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김종성(자유기고가)

흑백TV 시절 어린이방송에서 대덕의 한국과학기술원이 나오던데, 출연한 여자어린이(지금쯤 환갑이 되었을라나?)의 질문이 생각난다. “왜 그런 걸 서울에 세우지 않나요?”라고 물으니, 그때 답변이 과학자들은 조용한 시골이 연구하기에 더 좋아요식으로 달래주는 것이었다. 어려웠던 시절, 집권자들이 당장 챙기기에 용이하도록 국책사업을 서울 위주로 유치하던 게 그만 좋은 건 전부 서울에만 있어야 한다는 관념으로 베인 건지 모르겠다.

지난번에 서유럽의 쇠망을 거론해 보았다. 남들이 그들을 부러워할 정도로 충분히 가난한 상태였을 때의 오만으로 인하여 남들이 그들을 얼마나 추월해 버렸는지도 모르고 방치된 낙후성을 독창적 전통으로 치부하고 있다가 실제상황 앞에 밑천이 드러나니 애써 현실을 부인하고픈 상태 말이다. 이를 서울을 벗어나기 두려워하는 우리의 실태도 서유럽의 중세적 고집과 뭐가 다른지 생각해볼 일이다.

 

더 좋은 환경인데도 경쟁력은 더 약하다

2010년 1057만 이후로 서울 인구는 계속 줄고 있다 
2010년 1057만 이후로 서울 인구는 계속 줄고 있다 

지금은 우리나라 인구가 5천만이 넘고 서울 인구는 941만이니 총인구의 20%가 못 되는데, 35년 전 우리나라 인구가 5천만이 되지 않았을 때 서울은 1천만이 넘었기에 20%를 훨씬 상회했었다. 그럼에도 당시 과외폐지와 고입평준화 그리고 대입체력장을 실시했더니, 소위 말하는 SKY 대학의 진학에 있어 서울 출신이 인구비율만큼 차지하지 못했었다. 가령, 알아주는 명문도 아니었고 심지어 지금은 저출산으로 인해 폐교 위기까지 맞은 모교이지만, 필자가 대학에 진학할 당시 필자 모교만큼 SKY에 많이 진학한 학교가 없었던 일이 지금도 기억에 생생하다. 그 당시 서울은 의외로 열세였다.

그러다가 서울이 SKY 대학 진학에 유리했던 것은 수시입학 제도를 도입하고 나서부터다. SKY대학 맞춤형 수시전형 준비는 실질적으로 학원과외로만 가능하고, 그 과외조차 대부분 서울에서만 가능하였기에 지방 사람이 SKY 대학에 진학하는 것은 서울에서 학원과외 시킬 부호급이 아니면 원천차단 당한 셈이다. 게다가 공교육 붕괴만큼 강남지역 학원의 합격결정력은 더 높아졌던 점에서, ‘체력장 폐지도 어쩌면 장애인 배려로 위장한 연약한 서울의 비교우위를 조장하기 위한 술책이 아니었나 생각될 때도 있다. 그나마 요즈음 짜고 치지 않으면 불가능한 예지력을 보인 일타강사 비리라도 이슈화된 게 다행이라고 봐야 한다. 일타강사 아니면 공부가 안 되는가?

서울은 어디에?
서울은 어디에?

수시입학처럼 짜고 치지 않으면 이길 능력이 없는 서울의 나약함은 필자가 즐겨보는 육상경기에서 잘 나타난다. 서울이 1위를 하는 일이 거의 없고, 설령 가뭄에 콩 나듯 서울이 1위를 했다 해도 그 선수의 출신 모교가 대부분 지방이더란 거다. 더 좋은 시설, 더 좋은 코치, 더 좋은 대우를 받고도 그것 밖에 못한다? 그것도 최상급 지도층인 금메달리스트 출신이 가장 많이 사는 곳이고, 선수층에 해당하는 연령대의 3분의 1 가까이 거주하는 곳이어서 모집단이 가장 큰데도, 3분의 1은커녕 30분의 1정도 밖에 몫을 해내지 못한다는 건 생각해 볼 문제다. 그마저도 뜯어보면 서울 출신이 아니란 점에서 서울은 굴러온 돌이 박힌 돌을 지배하는 곳이란 말인가. 좋은 유전적 요인조차 희석시킬 정도의 후천적 허약화는 도대체 어디서 비롯된 것일까! 결국 서울은 이미 잘된 사람들이 모인 곳일 뿐, 잘 될 아이들이 자랄 곳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지방에 겁을 줄 수 없는 서울

대개의 나라는 수도가 중심부 내지는 살기 좋은 곳에 위치하였기에 수도의 사람이 유약해지고, 방송매체를 통하여 수도 위주로 공개되어 지방 사람에게 속을 다 읽히는 반면, 변방화된 지방 사람의 속내를 알기가 어려운 데서 생기는 두려움을 수도 사람은 갖고 있다.

그래샴의 법칙이 아니더라도 그렇다. 사실이었는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오래 전 우스갯소리 같이 듣기로는 미국에선 흑인거주지에 백인이 들어가 살려고 하지 않으며, 백인거주지에 흑인이 들어오면 백인들이 그 동네를 슬슬 빠져나간다는 말이 유행했다. 비슷한 게, 지방에서 서울로 올라와 사는 건 봐도 서울에서 지방에 내려가 사는 경우를 거의 못 본다. 내쫓지도 못하고 그냥 싫어서 피하다 터전을 잃는다.

검정고무신 시절 우리 고향에서도 읍내 애들은 딴에는 촌놈 아니라고 검정고무신 대신 파란고무신을 신었고 머리도 빡빡 밀지 않았다. 그 파란고무신에다 상고머리 차림으로 검정고무신에다 빡빡머리로 살아가는 골짜기 동네에 놀러 가면 왠지 그 동네 애들에게 무슨 해코지 당할까봐 무서웠던 기억이 난다. 당시 읍내 애들이 골짜기 애들에게 가진 공포를 지금 도시사람들이 시골사람에게, 서울사람이 지방 사람에게 가지는 건가? 그럼 누가 누구를 무서워하는지 극명해진다.

다행히 이젠 시골이 노인천국이 되어 옛날 같이 사납지 않지만, 지방 사람들의 텃새도 그렇다. 교과서에서 배운 대로 순박한 줄 알았더니 못된 것은 서울사람보다 더 많이 알고, 서울의 명물에 안 가보기로는 대부분의 서울사람들과 비슷하더란 거다. 가령, 롯데월드나 남산타워에 지방 사람이 안 가봤다고 세상물정 모르는 것처럼 취급하기엔 좀 낯간지러운 자랑 아닌가 싶은 게, 서울에 살아도 굳이 그런 곳에 갈 일이 없는 사람이 많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지방의 우주발사센터, 핵융합로, 원자력발전소, 조선소, 항공기 공장 안 가봤다고 서울사람보고 세상물정 모른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롯데월드와 인공태양 k-star 핵융합로
롯데월드와 인공태양 k-star 핵융합로

부러워하면 지는 거라는 식인지, 서울의 이유 없는 우월감은 지방 사람이 부러워할 거라는 착각에서 비롯되었다고 본다. 외부로 힘을 뻗치기에 우월한 게 아니라 마치 중원처럼 남이 자신을 탐내는 것을 부러움으로 해석하여 좋은 것 차지했다고 우월하다는 것이다. 필요하지 않아도 서울이 가졌기에 필요한 거라는 관념이다.

부러워할 거라는 착각 속에 관광 등을 통하여 지들 자랑만 했지 남들이 얼마나 추월해버렸는지 모르는 서유럽처럼, 개인소득에서 서울이 1위가 아닌지 오래되었건만 지방 사람들이 가난할 때 서울에 품었던 부러움을 가난하지 않은 지금도 그럴 것으로 착각하는 게 아닌가 싶다. , 서울이 지방에 대해 가진 무기는 군침 흘리는 산적 앞에 놓인 예쁜 처녀가 비싼 분홍치마 자랑하는 격이라는 거다. , 얼마나 더 말랑말랑한 분홍색인가를 두고 우월을 논하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는 거다. 차라리 얼마나 더 날카로운가를 두고 논하기라도 했다면 모를까.

좀 삐딱하게 생각해보면, 말랑말랑한 분홍색 지향을 서울의 우월적 요소로 인식하는 이유는 그것이 집값을 올리기 때문이라는 생각도 든다. , 서울의 집값은 쓰레기 매립장과 발전소 같은 집값 떨어지게 하는 님비시설을 전부 지방에서 유치해준 대가라는 말이다. 그런 님비시설로 인한 지방 집값의 희생을 고마워해주는 차원에서라도 지방에 대한 존중이 필요하다고 본다. 그렇지 않을 경우 지방의 반발로 서울의 쓰레기와 전기를 서울에서 해결해야 한다면 상황은 완전히 달라진다고 본다.

 

지방으로 가는 건 두렵고, 자연으로 가는 건 부럽다?

서울 벗어나 수도권으로 밀려나든지, 지방도시로 밀려나든지, 이에 더하여 농촌으로 밀려나면 인생추락으로 보고, 그것도 사무직을 벗어나면 인생실패로까지 보는 관념이 서유럽의 쇠퇴와 왠지 오버랩 된다. 외노자와 다문화가 들끓는 다양성을 극복해야 하는 지방 실정을 감안하면 서울은 적응결핍으로 면역이 약해져 갈라파고스화 되어가고 있음을 본다.

웃기는 건 지방이라는 현실은 부정하고 싶어도, 자연이라는 관념은 향유하고 싶어 한다는 거다. 그 실태가 바로 시골에 내려간 사람들이 외부와 소통이라도 되고 시장이라도 형성된 읍내 빈집들 놔두고 억지로 외진 산골짜기에다 전원주택이라는 이름의 별장을 짓고 사는 것이다. 일거리를 찾을 수 있는 농공단지 같은 곳은 혐오시설로 보고 최대한 속세와 먼 불편한 곳에 독보적인 풍광만 차지하려고 한다. 이게 정상인가? 난 멧돼지 무서워서 그런 곳에 못 살겠다.

요즈음 전원주택은 유지관리 때문에 새로운 빈집이 되고 있다(출처 : pixabay)
요즈음 전원주택은 유지관리 때문에 새로운 빈집이 되고 있다(출처 : pixabay)

아직도 시골이라고 하면 아마존 원주민 보듯 그저 후진상태로 사는 것으로 생각하고, 세속적 텃세를 꺼려서 읍내나 마을에서 생활할 생각은 꿈도 못 꾸고, 현지 사람들과 접촉을 피하려고 최대한 후진 골짜기에서 별장 같은 것 지어놓고 살려고 한다면, 미안하게도 그건 정말 무지한 판단이다. 그게 바로 해외여행 가서 현지 맛집은 알아도 시골의 산업구조는 모르는 서울촌놈이다. 그 시골사람들도 실은 대부분 해외여행을 가봐서 서울사람만큼 해외물정을 안다. 이러니 서울사람이 지방 사람을 지배하지 못한다는 거다. 부러워할 만하지도 않은데 속으로 부러워하는 줄 착각하지 말란 거다.

농공단지에서 만든 유명음료
농공단지에서 만든 유명음료

흔히 우습게 보는 농공단지의 위세가 어느 정도냐 하면, 캔음료나 스프레이캔의 제조지를 보라. 그것들 전부 시골 농공단지에서 만든다. 시골의 농공단지 공장 한번 가봐라. 업종별로 다르지만 로봇화된 공장이 많다. 오래 전에 조성된 도시산단의 중소제조업체보다 시설이나 환경이 더 좋은지 오래다. 서울 촌놈이란 말이 실감난다.

사람이 모자란다는 소리만 믿고 필자가 제2인생을 위해 고향 농공단지에 일자리를 신청해봤는데, 의외로 깐깐하더라. 남들이 보기엔 사무직이 좋을 것 같지만, 그런데서 뭘 몰라서 일이 막히면 개망신 당할 노릇이라서 필자는 생산직을 하려는 건데, 나이 때문에 안 된다느니, 생산직을 만만하게 본다느니 식의 텃세가 만만치 않았다. 고향이라고 내세워도 떠난 지 30년이 넘고 굴러온 돌들이 이미 공장 차리고 이젠 그들이 주인인데, 그들 앞에 여기가 고향이라느니 하는 소리는 아예 안 먹힌다. 하긴 인천에 30년 가까이 산 나도 해외에서 30년 살다온 사람이 인천이 고향이라고 하면 그가 지금의 인천에서 생활이 가능할 사람으로 보지 않는 것과 같으리라. 고향과 터전은 다른가 보다.

 

지방의 외국화 문제 - 2의 대마도/간도

농공단지의 사무직들은 주로 인근 대도시에서 출퇴근하기에 논외로 하더라도, 그런 시골에 굴러 들어와 사는 외지인은 크게 두 가지다. 농공단지 내의 기숙사에 바글거리는 외노자(아마 해당 시골인구의 10%가 넘으리라)가 첫째부류요, 읍내가 아닌 골짜기에 별장 짓고 사는 도시사람들이 둘째부류다.

시골 지역 농공단지의 외노자는 대부분 공장 내 관리동이라는 기숙사에 거주한다. 그래서 시골 읍내에 나돌아 다니는 외노자가 그리 많아 보이지 않는 것이지, 이들을 풀어놓으면 40세 이하 인구의 절반이 넘는 곳이 많을 것으로 본다. 게다가 다문화 가정까지 고려하면 젊은 사람 중에 순수 내국인 비율은 더욱 낮아지게 된다.

농공단지 외노자 중에 여자는 소수인지라 남자들이 우글대는 공장 내 기숙사에 같이 두기에는 위험하여 회사 측에서 읍내에 월세방을 마련해주는데, 이들 외노자 여성과 다문화 여성 때문에 그나마 읍내에 드문드문 젊은 여성이 좀 보이고, 거의 흉가 수준의 읍내 떡집도 농공단지의 외노자 간식 주문 덕에 그나마 일감이 있어 고독을 씹으며 떡을 빚고 있는 것 같다.

지난 글에서 유럽이 원주민인 백인의 저출산과 난민인 무슬림 인구의 폭증으로 다음세대엔 인구역전이 일어나 결국 나라를 빼앗길 거라는 애기를 꺼낸 적이 있다. 우리도 그 짝 나게 생겼다. 한 세대 전에 읍내나 마을에서 방귀께나 뀌던 어른들이 살던 집은 모두 빈집이고, 우리네 모친들이 그리도 증오하던 술집색시들의 웃음소리와 분냄새가 흘러나오던 무슨 이니 무슨 이라는 읍내 술집들은 전부 폐업하고 지붕엔 와송(瓦松)만 을씨년스럽게 난무한다.

와송(출처 : 건강정보)
와송(출처 : 건강정보)

빈집 아니래봐야 할머니 한분만 사는 집들이 대부분인데, 그 분들마저 돌아가시면 더욱더 빈집만 늘어갈 판국이다. 이런 빈집이 농공단지에서 해고되거나 체류기간이 지난 불체자의 아지트로 악용된다면 읍내를 더욱 황폐화시키고 저절로 장악될 우려가 있다.

골짜기 별장도 문제다. 통신회사에서 인터넷 설치를 거부하는 일이 다반사이고, 택배직원이 집집마다 일일이 갖다 주기 귀찮아서 택배물을 차에서 내리기 쉬운 곳에 대충 던져놓는 식으로 아주 퉁명스럽게 대한다. 모두 그들에게 채산성이 안 맞기 때문이고, 돈도 안 되는 사람들 괜히 배려해 줘봐야 엉뚱한 심부름꺼리만 덮어쓰기 때문이리라.

 

자연향유보다는 사회장악부터

생각건대, 우리는 지방에서 자연을 누릴 게 아니라 사회를 장악해야 한다. 지방에서 내국인이 충분한 위세를 유지하지 않으면, 외국인을 동화시키기는커녕 지방이 외국화될 우려가 있기 때문이다(러시아가 극동지역을 중공에 개방하지 않으려는 이유를 생각해보라). 영토고권이라도 흔들리지 않으려면, 적정수준 내국인이 지방으로 진출하여 한국인의 우위를 유지해야 한다.

이딴 식으로 헛된 부러움을 추구하느라 지방이라는 세속은 배제하고 자연이라는 탈속만 찾다간 서울은 갈라파고스가 되고 지방은 외국이 될까 두렵다. 우리 역사 속에 그런 사례가 대마도와 간도 아닌가.

언제까지 골짜기에다 쓸데없는 엉뚱한 서울만 자꾸 만들 텐가. 그런 귀곡산장들은 왜 난개발이라고 하지 않나. 그딴 식이면 차라리 우리나라 전체를 그냥 서울에다 편입시키지 그러나.

어찌 보면, 이러한 문제는 필자가 예전의 글에서 주장했던 폐가합촌(廢家合村폐촌합동(廢村合洞) 개념을 도입했다면 좋았을 텐데 자만해본다. 원래 교통·전기·통신·상하수도 같은 인프라를 조성하는 데는 적정규모 이상 집단화 되어야 경제성이 있기 마련이므로, 별장 같이 산개한 독립가옥일수록 소중한 산야는 산야대로 귀중한 농지 농지대로 낭비하면서도 인프라 구축에는 더 불리하고 비용이 많이 들기에 결국 흩어진 동네를 조성한 난개발 밖에 안 된다. 하물며 치안과 소방 측면에선 더더욱 그러하다.

힘 좀 있는 누군가 폐가합촌·폐촌합동 쪽으로 챙기는 사람 좀 있었으면 싶다. 그래야 시골 집값도 오르고 자연히 내국인도 활착된다고 본다. 시골에 내국인을 유치하는 데는 시골 집값 오르게 만드는 것 이상으로 씨알 먹힐만한 방도가 없지 않은가.

 

PS : 여름의 지혜 (필자 의견)

뒷창을 조금 내려두거나 페트병에 물을 담아두면 과열 방지에 도움이 된다 
뒷창을 조금 내려두거나 페트병에 물을 담아두면 과열 방지에 도움이 된다 

여름철 햇볕아래 주차한 차 내부의 과열은 무섭다. 자동차 실내온도가 80~90도 이상으로까지 올라가는데, 이를 낮추는 방안이 없을까?

우선 뒷좌석 유리를 1cm쯤 내려놓는 것이다. 그러면 바깥기온인 35도짜리 공기와 열교환 하게 된다. 앞좌석 유리를 열 경우 운행시 바깥에서 날아든 먼지가 운전자의 눈에 들어오기에 이를 방지하기 위하여 뒷좌석 유리를 여는 것이다.

그리고 사각 페트병 몇 개에다 물을 채워 뒷좌석 바닥에 놓아둔다. 물의 비열 때문에 차내 열을 상당부분 흡수해줘 온도상승을 막아준다. 평소에 사람이 잘 타지 않기에 뒷좌석 바닥에 두는 것이며, 코너링 시 페트병이 차안에서 구르지 않도록 사각병을 쓴다.

이렇게 해도 운전석 시트는 여전히 뜨겁긴 하지만, 그래도 하지 않았을 때보다 훨씬 덜 뜨겁다. 정 그러면 뒷좌석 바닥이 아닌 운전석 시트에 페트병을 놔두면 훨씬 효과가 있다.

필자 김종성(자유기고가)
필자 김종성(자유기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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