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년산성 들렀다 말티재 넘어 150리

삼년산성의 정문격인 서문 입구에서. 뒤쪽 성벽은 높이 15~20m, 폭 8~10m에 달하는 국내최고 최대의 거벽이다
삼년산성의 정문격인 서문 입구에서. 뒤쪽 성벽은 높이 15~20m, 폭 8~10m에 달하는 국내최고 최대의 거벽이다

660년 음력 9월, 보은 삼년산성에서는 기이한 일이 발생한다. 그해 7월 당나라는 신라와 더불어 백제를 정복하고 백제 땅에는 직접통치기구인 웅진도독부를 설치, 노장인 왕문도(王文度)를 초대 도독으로 보냈다. 왕문도는 당 고종의 칙서와 하사품을 가지고 삼년산성에서 동맹국인 신라의 태종무열왕(김춘추)을 만나던 도중 갑자기 급사하고 만다. 기록에는 급사, 혹은 병사로 되어 있고 당은 이를 문제 삼지 않고 넘어갔으나 칙서를 전달하던 도중에 쓰러져 죽었다니 기이한 일이다.

원래 당은 백제를 멸한 후 백제 땅을 신라에게 준다고 약속했으나 이를 어기고 웅진도독부를 설치한 것이 왕문도 급사와 관련 있지 않을까. 김춘추는 전국력을 기울여 백제를 멸망시켰으나 아무런 소득이 없는 처지가 되어 분노하고 있었는데 왕문도가 당 황제의 칙서를 가지고 삼년산성으로 온 것이다. 필자는 졸저 <산성삼국기>에서 이 장면을 병약한 왕문도가 삼년산성의 웅자와 신라 정예군이 내뿜는 살기에 심장마비를 일으킨 것이라고 묘사했다.

서문 안쪽 바위에는 통일신라시대 명필인 김생의 글씨로 전하는 蛾眉池(아미지) 각석이 보인다. 성내 수자원인 저수지를 아미지로 미칭한 것 같다

안쪽에서 본 아미지(앞쪽 억새가 핀 저수지)와 성벽. 성 안쪽은 내탁공법으로 성벽 접근이 쉽도록 높이를 3m 내외로 낮췄다. 성벽의 밝은 색 부분은 그래에 복원한 것이다 

북문 근처의 성벽은 원형을 잘 보존하고 있다. 성 안쪽인데도 높이가 6~7m나 된다

북문 아래에 있는 보은사

지금 다시 삼년산성에 와보니 생각이 조금 달라졌다. 당군을 이끌던 소정방이 667년 상주 당교(唐橋)에서 김유신에게 독살당했다는 전설이 전해오고, 현지 주민들은 이를 사실로 받아들이고 있다. 중국 사서에도 소정방의 최후가 애매하게 기록되어 이를 뒷받침한다. 소정방과 마찬가지로 왕문도 역시 독살 당했을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신라 입장에서는 백제 땅의 직접통치를 위해 파견된 왕문도에 대한 적개심이 당연히 있었을 것이다. 게다가 왕문도는 당나라에 있을 때부터 소정방과 사이가 나빠, 소정방 역시 왕문도의 죽음을 묵인했을 가능성이 충분하다.

삼년산성은 고구려가 지배하던 한강하류 유역을 쟁취할 때도 거점이 되었고, 백제와 신라가 한강하류를 두고 건곤일척의 승부를 벌인 554년 관산성 전투 때도 신라의 전진기지였다. 관산성 전투 때 신라는 백제 성왕까지 전사시키며 대승을 거둔 자신감의 관성을 업고 삼국통일전쟁으로 치닫게 된다. 앞서 보은은 백제와 신라가 영토를 확장해나갈 때 영역을 다투는 요지였다가 5세기 중엽 신라의 땅이 되었다.

동문 옆의 원래 성벽. 왼쪽 아래 나무가 높이 10m 정도이며, 석축 아래 삭토구간을 포함하면 총높이가 30m에 육박한다

보은읍내에서는 삼년산성이 바로 올려다 보인다. 기점으로 잡은 보은공설운동장을 출발해 동쪽으로 작은 들판을 지나면 바로 삼년산성 아래다. 성내 북문 아래에 자리한 보은사까지 길이 나 있어 자전거로 진입할 수 있다. 산성은 남쪽 320m봉을 중심으로 능선과 골짜기를 에워싼 포곡식으로 보은읍내가 해발 150m나 되어 평지와의 고도차는 100m 전후밖에 되지 않는다.

서문에 들어서는 순간, 성벽의 위용에 압도된다. 유럽이나 중국, 일본의 성곽을 본 사람들은 우리의 성벽이 너무 낮고 허술하다는 생각을 하기 마련이다. 하지만 이는 큰 착각이다. 잔존 성벽 높이가 4~5m 밖에 되지 않아 쉽게 넘을 수 있을 것 같지만, 삼국시대에 발전한 산성은 절벽을 이룬 능선이나 급사면을 최대한 활용해 최소한의 축성으로 방어력을 높이는 방식을 썼다. 실제 석축성벽은 4~5m라고 해도 그 아래쪽 지형을 성벽처럼 급사면으로 삭토해 높이 10~20m의 성벽 효과를 낸 것이다.

동문에서 바라본 말티재(뒤쪽 산줄기에서 가장 오목한 부분) 

삼년산성도 이런 방식을 따르지만 석축성벽 자체의 규모가 다르다. 남아있는 성벽만도 10m 이상 최대 22m에 달하며, 아래쪽 삭토벽을 포함하면 30m 전후의 거대한 벽을 이룬다. 성벽의 폭도 8~10m나 되어 대포가 없던 고대라면 성벽을 허물거나 넘을 방법이 없다. 우리 땅에도 이런 성곽이 있었던가 경악하면서 삼국 중 최약체였던 신라의 저력과 야망을 괄목상대한다. 둘레는 1,680m이고 동서남북 4개소의 문이 있었으며 다수의 건물터와 저수지가 확인되었다. 백제와의 전쟁 당시 김춘추가 백화산 금돌산성을 거쳐 전선에 가까운 이곳에 머물렀던 것도 삼년산성의 방어력을 확신했기 때문일 것이다.

국내에 남은 산성 1500군데 중에 가장 웅장한 이 성은 470년(자비왕 13년)에 완공되었으며, 축성에 3년이 걸렸다고 해서 삼년산성이라 부른다는 기록이 <삼국사기>에 남아 있다.

아미지 뒤쪽으로 보이는 구릉지 형태의 성 내부. 아미지 외에 저수지가 더 있고 많은 건물터도 확인되어 대군이 주둔 가능했을 것으로 보인다

삼년산성 동문에서는 속리산 방면으로 말티재가 정면으로 마주 보인다. 말티재는 상주 방면으로 이어지는 길이기도 하고 말티재와의 사이를 흐르는 복달천 유역은 상주와 영동 방면 루트여서 이를 감제하기 좋은 위치다. 서쪽 보청천 일원은 옥천을 거쳐 대전~논산~부여로 이어지는 길목이니 삼년산성은 기막힌 전략적 요지다. 보은읍 주위에 펼쳐진 평야지대는 보급기지로 충분하고 평야 외곽은 산악으로 둘러싸여 방어도 유리하다. 한반도 남부만 보자면 정확히 중심부로, 신라의 삼국통일은 결과적으로 한민족의 탄생으로 이어졌으니 그 중심 거점이 된 보은과 삼년산성의 역사적 역할이 지대하다 할 수 있다.

삼년산성을 여러 번 찾았지만 올 때마다 거대한 성벽에 감탄한다. 마치 중세 유럽의 성곽 같은 원형의 치성(雉城, 성벽 바깥으로 돌출해 성벽에 붙은 적을 공격하는 시설)과 1500년 풍파에도 허물어지지 않는 두텁고 높은 석축은 경이롭다. 일부 허물어진 성벽 아래로는 성돌이 마치 자연너덜처럼 광대하게 흩어져 옛날의 위용을 말해준다. 특히 동벽 일부는 삭토 급사면과 성벽을 포함해 30m를 넘는 아찔한 높이 구간도 있다. 지금도 이 정도 위용인데 당시에는 공격의 엄두도 낼 수 없는 난공불락의 철옹성이었을 것이다.

성내에서 바라본 보은읍. 바로 지척의 거리이며 보은읍 일원의 평야는 대군을 뒷받침하는 보급기지로 충분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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