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성은 허물어지고 부흥군은 어디로

 

금강을 벗어나 석성산성을 향해 들길을 가른다. 왼쪽 멀리 낮은 산줄기 위에 석성산성이 있다  
금강을 벗어나 석성산성을 향해 들길을 가른다. 왼쪽 멀리 낮은 산줄기 위에 석성산성이 있다  

​​​​​​​석성산성은 작은 규모가 아니다. 성이 터 잡은 옥녀봉(184m)은 평야지대여서 돌출 망대로 탁월하고 부여로 이어지는 금강을 감시하는 천혜의 위치다. 2017년 발굴 결과, 3중의 석축성임이 밝혀졌는데, 백제 때 쌓은 외성은 둘레가 1,605m로 중대형급에 든다. 내부면적이 15만8,352㎡(약 4만8천평)이니 수 천의 군사가 주둔 가능했을 것이다. 북쪽 봉우리 주위에 쌓은 2차성은 둘레 751m로 통일신라 초기의 성벽이어서 백제 멸망 후에도 활용된 것을 알 수 있다. 3차 성벽은 607m이며 통일신라 말기에서 조선시대까지 사용된 것으로 밝혀졌다. 그만큼 석성산성의 입지가 전략적으로 매우 탁월하고 중요했다는 뜻이다.

석성산성 아래에 서 있는 백제무명용사 충혼탑. 1300년이 지났어도 주민들은 전쟁의 상흔을 잊지 않고 있다

안내문의 석성산성 조감도. 파란색 1차 성벽이 둘레 백제 때 쌓은 둘레 1.6km의 외성이고 2, 3차 성벽은 통일신라 이후 추가로 축성되었다. 성벽은 대부분 허물어져 돌무지로 남았지만 수풀에 묻혀 알아보기 어렵다 

돌무지로 뒹구는 2차 성벽의 일부. 선조들이 피땀 흘려 쌓은 유산을 이렇게 방치할 수 있나. 수풀이라도 걷어내 형태를 드러내고 더 이상 허물어지는 것을 막아야 한다

성 내에서는 토기편을 쉽게 볼 수 있다. 삼국시대 토기부터 조선시대 백자까지 분포해 산성이 다양한 시대에 걸쳐 사용됐음을 알 수 있다  

성 안쪽에는 곳곳에 묘지가 들어섰고 성벽은 수풀에 덮였지만 자세히 보면 성곽의 형태를 파악할 수 있다. 발굴을 위해 성벽 주변은 벌목을 했으나 다시 수풀이 뒤덮은 상태다. 사람들이 무관심하고 찾지 않아서 방치하고 있다면 순서가 틀렸다. 오히려 성벽을 보존하고 전망대와 번듯한 산책로를 조성한다면 사람들이 찾아올 것이다. 석성산성은 이도저도 아닌 상태로 갈피를 못 잡고 있는데 전국에 분포한 1500곳의 산성 대부분이 그렇기도 하다.

옥녀봉 정상에는 ‘그날의 함성’이란 시비가 서 있고 터가 넓은데 장대 흔적이 발견되었다. 남북으로 흐르는 금강과 논산평야가 한눈에 들어오고, 부여를 남쪽에서 지키던 가림성은 금강 저편으로 가까이 보인다. 가림성-석성산성-노성산성-황산성은 부여 남부를 지키는 방어선이었음을 바로 실감한다. 황산성 아래가 계백장군의 5천 결사대가 김유신의 신라군에 대적한 바로 황산벌이다.

석성산성 정상 옥녀봉 장대터에서 바라본 금강과 부여읍내. 오른쪽에는 '그날의 함성'이란 백제 부흥군을 기리는 시비가 서 있다 

석성산성에서 바라본 논산평야와 논산시내. 멀리 둔중한 고봉은 대둔산(879m)이다 산 아래에서 올려다본 석성산성. 송전탑 뒤편 오목한 곳이 성내 영역이고 왼쪽 봉우리가 옥녀봉이다   

산성을 내려오니 짧은 가을 해가 훌쩍 기울었다. 아직 갈 길이 먼데 날이 어두워지면 마음도 발길도 바빠지기 마련이지만 들판에서는 아무런 부담이 없다. 길은 빤하고 주변이 훤히 보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숲은 다르다. 우리가 어둠을 꺼려하는 것은 생물학적 본능이다. 적이나 맹수가 어디서 다가올지 알 수 없는 미지에서 불안이 점증하기 때문인데, 숲은 숨을 수 있는 나무나 바위가 많고 도망갈 때는 장애물이 되며, 밤이 되면 불안이 극대화되어 된다. 이제부터는 내내 들길이라 어둠이 와도 마음은 느긋하다.

들판은 곳곳에 구릉지가 있어서 바둑판같지는 않아 하천을 이용하는 것이 길 찾기에 편하다. 하천변에는 대부분 농로나 둑길이 있고 지대도 살짝 높아 주변을 살피기도 좋다.

들판에서는 어둠이 내려도 걱정이 없다. 사방이 탁 트여 다 보이고 시멘트 길은 밝다. 하지만 숲은 무엇이 숨어 있을 줄 몰라 본능적으로 긴장된다. 들길 저편에 작은 숲도 살짝 불안감을 자아낸다 

정각천을 따라가다 용평천 둑길을 타고 북상하면 고고학적으로 매우 중요한 부여 송국리선사유적이 낮은 언덕 위에 있다. 송국리유적은 1974년 처음 발견된 이후 25차례 발굴조사를 거쳐 수많은 유구와 유물이 확인되어 한반도 청동기문화를 대표하는 유적으로 인정받는다. 집터는 가운데에 구덩이를 파고 양 끝에 기둥을 세운 원형주거지와, 바닥은 좁고 몸통은 불룩하며 입구가 짧게 벌어진 토기는 각각 송국리형 주거지와 토기로 명명될 정도로 상징적이다. 송국리형 주거지와 토기는 일본의 야요이시대 유적에서도 확인되어 한반도에서 일본으로 청동기문화가 전파되었음이 입증되었다.

하지만 송국리유적은 일본의 대표적인 청동기유적인 요시노가리에 비할 수 없을 정도로 복원과 관리가 되지 않아 어정쩡한 상태다. 주거지는 3동만 복원되어 있고 나머지 유적은 터만 표시하고 있는 정도다. 비슷한 시기의 유적인 진주 대평리유적은 규모를 축소했을망정 울타리를 치고 번듯한 박물관을 갖춘 것과도 대조된다. 언덕 한쪽에 ‘바람의 언덕’ 표지판을 세웠는데, 사전지식 없이 찾아오는 사람은 그냥 사진 찍기 좋은 장소로만 여길 것 같다.

송국리유적의 집터는 움집 3동만 복원되어 있다

안내문의 송국리유적 조감도. 중간의 얕은 구릉지 일원에 유적이 분포한다

마을을 에워싼 목책 유적은 바닥 표시만 남았다. 어느 정도 복원해서 원형을 살리면 한결 나을 것 같다

구릉지 끝단에 자리한 산직리지석묘 2기. 왼쪽 1호 고인돌은 덮개돌 반이 내려앉아 경사진 형태를 이루고, 오른쪽 2호 고인돌은 받침돌이 무너져 덮개돌과 함께 모두 바닥에 닿은 상태다. 무덤방이 발견되지 않아 송국리유적 사람들이 제단으로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송국리유적은 북쪽 산지에서 들판을 향해 길게 흘러내린 낮은 구릉지 위에 자리하고 있는데 이는 한반도 도래인이 주축이 되어 조성한 것으로 보이는 일본 요시노가리 유적과 같은 입지다. 구릉을 따라 들판을 향해 끝까지 내려가면 들판 직전의 언덕 위에 산직리지석묘가 있다.

2기의 고인돌 중 동쪽의 1호는 거대한 덮개돌 한쪽이 내려앉아 경사면을 이뤄 아주 특이한 모습이고 서쪽의 2호는 덮개돌과 받침돌이 모두 내려앉아 각기 바닥에 닿은 상태다. 조사결과 무덤방이 확인되지 않아 송국리유적 사람들이 제단으로 활용한 것으로 보인다. 남쪽으로 넓은 들판과 석성천을 바라보는 입지여서 농경과 수렵의 풍요를 기원하는 의미를 담지 않았을까 추측해본다.

인구가 얼마 되지 않던 2~3천 년 전, 선사인들이 이곳에 터 잡았다는 것은 식산이 풍부하고 적으로부터 방어도 유리했기 때문일 것이다. 선입견이 없던 고대인의 ‘선택’은 당시로서는 최선의 집단지성의 결과이기에 최선이었다고 볼 수 있다. 지금은 농경지만 드넓지만 논산평야는 서울 정도의 거대도시도 수용할 만하다.

이미 해는 졌고 사방은 어둑한데 시멘트 포장된 농로가 하얗게 들판을 밝힌다. 저 멀리 논산시내의 휘황한 불빛이 등대처럼 아롱거린다.

글/사진 김병훈 발행인  

 

tip

논산시내와 강경읍내를 벗어나면 식당과 가게가 없어 일정 계획을 잘 짜야 한다. 석성산성은 철탑이 있는 산성 입구에 자전거를 두고 정상까지 도보로 다녀오는 것이 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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