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창한 편백숲 산길, 500년 읍성 산책

화산봉(450m) 편백림 숲길. 인적이 드물어 한적하고 자전거 진입이 허용되어 고맙다 
화산봉(450m) 편백림 숲길. 인적이 드물어 한적하고 자전거 진입이 허용되어 고맙다 

‘장성 축령산’이라지만 여기서는 ‘고창 축령산’으로 하련다. 축령산(621m)은 전국 최대의 편백숲으로 유명하고 숲 관리를 위한 임도가 잘 나 있어서 오래 전부터 산악라이딩 코스로 각광받았다. 필자는 2005년경 전남도 요청으로 코스를 개발하고 가이드북을 펴낸 ‘전남 무지개길 27선’에 포함시키기도 했다.

하지만 편백숲이 건강에 좋다는 것이 알려지면서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자 어느 순간 자전거 출입이 금지되었다. 2009년 산림청에 의해 ‘치유의 숲’으로 선정되고 보행자가 폭증하면서 어쩔 수 없는 조치겠지만 두바퀴 입장에서는 코스 하나를 잃은 것 아닌가.

다행히 축령산의 절반을 차지하는 고창 쪽에도 편백림이 다수 있고 임도가 열려 있어 이제 우리에게 축령산은 당연히 ‘고창 축령산’이다. 게다가 고창은 방문산(640m)에 2014년 개장한 국내 최대 규모의 본격 MTB파크까지 갖추고 있는, 대단히 자전거 친화적인 고장이다.

고창의 상징, 모양성 북문에서 여정을 시작한다 

고창의 상징 중 하나는 읍내를 끼고 있는 고창읍성이다. 원형이 잘 보존되고 공학적 미학적으로도 뛰어나며 모양성(牟陽城)이라고도 하는데 백제 때 고창 지명인 ‘모량부리’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인다. 매년 10월 성곽 일원에서 ‘모양성제’가 성대하게 열린다.

축제 준비가 한창인 모양성에서 여정을 시작한다. 모양성은 서산 해미읍성과 더불어 전국에 남은 읍성 중 가장 아름답고 규모가 크다. 읍성(邑城)은 관가와 마을을 둘러싼 평지성으로 산성과는 성격이 다르며, 고려와 조선에 걸쳐 주로 왜구와 여진족의 침입을 막기 위해 축성되었다. 모양성은 1453년(조선 단종 원년)에 완공되었고 둘레 1,684m, 높이 4~6m, 면적 16만5,858㎡(약 5만평)이다. 관아 등 22개의 건물은 모두 소실되었으나 성벽은 거의 완벽하게 남아 있다. 고창에는 4년마다 돌아오는 윤년(閏年) 윤달(閏月)에 부녀자들이 무병장수를 기원하며 돌을 머리에 이고 성벽을 도는 답성놀이(성밟기라고도 한다)를 한다. 이렇게 모은 돌은 유사시 투척 무기로 활용할 수 있어 처음에는 이런 목적으로 시작된 것이 아닐까 싶다. 성 입구에는 조선후기 판소리를 집대성한 신재효(1812~1884)의 생가와 판소리박물관이 있다.

문을 보호하기 위해 둥그렇게 에워싼 옹성(甕城)으로 구축한 북문이 정문격으로, 석축성벽은 높이 4~6m 정도지만 자연구릉을 급사면으로 삭토한 토대 위에 축조해 실제 높이는 30m에 달하는 곳도 있다. 이는 공주 공산성을 비롯한 삼국시대 산성에서 흔히 보는 축성법이다. 급사면의 수목을 벌채해 성벽의 전체 위용을 드러낸 것은 참으로 잘 한 일이다. 성곽은 축령산을 돌고 온 다음 천천히 돌아보자.

석축 성벽 아래 삭토한 급사면을 벌목해 한층 위용이 드러났다. 이를 포함하면 실제 성벽 높이는 30m에 달한다

모양성을 동쪽으로 우회해 노동저수지 방면으로 남하하면 길은 꾸준한 오르막이다. 모양성이 자리한 구릉지와 이어진 노동저수지는 공원으로 잘 꾸며져 있다. 둑길과 호반 산책로도 멋지다.

노동저수지 남단 개울가에 취석정(醉石亭)이 고즈넉하다. 1545년 김경희(1515~1575)가 지었다. ‘취석’은 5세기 중국 동진시대의 자연주의 시인 도연명이 술에 취해 누웠다는 바위에서 따온 이름으로, 정자 주변에 흩어져 있는 고인돌을 취석에 비유한 듯하다. 정면 측면 각 3칸에 가운데 1칸짜리 온돌방을 들여 숙박이 가능한 것이 특징이다. 옆에는 개울이 흐르고, 고인돌과 고목이 어우러져 음풍농월하기에는 최적이다. 정자 난간을 받치는 작은 기둥인 닭다리 모양의 계자난간(鷄子欄干)에는 태극과 팔괘를 새겨 만물에 대한 근원적 사색을 가미하고 있다. 을사사화에 연루되어 관직에 나가지 못한 김경희가 울분을 삭이며 세상을 멀리하는 탈속의 마음으로 우주를 품은 구상이 얼핏 짐작이 간다.

취석정에서 골짜기를 따라 계속 올라가면 무던한 골짜기 옆에 마을들이 흩어져 있고 이윽고 경사가 급해지더니 화산재(210m)로 올라선다. 이제부터 본격적인 산길이다.

호반과 호수 중간에 산책로가 나 있는 노동저수지 

고인돌을 취석으로 삼은 취석정. 풍류적 운치가 대단하다

본격적인 산길이 시작되는 화산재(210m)

화산재 인근에서 바라본 산아래 원경

 편백림이 시작되는 화산삼거리(330m). 오른쪽으로 가면 '치유의 숲 제2치유센터'로 이어진다

제2치유센터는 잘 지어졌건만 인적이 없다 

치유의 숲 안내도. 정작 중요한 산 이름이 빠져 여기서는 화산봉(450m)으로 부르기로 한다

화산재를 품은 산줄기는 축령산 주능선이 흘러내린 북봉에 해당하며 여기에도 편백림이 대단한데도 따로 산명이 없다. 여기서는 마을 이름을 따서 화산봉(化山峰, 450m)이라 하자. 화산봉 서사면에는 길이 1.5km, 폭 300~400m의 편백림이 펼쳐져 있고 숲 사이로는 임도가 이중으로 구불거린다. 장성은 편백림 초입에서 도보 외에는 일체의 탈것 진입을 막지만, 여기는 원동기를 부착하지 않은 탈것의 진입을 허용한다. 그런 탈것 중에 이런 산길을 달릴 수 있는 것은 자전거 밖에 없다.

화산봉 편백림은 수십 년은 묵은 듯하고 어린 나무도 적지 않다. 그래도 피톤치드가 풍성한 듯 급사면 업힐에도 호흡은 경쾌하고 피로는 축적될 기미가 없다. 정상 바로 아래에는 ‘치유센터’ 건물이 들어섰지만 인기척이 없다. 아니, 숲 전체에 아예 인적이 없다. 아마도 편백림을 찾는다면 장성으로 가지 굳이 고창으로는 오지 않는 모양이다. 조용한 분위기에서 편백숲을 즐기고 싶다면 이제 장성이 아니라 고창으로 올 일이다.

정상 옆에 있는 전망대에 오르니 고창읍내가 아득하고 선운산 방면 구릉지 들판이 장쾌하다. 평야지대에서 400m를 넘으니 고도감도 상당하다.

정상 부근 전망대 길목에 구절초가 만발했다

전망대에서 바라본 임도와 편백림 그리고 고창읍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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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부 임도는 관리를 하지 않아 물골이 깊게 패인 구간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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