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방 중의 전방, 들은 넓고 백사장은 단단하건만

장장 3.7km의 사곶해변. 백사장이 워낙 단단해 비상 활주로로 사용된다. 바퀴 자국이 거의 남지 않는 것을 알 수 있다
장장 3.7km의 사곶해변. 백사장이 워낙 단단해 비상 활주로로 사용된다. 바퀴 자국이 거의 남지 않는 것을 알 수 있다

새벽에 하늬해변에서 일출을 맞았다. 섬 동단에 자리한 하늬해변은 일출의 명소로 알려져 있지만 육지와의 사이가 20~30km에 불과해 해는 수평선이 아니라 옹진반도 산자락 위로 올라온다.

이른 아침인데도 병사들이 구보하며 부르는 힘찬 군가가 들려온다. 백령도의 아침을 깨우는 소리다. 젊은 청춘들이 이 먼 섬에서 고생하는 것이 안타깝지만 인간사 부조리가 극단으로 치달은 이 땅에서는 도리가 없다. 고마움과 미안함 그리고 지당함까지 자식 같은 장병들을 보며 복잡한 심경에 빠져든다.

하늬해변 언덕에서의 일출. 수평선이 아니라 북측 옹진반도 산자락 위로 해가 떠오른다  

진촌리를 벗어나 남쪽으로 방향을 잡는다. 100년 전만 해도 바다이던 내만은 드넓은 곡창으로 변모했다. 벼는 고개를 숙여 영글어가고 창공은 더없이 높다. 들판을 관통하면 백령호가 펼쳐진다. 섬 내 용수를 책임지는 호수는 길이 1.8km, 최대폭 900m로 자못 광활하다.

백령호 북동쪽으로 펼쳐진 들판에 공항이 들어선다는데 아직 측량 깃발조차 보이지 않아 첫삽을 뜨기까지는 꽤 시간이 걸릴 것 같다.

백령호를 기준으로 동서에 평야가 있으며 서편이 조금 더 넓다. 산으로 둘러싸인 3km 들판은 섬 분위기가 느껴지지 않는다. 들녘 저편으로 군사시설로 가득한 업죽산과 북포리 마을이 보인다. 해병 여단본부가 있어서 진촌리가 백령도의 행정·경제 중심지라면 북포리는 군사의 중심이다.

저편으로 어제 넘어온 연화리고개를 올려다보며 극심한 경사도에 거듭 혀를 내두른다. 이윽고 해안에 이르러 작은 언덕을 오르면 천안함위령탑이다.

백령도 들판은 상당히 넓어서 어민보다 농민이 더 많다고 할 정도다

 

백령평야의 용수를 대는 백령호. 최대폭 900m, 길이 1.8km로 상당히 큰 인공호수다 백령호 옆에 있는 충혼탑과 구룡 다련장로켓. 순국선열을 기리는 기념물과 무기는 '상무' 정신을 고취해준다

 

들판 저쪽으로 백령도에서 가장 높은 업죽산(184m)이 길게 뻗어난다 

전날 두무진에서 넘어온, 경사도 17%의 연화리고개. 길가의 전봇대를 보면 산줄기를 자르고 지그재그로 이어진다

위령탑은 높이 8.7m의 세 기둥이 모인 형태로 46용사가 우리 영해와 영토, 국민을 굳건히 수호하겠다는 의지를 나타낸다. 주탑 아래 보조탑에는 너무나 젊고 창창한 46용사의 부조 얼굴이 조각되어 있다. 이땅을 위해 희생한 청춘들 앞에 말을 잃은 일행은 거수경례와 묵념을 올렸다. 안타까움과 분노를 삭일 수밖에 없지만 결코 잊지 말아야 할 일이다.

2010년 3월 26일 밤 피격되었으니 벌써 13년이 지났다. 피격위치는 위령탑에서 2.5km 떨어진 해상으로 자세히 보니 하얀 부표가 떠 있다. 바다는 아무 일도 없었던 듯 광막한 유리처럼 잔잔하지만 수면 아래에는 지금도 마탄의 흑함이 잠항 중인지도 모른다.

활화산을 곁에 둔 것처럼 전쟁의 씨앗을 발본색원하지 못한 이 땅은 전운이 언제 폭발할지 모르는 불안지대다. 이미 6.25를 겪은 한국인의 심리 속에는 전쟁에 대한 공포와 함께 응전에 대한 각오가 내재화되어 있는 것 같다. 실제 그런 날이 닥치면 ‘아, 올 것이 왔구나’ 하고 현실을 직면하며 차분하고 합리적으로 대응할 가능성이 높다. 여론조사를 해보면 젊은이는 물론이고 중년 이상까지 참전하겠다는 결의가 확고하니 오히려 전쟁은 일어나기 어렵고, 시작되더라도 압도적인 화력과 사기로 곧 종결될 것이다.

천안함위령탑은 높이 8.7m의 세 기둥이 모인 형태로 46용사가 우리 영해와 영토, 국민을 굳건히 수호하겠다는 의지를 나타낸다. 폭침 해역은 왼쪽 뒤 2.5km 해상이다 너무나 젋은 청춘들이라 더욱 안타까운 46용사 얼굴 부조. 이들 앞에 서면 마음이 참으로 무겁다

폭침해역은 위령탑 뒤 해상에 하얀 부표로 표시해 놓았다 

원래는 해안과 연접한 연봉대고개를 넘어 중화동으로 갈 계획이었으나 비포장길이 매우 거칠어 내륙으로 우회하기로 한다.

장촌포구에 이르면 남쪽 해안으로 역시 북쪽보다 지형이 부드럽고 마을도 많다. 장촌포구 인근에는 용틀임바위가 새로운 명소로 안내되고 있다. 2019년 인증된 백령·대청 지질공원 10개 명소 중 하나이자, 일대의 남포리 습곡은 천연기념물 507호로 지정되어 있다. 15년 전에 왔을 때는 딱히 안내가 없어 지나쳤는데 진입로와 전망대를 새로 조성해 놓았다. 전망대에서 바라보는 용틀임바위와 단층 습곡은 실로 지질학적 장관이다. 문화해설사는 이런 습곡은 여기와 군산 말도에서만 볼 수 있다고 설명한다.

저 단단한 퇴적암이 마치 시루떡처럼 휘어질 정도면 얼마나 엄청난 압력이 가해졌을까. 지구 판구조론에 따르면 백령도는 10억 년 전 호주대륙에서 떨어져 나왔다고 한다. 지금은 5천600km나 떨어진 아득한 이국인데 아무리 장구한 세월이라고 해도 이 거대한 땅이 어떻게 수천km를 움직였단 말인가. 46억 살 지구의 조화 앞에 인류문명 3천년은 참으로 찰나이고, 또 찰나에 지나쳐갈 것만 같다. 인생 100년은 말할 것도 없는 것이, 그동안 저 퇴적암의 0.1㎜라도 마모될까.

수면 위로 불쑥한 용틀임바위는 높이 10m 정도로, 마치 몸을 뒤틀며 승천하는 용을 닮았다는데 내륙의 산에 있었다면 ‘촛대바위’나 ‘남근바위’가 되지 않았을까. 용틀임바위 저편으로 고깃배가 지나고 그 뒤로는 뾰족한 삼각산(343m)을 중심으로 대청도가 기다랗다.

해상에서 10m 정도로 솟아 있는 용틀임바위. 정확히 말하면 침식과 풍화로 점점 무너져내리는 중이다 

용틀임바위 주변의 퇴적암 습곡. 10억 년 호주대륙에서 떨어져 나온 흔적이기도 하며 이런 습곡은 이곳과 군산 말도에서만 볼 수 있다고 한다 

용틀임바위에서 바라본 대청도. 가운데 삼각산(343m)을 중심으로 온통 산지를 이룬다. 직선거리 8.5km인데 상당히 멀게 느껴진다

장촌포구를 지나 어느 해변을 지나는데 해병 장병들이 해상침투훈련을 하고 있다. 이홍희 위원은 예전에 이 부대의 대대장을 지냈다면서 감회어린 표정으로 주변을 돌아보았다. 이 위원이 신분을 밝히자 교관은 깍듯하게 경례를 올린다. 검게 그을린 얼굴과 당당한 풍채의 교관에게서 특수부대의 군기가 풍겨난다. 지금은 백발에 항상 인자한 표정의 이 위원이지만 한때는 이처럼 살벌한 부대를 지휘했다는 데서 인품과 경력을 다시 보게 된다.

군필자라면 이름만 들어도 모골이 송연한 ‘유격장’ 고개를 넘어 다운힐하면 백령도의 명물 중 하나인 콩돌해변이다. 풍화와 침식으로 떨어져 나온 암석이 파도와 바람에 마모되어 둥글게 변한 콩돌로 가득한 해변으로 길이는 900m 정도다. 콩돌해변에서 자연이 선호하는 기하학의 원점은 원과 구임을 실감한다. 지구와 달, 모든 별과 행성이 구이고 생명의 원형질인 난자와 알 역시 구인 것은 우연이 아닐 것이다.

유격장고개 넘어 콩돌해변 가는 길. 북부 코스와 마찬가지로 평지는 드물고 업다운이 연속되어 진을 뺀다

 

콩돌해변에서는 자연이 원과 구를 좋아한다는 것을 실감한다. 타원체가 많지만 점점 완벽한 구체로 깎여나갈 것이다    

콩돌해변에서 작은 고개를 넘으면 백령호 수문 위로 나 있는 백령대교다. 길이 30m로 ‘대교’이름이 붙은 것은 40톤 하중도 지탱하는 튼튼한 구조와 섬의 생명줄인 백령호를 만들어낸 입지 때문일까. ‘대교’ 옆에는 예전에 없던 ‘서해최북단 백령도비’가 서 있고 주변은 작은 공원으로 꾸며져 있다.

백령대교부터 백령도의 진풍경 중 하나인 사곶해변이 시작된다. 지금도 비상 활주로로 활용되는 길이 3.7km, 최대폭 300m의 단단한 백사장은 너무나 특이해서 천연기념물 391호로 보존되고 있다. 충청 이남 서해안 백사장이 대체로 단단하지만 사곶해변은 바퀴 자국이 살짝 남을 정도로 정말 단단하다. 토목전문가인 차백성 위원이 단단한 백사장의 원리를 ‘공극율(孔隙率)’로 설명한다. 공극율은 알갱이 사이에 있는 빈틈의 비율을 뜻하며, 사곶해변은 모래 알갱이 사이의 공극율이 극히 낮아서 단단함을 유지한다는 것이다. 이 정도로 단단한 백사장은 이탈리아의 한 곳을 포함해 전세계에서 둘뿐이라고 한다. 파도를 희롱하며 달리는 사곶해변 라이딩은 백령도 투어의 피날레로 제격이다.

백령대교 옆에는 '서해최북단백령도' 비와 소공원이 조성되어 있다 

사곶해변 라이딩은 백령도만의 진귀한 경험이다 

사곶해변 옆마을인 진촌3리에는 백령도 맛집 중 하나인 ‘사곶냉면’ 집이 있다. 예전보다 내부가 확장되고 깨끗해졌으며 수육과 냉면 맛은 그대로다.

용기포신항 부두는 배가 닿기 1시간쯤 전부터 자동차와 사람이 모여들기 시작한다. 한바탕 떠들썩한 승하선 과정을 거쳐 코리아 프라이드 호는 대청도를 향해 출항했다. 겨우 20분 거리지만 백령도의 명소와 추억을 이미지로 되새김질 하는 한편, 대청도의 명승을 기대하며 잠시 눈을 감는다.

 

tip

사격장을 지나는 연봉대고개는 길 사정이 나쁜데다 군 작전지역이기도 해서 우회하는 것이 좋다. 시간 여유가 된다면 용기포신항 인근에 있는 용기원산(136m) 정상의 끝섬전망대를 올라보기를 추천한다. 승선 시 자전거는 가장 먼저 올라 화물칸에 적재해야 해서 부두에 미리 도착해 있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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