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원분지에서 바라보는 덕유산의 웅자

매방재산 임도에서 바라본 덕유산 최고봉 향적봉과 안성고원. 향적봉은 구름에 살짝 가려 있다. 들판 가운데 낮은 산줄기는 2차 분지나 2차 분화구인 알봉처럼 둥글게 모여 있는 단지봉 일대다
매방재산 임도에서 바라본 덕유산 최고봉 향적봉과 안성고원. 향적봉은 구름에 살짝 가려 있다. 들판 가운데 낮은 산줄기는 2차 분지나 2차 분화구인 알봉처럼 둥글게 모여 있는 단지봉 일대다

덕유산(1614m)은 국내 4위의 고봉이지만 1, 2, 3위의 한라산(1950m), 지리산(1915m), 설악산(1708m)에 비해 관심도와 존재감이 현격히 떨어진다. 역시 진선미만 서는 포디엄 효과에서 제외된 때문일까. 덕유산은 웅장한 육산으로 지리산과 분위기가 비슷하고 서로간 거리도 멀지 않아 그런 듯하다. 내륙오지의 대명사인 ‘무진장(무주 진안 장수)’에 자리한데다 아득히 먼 ‘무주구천동’ 이미지도 한 몫 하지 않을까.

지금은 통영대전고속도로가 개통되어 덕유산 바로 옆을 지나가 차안에서 편안히 웅자를 감상할 수 있고 접근도 한층 편해졌다. 하지만 매번 시속 100km로 쏜살같이 스쳐가는 풍경이 아쉬워 향적봉 서편의 고원지대를 찬찬히 일주하며 산중 풍광을 보고 싶었다. 이 일대는 무주군 안성면으로 덕유산 북서사면 대부분이 포함되고, 향적봉 서쪽에 기이한 고원지대가 펼쳐져 있다. 이름은 따로 없으나 여기서는 ‘안성고원’으로 부르기로 한다. 해발 400m가 넘는 평탄지이지만 다른 지역과 고도차가 커서 고원으로 칭하기에 충분하다. 잘 보면 양구 펀치볼이나 합천 초계분지처럼 지름 6km 정도의 오목한 분지를 이뤄 침식이건 운석충돌이건 지질학적 사건의 결과물이 분명해 보인다. 특히 고원 내부에 울릉도 성인봉 나리분지의 알봉처럼 2차 분화구 격인 단지봉(508m)이 낮은 산줄기를 둘러 2차 분지를 이룬 것도 주목된다.

‘지리산 바라기’에서 소개한, 최고의 천왕봉 전망대인 산청 주산(828m)에 꼭 그대로 해당하는 매방재산(776m)이 고원 서쪽에 솟아 있고 임도가 나 있는 것도 이 고원을 더욱 각별하게 한다.

구랑천을 따라 상류로 가면 점점 향적봉이 가까워진다. 짙은 구름모자는 언제 벗으려나  

기점으로 잡은 안성면소재지는 고원지대의 모든 물이 모여 빠져나가는 일종의 ‘수구(水口)’에 해당하는 북서단의 최저지점에 있다. 고원의 생활 중심지여서 마을이 자못 크고 초중고가 모두 건재하다. 이런 ‘강소 마을’이 전국적으로 확산된다면 시골지역 인구감소를 막고 균형발전을 꾀하는데도 좋을 것이다. 안성고원은 들이 비옥하고 산기슭은 전원주택지로 최적이어서 사람들이 떠나지 않는가 보다.

아득한 고가도로로 지나는 통영대전고속도로 아래 안성생활공원에서 출발한다. 고도는 410m로 향적봉과는 1200m 차가 난다. 잔디밭 축구장은 어르신들의 파크골프장으로 활용되고 있고, 둘레에는 우레탄 트랙도 말끔하다. 멀리 향적봉이 구름에 가려 보일들 말 듯 한다. 오늘 모습을 드러내줄지 모르겠다.

향적봉에서 곧장 흘러내린 구랑천은 도중에 다른 물길을 더해서 수량이 대단하다. 이제 향적봉을 가까이 보려면 구랑천을 따라 상류로 올라가기만 하면 된다. 아주 완만한 들판은 일종의 선상지(扇狀地)로 계곡에서 흘러내린 토사가 쌓여 형성된 비옥한 대지다. 곳곳에 마을이 형성되어 있고 사람과 자동차가 오가 활기가 느껴진다.

덕산저수지 입구에서 뒤돌아본 안성고원. 정면으로 보이는 산이 나중에 지나갈 매방재산이다  

산에 들기 전 마지막 덕곡마을은 해발 550m로 5km를 왔는데 고도는 겨우 140m 높아졌으니 평균경사도 2.8%의 완경사임을 알 수 있다. 안성분지 동쪽 외곽을 순회하는 727번 지방도를 건너 덕산저수지로 올라서니 해발 600m를 넘어서고 구름 속 향적봉이 저 앞으로 가깝다.

덕산저수지부터는 임도가 시작된다. 무주군이 관광용 테마임도로 개설한 길로, 국립공원 경계선 바로 바깥으로 나 있다. 국립공원 내부는 임도 개설이 어렵고 자전거 통행도 금지되어 이를 감안한 것인데 자전거로서는 세심한 배려가 고마울 뿐이다.

덕산저수지에서 500여m 올라가면 텐트가 즐비한 덕산계곡 초입이다. 여전한 폭염인데도 계곡 곁은 시원한 냉기가 감돈다. 역시 피서는 깊은 계곡이 최선이다.

하지만 계곡을 벗어나지 밀지 완벽한 무인지경이다. 주위가 어둑할 정도로 숲이 짙은데 서사면으로 나서면 이윽고 조망이 트이면서 고원이 내려다보인다. 고원이면서 동시에 오목한 분지지형은 볼수록 기이하다. 바로 아래 비탈까지 개간되거나 전원주택지가 들어서서 고원분지에는 생동감이 넘친다.

길은 고도 650~690m 사이를 오가며 등고선을 따라 구불거린다. 덕유산 품에 들었으니 산은 보이지 않고 고원만 감상한다. 이를 감안해 조망이 좋은 곳에는 작은 전망대를 여러 곳 만들어 놓았다. 덕유산은 고원 반대편에 솟은 매방재산(776m) 기슭에서 바라볼 것이다.

덕유산은 1600m를 넘는 고산이지만 품이 무던하고 바위가 드러나지 않은 육산이라 조금 큰 ‘동네 뒷산’으로 느껴질 정도로 친근감을 준다. ‘덕이 많다’(德裕)는 이름 그대로다.

간혹 북쪽으로 조망이 트이면 향적봉 서쪽의 만선봉(1232m)이 보인다. 덕유산리조트의 스키 슬로프가 있는 곳인데, 이곳에서는 리조트가 있다는 것을 조금도 눈치 챌 수 없다.

덕산계곡 초입에 몰려든 피서객. 이곳만 지나면 무인지경이다

 

테마임도 안내판. 덕유산국립공원 경계선 바로 바깥으로 길을 내 자전거 통행이 가능하며, 국립공원관리공단의 간섭에서 자유롭다 

테마임도 중간중간 쉼터와 전망대가 마련되어 있다

테마임도에서 바라본 안성고원. 오른쪽 통영대전고속도로 고가도로가 있는 곳이 안성면소재지이고, 그 왼쪽 산이 덕유산 조망대인 매방재산이다

테마임도에서 북쪽으로 모습을 보인 두문산(1053m). 산 너머에는 덕유산골프장과 덕유산리조트가 있다

고원지대를 내려다보는 높직한 곳에 자리한 민가

 

낙엽송이 많은 숲길

 

테마임도에서 북으로 바라본 봉화산(왼쪽, 886m)과 적상산(오른쪽, 1034m). 고원이 적상산의 허리춤 높이인 것을 알 수 있다  

덕산저수지에서 시작된 테마임도는 8km 가량 이어지다 공정리에서 727번 도로로 내려선다. 도로에서 좌회전, 조금 다운힐 하면 칠연계곡 입구에 자리한 용추폭포가 나온다. 바로 길가에 있어 용추교 위에서 볼 수 있다. 높이는 5m 정도로 낮으나 비스듬히 흘러내리는 수량이 대단하고 폭포 아래 형성된 못이 크고 깊어서 웅장하다.

용추폭포에서 도로를 따라 더 내려가서 ‘예향천리 백두대간 마실길’ 이정목을 따라 왼쪽 신무마을로 진입하면 다시 업힐이 시작된다. 이번 코스는 앞서 테마임도, 이곳 신무마을 마실길 그리고 매방재산 임도 세 군데 산악코스로 구성된다고 볼 수 있다. 작은 마을과 밭을 거쳐 길은 해발 640m까지 올라간다. 뒤돌아보니 칠연계곡 상류와 덕유산 2위봉인 중봉(1594m) 방면이 훤하다.

고개를 넘어가니 민가 한 채가 외롭다. 하산로가 애매해서 예초작업 중인 농부에게 물으니 잠시 일을 멈추고 친절하게 길을 알려준다. 산을 벗어나면 바로 통영대전고속도로가 평지와의 경계선처럼 길을 막아서고 고속도로 아래 굴다리를 통과하면 공진마을이다. 들판 저편으로 ‘골프존카운티무주’ 골프장을 품은 매방재산 능선이 다가선다.

낙차는 낮으나 수량이 많고 못이 깊고 넓은 용추폭포. 도로에서 바로 볼 수 있고 위용이 느껴진다

 

신무마을 마실길 고갯마루에서 돌아본 칠연계곡 방면 덕유산. 계곡의 길이와 깊이가 대단하다  매방재산 남단을 돌아나가는 농로가 아름답다

매방재산 남단에서 바라본 남덕유산 서봉(1498m)과 다락논. 들판과 가까워 입체감과 비고가 압권이다  

매방재산 임도는 골프장 반대편에서 시작되어 양악천을 따라 산줄기를 돌아 임도로 진입한다. 도중에 남덕유산 서봉(1498m)이 까마득히 머리를 솟구쳐 구름에 닿고 있다.

임도는 통행이 거의 없는 듯 잡초와 나뭇가지가 길을 넘나들어 자못 원시적이다. 골프장과 작은 능선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건만 분위기는 천양지차다.

초반에는 매방재산 서사면이고 숲도 짙어 조망이 없지만 골프장을 지나 동사면으로 진입하면이윽고 안성고원과 그 너머로 웅장한 산맥으로 맥동하는 덕유산이 모습을 드러낸다. 길은 해발 630m까지 올라갔다가 정상 동릉을 지나면 본격적으로 덕유산의 전모를 보여준다. 조망이 트일 때마다 발길을 멈추느라 진행은 지지부진이지만 안성고원과 덕유 주릉을 한 번에 보는 진풍경에 감탄을 거듭한다. 가히 ‘지리산 바라기’의 산청 주산에 견줄 만하다. 나의 애정 어린 시선에 부담을 느꼈던지 향적봉은 잠시 구름모자를 벗고 원호처럼 무던한 전모를 보여주었다. 나는 거수경례로 답한다.

이제 매방재산 북단의 농공단지까지 기나긴 다운힐이다. 도중에도 조망이 좋은 곳이 많아 속도를 낼 수가 없다. 여기서는 쾌속의 다운힐보다 덕유산과 고원을 보는 것이 더 좋다.

산을 내려와 다시 만난 구랑천이 반갑다. 저쪽으로 안성분지 초입을 통과하는 통영대전고속도로 고가도로가 향적봉을 배경으로 관문처럼 가로막고 있다.

매방재산 동사면으로 접어들면 덕유산 주릉이 웅자를 드러낸다. 왼쪽이 향적봉 방면, 정면은 칠연계곡

 

낙엽송이 울창한 매방재산 임도. 북동쪽 구간은 최근에 길을 내 상태가 좋은 편이다 

향적봉이 구름모자를 벗고 잠시 인사를 건넨다

  

구랑천을 따라 안성면소재지로 돌아가는 길. 고속도로가 고원의 관문처럼 우뚝하다 

 

tip

코스 길이는 34km로 짧지만 산악코스가 많고 경관을 즐기려면 시간을 넉넉하게 잡고 체력 배분도 잘 해야 한다. 안성면소재지에만 식당과 편의점, 마트가 있다. 면소재지임에도 서울 남부터미널에서 하루 4회 버스가 운행한다(3시간 내외 소요).

글/사진 김병훈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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