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처에 김유신 흔적, 통일의 희망은 어디에

백곡지 호반에 있는 식파정. 4칸짜리 단출한 규모로 흙길을 1km 통과해야 볼 수 있으며, 조선 광해군 때의 문인 이득곤이 세웠다
백곡지 호반에 있는 식파정. 4칸짜리 단출한 규모로 흙길을 1km 통과해야 볼 수 있으며, 조선 광해군 때의 문인 이득곤이 세웠다

진천은 유명한 속설인 ‘생거진천(生居鎭川) 사거용인(死居龍仁)’에 등장하지만 외지인에게는 충남인지 충북인지부터 헷갈리고 존재감도 떨어진다. 신라말의 고승 도선국사가 “용인은 금닭이 알을 품고 있는 형상”이라고 해서 명문세가의 무덤이 많은 것이 사실이다. 그런데 이 용인의 대구(對句)로 진천이 등장하는 것은 흥미롭다. 용인(591㎢)은 진천(407㎢)보다 훨씬 넓으나 산이 많고, 진천은 들이 넓어 물산이 풍족한 때문일까. 하지만 지금의 용인은 인구가 107만에 달하고 진천은 8만6천에 그치니 ‘생거진천 사거용인’은 이미 무색하다. 현대적 ‘생거’의 기준은 수도권 아닐까.

어쨌든 ‘안성맞춤’처럼 익히 알려져 있는 스토리텔링을 지역이 놓칠 리 없다. 진천에는 ‘생거진천’ 테마가 넘쳐난다. 하지만 내가 진천에 주목하는 것은 삼국통일의 영웅 김유신 장군의 고향이기 때문이다. 김유신의 활약으로 각축하던 삼국이 통일되어 한민족 탄생의 계기가 되었듯이, 새로운 통일도 진천에서 어떤 실마리를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싶어서다. 위인은 지세(지기)를 타고 난다고 한다면 진천에는 현대적 통일을 앞당기는 어떤 힌트가 숨어 있지 않을까.

김유신 사당인 길상사는 23년 5월부터 장기 보수공사 중이다. 신라시대 만노군 시절 관청인 치소가 있었던 곳으로 추정되며, 뒤쪽 산줄기를 따라 치소를 보호하는 도당산성이 남아 있다

김유신의 영정을 모신 길상사
길상사에 모셔진 김유신 영정. 물론 추정도겠지만 위엄이 넘치는 모습이다

출발지로 잡은 종합운동장의 공식명칭은 ‘생거진천 종합운동장’이다. 운동장 입구에는 화랑공원이 있고 실내체육관은 ‘화랑관’인데 이 역시 화랑이던 김유신에서 착안했을 것이다.

폭염이라 운동장도, 읍내 거리도 텅텅 비었다. 읍내를 벗어나 서쪽으로 조금만 가면 도당산(210m) 기슭에 김유신의 사당인 길상사(吉祥祠)가 있다. 이 자리는 김유신의 아버지 김서현이 만노군 태수로 있을 때 치소(治所)를 둔 곳으로 추정되며, 지금도 길상사 주변으로 도당산성의 흔적이 잘 남아 있다. 여기서 백제와의 접경을 지키는 전방기지인 만뢰산성은 8km 정도 서쪽에 자리하고, 김유신의 탄생지는 그 중간쯤에 있다. 김서현과 김유신은 여기 치소와 거처, 만뢰산성을 오가면서 지낸 것으로 보인다.

삼국시대 진천의 지명인 만노군(萬弩郡)은 서라벌에서 중국행 배를 탈 수 있는 서해안으로 가는 길목이면서 백제와 접한 최전방이었다. 백제는 나라가 기원한 한성과 아리수 하류를 회복하려는 생각을 잠시도 포기한 적이 한강유역 남동부 백제-신라 접경지대는 내내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백제 입장에서는 만노군만 뺏으면 한성 지역이 서라벌 방면으로부터 고립되어 쉽게 공취할 수 있는 요지였고, 신라 입장에서는 북으로 진출하려는 백제의 기세를 꺾을 수 있는 목줄 같은 곳이었다.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는 최전선이어서 언제든지 국지전이 발생할 수 있는 위험한 곳이기도 했다. 강력한 활(쇠뇌)을 뜻하는 노(弩)가 1만개나 있다는 뜻의 ‘만노군’ 지명도 이런 사연을 반영하고 있다.

만추의 길상사는 은행나무 가로수가 특히 아름답다  

마침 길상사는 공사중이다. 안내판을 보니, 5월부터 시작된 공사는 마치는 시점이 없어 무기한인데, 기약이 힘든 발굴 현장에도 이런 경우는 없다.

길상사를 내려와 산과 들판의 접경을 따라 서쪽으로 향한다. 중리마을을 지나면 높다란 백곡지 댐이 보인다. 길이 410m, 높이 28.7m의 큰 규모여서 만수면적 243.4ha(약 74만평)의 거대한 백곡지가 생겨났다. 댐 서쪽에는 길이 100m의 출렁다리가 놓여 있지만 관광지로 알려지지 않았으니 뜻밖이다. 댐 아래에 조성된 진천역사테마공원(종박물관 포함)과 연계한 시설이다. 산줄기에 에워싸인 저수지는 조용하고 차분한 분위기다.

댐을 건너 34번 국도를 타고 저수지 북안을 돌아나간다. 엽돈재를 넘어 평택, 천안으로 이어지는 국도여서 차량 통행이 다소 있는 편이다. 두건마을을 지나 사정마을 방면으로 좌회전해 400m 가면 왼쪽으로 ‘식파정’ 안내판과 함께 갈림길이 나온다. 여기서 식파정까지 1km는 비포장에 노면도 거친 흙길이다. 그래도 백곡지 최고의 절경인 식파정을 지나칠 수는 없다.

호수 깊숙이 뻗어난 반도 끝에 자리한 식파정(息波亭)은 각면 2칸의 단출한 규모로 조선 광해군 때 이득곤이 지었다. 이득곤은 학문이 뛰어나 당대의 학자들과 교유했지만 당쟁이 극심하던 당시 벼슬길을 멀리하고 이곳에서 은거했다. 원래는 인근 두건리 냇가에 있었으나 백곡지로 마을이 수몰되어 이곳으로 옮겨졌다. ‘파도를 잠재운다’는 식파(息波)는 이득곤의 호인데, 개울가에는 어울리지 않던 이름이 광대한 호수를 접하면서 의미가 그윽해졌다. 터가 낮은 데다 소나무에 가려 조망이 잘 트이지 않는데, 조금 높은 자리에 세웠다면 더 좋았을 것이다. 정자 내부에는 최명길, 송시열 등 당대의 학자들이 남긴 시편이 가득 붙어 있다.

백곡지 가는 길목(행정리)에 있는 400살 느티나무 고목. 둘레가 5m나 되는 거목이다  

찾는 이가 드문 백곡지 출렁다리(100m)

1984년 생겨난 인공호수인 백곡지. 댐 길이 410m, 높이 28.7m의 큰 규모여서 만수면적이 243.4ha(약 74만평)에 달한다. 멀리 뾰족한 봉우리는 만뢰산 갈미봉(568m)백곡지 북안에 숨듯이 자리하고 있는 식파정. 솔숲에 가려 조망은 신통치 않다

정자 내부에는 이곳을 거쳐간 수많은 인사들의 시편이 걸려 있다. 최명길과 송시열 같은 당대의 학자도 보인다 

식파정 인근 호안 풍경

사정교를 건너 지구골의 농로로 들어선다. 불규칙한 다랑이 논이 무던한 단층으로 높아져 가고, 맞은편으로는 진천 최고봉인 만뢰산(611m) 동쪽 줄기 갈미봉(568m)이 우뚝하다. 작은 고개를 넘으면 갈미봉에서 흘러내린 능선이 마지막으로 갈무리한 준봉이 있는데 바로 김유신의 태를 묻은 태령산(450m)이다. 왕족의 태를 묻은 태실은 주로 고려~조선 시대에 성행했고, 김유신 태실은 태령산 꼭대기에 있다. 옛날에는 태(胎)를 생명력을 부여한 신성한 것으로 여겨, 조선왕조에서는 왕손의 태를 능묘에 버금가는 규모로 조성했다. 김유신은 왕족이 아니면서도 국내에서 가장 오래된 태실이다.

태령산 남쪽에 김유신 탄생지와 우물 터 등이 남아 있는데, 태실까지는 40분 정도 걸어 올라야 한다. 갈미봉에서 이어지는 산줄기 자체가 남동향으로 흐르는데다 태실 자체도 남동쪽을 바라보는 입지는 김유신의 부모인 김서현과 만명부인이 왜 이곳을 선택했는지를 알 수 있다. 경주를 향해 있는 태실은, 야합으로 경주에서 쫓겨난 두 사람이 “두고 보라. 아들을 나라의 보배로 키워서 우리 부부의 연은 하늘이 맺어준 것이란 걸 증명할테니까” 하는, 입을 앙다문 결기가 느껴진다. 그만큼 두 사람은 김유신의 훈육에 최선을 다했을 것이다.

만명부인의 어머니 만호태후는 진평왕의 생모로 당시 실권자였다. 김서현의 어머니 아양공주와는 시누올케 간으로 서로 사이로 좋지 않아 서현과 만명의 결혼을 반대해서 두 사람은 최전방인 만노군으로 도피하듯 온 것이다.

문봉리에서 태령산 끝단을 돌아 성암천을 따라 태령산 남록으로 진입한다. 만뢰산을 중심으로 오목한 협곡지대를 이루는 초입이다.

얼마 가지 않아 ‘화랑무예태권도성지’ 조형물과 김유신 탄생지가 나온다. 김유신은 일촉즉발의 팽팽한 긴장감이 감도는 최전방에서 태어나고 자란 것이다.

사송리 지구골 농로. 오른쪽 뒤로 갈미봉이 성큼 가까워졌다  

성암천을 따라 만뢰산 골짜기로 들어선다. 왼쪽 맨 뒤가 만뢰산 정상, 오른쪽은 김유신 태실이 있는 태령산

김서현은 다소 위험하더라도 만명이 함께 있는 한 골치 아픈 서라벌에서 멀리 떨어진 이곳이 마음 편했을 것이다. 그래도 백제와의 최전선이기에 방비만은 소홀할 수 없어 부임하자말자 백제와 마주보는 가장 높은 산인 만뢰산 정상에 있는 만뢰산성(萬賴山城)부터 보수했다. 만뢰산성 맞은편에는 백제의 최전방으로, 지금의 천안 동쪽에 남북으로 뻗은 산줄기를 따라 북쪽에서부터 위례산성, 성거산성, 왕자산성, 흑성산성 등이 각각 10리 안쪽의 거리를 두고 도열해 있었다. 신라쪽에서는 전방으로 나온 것이 만뢰산성 하나뿐인데도 백제가 산성을 줄줄이 쌓은 것을 보면 얼마나 예민하게 대응하고 있는지를 알 수 있다.

진중에서 태어난 김유신은 군사적 대치가 극심한 변경에서 자라서인지 어릴 때부터 무예에 관심이 많아 수련을 게을리 하지 않았고, 산과 들로 말을 달리며 저절로 강건한 기상이 몸에 배었다. 만명부인은 문무를 겸전하지 않으면 무식한 칼잡이가 될 뿐이라며 유불도(儒彿道)의 기본 경전을 가르쳤다.

태권도의 기원을 화랑에서 찾고자 한 듯 태령산 아래에는 ‘화랑무예태권도성지’ 조형물이 있으나 사실상 방치된 상태다

 

태령산 정상에 조성된 김유신 태실. 2단으로 흙을 북돋우고 돌담을 두르고 있다. 남동쪽 경주를 향하고 있는 점이 주목된다  

김유신은 변경의 군중에서 다소 거칠게 자랐지만 김서현과 만명부인의 지극한 보살핌으로 야성과 지성을 겸비해 10대 초반의 나이에 이미 태양 같은 위엄이 있어 주변에서는 제왕이 될 풍모라고 입을 모았다. 이런 소문에 어린 김유신을 불러서 본 만호태후는 “내 손자가 맞구나!”하고 김서현과 만명부인을 용서했고, 김서현 등은 곧 경주로 옮겨와 살게 된다. 김유신은 15세에 화랑의 우두머리인 국선(國仙)이 되어 기대를 한 몸에 받았다.

하지만 김유신 탄생지나 주변 일대를 보면 진천군의 어정쩡한 입장을 알 수 있다. 신라에 의한 삼국통일을 폄하하고, 심지어는 외세(당)를 끌어들여 같은 민족을 멸망시켰다는, 현대적 관점과 역사 가정법이 횡행하면서 김유신을 현창하기가 부담스러운 듯하다. 아마도 태권도의 근원을 화랑에서 찾고자 한 듯 ‘화랑무예태권도성지’ 조형물까지 만들었지만 구체적인 설명이 없는데다 주위는 방치되어 있고, 김유신 탄생지에는 조선시대 양식의 건물 한 채만이 덩그러니 앉아 있다. 지자체마다 출신 인물들의 생가를 복원하고 거창한 기념관을 세우는 트렌드와 대조된다. 

읍내 북쪽 사곡리 옥녀봉(456m) 자락에는 김유신이 수도하며 무예를 닦았다는 중악석굴도 전하지만 관광지로 전혀 개발되지 않고 있다. 경주 외곽에도 이런 석굴이 전해지지만 진천도 가능성이 없지 않다. <삼국사기>에는 김유신이 17세에 중악석굴에 들어가 기도하고 있을 때 난승이라는 도인이 나타나 삼국통일의 비전을 전해준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중악석굴이 이곳이 맞다면 현대적 통일의 영감을 주는 곳으로 재조명할 수도 있지 않을까.       

김유신 탄생지 상류에 화랑을 테마로 조성된 펜션 마을 ‘화랑촌’은 간판을 내린 지 오래다. 계곡 끝까지 거슬러 오르면 보탑사가 나오는데 경주 황룡사 9층탑을 모티브로 세운 통일대탑이 유명하다. 삼국통일의 기운을 이어받아 남북통일을 이루자는 취지인데, 높이가 42.7m에 달할 정도로 높고 웅장하지만 그래도 9층까지 올라가지 못하고 3층에 머물러 어딘가 어정쩡한 모습인 것은 어쩔 수 없다. 김서현이 수축하고 어린 김유신도 누볐을 만뢰산성은 보존 노력을 기울이지 않아 흔적을 찾기도 어렵다. 이래저래 김유신 탄생지는 홀대받고 방치되어 있다.

김유신 탄생지는 몇 개의 건물 터와 함께 한옥 한 채만 덩그러니 있다. 주민들은 탄생지가 큰 담장 안에 있다고 해서 '담안밭'이라 불렀다

탄생지 뒤쪽 산기슭에는 당시 식수로 사용했다는 연보정 우물이 남아 있다. 우물 아래에는 꽤 큰 못까지 있어서 김서현 거처뿐 아니라 일대에 주둔한 군사들의 식수원이 된 것으로 보인다

김유신이 기도하며 무예를 닦았다는 중악석굴. 진천읍 북쪽 옥녀봉 기슭에 있다. 석굴 입구에는 높이 12m의 대형 마애여래입상 부조가 있다

중악석굴 가는 길목에 있는 단석. 김유신이 칼로 잘랐다는 바위다. 경주 단석산의 단석과 흡사하다

만뢰산 계곡 끝까지 거슬러 오르면 보탑사가 나오는데 경주 황룡사 9층탑을 모티브로 세운 통일대탑이 유명하다. 높이가 42.7m에 달할 정도로 높고 웅장하지만 3층에 머물러 어딘가 어정쩡한 구조다    

보탑사 한켠에 있는 연곡리석비. 비문이 없어 '백비(白碑)'라고 부르며 조각기법과 규모가 대단하다(보물 제404호). 고려 초의 양식으로 추정되며 왜 비문이 없는지는 미스터리다

만뢰산 계곡 중간쯤에 있는 만뢰산생태공원. 외진 산속에 자리해 조용하고 한갓지다 

만뢰산 골짜기를 돌아 나와 성암천을 따라 남하하면 한적한 전원 속에 우뚝한 환희산(403m) 중턱으로 들어선다. 이곳에는 조선 중기 가사문학의 대가인 송강(松江) 정철(鄭澈, 1536~1593)의 무덤과 사당이 있다. 정철은 서울에서 나고 전남 담양에서 오래 살아 진천과 직접적인 인연은 없으나 사후 고양에 있던 묘를 손자 정양(鄭瀁)이 송시열과 상의해 이곳으로 이장했다. 풍수지리에 의거한 명당 관념이 투철하던 당시여서 정철을 존경한 송시열이 좋은 터를 제안한 것 같다. 명당은 후손의 발복(發福)이 목적으로, 선조의 유체를 통해서까지 부귀영달을 추구하는 욕망의 상징이다. 당연히 좋은 명당은 권문세가에서 독차지하기 마련이고, 기득권을 가진 후손들은 부귀영화를 누릴 가능성도 높으니 명당의 효험은 양해가 되었을 것이다.

정철의 영정을 모신 사당과 기념관은 터가 넓고 건물도 산뜻하다. 남쪽 능선 위에 둘째 아들(宗溟)과 나란히 묻힌 정철의 묘가 있다. 조선의 이른바 명당 터를 보면 ‘좌청룡우백호’를 거느린 오목한 산자락 혹은 낮은 산줄기 위가 많은데, 정철의 묘는 능선 위에 터를 잡았다.

정쳘은 국문학사상 가사문학의 대가로 유명하지만 정치적으로는 매우 복잡한 인물이다. 정여립의 모반을 처리하는 과정에서 정철은 반대파(동인)를 숙청하는 칼자루를 잡아 수많은 선비들을 형장이나 유배지로 보냈다(기축옥사). 정철이 주도했던 이 옥사로 인해 동인과 서인 간의 당쟁은 극으로 치달았고 그 결과 예측 가능했던 임진왜란의 대비도 놓쳤다. 서인 황윤길과 동인 김성일이 왜란 직전 일본에 통신사로 파견되어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만나고 와서는 일본의 침략 여부를 두고 서로 상반된 의견을 낸 것은 잘 알려져 있다.

사당에서 정철 묘까지는 300m 거리인데 길에 잡초가 가득해 찾는 이가 거의 없는 듯하다. 어쨌거나 그가 지은 사미인곡, 관동별곡은 지금껏 회자되고 있으니 그는 느꺼울 것이다.

송강 정철 사당에서 내려다본 모습. 환희산 중턱 해발 180m의 높직한 위치지대에 있다. 맨뒤 산자락 저편은 청주 오창읍이다

송강사에 모셔진 정철 영정  

나지막한 능선 위에 자리한 송강 정철 묘(뒤편). 앞은 둘째 아들 정종명의 무덤이다 

진천의 시골마을 입구에는 천하대장군 지하여장군이 서 있는 곳이 적지 않다. 나그네길을 위로해주고 서정을 더해주는 미소다 

양천산 자락을 벗어나면 진천들판이 펼쳐진다

아직 오전인데 뙤약볕에 폭염의 기세가 굉장하다. 열사병이 우려될 정도여서 문백면소재지 편의점에서 숨을 돌린다. 고맙고 다행스럽게도 전국 어디를 가나 면소재지에는 편의점이 있어서 급한 불을 끄기 좋다.

옥성저수지를 지나 양천산(351m) 동쪽 기슭 평산리를 거쳐 산지를 빠져나가면 진천읍 동쪽 들판이다. 읍내 남쪽 봉화산이 아직도 멀어 보이는 것은 지독한 무더위에 심신이 지친 탓이다. 다시 돌아온 읍내는 거리도, 종합운동장도 여전히 비어 있다.

글/사진 김병훈 발행인 

 

tip

생거진천 종합운동장에 넓은 무료 주차장이 있다. 김유신탄생지 뒤편의 활터인 화랑정 뒤에 우물터인 연보정이 있으나 23년 7월 폭우로 인한 산사태로 화랑정 진입로가 단절되어 접근에 주의해야 한다. 정철 묘는 사당에서 300m 남짓이며 길이 험해 도보로 다녀오는 것이 좋다. 문백면소재지에 식당과 편의점이 다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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