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바퀴로 느리게, 천년고도 향기 온몸으로 맡으며

경주 시내 한가운데에 있는 봉황대. 주인을 모르는 왕릉급 무덤으로 높이 22m 지름 82m에 달한다. 대릉원 내에 있는 황남대총(높이 23m, 길이 120m) 다음으로 큰 무덤이다. 봉분 허리춤에 수백년 묵은 고목들이 마치 왕관처럼 자라 고색창연하면서도 기괴한 느낌을 준다
경주 시내 한가운데에 있는 봉황대. 주인을 모르는 왕릉급 무덤으로 높이 22m 지름 82m에 달한다. 대릉원 내에 있는 황남대총(높이 23m, 길이 120m) 다음으로 큰 무덤이다. 봉분 허리춤에 수백년 묵은 고목들이 마치 왕관처럼 자라 고색창연하면서도 기괴한 느낌을 준다

한국인이라면 경주는 한번이 아니라 수학여행, 신혼여행(예전에), 가족여행, 졸업여행 등으로 여러 번 가본다. 이렇게 여러번 경주를 찾는 것은 이 작은 도시에 퍼내도 퍼내도 끝이 없는 역사의 샘이 있기 때문이다.

1천년 간 한 나라의 수도였던 도시는 세계적으로도 유례가 드물다. 서울은 조선조를 포함해 이제 600년을 조금 지났다. 우리 역사상 문(文)과 무(武)가 조화되고, 문화적으로도 최고의 황금기를 구가한 한국의 로마시대가 바로 경주에 있었고, 노천박물관이라고 할 만큼 많은 유적과 유물이 당대의 번영을 전한다.

통일신라 전성기에 경주는 100만 인구의 세계적인 대도시였으나 지금은 27만으로 오히려 크게 줄어들었다. 이 같은 축소는 순기능도 있는데, 역사의 현장을 현대적 도시로도 뒤덮지 못해 경주 분지에는 여전히 고대의 영기가 감도는 듯 천년의 무게로 진중하다.

우리가 경주를 돌아보는 방식은 대개 비슷하다. 자동차로 주요 유적지를 돌아보고 ‘경주도 별것 없다’는 속단을 내리기 십상이다. 이래서는 그 많은 신라의 흔적과 사연들을 제대로 만날 수 없다. 일단 이동 속도가 느려야 하고, 움직이는 과정마저 역사와 만나는 접점이 되어야 한다. 가장 좋은 방법은 걷기지만, 너무 느리고 쉬이 지쳐서 제풀에 의욕이 꺾이고 만다. 실질적으로 가장 좋은 경주 여행 방법은 바로 자전거다. 두 바퀴로 천천히 경주를 대하는 순간, 이 천년의 땅은 익숙하면서도 지금껏 보지 못한 생경한 표정으로 깊숙한 말을 걸어온다.

신라 1000년 간 왕궁이 있던 반월성 터는 건물들이 모두 소실되고 잔디밭만 남아 텅텅 비었다. 맞은편의 고분 같은 언덕은 성벽의 망루이고, 왼쪽에는 조선시대 얼음 저장시설인 석빙고가 보인다(현재 발굴이 진행 중이며, 사진은 발굴 전 모습이다)

김유신 장군의 집터에 남아 있는 재매정 우물. 장군이 승전하고 개선한 직후 다시 적군의 침입을 받아 그대로 출진하면서 집 앞을 지날 때도 가족들은 돌아보지도 않고 이 우물물 맛만 보고 갔다는 전설의 현장이다

 

경주는 시내와 외곽 유적지를 잇는 자전거길이 잘 되어 있어 초보자와 가족 단위 자전거 여행지로 최적지다. 아무리 경주를 많이 갔어도 자전거로 저 1000년 묵은 들과 산을 돌아보지 않았다면 아직 경주의 진짜 향기를 맡지 못했다고 단언할 수 있다.

경주 전역을 자전거로 둘러보려면 최소한 3~4일은 잡아야 할 것이다. 여기서는 하루 일정으로 적당한 반월성과 낭산 주변의 핵심 코스를 소개한다. 낭산 꼭대기에 있는 선덕여왕릉 외에는 모두 평지여서 초보자도 무리없이 완주할 수 있다.

자전거로 떠나는 경주 여행은 국립경주박물관에서 시작하는 것이 편하다. 박물관 자체도 볼만하지만 무료 주차공간이 널찍하고, 외지에서 접근이 쉬우며, 핵심 유적지가 밀집한 곳에 자리해 있기 때문이다. 자전거가 없다면 박물관 인근의 대릉원 앞에서 빌릴 수도 있다.

박물관 바로 옆에, 성긴 숲이 뒤덮고 있는 작은 언덕이 신라 1000년 간 왕궁이 있던 반월성이다. 하늘에서 보면 지형이 반달을 닮아 반월성이라고 하는데, 자연 구릉지에 인공을 더해 사방을 성벽으로 에워쌌다. 박물관 앞을 지나는 대로(7번 국도)를 따라 시내 쪽으로 잠시 가면 왼쪽으로 반월성 진입로가 나온다. 반월성 안으로 들어서면 주위에 비해 다소 높은 황량한 대지가 펼쳐진다. 반월성 내부는 최대폭 200m, 길이 800m에 달하는 대규모여서 전각들이 가득 찼다면 대단한 장관을 이뤘을 것이다. 천년왕국을 통치했던 56명의 왕과 비빈, 그리고 신하들의 희로애락이 바로 여기 반월성에서 점철되었으니, 흙 한 줌, 돌부리 하나도 예사롭지 않다. 반월성 내부를 돌아보는 소담스런 흙길은 자전거 타기에도 좋다.

황룡사 9층 목탑의 주춧돌. 높이가 20층 빌딩과 맞먹는 80m에 달해 현존한다면 세계최고의 목탑이 되었을 것이다. 왼쪽의 높은 바위는 중앙기둥을 세웠던 심초석이다. 목탑 주변에는 금당과 회랑 등 황룡사의 웅장했던 건물 터가 고스란히 남아 있다잔디밭을 이룬 황룡사지. 지금은 시가지에서 떨어진 휑한 들판이지만 통일신라 때는 100만 인구가 살던 대도시 서라벌의 한 가운데 자리하고 있었다. 왼쪽 뒤로 미탄사지 3층 석탑이 보이고, 그 뒤로는 남산의 많은 봉우리와 골짜기들이 첩첩이 겹쳐 있다

반월성 서쪽의 통로로 나오면 바로 옆에 계림과 첨성대가 보인다. 계림은 고목들이 우거진 숲으로, 신라 초기 이후 왕들의 계보를 독점한 경주 김씨의 시조인 김알지가 유래했다는 전설이 서려 있다. 숲 안쪽에는 신라의 국가적 기틀을 다졌다는 내물왕릉이 장중하게 앉아 있다. 내물왕릉 앞에서 왼쪽으로 숲을 벗어나면 경주 시내에서 가장 고즈넉하고 전통적인 느낌이 진한 교동 마을이다. 경주향교와 수백 년 간 적선을 베풀어 지금도 칭송이 끊이지 않는 ‘경주 최부자집’, 원효대사가 요석공주와 동거한 요석궁터(지금은 식당으로 변함)도 이 마을에 있다.

반월성에 가까운 남천 변에는 화려했던 다리인 월정교가 한창 복원중이다. 남천을 따라 마을길을 조금 내려가면 주춧돌만 남은 넓은 건물터와 낮은 담으로 둘러싸인 우물터가 나온다. 이곳이 바로 삼국통일의 공신인 김유신 장군의 집터로, 우물 이름을 따서 재매정이라고도 한다. 장군이 집은 사라졌지만 장군이 출전길에 마셨다는 우물은 지금도 남아 있다.

계림에서 첨성대와 안압지를 지나는 길은 작은 들판을 이루는데, 주위에 중요한 유적과 유물이 밀집해 있어서 가장 ‘경주스러운’ 풍경을 보여준다. 봄이면 유채꽃이 만발하는 화원으로 변한다.

안압지를 지나 임해로에서 좌회전해서 작은 들을 가로지르면 원효대사가 주석했던 분황사 앞으로 신라의 국력을 총결집해서 이룩한 황룡사 터가 장황하다. 높이가 80m나 되었다는 거대한 9층 목탑은 주춧돌만 남았지만 절터 규모만으로도 입이 벌어진다.

고요한 배반들 한쪽에 아무런 장식 없이 탁 트인 공간에 앉아 있는 진평왕릉. 마치 절을 하듯 고개를 잔뜩 기울인 소나무가 특이하다. 진평왕은 52년 간 재위하며 신라의 부흥을 이끌었고, 선덕여왕의 아버지이기도 하다

명활산성과 낭산 사이에 펼쳐진 배반들은 시내가 지척임에도 매우 조용하고 전원적인 풍경을 간직하고 있다. 들판은 아주 살짝 경사가 져 있으며, 논 사이로 구불대며 나 있는 농로는 매혹적인 자전거 코스다

황룡사 터를 나와 분황사 앞길에서 우회전하면 경주IC나 포항 방면으로 경주시내를 우회하는 구황로와 만난다. 도로의 동쪽(왼쪽) 인도를 따라 500m 남하하면 들 가운데 길게 솟은 낭산(115m)에 못 미쳐 왼쪽 들판으로 뻗어나간 길이 나온다. 이 길로 들길을 1km 정도 횡단하면 맞은편 명활산 아래 거대한 봉분 하나가 고목들에 에워싸여 있다. 아무런 장식도, 울타리도 없이 자연 그대로 노출되어 있는 이 무덤이 선덕여왕의 아버지인 진평왕릉이다. 왕릉 맞은편의 배반들은 살짝 경사가 져있는데 매우 고즈넉하고 묘한 정감이 흘러서 신라 당시의 공기가 그대로 남은 것만 같다.

낭산 꼭대기에 자리한 선덕여왕릉. 우리 역사상 최초의 여왕이었지만 치세 내내 병고와 내우외란에 시달려야 했다. 여왕의 처지를 반영하듯 능 주위의 소나무 숲은 어딘가 가녀리고 애처로운 모습이다

진평왕릉에서 들길을 내려와 3층 석탑이 덩그러니 남은 황복사터를 지나 산모롱이를 돌아가면 곧 강선 마을이다. 시내가 지척이지만 낭산에 막혀 완연한 시골 분위기로 조용하고 초라하다. 마을에서 문무왕 화장터인 능지탑 방면으로 넘어가는 고갯마루에서 왼쪽 능선길로 들어서서 잠시 산길을 오르면 숲속에 커다란 봉분이 나타난다. 우리 역사상 최초의 여왕인 선덕여왕이 잠든 곳이다(선덕여왕릉 구간은 자전거를 끌거나 산 아래 두고 간다).

선덕여왕릉에서 왔던 길 반대편으로 산을 내려와 동해남부선 철길을 통과하면 발굴중인 사천왕사터가 반긴다. 절터 앞을 지나는 7번 국도에서 우회전해 1.5km 가면 출발지인 국립경주박물관이 나온다.

문득 경주가 그립다면 연중 가장 찬란한 4~5월을 기약하자.

글/사진 김병훈 발행인 

 

<코스>

국립경주박물관→반월성→계림→경주향교→최부자집→재매정→안압지→황룡사지→분황사→진평왕릉→황복사지→선덕여왕릉→사천왕사지→국립경주박물관. 14km. 4시간 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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