엄청난 전과이다.

이로 인해 일본군은 약 1달 후에 벌어진 ‘제1차 진주성전투’(10.5~10. 임진왜란의 3대 대첩 중 하나인 ‘진주대첩’)에서 개전 이래 최대의 참패를 당하고 만다. 일본군의 최대 난제요, 시급한 과제인 ‘보급’ 문제(식량 확보)를 해결하기 위해 진주성을 뚫고 전라도를 점령하고자 했다. 그런데, 일본군은 약 1달 전에 있었던 부산포해전에서 입은 막대한 피해(전선 파괴)로 말미암아, 진주성 전투 때 감히 수군을 동원(활용)하는 전략을 구사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그래서 수군의 지원을 받지 못한 상태에서 육군 단독(약 3만 명)으로 ‘전라도’를 향한 통로 개척을 추진하다가 ‘진주성전투’에서 전멸에 가까운 패배를 당하고 말았다.

1∙2차 진주성전투의 비교는, 상황∙여건이 서로 달라 단순 비교하기는 어려울지라도 참고는 될 수 있을 것이다. 수군을 전혀 활용할 수 없었던 ‘1차 진주성전투(1592년 10월)’ 때와 달리, 2차 진주성 전투 때에는 500여 척(일부는 800여 척이라 주장)의 전선이 지상군 수송에 동원됐다. 상당수의 육군 부대를 ‘고성’에 상륙시켜 진주성전투에 가담하게 함으로써 진주성을 지키던 조선의 민∙관∙군이 전멸하고 말았다.

‘충렬공’ 이대원(李大源, 1566~1587)과 ‘충장공’ 정운(鄭運, 1543~1592)의 충혼을 함께 모시고 있는 고흥 쌍충사(雙忠祠) : ‘이대원’(오른쪽 동상)은 1587년 녹도만호로 재직 중 출몰하는 왜구를 맞아 싸우다 손죽도(녹동 동남쪽 30km) 해상에서 순절했다. 부산포해전 후, 이순신장군의 요청(장계)에 의거 이대원을 모시던 사당(고흥군 도양읍)에 부산포 해전의 영웅 녹도만호 ‘정운’장군(왼쪽 동상)을 함께 모시게 됐다

② 전쟁 때 심리적 ‘충격’이 끼치는 영향은 ‘측정 불가’의 영역일 수 있다. 특히, 지휘관(장수)들에게 미치는 심리적 영향은 더욱 광범위하여 전쟁의 승패와 직결되는 경우가 많다.

무엇보다, 임진왜란 일본 측 최고의 지존인 ‘도요토미 히데요시’도 심각한 심리적 타격을 받은 나머지, 적절한 시기에 한반도로 건너와서 전쟁을 ‘직접 지휘하려 했던 계획’을 접게 된다. 그 배경 중 하나가 양아들(도요토미 히데카츠)이 부산포해전에서 입은 충격으로 인해 사망하고 말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도요토미 히데요시’ 자신의 신변 안전을 담보할 수 없는 상황이 펼쳐졌기 때문에 한반도로의 도해(渡海)를 단념하게 된 것이다. 도해 포기로 인해 전쟁 전개에 어떤 방향으로든 큰 영향을 미치게 된 것은 사실일 것이다.

그리고, ‘히데요시’가 가장 신뢰하여 한산도∙안골포 해전에 투입했던 일본군 최고의 수군 장수들이 부산포해전에서도 연거푸 패배함으로써, 더욱 충격에 빠진 나머지 해상전투를 기피하게 됐다. 1593년 2월에 있었던 ‘웅포해전’ 때까지 부산포에 칩거한 채, 한 발짝도 바다로 나오려 하지 않았다. 그래서 일본군은 당면한 보급문제 해결을 위한 전라도 쪽 진출을 육군 단독으로 실시할 수밖에 없었다. 수군의 지원 없이 육군 단독으로 펼친 ‘제1차 진주성전투(1592년 10월)’에서 전멸하면서, 육지를 통한 호남 진출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몰운대 시비 : 부산포해전의 영웅 ‘정운(鄭運) 公’을 참배한 후 돌아 나오며 ‘시(몰운대)’ 한수를 감상해보면 좋다. 순의비 비문에는, 정운장군이 ‘몰운대(沒雲臺)’의 운(雲)과 자기 이름의 ‘운(運)’이 같다며 죽을 각오로 전투에 임했다고 전해진다

③ 일본의 전쟁 수행 전략을 수세(守勢)적, 수성(守城)적으로 변화시켰다. 부산포해전으로 말미암아 일본군은 충격에서 헤어나지 못한 가운데, 두 번 다시는 조선 수군으로부터 부산포가 공격받지 않기 위해 특단의 조치를 취한다. 조선 수군의 본영인 ‘여수’로부터 일본군의 본영인 ‘부산’으로 향하는 길목 마다 ‘왜성’을 쌓아 부산포 방어를 위한 겹겹의 방어막을 쌓았다. 특히 부산과 인접한 ‘진해만’(창원, 거제도, 고성으로 둘러싸인 만)에 집중적으로 구축했다.(울산-순천 간 남부 지역에 총 31개의 왜성을 구축했는데, 이중 진해만 주변에 총 9개의 왜성을 집중 구축했다) 일본군들이 해안에 인접한 고지대에 왜성을 축조함으로써 조선 수군의 모든 활동은 일본군의 관측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게 되었다.

또한, 조선 함대가 일본군의 본영 ‘부산’으로 진격하는 동안에 정박∙휴식을 위한 중간 기항지가 필요한데, 그럴 가능성이 있는 ‘요지’를 일본군이 ‘선점’함으로써 조선 수군의 작전 수행에 막대한 어려움을 안겨주게 됐다. 또한, 왜성들 간은 물론 본영에 조선 수군의 진출 상황을 실시간으로 전파∙보고함은 물론, 전진기지(왜성)에 배치된 전선들이 협조하여 조선 수군 함대의 측∙후방에 대한 공격을 기도할 수 있게 됐다.

‘웅천왜성’ : 남쪽으로 철수한 일본군들이 쌓은 31개의 왜성 중의 하나로, 인근 안골포∙가덕도∙거제도 등지의 왜군과 연락이 용이한 요지(185m 높이)였다. 고니시 유키나가가 이곳에 진(陳)을 치고 성을 쌓아 일본군 ‘제2기지’로 삼았을 만큼 핵심 요지였다. 통영∙여수에서 발진한 조선 수군의 모든 ‘이동’을 이곳에서 감제할 수 있다. 멀리로 ‘거가대교’가 보인다

④ 부산포해전의 결과는 ‘조선(육군∙수군)의 전략 변화’를 요구하게 했다. 부산포에 정박해 있던 적선(빈 배) 100여 척을 파괴하였지만, 해전을 회피하고 육상 진지에서 대응한 일본군들을 상대하는 데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병력’ 사살이라는 확실한 전과를 올리기 위해서는 수군과 육군이 협조하는 ‘수륙합동작전’ 개념으로의 전환이 필요하게 되었다. 1593년 2월의 ‘웅포해전’ 때, 육군과 함께 합동작전을 전개하려 했으나 육지 상황이 여의치 않아 ‘수군’ 단독으로 초유의 ‘상륙작전’을 전개했다. 육군의 지원이 없는 가운데, 수군 자체에서 보유한 승병(僧兵)과 의병(義兵)을 상륙군으로 운용하여 나름 큰 성과가 있었으나 웅천 왜성을 확실하게 점령하는 데는 한계가 있었다. 또한, 1594년에 있었던 ‘장문포(왜성) 전투’ 때도 육군∙수군∙의병이 함께 참가해 ‘수륙합동작전’을 전개하였으나 지휘부의 소극적 참여로 인해 소기의 성과를 얻지 못했다. 

문헌상 최초의 서구인 ‘세스페데스’ : 임진왜란 때(1593년 12월) ‘고니시 유키나카軍’을 종군한 포르투칼 신부 ‘세스페데스’는 네델란드인 ‘하멜’보다 60년이나 빠른 시기에 한국(조선) 땅을 밟았다. 이를 기려(?) 웅포해전이 있었던 ‘웅천왜성’ 부근에 기념공원을 세웠다. 조선인 포로를 대상으로 ‘선교’활동을 실시했다 전해지지만, 왜군을 종군했던 신부를 기념하는 것에 대한 정서는 곱지 않다

 

부산포 해전 이후, 임진년 이후의 전쟁 전개

1592년 9월 1일에 있었던 부산포해전은 임진년 마지막 해전이었다. 부산포해전을 포함하여 열 차례의 해전을 치르며 해상을 통한 전라도 진출이 불가함을 인식한 일본군은, 심각한 보급난을 해결하기 위해 전라도 진출의 ‘요지’인 진주성 공략에 나섰다가 전멸에 가까운 참배를 당한다(1592년 10월. 제1차 진주성 전투. 진주대첩). 

부산포해전과 부산의 상징 ‘부산탑’ : 부산시민의 날은 10월 5일이다. 이는 임진년 ‘부산포해전’에서 승리한 날인 ‘9월 1일’에 해당한다. 부산포해전을 지휘했던 이순신장군 동상이 1955년 용두산 공원에 건립됐고, 그 후방에 부산의 상징 ‘부산탑’(1973년. 높이 120m)이 세워짐으로써 부산의 중심 공간이 되었다. 최초의 부산탑은 1963년 부산직할시 승격 기념으로 세운 ‘서면 로터리 부산탑’이었으나 부산에 지하철이 착공되면서 1981년 철거됐다(작은 그림 : 부산 서면 문화로에 있는 1/10 축소 서면 부산탑 모형)

해가 바뀐 계사년 1월, ‘선조’를 쫓아 북진했던 일본군이 ‘평양성전투’에서 조∙명 연합군에 대패하면서, 한성 이북으로 진출했던 모든 ‘부대’(함경도로 진출한 가토 기요마사軍 포함)들을 한성 일대로 집결시키는 등 전반적으로 부대를 남쪽으로 ‘재배치’하기 시작한다.

일본군을 추격해 남하하던 ‘조명연합군’은, 한양 북방에서 치른 일본군과의 ‘벽제관전투’(1593년 1월 27일. 고양시 덕양구)에서 대패하면서 개성으로 다시 물러나고 만다.(이 ‘백제관 전투’는 칠천량해전, 울산성 전투와 함께 일본군이 꼽는 3대 대첩 중의 하나다) 임진강을 건넌 ‘조명연합군’과 합세하여 한양을 탈환할 계획으로 ‘행주산성’까지 진출했던 ‘권율부대’는 조명연합군이 패퇴함에 따라 오히려 일본 부대들 사이에 ‘고립’되고 만다. 그러나 권율부대는 불리한 지형적 여건과 열세의 전투력(조선군 9천, 일본군 3만)에도 불구하고 민∙군이 합심하여 일본군의 7차례에 걸친 공격을 격퇴하니 이것이 임진왜란 ‘3대 대첩’ 중의 하나인 ‘행주대첩’이다.(1593년 2월 12일).

한편, 평양성 탈환 소식을 들은 선조는 이순신에게 다시 출정할 것을 지시한다. 이순신은, 부산포 공략에 최대 걸림돌인 ‘웅포’를 공격하기로 한다. 일본군은 웅포에 왜성을 쌓고 함선까지 주둔시키고 있다. ‘웅포해전’(1593년 2월 10일~3월 6일)에서 초유의 ‘상륙작전’(수륙합동작전)을 구사하는 등 약 한 달간의 전투를 통해 많은 전과를 올렸지만 일본군의 ‘웅포’ 전진기지를 발본색원하지는 못했다.

웅포해전지 : 일본군 본영인 ‘부산’ 공격에 앞서 반드시 제압해야 하는 이곳 ‘웅포(웅천)’에서 한 달이 넘는 긴 전투를 했다. 넓은 바다로 나오지 않으려는 일본군을 상대하여 ‘상륙작전’까지 실시했다. 이곳에서 서쪽 2km 지점에 ‘제포(薺浦)’가 있다. 제포는 세종 때 ‘3포 개항’과, 중종 때 ‘3포왜란’이 일어난 역사의 현장이다. 그러나 현재는 ‘제포 성지(城址)’의 흔적만이 겨우 알 수 있을 정도다

이후 조선과 명나라군의 압박, 군량과 물자의 부족으로 인해 일본군은 1593년 4월 한양을 떠나 남해안까지 남하하기 시작한다. 명나라의 보호(?) 아래 큰 전력 손실 없이 무사히 남해안까지 내려온 일본군은 남해안 요소요소에 ‘왜성’을 쌓고 아주 ‘자리’를 잡게 된다.

왜성에 틀어박힌 채 전열을 재정비한 일본군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명령에 따라 임진년 ‘1차 진주성전투’ 때의 패전에 대한 ‘복수’로 진주성을 재차 공격하게 된다(2차 진주성전투. 1593년 6월). 이 전투에서 극복할 수 없는 피∙아의 전력 차(조선 약 3만, 일본 약 9만 : 7년 전쟁 중 일본군이 최대 투입한 전투)로 인해 조선 민∙군은 전멸하고 만다. 그러나 진주를 넘어 호남을 도모하려던 일본군으로부터 호남을 보전할 수 있었던 것도 충분히 기적이 아닐 수 없다.

명나라군은 ‘평양과 한양까지 수복하면 그들의 할 일은 다했다’라는 인식 하에 더 이상의 전투를 회피하고, 일본과의 기나긴 ‘강화협상’에 들어간다. 강화협상이 진행되면서 명군은 대구∙남원∙순천 등지에서 일본군과 대치하기만 한다. 또한 강화회담의 틀을 깨지 않기 위해 일본군과 전투를 기도하는 조선군의 손발을 묶어두게 됨에 따라 전쟁은 소강상태를 보일 수밖에 없게 된다.

1593년 7월 본영을 여수에서 한산도로 이전한다. 이로서 견내량을 확실히 통제함으로써 일본군의 서진(西進)을 확실히 막을 수 있게 되고, 일본군의 본거지인 부산을 공격하기에 훨씬 용이한 여건이 된다. 그리고 이순신장군은 1593년 8월 15일 조선 수군을 총괄하는 초대(初代) ‘삼도수군통제사’로 임명된다. 전쟁이 계속되면서 견내량은 조선과 일본 수군이 장기간 대치하게 되는 분계선이 되고, 이곳에서 조선과 일본 간의 힘의 균형이 이뤄지게 된다.

왜선의 전진기지 ‘장림포구’의 변신 ‘부네찌아’ : 부산포해전 하루 전날 해전이 있었던 ‘장림포구’. 그 후 어항으로 발전했다. 현재는, 다양한 색을 입은 건물과 배가 떠있는 포구 풍경이 이탈리아 ‘베네치아’를 연상시킨다 하여 ‘부산 베네찌아’로 불린다. 아래 층은 어민들의 ‘어구(漁具)창고’이고, 위층은 카페.공방.각종 기념품 가게 들이 들어서 있다. 이곳 ‘부네찌아 선셋전망대’에서 보는 낙동강 하구 일몰은 이미 소문이 자자한 ‘핫 플레이스’이다

 

부산지역을 자전거로 답사여행을 하려면

부산지역 자전거 여행은, 앞선 여행기 ‘메멘토벨로 시즌2, 제 3 편 『임진왜란의 서전(緖戰) ‘부산지구전투’, 조선(朝鮮)은 참패하고 말았다』를 기준으로 다음 장소 정도를 추가할 것을 추천한다. 더 추가할 곳은 초량목(영도다리), 다대포, 몰운대 정운비, 아미산 전망대에서 보는 낙동강하구, 장림포구의 변신 ‘부네찌아’ 등이다.

 

  부산지역 자전거여행 포인트

 

< 참고 자료 >

* 이민웅, <임진왜란 해전사>, 청어람미디어, 2008

* 이민웅, <이순신 평전>, 성안당, 2017

* 황현필, <이순신의 바다>, 역박연, 2021

* 제장명, <이순신 백의종군>, 행복한 나무, 2011

* 박종평, <난중일기>, 글 항아리,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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