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골마다 은둔의 마을, 세상은 저 아래에

월전고개에서 바라본 남쪽 풍경. 해발 300m인데도 상당한 고도감이 느껴진다. 첩첩한 산줄기 맨 뒤로(왼쪽) 함안 여항산이 희미하다  

국내 유일의 운석충돌구로 알려진 합천 초계분지는 백두산 천지처럼 외륜봉이 빙 둘러싸고 있다. 둘레가 25km에 달하는 외륜봉 줄기는 태생도 그렇지만 지형도 범상치 않다. 운석 충돌의 충격파를 받은 분지 방면으로는 급경사에 계곡이 별로 발달하지 않았지만 반대 방면으로는 경사가 완만하고 긴 계곡이 형성되어 있다. 특히 분지 남쪽의 산들이 높고 깊은데, 최고봉은 천황산(688m)이고 미타산(663m)과 더불어 웅장한 산세를 펼치고 있다.

두 산의 남쪽으로 펼쳐진 긴 골짜기에는 산간마을이 곳곳에 흩어져 있고 마을들을 잇는 길이 능선과 산허리를 감돈다. 그렇다고 문명과 동떨어진 오지는 아닌 것이, 골짜기를 내려가면 면소재지로는 가장 큰 부림면(신반리)이 멀지 않다.

오른쪽 아래 부림면소재지(신반리)에서 미타산 등산로를 표시한 안내도. 중간중간 친절하게 현위치를 알려준다  

의령군 북단에 자리한 부림면은 웬만한 읍 규모다. 의령 총인구가 2만6천이고 의령읍이 9천500명인데 부림면은 2천800명으로 관내 12개 면 중 가장 많다. 초중고와 재래시장이 건재하고 상당한 규모의 농공단지도 활발하다. 중심가 거리는 자못 번화해서 온갖 가게가 다 모여 있다. 지금까지 본 면소재지 중 가장 크고 번화한 듯하다. 거리에는 활기가 흐르고 가게들도 잘 유지되고 있으며, 일부 도로 확장 공사도 진행 중이다. 메인 거리 좌우에 주차공간을 확보한 것도 질서 유지에 큰 도움을 준다. 다른 지역 읍내나 면소재지는 왕복 2차로 메인 거리에 주차공간이 따로 없는 데다 불법주차 차량이 줄을 지어 대단히 혼란하고 자동차나 보행자 통행이 불편한 곳이 많다.

마을 외곽 공설운동장을 기점으로 잡는다. 번듯한 트랙과 인공잔디 축구장을 갖춘 공설운동장도 면소재지급에서는 드물다. 공설운동장 뒤편 계곡으로 들어서면 얼마 가지 않아 업힐이 시작되면서 산으로 들어선다. 미타산에서 흘러내린 능선이다. 아스팔트 포장이 된 것은 산간 마을이 많아서일 테지만 통행 차량은 거의 없다.

신반리를 출발해 월전마을 가는 길. 숨 돌릴 틈 없는 업힐이지만 길이 좋고 조망도 가끔 트인다  

폭염에 언제 올라가나 아득하지만 꾸준히 페달링을 하다 보니 배곡재(170m)를 지나고 월전고개(300m)에 올라선다. 남쪽으로 뭇 산들이 겹겹이 중첩되고 능선들은 파도처럼 일렁인다. 멀리 가장 높은 산들은 함안 여항산(770m)~서북산(739m)~광려산(723m) 등이다. 근 40km 거리인데 꽤 선명하게 보일 정도로 맑은 대기에서 가을 기운을 살짝 엿본다.

월전고개를 넘어서면 산줄기로 오목하게 둘러싸인 월전마을이 그림 같다. 고도는 해발 250m이지만 아래가 저지대임을 감안하면 상당한 높이이고, 긴 골짜기 최상류에 숨듯이 있어서 더욱 각별하다. 20가구 남짓한 집들은 대부분 인기척이 있어 빈집 투성이인 다른 시골마을과도 다르다. 평야지대 농촌은 빈 집이 늘고 있으나 이런 산골에는 오히려 사람들이 찾아든다. 정신없이 빠르고 각박한 정보화시대지만 그만큼 번다한 세파에서 벗어나고픈 사람도 많다는 뜻이다. ‘자연인’에 대한 동경은 급진적인 정보화 속에서 극단적 아날로그 생활을 동경하는, 역설의 세태를 대변한다.

‘의미’는 ‘내가’ 인식할 때 비로소 활성화된다. 그런 면에서 세상의 온갖 소식, 뉴스를 많이 접할수록 ‘나’는 외부로 확산되는 것 같지만 그만큼 내면은 졸아들고, 제한된 인생에서 결국에는 방향을 잃고 만다. 적당한 단절을 유지하는 산골사람들이 현명해 보인다.

깊은 골짜기에 숨듯이 자리한 월전마을. 뒤쪽으로 미타산이 보인다

월전마을에서 내려다본 모습. 구비치는 계곡은 하류가 보이지 않는다. 멀리 창녕 읍내와 화왕산이 보인다  

월전마을을 지나 산모롱이를 돌아가면 채 몇 가구 되지 않는 옥공골이다. 경사지에 자리한 마을 앞으로 조망이 시원하게 트인다. 골짜기는 굽이쳐 하류가 보이지 않고 그 너머로 창녕읍과 화왕산이 아스라하다. 불꽃이 타오르는 듯한 화왕산 위로 해가 뜰 때는 특히 장관이겠다.

미타산 중턱을 서쪽으로 돌아나간다. 정상에는 미타산성이 남아 있고 바로 북쪽은 초계분지다. 분지 서쪽 대암산(591m) 정상에도 산성터가 전한다. 오래전 대암산 정상에서 만난 초계분지 토박이는 “우리 고향에서는 신라 대야성이 초계분지 그 자체라고 전해져 온다”고 해서 놀란 적이 있다. 대야성은 합천읍내로 비정되고 있는데 백제가 반간계를 쓰고 1만 대군을 동원해서 공격한 신라의 거점 성곽으로 보기에는 규모가 너무 작다. 당시 대야성을 지키던 성주 김품석은 나중에 태종무열왕이 되는 김춘추의 사위였다. 김춘추가 애지중지 하던 딸 고타소도 김품석을 따라 대야성에 있다가 백제 윤충 장군의 공격으로 모두 죽고 만다.

고타소의 죽음에 김춘추가 얼마나 충격을 받았던지 눈앞에 사람이 지나가도 모를 정도로 넋을 잃고 지냈다고 한다. 고타소를 특히 아꼈던 김춘추는 딸의 복수를 다짐하며 당나라와 고구려, 왜국을 오가며 원군을 얻어 백제를 치려고 했으니 대야성은 삼국통일전쟁의 불씨가 되기도 한 셈이다. 나중에 나당연합군 공격에 사비성이 함락됐을 때 먼저 항복한 백제 왕자 부여융(扶餘隆)을 신라왕자 김법민(나중에 문무왕)이 모욕을 주며 죽이려 든 것도 누나(고타소)를 죽인 복수의 감정에서였다.

그 주민의 말에 일리가 있는 것이, 초계분지 전체가 일종의 성곽처럼 산으로 둘러싸여 있어서 중간중간 보루를 쌓아 지키면 천혜의 요새가 되기 때문이다. 외륜봉에 남은 작은 산성들은 이를 뒷받침하고 있기도 하다.

미타산성을 보고 싶었으나 극심한 무더위에 길도 험해 다음을 기약한다.

미타산 아래 '미타약초농원' 앞 삼거리에서 남쪽으로 산록을 돌아 천황산 방면으로 간다. 정면의 길이다

미타산 남릉을 돌아나가면 드넓은 조림지가 펼쳐지고 맞은편으로는 천황산이 산허리에 상권마을을 품고 웅장하다. 상권마을은 해발 300~380m의 경사지에 다락논과 함께 정겹다. 미타산 남릉에서 상권마을에 이르는 임도는 노면이 거칠지만 숲이 성긴 조림지여서 조망이 잘 트이고 고도감도 아찔하다.

상권마을은 지대가 높지만 주변 골짜기는 널찍하게 트여 개방감이 좋다. 참으로 깊은 심심산골이지만 답답하지 않고 환한 분위기다. 이런 산골 입지는 보기 드문데 30가구 정도의 큰 마을이 형성된 것은 그만큼 터가 좋다는 뜻이겠다. 가장 높은 곳에 새로 지은 전원주택 단지가 들어선 것은 역시 조망과 개방감 때문이다.

상권마을을 통과하면 천황산 남릉을 이루는 봉산(564m)을 우회해야 한다. 임도는 해발 400m 산허리를 오르락내리락 하며 구불거리는데, 도중에 붕현촌을 스쳐간다. 붕현(鵬峴)과 봉산(鳳山), 봉수면(鳳樹面) 등의 지명을 보면 국사봉과 봉산 일원을 전설속의 길조인 봉황새나 붕새로 봤던 모양이다. 남으로 가파른 산세와 세 갈래 큰 산줄기는 봉황이 날개를 편 형상 같기도 하다. 국사봉 직하에는 봉암사(鳳巖寺)까지 있다.

미타산 남릉을 돌아나가면 천황산(오른쪽 중간 봉우리)과 다락논 위에 자리한 상권마을이 펼쳐진다

조림지 임도는 조망이 탁 트이고 고도감이 아찔하다

 

상권마을에서 뒤돌아본 미타산(가운데 뾰족한 봉우리). 방금 정면 산기슭의 조림지를 지나 왔다

 

솔숲이 그윽한 봉산 임도

이제 이번 코스의 백미이자 난관인 국사봉 봉암사 업힐이 기다린다. 5~6 가구의 상산동(上山洞)은 해발 410~440m에 자리해 미타산~천황산 일대에서 가장 높은 마을이다. 남쪽으로는 협곡이고 산록의 경사가 심해 고도감과 격리감이 대단하다.

상산동 서단에서 곧장 가파른 오르막이 시작된다. S자 헤어핀이 연속되는 마지막 구간은 경사도 25%를 넘나들고 산록도 가팔라 산중 별세계로 넘어가는 것만 같다. 드디어 해발 570m 신현고개 정상이다. 고갯마루 좌우에도 두 집이 있는데 인기척은 없다.

이제 거의 평탄한 산자락을 따라 1.4km 가면 최종 목적지인 봉암사다. 자전거가 나타나자 강아지 여러 마리가 요란하게 짖어댄다. 산사에서 개를 키운다는 것은 찾는 이가 드물고 외진 곳이라는 뜻이다.

해발 600m, 국사봉 턱밑에 자리한 봉암사는 기대와 달라 실망이다. 천상의 세계에서 천하를 내려다보는 그런 조망도 없고, 낡은 슬레이트 건물은 고풍이나 엄숙미가 깃들 여지가 없다. 강아지는 계속 짖어대는데 산사에는 인기척마저 없으니 무심쿠나. 잠시면 올라갈 국사봉 정상길은 잡초에 뒤덮인 데다 어차피 정상도 숲에 가려 조망이 없기는 마찬가지여서 발길을 돌린다. 아깝고 아쉬운 600m 고지다.

봉수면까지의 다운힐은 브레이크를 잡은 손가락이 아프고 디스크와 패드의 과열이 걱정될 정도로 5km의 급전직하다. 부림면까지 5km 역시 아주 완만하나마 내리막이어서 페달링이 가볍다.

상산동에서 봉암사 가는 길. 해발 500m를 넘어 고도감이 헌칠하고 아득한 원경이 드러난다. 맨 뒤 산들은 마산 무학산~함안 여항산 등이다

 

신현고개 업힐 도중 내려다본 남쪽 풍경. 바로 아래는 해발 200m에 자리한 봉수면 상곡마을이고, 가운데 맨 뒤로 마산 무학산이 우뚝하다

 

신현고개 직전은 극단적인 헤어핀이 연속되는 급경사 구간이다

신현고개 정상(570m). 고갯길 좌우에 민가가 있다. 고도감이 압권이고 조망도 좋은 위치다

봉암사 가는 길에 내려다본 모습. 산록이 급전직하로 흘러내리고 신현리 일대가 보인다. 오른쪽 뒤로 의령 최고봉인 자굴산(897m)이 보인다 

민가를 개조한 듯한 봉암사. 해발 600m 고지이지만 조망이 트이지 않아 아쉽다  

 

tip

부림면소재지에 식당과 마트, 편의점이 다수 있다. 일단 산중에 들면 물을 구하기 어려우므로 식수를 충분히 챙긴다. 산악구간이 다소 험해서 산악 초보자는 무리가 따를 수 있다.

글/사진 김병훈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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