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운 최치원이 왜 이곳에?

서낭당고개를 넘은 홍성 월계리 서낭댕이골의 아름다운 다랑논
서낭당고개를 넘은 홍성 월계리 서낭댕이골의 아름다운 다랑논

세상의 인물이든 장소든, 사물이든 대부분은 무명과 평범이다. 우리의 일상이 그렇고 역사가 그렇고 우주도 그러하다. 특별함은 평범 속의 작은 일탈이고 이변일 뿐이며 그 판단 기준은 사람들의 집단의지이지 고립된 개인과는 사실상 무관하다. 그럼에도 늘상 조용하고 조명받지 않는 장소와 인물은 역설적으로 관심과 흥미, 혹은 작은 연민을 부른다.

충남 내륙 홍성~청양 일원은 지리적으로, 지형적으로 참 무던하다. 산은 높지 않고 들이 넓지도 않으며 대단한 명소가 있는 것도 아니다. 역사적으로 주무대에 등장한 적이 없으며, 다만 백제 사비성이 함락된 후 예산 봉수산 ~ 홍성 오서산 라인이 부흥군의 활동 거점이 되어 산성이 다수 남아 있다. 그리고 여기, 낮은 산간지대에 뜻밖에도 신라말의 풍운아이자 문장가 최치원(857~?)의 유적이 있다.

너무 평범해서 마음을 안온하게 해주는 비산비야를 돌며 고운(孤雲, 최치원의 호)의 흔적과 백제 부흥군의 피눈물이 어린 산성들을 찾아본다.

광시에서 작은 고개를 넘어 북상하면 백제부흥군의 거점이었던 임존성이 터잡은 봉수산이 마주선다. 왼쪽 정상부 일대에 성벽이 살짝 보인다. 둘레 4km의 거성이다   

예산군의 남단은 한우테마촌으로 유명한 광시면이다. 작은 면소재지 거리가 온통 한우 마트와 식당으로 가득한 특이한 곳이다. 전국에 이런 곳이 여럿 있지만 마을이 가장 작고 집중화된 곳이 광시일 것이다.

마을 외곽의 광시한우테마공원을 기점으로 잡는다. 예산 땅에서 출발하지만 이번 여정에서 예산의 비중은 10% 정도에 그친다. 디테일이 좀 부족한 한우 조형물에서 광시저수지 뒤로 작은 고개를 넘어 은사리로 간다. 저편으로 백제부흥군의 거점이던 임존성이 자리한 봉수산(484m)이 둔중하다. 500m가 되지 않는 높이지만 주변이 저지대여서 압도적인 키로 솟아 있다. 산정부에 자리한 임존성은 둘레가 4km나 되는 거성으로, 백제가 전략적으로 축성했음을 알 수 있다. 이런 난공불락의 산성 덕분에 백제 부흥군은 3년을 버틸 수 있었다.

봉수산과 이웃해 있고 자못 헌칠한 초롱산(340m) 북쪽으로 음미고개를 넘는다. 140m의 낮은 고개지만 꽤나 깊은 산골 분위기다. 고개 너머는 홍성 땅이다.

음미고개(140m) 넘는 길. 길가에는 벼가 누렇게 익어가고 산중에는 인기척이 없다  

음미고개에서 뒤돌아본 산야. 멀리는 청양군 일원이다

 

조붓한 길, 한가로운 들판은 더없이 정겹고, 농익은 벼는 풍요를 예고한다(금당리)

처음 가는 길이다. 특별한 경관도, 명소도 없는 이 땅의 뒤안길은 대개 이렇다. 골짜기 끝까지 경작지가 들어서 있고 야트막한 산자락마다 마을이 기대 있다. ‘농자천하지대본’ 시대가 끝난 지금 이런 농촌에는 생기가 없다. 들에는 뛰노는 아이들이 보이지 않고, 빈 집은 지천이며 간혹 허리 굽은 노인, 그것도 대부분 할머니가 유모차를 밀고 다닐 뿐이다. 그래도 웬만한 마을까지는 반듯한 아스팔트 도로가 나고 좁은 농로까지 시멘트로 포장되어 길은 사통팔달이다. 고개를 내려간 금당리에 초등학교가 생존(?)한 것은 일대에 귀농한 젊은층이 꽤 있다는 뜻이겠다.

마치 고속도로처럼 거창한 29번 국도 아래를 통과해 학계마을을 지난다. 전통이 깊은 듯, 마을 유래 설명과 안내도, 주민 성명을 적은 안내판이 커다랗다. 세대주 이름과 주소까지 이렇게 안내판에 밝힌 것은 전국을 돌면서 처음이다. 개인정보를 이렇게 노출하고 세대주가 바뀌어 새 이름으로 바꾼 흔적에서 이 마을만의 남다른 자부심을 엿본다. 마을이라고 해도 집들이 다닥다닥 모여 있는 것이 아니라 강원 내륙처럼 각자 흩어진 산촌(散村)이라 더욱 각별하다.

마을입구마다 있는 쉼터. 주변에는 마을회관과 기념비가 있기 마련이다.  효학리 효동마을나지막한 호왕고개를 넘으면 서해안 최고봉 오서산(791m)이 웅자를 드러낸다. 구름을 이고 있어 대단한 고산의 풍모다

샛노란 가을 빛깔이 문당리 계곡을 가득 채우고 있다. 결실 직전, 노랗게 익은 벼는 이 땅의 들을 가장 풍요롭고 아름답게 장식한다. 삽교천 지척까지 내려간 길은 다시 내륙으로 방향을 돌려 서낭당고개(150m)를 오른다. 서낭당고개는 봉수산~오서산 간 산줄기를 넘으며, 금북정맥의 갈래여서 등산객들이 지나간 리본이 다수 달려 있다.

고개를 넘으면 남쪽 천주교회묘지 방면으로 다랑논이 참으로 아름답다. 격리감이나 위압감이 전혀 없는 아늑한 골짜기를 계속 내려가면 이윽고 작은 개울이 나오고, 개울가 언덕 위에 ‘최치원선생유적지’가 소공원으로 꾸며져 있다. 지면에서 푹 꺼진 개울인데 ‘장곡월계(長谷月溪)’와 ‘용연(龍淵)’이라는 과장된 이름이 붙었다. 개울가 석벽에 최치원이 새겼다는 글귀가 다수 분포한다. 예전에는 개울 중간에 징검다리가 있어 각석을 볼 수 있었지만 홍수에 훼손된 이후 손을 보지 않아 징검다리는 대부분 망실되었고 각석은 잡초가 뒤덮어 거의 보이지 않는다.

유적지 안내도를 보면 최치원의 은거지와 강당지는 물론 추정 묘까지 표시되어 있다. 최치원이 이곳에 은거하다 죽었다는 것인데, 과연 사실일까.

문당리 가실골의 정겨운 다랑논과 외길

서낭당고개(150m)는 봉수산~오서산 간 산줄기를 넘으며, 금북정맥의 갈래여서 등산객들이 지나간 리본이 다수 달려 있다

야산 중간에서 만난 최치원 유적지. 장곡면 월계리에 있다  

홍성군은 이 일대를 최치원유적지대로 크게 가꿀 계획을 세우고 정말 근거가 있는 것인지 확인하기 위해 2015년 발굴조사를 했다. 결과는 실망스러웠다. 유적지 인근 절골에 전하는 최치원 묘는 조선후기에 조성되었고, 그 아래의 극락사지도 조선중기 이상으로 소급이 어렵다는 결론이 나온 것이다.

최치원은 정읍과 서산 지방의 태수를 지낸 적이 있어 전북과 충남 일대에 그와 관련된 유적이 다수 남아 있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당나라에서 17년 간 유학하며 중국 각지를 유람했고 귀국해서도 명승지를 찾아다닌 그가 이처럼 평범하고 야트막한 산자락에서 말년을 보냈다고는 믿기지 않는다. 공식적으로는 가야산 해인사로 들어가 908년 즈음에 사망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당나라 과거에서 장원급제할 정도로 수재였던 그는 불우한 시대를 타고 나 결국 뜻을 펴지 못했다. 그가 유학한 당나라도 이미 쇠락해 황소의 난을 비롯해 난이 끊이지 않는 대혼란시대였다. 황소(黃巢)의 난 때 토벌군에 종사한 최치원은 ‘토황소격문(황소를 토벌하는 격문)’을 지어 당에서도 문명을 떨쳤지만 끝내 당에 정착하지 못하고 귀국했다.

하지만 고국 신라 역시 말기증세를 겪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각지에서 호족이 발호하고 산적이 들끓어 당나라로 가는 사신 여행조차 어려웠다. 최치원은 지방사정을 살피기 위해 외지의 지방관을 자청했고, 정치개혁을 위한 시무십조(時務十條)를 진성여왕에게 올렸으나 그를 견제한 중신들의 반대로 받아들여지지 않자 해인사로 들어가 은거했다. 이미 그로서도 어쩔 수 없는 망국의 현실이었다.

최치원 유적지 안내도. 가운데 개울을 따라 각석이 분포하고, 왼쪽 위에는 추정 최치원묘까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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