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정유 7년 전쟁의 대단원 ‘노량해전’

‘大星隕海’(대성운해) 나라를 구하고 큰 별이 바다에 졌다

흙으로 빚은 이순신장군 ‘순국의 벽’. 노량해전 전투 상황을 ‘평면도자기’ 기법으로 빚어냈다. 가로·세로 50cm의 평면도자 4천여 개를 퍼즐 조각처럼 붙여 그려냈다. 높이 5m에 길이가 무려 200m에 이른다(남해 이순신 순국공원 / 이천 ‘한얼도예’ 작품)
흙으로 빚은 이순신장군 ‘순국의 벽’. 노량해전 전투 상황을 ‘평면도자기’ 기법으로 빚어냈다. 가로·세로 50cm의 평면도자 4천여 개를 퍼즐 조각처럼 붙여 그려냈다. 높이 5m에 길이가 무려 200m에 이른다(남해 이순신 순국공원 / 이천 ‘한얼도예’ 작품)

글/사진 이홍희(전 해병대사령관)

 

1597년 7월 칠천량해전으로 시작된 정유재란. 조·명연합군이 일방적으로 밀리면서 일본의 전라도 침공까지 허용한 가운데, 한반도 석권을 노리는 일본군의 공세가 이어졌다. 이 악몽을 잠재운 것이 1597년 9월의 ‘명량해전’이고, 그보다 앞서 9월 7일에 있었던 ‘직산(충남 천안)전투’이다. 두 전투를 통해 거침없던 일본군의 기세가 꺾이고 전쟁의 흐름도 바뀌었다. 명량해전으로 인해 보급로가 끊어져 더 이상 북진할 여력을 잃고 만 것이다. 일본군은 한반도 동·남쪽으로 후퇴하여 조·명연합군과 기나긴 대치·소모전을 이어가게 됐다.

명량해전에서 ‘기적적인 승리’ 직후, 이순신 함대는 군산 앞 ‘고군산군도’까지 북상·후퇴해야만 했다. 수군 재건 ‘명령’을 받고서 약 한 달간 겨우겨우 마련했던 전투물자 모두를 명량해전에 쏟아 부은 나머지, 더 이상 일본 함대를 밀어붙일 여력이 남아있지 않았다. 섣부른 공세보다 한발 물러나서 ‘힘’을 키우기로 했다.

이후, 일본군을 압박하며 남하하는 조·명연합 지상군과 보조를 맞추어 서해안을 따라 남하하였다. 목포 앞, ‘고하도’에 도착하여 겨울을 나면서 전선(戰船)을 추가 건조하고 병력도 충원하고 군량도 확보했다. 몸집을 키운 이순신 함대에게는 더 크고 튼튼한 ‘기지’가 필요했다. 또한, 동·남해 바다로 밀려난 일본 함대와의 접촉을 유지하면서, 유사시 즉각 대응하기 위해 ‘고금도’(완도군)로 이전하고 이곳에 ‘통제영’을 개설했다.

1598년 7월 16일, 이곳 ‘고금도’에 명나라 수군이 합류함으로써 ‘조·명 연합수군’이 이뤄졌다. 이에, 일본군은 연합수군의 ‘팀워크’가 형성하기 전에 그 정도를 ‘시험’하고 방해하기 위해 ‘고금도’로 공격해왔다. 이 과정에서 있었던 전투가 7월 19일의 ‘절이도해전’이다. 일본군은 이 전투에서 많은 대가를 지불해야만 했다.

 

1598년 8월 18일 전쟁의 원흉인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사망하자, 일본은 조선으로부터 전 병력을 철병하기로 했다. 그러나 일본군의 철병 ‘사정’은 여의치 않았다. 조·명 연합군은 철군하려는 일본군에 대해 대대적인 공격을 계획했다. 이 작전이 ‘사로병진작전(四路竝進作戰)’이다. 조·명 연합군은 가용한 전 부대를 투입하여 ‘네 갈래’ 방향에서 주요 핵심 거점(울산성·사천성·순천 예교성)을 동시에 공격하기로 했다. 이때, 서로군(西路軍)과 수로군(水路軍)은 순천의 예교성(고니시 부대)을 목표로 합동작전을 전개했다. 이 ‘예교성 전투’와 연계해 일어난 전투가 ‘노량해전’이다. 이 전투에서 조·명연합군은 임진·정유 7년 전쟁을 통틀어 가장 큰 전과를 올렸다. 그러나 7년 간 해전을 지휘해온 이순신장군이 전사하고 많은 장수들도 현장에서 목숨을 잃거나 큰 부상을 입었다. 이렇게 하여 7년간 계속됐던 지옥 같은 전쟁이 비로소 끝났다.

 

작전상 후퇴했던 이순신 함대, ‘고하도’에서 겨울을 나다

명량해전 직후, 이순신 함대는 전라도 해안을 거쳐 군산 앞바다에 위치한 ‘고군산군도’까지 북상했다. 명량해전에서 133척의 적선을 분멸·격파하긴 했지만, 아직도 일본 수군은 수백 척의 전선을 보유하고 있었다. 당장은 일본 수군을 상대하여 전투를 수행할 수 있는 여건이 되지 못했다. 가진 것 모두를 명량전투에서 남김없이 쏟아 부은 이순신 함대는 작전상 후퇴해야만 했다.

명량해전으로 소진된 전투력을 복원한 임시 통제영 ‘고하도’. 이곳에서 100여 일 주둔하며 전선, 군량미와 전투물자, 병력을 획기적으로 증강시켰다. ‘노량해전’을 수행할 수 있는 기틀을 마련한 것이다. 이순신을 기리는 사당 ‘모충각’과 통제영의 흔적이 일부 남아 있다(목포시 고하도길 175) 

‘조·명연합군’(육군)은 ‘직산(충남 천안)’에서 ‘북(北)’으로 진격하던 일본 지상군을 돌려세워, 한반도 동·남쪽으로 밀어붙이기 시작했다. 이순신 함대도 지상군과 보조를 맞춰 서해안을 따라 남하하였다. 목포 입구에 있는 ‘고하도’에 도착하여 ‘임시 통제영’을 설치했다. 고하도는 ‘북서풍’을 막을만하고, 수많은 섬으로 둘러싸여 배를 감추기에 적합한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또한, 경기도(한양)와 영남을 연결하는 바닷길의 길목이기도 한 곳이었다.

이순신 함대가 고하도에 주둔하기 시작한 때는 음력 10월 말, 이미 겨울이다. 해상 상태가 거칠어지며 해상작전은 물론 수군의 활동도 어려운 시기가 됐다. 이순신 함대는 이 소중한 시간을 활용하여 전력을 보강해 나갔다. 당시 조선 수군의 군세(軍勢)라고는 13척의 전선과 1천 명이 조금 넘는 병력이 전부였다. 이곳에 머무는 동안(108일) 적의 공세를 걱정하지 않고 오로지 전력 증강에 매진할 수 있었다.

주변 섬들에는 일본군을 피해 유랑(流浪) 중인 백성들이 많았다. 피난민들에게 ‘해로통행첩(海路通行帖 : 신원확인증 역할)’을 발행하여 그들의 신변 안전을 보장해주면서, 그들로부터 일정 수준의 ‘물자’와 ‘재원’을 지원받았다. 또한 ‘둔전’과 ‘염전’을 운영하여 군량 확보를 위한 재원으로 활용하기도 했다. 그 결과로, 고하도 진영에 주둔하는 동안 무려 40여 척의 전선을 추가 건조할 수 있었다. 또한, 전선 운용에 필요한 병력을 추가로 충원함은 물론, 전선에 필요한 무기(총통·화약·화살 등)들도 확보했다. 

우리나라 ‘육지면’ 시배지 목포(고하도). 우리나라 목화의 역사는 1363년(공민왕) 문익점에 의해 시작됐다. 경남 산청에서 시작된 목화는 ‘아시아면(인도 원산지)’이었고, 1904년 이곳에서 시작한 목화는 ‘육지면’(아메리카 원산지)으로 일제 때 도입됐다. 육지면은 아시아면에 비해 수확량이 많고 품질이 좋아 경제성이 좋았다. 일본은 한반도 남부 지역을 ‘육지면’ 생산기지로 만들고, 생산된 ‘목화’를 쌀과 함께 수탈해갔다. ‘1흑(黑) 3백(白)’(김, 쌀·소금·목화)의 고장 목포의 주요 생산물 중의 하나로 자리매김하고, 목포가 ‘목화의 포구’에서 유래됐다고 할 정도였다고 전한다(고하도 목화체험장. 목포시 고하도길 8)

 

‘일본군’을 쫒아 ‘고금도’로 이진(移陣)하다

정유재란을 통해 ‘수륙병진’으로 북상하려던 일본군이 ‘명량’과 ‘직산’에서 패하면서, ‘순천(예교성)’과 사천·울산 일대로 물러나 주둔하고 있었다. 이순신장군은 1598년 2월 17일 통제영을 현재의 완도 ‘고금도’로 옮겼다. 일본군에 효과적으로 대처하면서 남해 바다에 대한 해상 주도권을 잡기에 ‘고하도’는 너무나 먼 곳이었다. 좀 더 가까이 다가가서 일본군을 압박하고, 좀 더 넓은 해역에 대한 ‘통제권’을 확보할 필요가 있었다. 계절적으로도 겨울을 지나면서 바다 상태가 좋아지고 일본군의 해상 활동(공세)도 빈번해질 때가 됐기 때문이다.

고금도 묘당도의 ‘관왕묘(關王廟)’와 ‘충무사(忠武祠)’. 명나라 도독 ‘진린’이 그들의 군신 ‘관운장’을 모시기 위해 '관왕묘'를 세웠다. 이후, 건물을 증축하여 이순신장군과 진린도 함께 모셨다. 일제 때 민족말살정책에 의거 ‘관왕묘’가 폐지됐다. 광복 후 지역 ‘유림’들 주도로 그 자리에 사당을 새로 지어 ‘충무사’로 명하고 이순신을 ‘정전’에 모셨다. 경내에 있는 ‘관왕묘비(關王廟碑)’는 관왕묘 창건 이후의 내용을 중점적으로 기록하고 있는데, 진린장군이 이순신장군의 전사를 슬퍼했다는 내용도 기록되어 있다(완도군 고금면 충무사길 86-31)

고금도는 전라 좌·우도 바다를 제어할 수 있는 요충지일 뿐만 아니라, 섬이 크고 농경지가 넓어 자체 식량(군량) 생산이 가능한 이점도 있었다. 그리고 추가로 유입될 피란민들을 정착시켜 군량과 전비(戰備)의 확보, 병력충원 등 장기적인 준비가 가능한 곳이기도 했다.

이곳 고금도에 주둔하면서 전선을 추가로 건조함은 물론 병력과 군량을 추가로 확보하는 등 칠천량 해전으로 말미암아 손실됐던 군사력을 완전히 회복했다. 7월이 되면서, 조선 수군은 80여 척의 전선을 보유한 함대로 커졌고, 병력도 8천 명에 이르게 됐다. 뿐만 아니라 이순신에 의지해 피난 온 백성들이 많아 섬에는 수백 호의 민가가 생겨날 정도였다.

임진왜란 당시 ‘한산도’가 일본 수군의 서진(西進)을 막아낼 수 있었던 요지(要地)였듯이, 정유재란이 일어나면서 이곳 ‘고금도’가 그 역할을 하게 됐다. 그리고 고금도에 주둔하면서 미진한 분야에 대한 수군 전력 증강을 지속해 가는 가운데, 순천 ‘예교성’에 주둔하고 있는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 군을 견제하는데 소홀하지 않았다.

묘당도 ‘월송대’. 노량해전에서 순국한 이순신의 유해가 아산으로 운구되기까지 80여일간 임시로 안치됐던 곳이다. 유해를 모셨던 자리에는 아직도 풀이 자라지 않고 있다. 주민들은 장군의 ‘기(氣)’가 서려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완도군 고금면 덕동리 699)

 

명(明) 수군의 전개, ‘조·명 연합 수군’이 이뤄졌다

1598년 중반을 넘기면서, 일본군은 한반도 동·남쪽에 왜성들을 추가적으로 축성하여, 이곳을 거점으로 조·명연합군(육군)과 대치하면서 크고 작은 전투(지상전)가 이어졌다. 바다에서도 이순신 함대와 순천의 ‘예교성’에 주둔한 일본군 간에 팽팽한 대치 속에 산발적인 소규모 전투가 계속되고 있었다. 이는 조선 수군이 고금도에 확실하게 기반을 잡는 것을 ‘방해’함은 물론, 조선 수군의 활동범위를 최대한 서쪽으로 ‘제한’하기 위한 일본의 기도로 볼 수 있었다. 조선 수군의 전력이 많이 증가됐다고는 하지만, 일본 수군에 비하면 아직 매우 열세인 상태다. 일본 수군이 걸어오는 싸움에는 대응해야 했지만, 전력 손실을 감수하면서까지 무모하게 먼저 나설 이유는 없었다. 그래서 ‘대치상태’가 계속된 것이었다. 

이순신장군의 업적을 기리고 정신을 되새기기 위한 ‘사당’은 전국에 수십 개가 있지만, 그중에서 ‘현충사’는 가장 크고 널리 알려져 있다. 1706년에 충청도 유생들이 숙종 임금에게 상소하여 사당을 건립했으나 서원 철폐령에 따라 없어졌다. 그러다 일제 치하이던 1932년 전국적인 성금 운동을 전개해 현충사를 다시 건립했다. 1966년부터 현충사의 성역화계획에 의거 ‘본전’이 새로 세워지면서 (구)본전은 경내에 원형대로 이전했다(아산시 염치읍 현충사길 48)

이런 대치상황이 이어지는 가운데 7월 16일 5백여 척의 전함과 5천여 명으로 이뤄진 ‘명나라’ 수군이 고금도에 도착했다. 정유년(1597년)에 있었던 칠천량해전에서 조선 수군이 참패하자, 명나라는 ‘본토’에 대한 일본 수군의 ‘직접 공격’을 우려하여 ‘연안방어’에 치중하는 ‘해방(海防)전략’을 채택했다. 이후, 명나라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조선에 수군을 ‘직접’ 파견하여 일본 수군에 적극적으로 대응하기 시작했다. 1597년 10월에 파견됐던 명나라 수군 ‘1진’(3천200여 명)은 해상작전에 투입하지 않고 ‘전라도(남원)’ 지역으로 투입시켰다. 순천 ‘예교성’에 주둔 중인 일본군(고니시 유키나가)이 ‘울산’ 지역(가토 기요마사)으로 증원하지 못하도록 견제하는 역할을 담당하게 한 것이었다.

그러다가, 정유년(1597년) 연말에 있었던 울산 ‘도산성 전투’(제1차 울산성전투)를 치르면서 수군의 중요성이 제기되어 명나라는 수군을 본격적으로 파병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사로병진(四路竝進)작전’ 수행을 위해 육군을 추가 파병할 때 수군도 함께 파병한 것이다. 이에 따라 ‘진린’ 장군 지휘 하에 ‘명나라 수군’이 고금도에 합류하게 된 것이다. 

1597년 7월 칠천량에서 조선 수군이 크게 패하며 나라가 위기에 처하자, 이순신을 삼도수군통제사로 재임명하면서 내린 ‘기복수직교서’(임명장. 왼쪽)와 ‘유서’(선조의 편지. 오른쪽). 이후 이순신장군은 수군을 재건하여 정유재란 중의 해전, 명량·노량해전 등을 치른다(1597년 8월 3일. 진주 수곡 손경례가옥)

한 척의 전함이라도 아쉬웠던 조선 수군의 입장에서 분명 큰 도움이 될 것이지만 어려운 문제도 없지 않았다. 그간 앞서 조선에 전개한 명군(육군)들이 보인 ‘갑질’로 미루어 볼 때 연합작전에 대한 신뢰도 문제, 백성들에게 미칠 ‘민폐’, 5천 명의 병력에 대한 보급 지원 문제 등 어느 것 하나 만만한 것이 없었다. 더 나아가 명나라 수군 최고 지휘관 ‘진린’의 포악·교만·탐욕스런 성격으로 인해 ‘조·명연합작전’에 대해 우려하는 목소리들도 많았다. 그러나 이순신은 처음부터 ‘진린’의 환심을 사기 위해 극진히 접대했을 뿐만 아니라, 진린의 욕구를 충족시키고 명나라 수군을 적극적으로 지원하는 방향으로 노력해 나갔다.

 

7년 전쟁 후반의 ‘전환점’, ‘도산성 전투’(제1차 울산성전투)

정유년(1597년) 이후 ‘수륙병진’으로 총공세를 펼치던 일본군의 ‘기도’가 좌절되면서, 일본군은 한반도 동·남쪽으로 후퇴하여 장기전에 돌입하게 됐다. 제후국의 전쟁에 장기간 참전함에 따라 국내 상황이 어려움에 처하자, ‘명나라’는 ‘속전속결’로 전환하여 ‘도산성’을 공격하는 특단의 조치를 취했다. 울산 ‘도산성’이 공격 목표로 정해진 것은, 일본의 침략 본거지인 ‘부산’을 방호하는 핵심 요충지이기 때문이었다. 일본군의 본거지 ‘부산’에 치명타를 가하면, 일본의 조선 침략을 사실상 좌절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전투는 1597년 12월 23일 ~ 1598년 1월 4일에 있었다.

울산 인근의 여러 왜성들이 조·명연합군의 공세 초기에 ‘함락’되면서, ‘도산성’은 조·명 연합군에게 완전히 ‘포위’됐다. 대규모 공세로 ‘도산성’의 일본군이 함락 직전 상황까지 몰렸으나, 일본군도 최후의 발악을 펼치며 저항했다. 예상외로 고전하며 많은 피해가 발생하자, 조·명연합군은 도산성의 ‘허점’을 이용하여 ‘고사작전’을 전개했다. 도산성은 성내에 단 하나의 우물도 구축하지 않았고, 군수 물자의 비축도 부실한 치명적인 허점을 안고 있었다. 성 주변의 모든 우물을 묻어버리고 ‘태화강’을 원천 봉쇄하자 일본군은 굶주림과 갈증에 시달릴 수밖에 없게 됐다. 전투가 길어지면서 주변 왜성들로부터의 ‘구원’이 우려되자, 조·명연합군은 도산성에 대한 총공세를 감행했다. 공세를 펼친 조·명연합군은 외성(外城)까지는 함락시킬 수 있었으나, 미로(迷路)로 이뤄진 좁은 내성(內城)으로 물러난 일본군들이 ‘결사 항전’으로 저항했다.

정유재란 당시 일본군 최전방 거점 ‘울산왜성’. 일본군의 본거지 ‘부산’에 대한 방어력을 보강하기 위해 동해 최동단 ‘서생포왜성’ 전방에 별도로 구축한 ‘방어거점’이다. 이곳에서 두 차례에 걸쳐 대규모 ‘울산성전투’가 벌어졌고, 두 전투 모두 조·명연합군이 패했다. 1차 울산성전투(도산성전투) 때, 일본군이 함락 직전까지 가고 식량과 식수가 떨어진 나머지 종이를 끓여먹고 ‘말(馬)’의 피와 소변까지 마시면서 연명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울산 중구 학성공원3길 54)

도산성에 고립된 일본군을 구원하기 위한 증원 시도들이 끊이지 않았으나, 조·명연합군에 의해 모두 격퇴됐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더 많은 왜성들(심지어 가장 거리가 먼 순천의 ‘고니시’의 예하 부대까지)이 ‘울산성’ 구원작전에 나서면서 전투는 더욱 치열해졌다. 이에 조·명 연합군은 ‘구원군’과도 싸워야 하는 ‘양면전(兩面戰)’을 펼칠 수밖에 없게 됐다. 이 과정에서 조·명연합군은 상상 이상의 많은 피해를 입게 되자, 연합군 지휘부는 10여 일에 걸친 도산성 공격을 포기하고 물러났다. 이 전투에서 조명연합군은 약 6천 명의 사망자를 포함하여 1만 명이 넘는 사상자가 발생하였고, 일본군도 6천여 명의 사상자가 발생한 것으로 알려진다. 이 전투는 일본군이 꼽는 임진왜란 3대 대첩 중의 하나이다.

조·명 연합군은 울산 ‘도산성 전투’에서 패배한 교훈을 바탕으로 새로운 전쟁 전략을 수립하게 된다. 이 전략이 임진·정유 7년 전쟁의 마지막 해 1598년 마지막 해전인 ‘노량해전’까지 이어지는 ‘사로병진작전(四路竝進作戰)’이다.

  

‘사로병진작전(四路竝進作戰)’이란 어떤 것인가

‘명량해전’ 이후의 전쟁 흐름을 이해하는 데는 어려움이 많다. 특히, 마지막 해인 1598년에 있었던 모든 전투가 ‘도산성전투’의 연장선상에서 실시됐다는 것을 이해하는 것은 결코 쉽지 않다.

1598년 들면서 조·명연합군은 일본군에게 최후의 ‘대 반격’을 펼쳐 전쟁을 끝내기 위한 특단의 조치를 취한다. 이것이 ‘사로병진작전(四路竝進作戰)’이다. 직전의 공세 때는, 동·남해안의 다른 왜성들은 제쳐놓고 가장 중요하다고 판단한 울산 ‘도산성’ 한곳만을 집중 공격했다. 이때, 도산성을 지키던 ‘가토 기요마사 부대’를 함락 직전까지 몰아붙였으나 원근(遠近)의 주변 왜성들로부터 증원해온 ‘구원군’들을 제대로 방어하지 못해 패배하고 말았다. 그러나 도산성전투가 끝난 직후인 1598년 초, 일본군의 주요 거점들을 ‘동시’에 공략하여 거점들끼리 서로 응원(구원)하지 못하게 ‘각개격파’한다면 충분히 승리할 수 있을 것이라는 ‘확신감’을 갖게 됐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일본을 통일한 후 조선 정복에 나섰다가 실패하고 62세의 나이로 죽었다. 그의 무덤은 교토의 조그만 산 정상에 있다. 워낙 경사지고 500여 개의 계단을 올라야만 하여, 찾는 걸음이 별로 없다. ‘도쿠가와’에 의해 폭파됐다가 다시 조성했다고 한다는데(일본판 부관참시?) 예상보다는 초라했다. 색 바랜 조화 꽃다발과 동전 몇 개만이 흩어져 있을 뿐이었다. 죽은 다음의 모습은 어디나 거의 비슷했다(작은 사진은 오사카 성 내에 있는 히데요시 신사)

무술년(1598년) 8월 18일, 7년 전쟁을 끝내게 할 수 있는 변수가 생겼다. 조선을 넘어 명(明)나라까지 공격하겠다며 호언장담하며 임진왜란을 일으킨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사망했다. 히데요시의 사망은 ‘비밀’에 붙여졌으나 소문은 막을 수 없었다. 일본군의 사기는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일본은, 조선에 출병 중인 일본군들은 11월 중순까지 ‘철병’하라는 명령을 하달했다. 조·명연합군은 조선에서 철병하는 일본군을 공략하기 위해 가장 핵심적인 왜성 세 곳을 공격목표로 설정하여 사기가 떨어진 일본군을 상대하여 싸웠다. 울산성·사천성·순천 예교성이다.

이 작전의 주요 골자는 다음과 같다. 명 제독 ‘마귀’가 이끄는 ‘동로군’(4만의 조·명연합군)은 ‘울산성’(가토 기요마사)을 공략하고, 명 제독 ‘동일원’이 지휘하는 ‘중로군’(4만의 조·명연합군)은 ‘사천성’(시마즈 요시히로)을 공략하고, 명 제독 ‘유정’이 지휘하는 ‘서로군’(3.6만의 조·명연합군)과 명 수군 제독 ‘진린’과 이순신장군이 지휘하는 ‘수로군’(1.5만의 조·명연합수군)이 합동으로 순천 ‘예교성’(고니시 유키나가)을 동시에 공략하는 것이다. 

야심차게 시작한 ‘사로병진작전’의 전황은 조·명연합군에게 불리하게 전개됐다. 1598년 9월 말에서 10월 초에 있었던 ‘울산성전투’와 ‘사천성전투’에서 일본군의 완벽한 전투준비와 함께, 조·명연합군 병영에서 발생한 ‘화재·폭발사고’ 등으로 인해서 많은 피해를 입은 나머지 패하고 말았다. 이제 남은 곳은 순천 ‘예교성’의 ‘고니시 유키나가 부대’ 뿐이었다. 이에 대해서는 별도로 기술한다. * 울산성전투 : 1597년 연말에 있었던 ‘1차 울산성전투’(독산성 전투)와는 다른 ‘2차 울산성전투’임

 

조·명연합수군의 전력을 탐색하기 위해 펼친 ‘절이도 해전’

고금도에 통제영이 설치된 1598년 2월 이후 이순신함대와 일본 수군 간에 날선 대치가 진행되는 가운데 몇 차례 크고 작은 전투가 있었다. 이런 대치가 이어지던 7월 16일 명나라 수군이 고금도에 합류했다. 명나라 수군의 고금도 전개는 이미 계획 중이던 ‘사로병진작전’의 일환이지만, 육군의 작전 개시보다 한 달 정도 빠른 시기에 진행됐다.

일본군 입장에서는 ‘고금도’까지 전진 배치한 이순신 함대가 날로 증강하는 상황이 신경 쓰이던 차에, ‘명’ 수군까지 합류했으니 부담감이 더 가중될 수밖에 없었다. 일본군은, 연합작전체제가 확실히 정착되기 전에 ‘판’을 흔들고자 했다. 연합수군이 형성된 지 사흘째 되던 날(7월 19일), 100여 척으로 이뤄진 대 함대로 느닷없이 ‘고금도’로 공격해온 것이다.

거금도 ‘절이도해전기념비’. 정유재란 당시 조·명연합수군 편성에 긴장한 일본군이 고금도에 있는 ‘통제영’으로 침공해올 때 길목인 ‘절이도’(현, 거금도) 일대에서 맞서 싸워 대승을 거뒀다. 조·명연합수군이 참가한 최초의 해전에서 의미 있는 승리를 거뒀다. 뒤로 소록도와 거금대교가 보인다(거금대교는 상층은 자동차 전용, 하층은 자전거·보행자 전용으로 구분돼있는 복층교량이다)

‘조·명연합함대’는 고금도에 이르는 ‘길목’인 ‘절이도’(고흥군 ‘거금도’)로 나아가 일본 함대를 맞았다. 그러나 명나라 수군은 조선의 바닷길을 잘 모를 뿐만 아니라, 일본군에 대해 제대로 아는 것이 없어 전투를 수행할 수 있는 입장이 되지 못했다. 또한, 장거리 항해로 인한 ‘여독’도 채 풀리지 않은 상태라 명 수군은 전투 현장 후방에서 전투를 지켜보기로 했다. 조선 수군 ‘단독’으로 일본군을 상대하여 50여 척으로 적선을 분멸(焚滅)시키는 등 대승을 거뒀다. 일본 함대는 순천·남해 쪽으로 물러갔다. 명 수군 대장 ‘진린’이 지켜보는 가운데 조선 수군의 능력을 십분 발휘하는 계기가 됐다. 이순신 장군은 이 해전에서 획득한 수급 70여 개 중에서 40여 급을 ‘진린’에게 선물로 주는 등 원만한 ‘관계’ 유지를 위해 더 많은 노력을 기울여 나갔다.

절이도 해전은 형태와 내용은 어떻든 ‘조·명연합수군’에 의한 최초의 전투에서 일본 수군을 격파했다. 칠천량해전에서 전멸했던 조선수군이 ‘기적적’으로 부활하여 ‘하늘의 도움’으로 ‘명량해전’에서 위기를 극복한 다음, 완벽하게 부활한 것을 알렸다는 것이 가장 큰 ‘의의’일 것이다. 해전이 끝난 다음, 일본 수군을 멀리 순천 왜성 일대까지 퇴각시킴으로써 전라도 바다에 대한 통제권을 확보할 수 있게 된 것도 큰 소득이었다. 이는 2개월 후에 벌어지는 ‘사로병진작전’의 한 축인 순천 ‘예교성 전투’(1598년 9월 20일~10월 7일)에서 제몫을 다할 수 있는 ‘기반’이 됐다. 전과(戰果)와 전쟁에 기여한 바를 기준으로 보면 ‘절이도해전’은 ‘한산대첩’ 등 주요 전투에 결코 뒤지지 않으나 아직까지 그렇게 알려진 것이 많지 않은 전투이다. 더 많은 연구가 필요한 부분이다.

 

‘사로병진작전(四路竝進作戰)’과 예교성전투

절이도해전(1598년 7월 19일)이 끝나면서 남해바다에서는 조·명연합군과 일본 수군 간의 전투가 소강상태에 접어들었고, ‘사로병진작전’을 위한 동·남해안의 주요 왜성에 대한 대규모 공격을 위해 조·명연합군(지상군)들이 추진 배치하고 있었다. 이러한 가운데,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사망하고 ‘철병’ 명령까지 내려진 상황이었다. ‘수적 우세’에 놓였을 뿐만 아니라 상대적으로 사기가 높아진 조·명연합군이 1598년 9~10월 사이에 남해안의 주요 왜성에 대한 공격을 추진하게 됐다. 작전계획은 이미 수립된 ‘4로병진작전’이었다.

정유재란 때 일본군이 전라도 공격을 위한 전진기지 겸 최후 방어기지로 삼기 위해 축성한 순천 ‘예교성’. 원래 3면이 바다여서 ‘고니시’가 보유한 300척의 자체 함대를 수용할 수 있었다. 성벽이 2~3중으로 중첩되고, 성벽의 높이와 굴곡, 곳곳에 ‘총안구’ 등을 갖추고 있어 거의 ‘난공불락’의 요새였다. 3배가 아니라 10배의 병력으로도 성을 탈취하는 것이 어려웠을지 모른다. 현장에 가보면 더욱 실감할 수 있다(순천시 해룡면 신성리 산 1)

이에 따라 순천 ‘예교성’에 대한 수·륙합동, 조·명연합작전을 개시하게 됐다. 명나라 장수 ‘유정’과 조선의 ‘권율’이 ‘서로군’을 형성하여 육지로부터 왜성을 공격키로 하고, 명나라 제독 ‘진린’과 조선의 ‘이순신’이 ‘수로군’을 편성하여 바다로부터 공격하기로 했다. ‘예교성’은 삼면이 바다라서 서쪽을 통해서만 지상 공격이 가능하고, 나머지 방향은 수심이 얕은 바다로 둘러싸여 있고 간조시간 때는 ‘갯벌’이 드러나는 곳이다.

‘예교성’ 공략을 위해 남하한 ‘서로군(제독 ‘유정’ 지휘)’은 9월 중순 1차적으로 강화회담을 미끼로 ‘고니씨’를 유인·제거하려했으나 이 계획은 실패하고 말았다. 계략에 실패한 후 실시한 지상군만의 공격도 실패하고 말았다. 이에, 예교성 전방 ‘장도’ 일대까지 진출해 있던 ‘수로군’과 함께 ‘합동’으로 예교성을 공격했다. 그러나 지상군이 적극적으로 전투에 가담하지 않자, 수로군 단독의 ‘포격전’으로 전개할 수밖에 없어 소기의 전과를 거두지 못했다(9월 20~22일). 오히려 이 과정에서 수로군은 많은 피해를 입은 나머지 작전은 실패하고 말았다.

10월에 들어서도 예교성에 대한 ‘수·륙합동작전’을 재개했다. 이번에도 ‘유정’의 무성의한, 이해되지 않는 작전 ‘가담’으로 말미암아 실패하고 말았다. 이때, 인접한 ‘사천왜성 전투’에서 ‘중로군’이 패전했다는 소식이 전해지면서 서로군은 아예 ‘철군’을 실행하기 시작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진린’ 휘하의 수로군은 공격이 끝날 때까지 적극적으로 전투에 가담했다. 그러나 예교성 공격 간 ‘조수(潮水)’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명’ 전선 39척이 갯벌에 갇힌 상황이 발생하고, 일본군의 공격에 의해 수백 명이 전사하는 피해를 입어야 했다. 10월 6일, ‘유정’은 아예 예교성에 대한 포위를 풀고 각종 무기와 군량을 그대로 남긴 채 ‘퇴각’함으로써 예교성을 공략하려던 ‘수·륙합동작전’은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이후, 양군(兩軍)은 각기 단독작전을 펼쳐나가게 됐다. 

순천 ‘예교성’ 공격에 앞서 실시한 ‘장도해전’. 이 전투를 통해 장도에 계류 중이던 왜선 30척을 격침시키고 군량미 창고를 불태워 일본군의 작전지속능력을 격감시켰다. 장도는 완전히 육지 속의 ‘섬’이 되었다. 뒤쪽 멀리로 ‘묘도’(좌)와 ‘여수국가산업단지’(우)가 보인다(여수시 율촌면 여동리)

※ 참고로, 예교성에 대한 본격적인 공격에 앞서 이순 함대는 예교성 직전방에 위치한 ‘장도’(지금은 공단 조성)를 공격했다. 이곳에는 ‘고니시’가 자체로 보유한 300여 척 중 일부 전선이 정박하고 있었고 ‘식량창고’도 있었다. 이곳을 공략하여 군량미 창고를 불태우고 30여 척의 왜선을 분멸시켰다(장도해전).

※ ‘장도해전’은 순천 예교성 공략 과정에서 진행됐기에 ‘예교성전투’의 일환으로 보고 있다. 또한, 명 수군(진린)이 참전한 ‘예교성 전투’는 ‘사로병진작전’ 중의 하나이다. 명 수군이 ‘고금도’에 합류한 것도, 조선 수군과 합류한 이후에 실시된 ‘절이도해전’도 큰 흐름에서 볼 때 ‘사로병진작전’ 추진 과정의 전투로 봐야한다는 의견이 우세해지고 있다. 그리고 임진∙정유 7년 전쟁의 마지막 해전인 ‘노량해전’도 사로병진작전의 연결선 상에서 있었던 전투로 보고 있는 추세이다.

 

7년 전쟁의 마지막 전투 현장, ‘노량바다’로의 초대

히데요시 사망으로 사기가 꺾인 일본군을 상대하여 전쟁을 끝내기 위해 전개한 ‘사로병진작전’은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울산·사천성에 주둔했던 일본군은 철병에 별다른 어려움이 없었겠지만, 순천 예교성에 주둔했던 ‘고니시 부대’는 앞바다에 버티고 있는 조·명연합수군으로 인해 꼼짝할 수가 없었다. ‘명 육군’을 뇌물로 구워삶은 덕분(?)으로 순천 ‘예교성’의 함락을 면했던 일본군은, 이번에는 바닷길을 열기 위해 ‘진린’을 상대하여 매달려 애걸복걸했다. 직후, 고니시 부대가 자체 보유한 전선 300여 척을 이용하여 탈출하려던 시도는 이순신함대에 의해 선발대(10척)가 몰살당하면서 탈출 시도는 접고 말았다.

뇌물을 주고도 안전한 ‘탈출’이 이뤄지지 않자 특단의 조치를 결심했다. 남해도 너머의 사천과 거제도 등지에 주둔 중인 일본군의 구원을 받아 ‘봉쇄’를 뚫는 방법을 채택하게 됐다. 이를 위해서는 이곳 구원부대로 연락할 수 있는 ‘첩보선’의 통과를 간청했고, 이를 ‘진린’ 측이 ‘묵인(默認)’함으로써 첩보선이 봉쇄망을 빠져나갔다. 이로써 ‘구원함대’와 ‘고니시 함대’가 합동으로 광양만 일대에 포진 중인 조·명연합수군을 양 방향에서 ‘협공’하는 가운데 봉쇄망을 탈출하기로 계획했다.

‘첩보선’의 탈출을 막지 못한 이순신장군은 일본군과 싸울 ‘작전’ 마련에 고심했다. 더 이상의 전쟁을 않겠다는 명군의 ‘속내’가 역력하게 보였고, 조선 내부에서도 ‘이제는 전쟁을 접자’라는 일부 의견이 있었다. 그렇지만 이순신은 그렇게는 할 수 없었다. 전쟁에서 패한 적을 그냥 온전하게 돌려보내서는 안 되며, 많은 피해를 줘서 적의 ‘의지(意志)’를 확실하게 꺾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했다. 적의 의지를 최대한 꺾어놓지 않는다면, 일단은 물러나더라도 힘을 키워 다시 돌아올 것이 명확하기 때문이다.

이순신은 일본군 ‘구원 함대’가 도착하여 ‘앞뒤’에서 협공당하는 상황을 상정하여 작전계획을 세웠다. 일정 규모로 순천 ‘예교성’ 쪽을 견제하는 가운데, 구원 함대를 먼저 공략하기로 작전계획을 세웠다. 이를 진린에게도 통보했다. 진린은 더 이상의 전쟁을 원치 않았지만, ‘철병’하는 일본군을 상대해서 결전하겠다는 이순신의 신념을 꺾을 수 없었다. 작전에 가담하지 않을 경우, 연합수군 최고 지휘관으로서 ‘위신’이 말이 아닐 뿐만 아니라, 그간 이순신에게 진 일말의 ‘빚’이 많았기 때문이다. ‘울며 겨자 먹기 식’일지 모르나 진린의 명나라 수군도 이순신 함대와 함께 노량해전을 치르기로 결심했다. 이로써, 1598년 11월 18~19일, 조·명연합함대와 일본 함대 간에 7년 전쟁의 마지막 전투가 된 ‘노량해전’이 전개됐다. 이 해전에 참가한 쌍방(雙方)의 전선 수는 무려 천 여척이나 되었다.

첨망대에서 바라보는 ‘노량해전’의 그 바다. 광양만·노량해협·관음포가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바다 건너로 광양국가산업단지가 보인다

11월 18일 빨리 어두워진 겨울 밤, 일부 전선(戰船)으로 하여금 ‘예교성’을 견제하게 한 상태에서 주력은 노량해협 쪽으로 나아갔다. 노량해협에 도착한 조·명연합함대는 ‘사천’ 등지로부터 광양만 방향으로 진격해올 일본 구원군을 선제공격하기 위해 ‘매복’에 들어갔다. 두 전선에서 동시에 전투를 수행하는 것은 전쟁에서의 ‘금기사항’이다. 주(主) 전장은 ‘노량해협’ 일대로 하고, 일부 전선을 ‘예교성’ 일대에 배치하여 견제하게 하여 ‘증원 함대’와 연결하지 못하도록 하는 임무를 부여했다.

이제는 결전만을 기다리는 순간이다. 이순신장군은 노량해전 출정을 하늘에 고하는 제사를 지내며 ‘此讐若際 死則無憾’(차수약제 사즉무감. 이 원수를 무찌른다면 지금 죽어도 여한이 없겠나이다)라고 승전을 다짐했다고 한다.

 

노량해전은 이렇게 진행됐다

노량해전은 11월 19일 새벽 2시경에 양측 함대가 노량해협 일대에서 조우하면서 시작됐다. 양측 전선 천여 척으로 인해 노량해협 일대 좁은 바다가 가득 메워질 정도였다. 전투는 처음부터 양쪽이 뒤엉키며 전력을 다해 싸우는 격전으로 진행됐다. ‘혼전’이 계속되는 중, 조·명연합함대가 북서풍을 이용한 ‘화공전(火攻戰)’을 펼치며 전투의 주도권을 잡았다. 시간이 지나면서, ‘화공’으로 큰 타격을 받은 일본 함대가 퇴로를 찾아 도주하기 시작했다. 퇴로가 없이 막힌 ‘관음포’ 쪽으로 도주했다. 남해도를 돌아 남쪽으로 나갈 수 있는 ‘해로’로 착각했던 것이다. 날이 밝아 오면서 관음포에 갇힌 것을 알게 된 일본 함대는 포구를 탈출하기 위해 최후의 ‘발악’을 시작했다. 사생결단의 ‘격전’이 될 수밖에 없었다. 임진·정유전쟁 개전 이래 가장 많은 전선이 참가한 전투, 가장 격렬한 전투가 전개된 것이었다. 한때, 명 수군 ‘진린’ 대장의 지휘선이 포위될 정도로 혼전이 펼쳐졌다.

노량해전을 지휘하는 ‘이순신장군’ 동상. 뒤로 관음포와 광양만이 보인다(남해 이순신 순국공원)

혼전이 계속되는 가운데 일본군의 ‘총탄’ 공격으로 이순신장군이 전사했다. 이순신은 “전투가 한창 급하니 나의 죽음을 알리지 말라(戰方急 愼勿言我死 : 전방급 신물언아사)”라는 유언을 남기고 운명했다. 유명(遺命)을 받은 아들 ‘회’와 조카 ‘완’ 등이 독전(督戰)하며 전투를 끝까지 수행했다. 전투는 19일 정오경 화력과 군선이 우세한 조·명 연합함대의 대승으로 끝났다.

전투가 한창일 때 예교성에 주둔하던 ‘고니시 軍’은 남해도 남쪽을 돌아 부산 쪽으로 탈출해 나갔다. 자신을 구원하러온 부대들의 안위 따위는 관심 밖이었다. 전투에서 살아남아 남해 섬으로 도주한 일본군에 대한 ‘토벌전’이 혹독한 겨울 날씨 속에서도 진행됐다.

이 전투를 통해, 구원하러 왔던 일본 함대 200여 척을 격침하고 100여 척을 포획했으며 500여 급을 참수했다. 1만5천여 명의 일본군이 살상됐을 것으로 추정된다. 조·명연합군의 손실 또한 적지 않았다. 이순신 휘하의 장수 급만도 10여 명이 전사한 싸움이었다. 노량해전을 앞두고 ‘전투 만류’의 의견도 없지 않았으나, 일본의 재침공 의지를 꺾기 위해서 꼭 치러야 하는 전투였다. 그러나 이 싸움터에서 이순신장군을 비롯한 너무나 많은 장군들, 수군들을 겨울 바다에 묻어야만 했다. 이들의 큰 희생은, 일본의 ‘재침공 야욕’을 아예 접게 만들었다. 

7년 전쟁을 이끌었던 이순신장군은 마지막 싸움터였던 ‘관음포’ 옆 언덕(이락사; 李落祠)으로 잠시 모셔졌다가, 남해 ‘충렬사’와 통제영이 있던 ‘고금도’(월송대)를 거쳐, 이듬해(1599년) 충청남도 ‘아산’(현충사 부근)으로 옮겨졌다.

 

치열하게 전개되는 전투 중에 적의 ‘유탄’을 맞고 이순신장군이 전사했다. 혼전 상황이라 장군의 전사 사실이 감추어진 가운데 전투가 끝났다. 이 전투에서의 승리로 지옥 같았던 7년 전쟁도 끝이 났다. 1592년 5월, 2차 출정(사천해전) 때도 ‘총상’을 입은 적이 있어 더욱 안타깝다(남해이순신순국공원. 남해군 고현면 차면리 717)

 

회심의 카드 ‘사로병진작전’, 성공할 수는 없었을까

조·명연합군은 사로병진작전을 수행하기 위해 가용한 전력 약 13만 명 모두를 투입했다. 일본군은 왜성 세 곳에 각각 약 1.5만 명 내외의 병력으로 방어하였으니 조·명연합군은 공격목표 별로 2~3배 정도의 병력 우위를 유지한 셈이다. 예부터 전투에서의 성공 가능성과 관련한 ‘공자(功者) 對 방자(防者)’의 비율로 ‘3:1’을 많이 얘기한다. 이는, 3배 정도의 군사로 공격하면 ‘이길 수도 있겠다’이지 ‘승리를 장담할 수 있다’는 것은 결코 아니다. 변수가 참으로 많은 것이 ‘전장’이기 때문에 그렇다. 그런 면에서 보면 ‘4로병진작전’의 수립·시행에 있어서 고려하지 못했던 점이 있지 않았을까.

전쟁을 계획할 때는 전례(前例, 戰例)를 많이 참고하는데, 이 작전의 ‘전례’는 1597년 말에 있었던 ‘도산성전투’(제1차 울산성전투)였다. 도산성 전투 때는, 1만5천의 일본군이 방어하는 성을 6만 명에 달하는(공자가 방자의 4배 병력) 조·명연합군이 공격하고서도 함락하지 못했다.

서생포왜성. 속전속결로 한반도를 점령하려던 일본군의 침략전략이 실패하자, 장기전에 대비하여 본거지 ‘부산’ 방호에 절대적인 이곳 서생포에 왜성을 쌓았다. 증원부대 투입 및 전투물자 지원이 용이하게 바다와 인접해서 쌓았다. 성 외곽이 무려 2.5km에 달하고 해안까지 연결되게 축성했다. 일본이 쌓은 왜성 가운데 가장 큰 규모이다(울주군 서생면 서생리 711)

이번에 공격목표로 선정된 왜성 세 곳은 일본군들이 조선 내에 구축한 왜성들 중에서도 가장 크고 견고하게 축성된 것이었다. 일본의 ‘왜성’은 조선의 산성이나 읍성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견고하여 공격하기가 쉽지 않다. 성벽이 높고 튼튼하며, 굴곡이 많고 수많은 총안구도 설치되어 있다. 또한 성을 둘러싸고 인공·자연 해자(垓字)까지 구축한 것을 감안한다면 3배 정도의 병력 우위로는 처음부터 공략이 불가능했다고 판단된다. 이번 작전의 공격목표였던 왜성 현장에 가보면 패전한 이유가 어렵지 않게 이해된다.

이렇게 병력 우위를 유지할 수 없는 경우, 취할 수 있는 방법이 ‘선택과 집중’이다. ‘가토 부대’를 함락 직전까지 몰아붙였으나 결국 패하고 만 도산성 전투의 가장 큰 패인(敗因)을 ‘구원(증원)군’에서 찾았다. 그래서 외부로부터의 위협적인 ‘증원’을 배제하기 위해 공격 목표 세 곳에 대해 ‘동시(同時)공격 방법’을 택한 것이다. 이런 결과로 인해 왜성별로 공격 병력의 부족을 초래할 수밖에 없었고, 어느 한 곳도 함락하지 못했다. 

순천 ‘예교성’ 공격 시 조·명연합수군이 이곳 ‘묘도’ 일대에 주둔했다. 명 수군은 묘도의 북쪽에, 조선수군은 묘도 남쪽에 주둔했다. 이곳 ‘도독마을’에 조·명연합수군 사령부를 설치하고 27일 간 주둔했다. 그래서 ‘도독마을’이라 불린다. 마을 뒷산에는 당시 축조했던 산성의 흔적이 남아있다(여수시 묘도8길 150)

만약 ‘선택과 집중’을 택했다면 결과는 달라질 수도 있었을 것이다. 예를 들어, 최적의 1차 목표는 ‘사천’이 될 수 있다. 주목표(사천) 공격에 병력을 최대한 집중하고, 나머지 목표(순천·울산)에는 적절한 규모의 견제부대를 운영하면 된다. 그랬다면, 순천·울산으로부터의 일본군 증원을 견제·지연하는 가운데, 절약된 병력을 ‘사천’에 투입했다면 ‘사천왜성’은 탈취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런 다음에, 수륙합동작전으로 ‘순천 예교성’을 취하면 됐을 것이다. 그랬다면 울산의 ‘가토 부대’는 놓치더라도 두 곳을 잡으면 큰 소득이 된다는 결론에 이를 수 있다.

‘전승(戰勝)’은 결코 ‘전승(全勝)’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전투에서는 ‘대세(大勢)’가 기울어지면 적의 전쟁 수행 의지가 급락하면서 ‘퇴각’하게 돼있다. 이번에 시행한 ‘사로병진작전’에서 병력을 분산하다 보니 ‘노량해전’에서 승리하고도 그 의미가 퇴색된 것 같다. 한 곳만이라도 제대로 집중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많이 남는다.

 

7년 전쟁이 끝난 이후 전쟁 당사국들의 사정

‘임진·정유전쟁’은 조선이 건국한 지 200년이 되던 해에 발생한 ‘대규모 전쟁’으로, 이후 조선은 역사상 최악의 시련을 겪어야만 했다. 다른 전쟁 당사국 명·일본도 전쟁이 끝나면서 엄청난 진통과 변화를 겪어야만 했다.

명나라는 ‘조공·책봉체제’에서 가장 상징적 국가인 조선을 ‘돕는다’는 명분으로 전쟁에 참가하였지만, ‘실상’은 명나라를 정복하겠다고 선언한 일본과의 전쟁을 중국 영토 밖에서 치르겠다는 ‘실리’면에서 참전했다고 보는 것이 더 타당할 것이다.

어쨌든 명나라는 장기간에 걸쳐 ‘남’의 나라 전쟁에 많은 군사력과 군비를 쏟아 부은 나머지 국력이 많이 소진되고 말았다. 또한, 끊이지 않는 수많은 ‘반란’으로 인해 정세도 불안해졌다. 게다가, 전쟁과 국내 정세에 몰두하느라 여진·만주족과 같은 ‘외적’들을 제대로 억제하지 못하면서 점차 망국의 길로 접어들었다. 여진을 통일한 ‘누르하치’에 의해 ‘후금(後金)’이 중국 대륙의 ‘새 주인’으로 들어섰다. 이후, 조선은 이 신흥 강국으로부터 또 다시 전쟁의 참화 ‘병자호란’을 겪어야만 했다. 그때, 굴욕적인 항복을 통해 조선의 민족적인 자존심은 크게 손상됐다. 

이락사(李落祠). ‘이(李)순신장군이 떨어진(落) 곳에 세운 사(祠)당’이란 뜻이다. 이충무공이 전사한 관음포 바다 바로 옆에 세웠다. 비각에는 ‘큰 별이 바다에 떨어졌다(대성운해 大星殞海)’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그래서 관음포 앞바다를 ‘이충무공이 순국한 바다’라는 뜻에서 ‘이락파(李落波)’라고도 부른다(남해군 고현면 차면리)

임진·정유전쟁을 치르는 도중에 전쟁 지도자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사망하면서 7년 전쟁은 끝이 났다. 그로부터 2년 만에 일본에서는 ‘천지의 개벽’이 일어나면서 정권이 바뀌었다. 전쟁에 참가하지 않고 ‘힘’을 키운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세키가하라 전투(1600년)’에서 강력한 정적들을 제압하고 일본을 통일한 것이다. 도쿠가와는 일본의 새로운 패자(覇者)로 등장하면서 ‘에도막부’ 시대를 열었다.

정치체제를 안정시킨 도쿠가와는 막부의 ‘정당성’ 확보에 필요성을 느껴 이웃나라 조선과의 관계개선과 수교에 주력했다. 일본은 전쟁을 일으킨 ‘가해자’로서 전쟁 중 많은 인적·물적 손실을 입었고, 정권이 바뀌는 ‘정치적 큰(大) 변화’도 있었다. 그렇지만 전쟁을 통해서 문화적·기술적으로 엄청나게 발전하게 되는 계기를 맞기도 했다. 그래서 일본을 임진·정유전쟁의 최대 ‘수혜자’라고 평하기도 한다. 그래서 2차 대전의 전범국·패전국 일본이 6.25전쟁을 통해 회생한 사실과 겹치니 ‘기분’이 묘해진다.

아산 현충사로 ‘학습여행’을 나온 유치원 어린이들. ‘흰색’ 도화지에는 모든 것을 그릴 수 있다. 이때 그린 그림은 죽을 때까지 간다

전쟁으로 인해 가장 심대한 타격을 받은 나라는 당연히 ‘조선’이었다. 그러나 전쟁이 끝나고도 왕조 교체 없이 300여 년간 계속되는 등 정치적으로는 큰 변화가 없었다. 주변국과 비교하면 잘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이다.

임진·정유 7년 전쟁을 치르면서 조선에 남은 것은 ‘폐허’뿐이었다. 무너져 내린 나라, 조선을 다시 만들어야만 했다. ‘재조산하(再造山河)’였다. 국가 재건에 총력을 기울이기 위해서는 안정적인 조건(전쟁 없는 시간)이 충족돼야 했다. 지정학적으로 전·후방 모두에 ‘적(敵)’을 두는 것은 국가의 ‘자멸’을 초래할 수 있다. 시간이 지나면서 ‘북쪽’이 위협요인으로 바뀌고 있었다. 그래서 일본과의 전쟁을 마무리 지을 수밖에 없었다. 수차례 사신 파견과 수교를 요청해온 ‘일본’의 제안을 받아들여 교류를 터나갔다.

총력을 결집하여 ‘재조산하(再造山河)’에 모든 것을 쏟아 부어야 할 때에, 조선은 ‘재조지은(再造之恩)’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방황했다. 그 결과가 무엇이었던지는 ‘역사’가 얘기해주고 있다. 그래서 또 한 번의 회오리, 정묘호란(1627)과 병자호란(1636)을 겪어야만했다.

 

연재를 마치며

임진왜란을 얘기할 때 우리 역사상 최대의 국난(國難)이라고 한다. 조선이 건국하여 200여 년 동안 큰 전란 없이 오래도록 문약(文弱)과 평화에 젖은 나머지 당한 전쟁이었다. 전쟁 발발 전 많은 ‘정보’들을 통해 전쟁의 ‘조짐’이 진작부터 여러 곳에서 감지됐다. 그러나 이런 징후들을 ‘당파적’으로 판단한 나머지 제대로 대처하지 못하고 전쟁을 맞고 말았다.

전쟁이 발발하자마자 관군은 무기력하게 무너졌지만, ‘들불’처럼 일어나 일본군의 ‘허’를 찌른 ‘의병’들의 활약으로 일본군의 진격은 주춤할 수밖에 없었다. ‘명’의 파병을 이끌어낸 국왕 선조의 덕분(?)으로 명나라 군대가 국경을 넘어 전쟁에 ‘가담’함으로써 일본군의 진격을 멈춰 세울 수 있었다. 이후, 전쟁은 조선이 배제된 ‘명·왜(明·倭)’의 전쟁으로 변했다. 그러나 ‘조·왜(朝·倭)’ 전쟁으로 진행된 바다에서의 전투에서 조선 수군이 연승하자 일본군이 추진하려던 ‘수륙병진전략’은 저지됐다.

갖은 이유로 이순신장군이 탄핵되면서 조선 수군은 ‘몰락’의 길을 걸었다. 그러나 다시 나라의 부름을 받은 이순신, ‘나락’으로 떨어진 수군을 다잡고 ‘구색’을 갖춰 나갔다. 이어서 ‘명랑’ 바다로 일본군을 끌어들여 ‘천행(天幸)’으로 일본군의 발걸음을 되돌렸다. 7년 전쟁의 마지막 전장 ‘노량 바다’. 본국으로 ‘철병’하려던 일본군의 ‘의지(意志)’를 확실하게 꺾어 재침을 막기 위한 ‘마지막 전투’를 펼쳤다. 대승을 거뒀다. 하지만, 큰 별을 잃고 말았다. ‘대성운해(大星隕海; 큰 별이 바다에 잠겼다)’라고 했다.

현충사 안에는 이순신장군의 사당과 옛집, 기념관 등이 있지만, 실제 그가 묻힌 무덤(墓)은 현충사 북쪽 약 6km 지점에 있다. 장군이 돌아가신 후 유해는 통제영이 있던 고금도(古今島)로 옮겨졌다가 이듬해에 아산 ‘금성산’ 아래에 모셔졌다. 그리고 1614년(광해군 6년)에 다시 이곳 ‘어라산’으로 옮겨왔다(아산시 음봉면 삼거리 산 2-1)

430년이 지난 임진·정유전쟁의 ‘바다’, 이순신이 싸웠던 ‘23전 23승’의 해전지를 찾았다. 가는 곳마다 ‘장군’의 흔적을 보고 느낄 수 있었다. 이순신에 대한 당시의 평가는 매우 ‘우호적’이었다. 북벌을 주장했던 효종, 숙종도 존경했지만 ‘정조’는 과하다 싶을 정도로 존경했다고 한다. 그런 흔적들이 많이 남아 있었다. 그러나 몇몇 곳을 제외하고는 ‘해전지’를 찾는 사람을 거의 볼 수 없었다. 국난 극복에 기여한 ‘영웅’들이 제대로 기억되지 못하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국가 안보에 대한 관심이 적음을 나타내는 단적인 현상일 수도 있다.

임진·정유전쟁 때, 이순신 외에도 기억해야 할 더 많은 영웅들, 장군들, 병사들이 있었을 것이다. 임진왜란 외의 다른 전쟁에서도 기억해야 할 많은 ‘영웅’들이 있을 것이다. 그들 ‘영웅’에 대한 이야기가 어린이들을 대상으로 하는 ‘위인전’ 안에만 있어서는 안 된다. 오늘의 ‘우리’를 있게 한 더 많은 영웅들의 더 많은 얘기를 좀 더 자연스럽게 접하게 할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를 생각해 봤다.

기간 중 만난 임진왜란(해전) 전문가가 “자료·연구의 부족으로 인해 전쟁 전체가 잘 연결되지 않는 곳이 더러 있다”라고 자평할 정도로 연구에 어려움이 많다고 했다. 승전(勝戰) 중심으로 전개된 ‘해전’에 관한 연구가 이 정도이니, 명군(明軍) 중심으로 진행되고 패전(敗戰)이 다반사였던 육상전투에 대한 연구는 어떠할지 궁금하다. 보다 체계적인 연구가 필요함을 느꼈다.

또한, 60~70년대에 ‘관(官)’ 주도의 이순신 현창사업이 진행됐던 적이 있었다. 현충사·한산도 제승당 등도 그때 성역화 됐고, 초등학교에 있는 대부분의 이순신 동상도 그때 건립됐다. “이순신에 대한 지나친 미화(美化)와 성웅화(聖雄化)가 오히려 임진왜란과 이순신장군에 대한 연구를 가로막는 장애물이 되기도 했다”고도 했다. 이순신장군을 얘기할 때 자주 대비해서 거론됐던 ‘원균장군’에 대한 연구와 옹호 활동들이 점점 증가하고 있는 추세다. 이런 연구와 의견도 새롭게 바라볼 시점이 되지 않았을까.

노량해전에서 순국한 이순신장군의 충의와 넋을 기리기 위해 세워진 최초의 충무공 사당 ‘남해 충렬사’. 경내에는 충무공의 시신을 임시로 묻었던 ‘가묘’가 있으며, 비각에는 ‘補天浴日’이라는 현판을 박정희 글씨로 달았다(보천욕일 : 위대한 공훈을 세운 것을 비유하는 말로 ‘하늘을 메우고 해를 목욕시키다’라는 뜻이다-남해군 설천면 노량로183번길 27)

임진∙정유의 7년 전쟁을 이끌었던 명재상 유성룡이 <징비록>이란 명저를 남겼다. 전쟁을 대비하여, 전쟁을 통해 ‘갖추어야 할 것’을 기록한 책이다. 결론은 ‘자강(自强)’, 스스로 강해지지 않으면 안 됨을 가르치는 책이다. 전쟁 이후로 세상이 다 바뀌었는데도 조선은 이 세상이 어떤 세상으로, 왜 바뀌었는지에 대해서는 ‘일(一)’도 관심이 없었다. 제대로 징비하지 않은 결과로 ‘병자호란∙청일전쟁∙러일전쟁’을 겪어야 했다.

오늘도 북한의 무력 도발은 지속되고 있고, 전쟁 가능성은 언제나 우리 곁에 있다. 전쟁에 관한 얘기는 우리의 생존에 관한 것인데 관심 밖의 주제·대상이 되어 가고 있는 현실이다. 한국인에게 전쟁에 관한 얘기는 주변을 의식해야 할 일이 아니다. 말초적인 즐거움에 모든 게 쏠린 나머지, 꼭 필요한 ‘안보·자강·징비’에 관한 이야기가 자리할 ‘공간’이 좁아 보이는 현실이 안타깝다.

 

노량해전지 답사여행을 하려면

‘노량해전’은 전남 ‘광양만’과 남해도 ‘관음포’ 일대에서 있었던 해전이다. 그 현장만을 답사한다는 것은 큰 의미가 없을 것이다. 그렇다고 노량해전과 관련된 전 지역을 둘러보기에는 너무나 광범한 ‘여정’이 될 것이다. 해전이 직접 벌어졌던 ‘남해도(관음포 일대)’만을 답사하기 보다는 일대의 다른 볼거리들과 연계시켜 ‘코스’를 설계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여건이 허락한다면 순천의 ‘예교성’과 삼도수군 통제영이 있었던 ‘고금도(묘당도)’까지 범위를 넓히면 어떨까 싶다. 그렇지만, 지역 간의 거리가 만만하지가 않다. 그러나 ‘예교성’과 순천만공원·여수를 연결하는 코스나 남해도 일주를 권장하고 싶다. 각자의 취향과 여건에 따라 달라질 수 있을 것이다.

                                            

<참고 자료>

* 박종평, <난중일기>, 글 항아리, 2018

* 이민웅, <임진왜란 해전사>, 청어람미디어, 2008

* 이민웅, <이순신 평전>, 성안당, 2017

* 이 훈, <이순신과의 동행>, 푸른 역사, 2014

* 제장명, <이순신 백의종군>, 행복한 나무, 2011

* 황현필, <이순신의 바다>, 역바연, 2021

 

 

 

 

 

 

 

 

 

 

 

 

 

저작권자 © 자전거생활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