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 부흥군의 거점 주류성은 어디에

장곡산성 서벽 상태. 왼쪽 절벽이 석축 성벽인데 수풀에 가리고 무너져 알아보기 어렵다. 성벽 위는 벌채를 해놓아 일부 라이딩이 가능하다
장곡산성 서벽 상태. 왼쪽 절벽이 석축 성벽인데 수풀에 가리고 무너져 알아보기 어렵다. 성벽 위는 벌채를 해놓아 일부 라이딩이 가능하다

'취석(醉石)' 글씨가 새겨진 바위. 최치원의 호 '고운' 글씨가 확인되지만 호를 자칭하는 것이 조금 어색하다

  

징검다리는 끊어지고 수풀에 묻혀 음습한 느낌의 협곡. 오른쪽 석벽에 글씨가 다수 새겨져 있다

‘쌍계(雙溪)’ 글씨가 새겨진 바위. 개울이 두 갈래여서 붙인 이름 같다

최치원이 노닐었다는 '장곡월계' 상류 부분. 평지에 깊이 파인 개울인데 딱히 특별한 경관은 아니다

 

최치원이 당나라 유학을 떠나면서 했다는 "남들이 100을 할 때 나는 천의 노력을 하겠다"는 각오(인백기천)가 제단에 새겨져 있다 

최치원은 아마도, 이곳 장곡월계를 지나친 적은 있을 것이다. 당시는 참으로 맑고 소박한 풍경이었을테니 잠시 머물며 음풍농월을 즐겼을 것이다. 그것이 전설화되어 말년의 은거지가 되고 무덤까지 있다는 설로 비화되지 않았을까 싶다. 어쨌든 이런 평범한 산야에서 최치원을 만난 것은 뜻밖이다. 부산 해운대는 그의 다른 호인 ‘海雲’에서 따온 지명으로 동백섬에서 해운 각석이 발견된 것이 지명의 유래다. 여기 장곡월계에도 ‘쌍계(雙溪)’ ‘취석(醉石)’ 등 그가 직접 새긴 것인지, 그를 흠모한 후대의 작품인지 각석이 많다.

공원입구 제단에는 당나라로 떠날 때 최치원이 각오를 다지며 남긴 ‘인백기천(人百己千, 남들이 100을 할 때 나는 천의 노력을 하겠다)’이 새겨져 있다. 타고난 수재이면서 이토록 노력했으니 세상의 인재들이 모여드는 당나라에서도 장원급제를 해냈을 것이다.

다시 좁은 들판과 골짜기를 몇 곳 지나 남하하면 장곡산성 아래 대현마을이다. 마을 뒤 256m 산 정상부에 산성이 있으며 마을에서 오르는 길은 경사도가 30%에 육박하는 아찔한 업힐이다. 산 이름이 따로 없어 ‘장곡산’으로 부르기로 한다. 길은 곧장 산성의 서문을 넘어 성내로 들어선다. 성벽 위는 벌초를 해놓았으나 성벽은 그대로 방치해 하염없이 무너지고 있는 중이다.

장곡산성은 둘레 1,352m로 상당한 크기이며, 10여개의 건물 터와 무덤 등이 발견되었다. 주변에는 학성산성, 태봉산성, 소구니산성과 함께 열을 짓고 있어 부여 북쪽의 외곽 방어선 역할을 했음을 알 수 있다.

이처럼 이름 없고 마을도 없는 다랑논 들판이 계속 등장한다. 산야의 멋진 조합과 따사로운 노랑빛에 마음이 안온해진다

장곡산성 서문(앞쪽의 단절선)을 통해 성내로 들어왔다. 성벽 위를 벌초해 형태를 대략 알아볼 수 있다

성내에서 발견된 길이 30m 건물지. 백제부흥군을 이끌던 풍왕의 거처가 아니었을까 싶다. 오른쪽 제단은 전사한 부흥운동군을 기리는 '백제부흥운동순의열사제공지위' 제단  

성내의 물이 빠져나가는 수구 일대는 성벽이 허물어진 채 방치되어 있다 

김정호는 <대동지지>에서 “홍주목(홍성)은 본래 백제 주류성”이라고 적고 있어서 이곳이 백제 부흥군의 최후 거점인 주류성(周留城)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 하지만 대군이 머물기에는 작은 규모여서 현재 주류성으로 비정되는 부안 우금산성(둘레 4km)이 더 유력해 보인다. 서천 건지산성을 주류성으로 보는 견해도 있는 등 주류성 전설이 곳곳에 전하는 데서 ‘주류’가 임금이 머물렀다는 ‘주류(主留)’의 뜻이 아니었을까 싶기도 하다. 사비성 함락 후 왜국에서 귀국한 의자왕의 다섯째 아들 부여 풍(夫餘 豊)이 왕위를 잇고 부흥군을 지휘하면서 이 성 저 성을 옮겨 다닌 데서 유래한 지명이 아니었을까 하는 것이 개인적인 생각이다. 성내에서 발견된 길이 30m의 거대한 건물지도 풍왕의 임시거처로 추정된다.

수풀 때문에 조망도 막히고 성곽도 알아보기 힘들지만 서쪽 성벽 위를 잠시 거닐다 수구(水口)를 겸한 동문을 돌아보고 발길을 돌렸다. 동문 일대는 차마 보기 민망할 정도로 석축이 망가지고 주변이 방치되어 있다.

장곡산을 남쪽으로 우회해 산허리 임도를 타고 북상하면 학성산성 입구의 사운고택(士雲古宅)이 가깝다. 양주조씨의 고택으로 19세기말 조중세(趙重世, 1847~1898)가 지어 그의 자(字)를 따서 사운고택이라 한다. 조중세가 문경현감을 지낼 때 기근에 시달리는 백성을 구하기 위해 본가의 양식을 실어와 나눠주었고, 1894년 홍주의병 봉기 때도 군량미를 보내 덕을 베풀었다. 아주 오래 되지는 않았으나 적당한 고졸미와 품격이 어우러진 고택에는 조중세의 인품처럼 건물에도 기품이 감돈다.

장곡산 허리를 돌아나가는 임도. 학성산성 가는 길이기도 하다

학성산성 초입에 자리한, 기품 어린 사운고택  

학성산성 북문터

수풀과 잡목에 묻혀 허물어져 가는 학성산성 성벽

학성산성을 내려와 광시로 돌아가는 무한천 둑길

광시한우테마공원
장곡산성과 골짜기 하나를 두고 1.2km 떨어진 학성산성은 학성산(214m) 정상부에 포곡식으로 축성되었다. 둘레는 1.3km이고 입지와 규모 모두 장곡산성과 빼닮았다. 북쪽에서 진입로가 있으며 북문은 수구 옆이어서 계류가 모여들어 땅이 젖어 있다. 산성이 제역할을 하려면 식수 확보가 최우선이어서 이처럼 정상부와 골짜기를 함께 에워싸는 포곡식 축성을 주로 택한다. 그래야 골짜기 물을 모아 저장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학성산성은 성벽을 일주할 수 있는 소로가 뚫려 있을 뿐 성곽과 내부는 온통 수풀로 뒤덮여 원형을 알아보기 어렵다. 충남도는 이런 성곽을 연결하는 트레킹 코스 ‘백제부흥군길’을 조성했으나 정작 중요한 성곽의 보존에는 무심하니 안타까운 일이다.

학성산성 북쪽은 대규모 밤 과수원이 자리 잡고 있다. 주능선을 넘어 동쪽으로 하산하면 예당호로 흘러드는 무한천이 나온다. 천변 둑길을 따라 북상하면 청양 록평리 들판을 거쳐 광시한우촌으로 이어진다.

넓은 들과 한우까지 있어 광시마을에는 풍요가 감돌고 길과 집 모두 넉넉하다. 대규모 주차장이 몇 군데나 있고 무한천 둔치에는 산뜻한 산책로가 나 있어 도회풍마저 감돈다.

 

tip

광시한우촌에 식당과 편의점이 다수 있으나 코스 중에는 아예 없으므로 유의한다. 최치원유적지의 장곡월계는 갈수기에는 개울로 내려가 몇 개의 석각을 볼 수 있다. 장곡산성과 학성산성은 낙옆이 진 후에 길이 잘 보이고 조망도 트일 때 도보로 일주해 보길 권한다.

 

* 코스 지도와 고도표, gpx 파일은 자전거생활투어(www.bltour.net)를 참조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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