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에 눕다, 천상의 억새고원

해발 800m 사자평 억새밭에 털썩 드러누웠다. 억새는 만발해 있고 봉우리는 눈높이로 푸근하다
해발 800m 사자평 억새밭에 털썩 드러누웠다. 억새는 만발해 있고 봉우리는 눈높이로 푸근하다

또 다시 이 길을 오른다. 돌아보니 어언 40년을 넘었다. 1981년 처음 이 놀라운 산을 올랐고, 그 뒤로도 수없이 저 봉우리와 이 능선, 저 고원을 지났다. 방식도 다양해서 걸어서 가장 많이 왔지만 20대 젊은 혈기로 오토바이를 타고 고원을 넘은 적이 있고 4륜구동 자동차로도 지났다. 자전거로는 저 아득한 천황산은 물론, 배내고개 저편의 신불산, 영축산 정상까지 오르기도 했다.

기이한 것은 올 때마다 길이 변해있고 풍경도 바뀌어 있는 점이다. 80년대까지만 해도 오토바이와 자동차도 그럭저럭 고원을 지날 수 있었지만 지금은 등산로 정도의 싱글트랙만 겨우 이어져 있다. 학생 1~2명 있던 분교와 화전민이 살던 고사리마을도 사라지고 없다.

능동산을 지나 주능선 위를 가는 길. 저 앞에 하얀 건물은 얼음골케이블카 상부승강장이고, 그 뒤로 천황산 정상이 살짝 보인다 

해발 685m의 배내고개를 출발해 지금 오르고 있는 산은 영남알프스의 상징인 천황산(1189m)이다. 가지산(1241m)이 가장 높기는 하나 광활한 억새고원 사자평을 품은 천황산의 카리스마와 위용이 압권이다.

경남북과 울산 3개 광역단체와 5개 시도에 걸쳐 있는 ‘영남알프스’는 7개의 1000m급 고봉이 모여 있는 산악지대로, 빼어난 봉우리와 억새고원이 유럽 알프스를 방불케 한다는 뜻으로 이런 별칭이 붙었다. ‘00알프스’는 한국알프스(함경도 관모봉 일원)‘ 충북알프스(속리산~구병산 일원), 일본알프스(일본 내륙의 3천m급 산악지대) 등에서도 볼 수 있다. 아름다운 골산에 금강산을 빗대 ‘00금강’이라 부르는 것과 같다.

재약산 동남부, 해발 750~850m 지대에 펼쳐진 사자평 억새밭. 원래는 훨씬 넓었으나 주변에 숲이 확산되면서 크게 줄었다. 왼쪽 뒤로 간월산(1069m)이 고개를 빼꼼 내밀고 있다  

42년 전, 우연히 신문에 난 사자평고원과 고사리마을 기사를 보고 처음 찾았을 때는 2박3일 여정을 잡았었다. 표충사 계곡에서 1박 후 천황산 정상에 올랐다가 재약산을 거쳐 고사리마을에서 1박하고 하산하는 계획이었다. 예상보다 진행이 빨라 고사리마을에 도착했을 때도 오후 시간이 많이 남아 그대로 하산, 1박2일로 마무리했지만 이제 자전거로는 반나절 코스다.

사자평에서 멀기는 하나 배내고개(685m)를 기점으로 잡으면 일단 고도차에서 마음이 편하다. 바로 옆 능동산(983m)과는 300m 차이여서 주능선까지 어렵지 않게 오를 수 있기 때문이다. 사자평을 다녀온 후 간월재 방면으로 가기도 편하다.

임도 초입의 차단기를 지나면 바로 지그재그 급사면 업힐이 시작된다. 대신에 고도는 금방 높아져 어느새 배내골이 저 아래로 푹 잠기고 능동산 정상부의 벌목지로 접어든다. 능동산에서 천황산으로 이어지는 주능선 안부는 해발 900m여서 금방 도착이다. 여기부터 사자평 초입에 자리한 간이매점 ‘샘물상회’(1000m)까지는 기복이 심하지 않은 능선길로 노면도 좋은 편이다.

주능선 위 해발 1010m 고지에 자리한 얼음골케이블카 상부승강장은 숲에 가려 길에서는 보이지 않으나 꾸며진 연결로가 있어 위치를 가늠할 수 있다. 발밑으로는 주암계곡이 아찔하게 패어 있고 배내골 저편으로는 영남알프스 동부를 갈무리하는 간월산(1069m)~신불산(1159m)~영축산(1081m) 능선이 웅장하다.

해발 1000m 옛 목장 정문 기둥은 속절 없이 녹슬어 간다. 오른쪽 기둥 뒤는 천황산, 왼쪽은 재약산. 광역 개념의 사자평 입구이기도 하다 

기나긴 업힐 끝에 갑자기 넓은 억새밭이 펼쳐지고, 길 좌우에는 낡은 쇠기둥이 서 있다. 오래전에는 사자평 일원에 터잡은 대규모 목장의 관문이었으나 지금은 기둥만이 남았다. 2007년 간월재와 사자평을 잇는 MTB대회를 진행한 적이 있는데 당시 코스의 골인점이기도 했다. 나중에 간월재에 걸린 현수막을 보니 ‘영남알프스 전국MTB 챌린지’라는 이름으로 지금도 진행이 되고 있어 반가웠다(올해는 10월 22일 개최). 긴 세월 풍상에 노출되어 녹은 슬었으나 기울지 않고 우뚝 선 철기둥이 반갑다. 여기가 정확히 해발 1000m이고 뒤로는 천황산~재약산이 무던한 높이로 성큼 다가선다.

철기둥에서 200m 가면 지난 수십 년 간 등산객의 대피소이자 쉼터가 되어온 ‘샘물상회’가 있다. 30년 전과 별 변화가 없는, 누추하고 어설픈 건물이지만 주인장이 친절하고 산중 음식이라 라면과 두부 김치 하나도 식감이 각별하다. 평일인데도 손님이 많은 것은, 얼음골케이블카로 올라온 사람들이 여기까지 왔다가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아마도 전국에서 가장 높은 사설 매점 아닐까 싶다. 해발 1000m 지점에 자리한 샘물상회는 얼음골케이블카 개통으로 언제나 붐빈다. 뒤로 재약산이 삐죽하다 

샘물상회부터는 길이 급변해서 거친 돌에 물골까지 패어 라이딩이 어려운 난관이 시작된다. 자신이 없으면 샘물상회까지만 보고 가거나 장시간 ‘끌바’를 각오해야 한다.

완만한 천황산 사면에는 폐건물이 군데군데 흩어져 있는데 옛 목장터다. 90년대만 해도 소를 방목해 참으로 목가적이었으나 지금은 축사마저 수풀에 묻혀 알아보기 어렵다. 목장 인근에 있던 민가 한 채도 비었다. 한때 젊은 부부가 들어와 샘물상회처럼 등산객을 상대로 매점을 운영했는데 결국 떠나버린 모양이다.

목장터에서 길은 등산로로 좁아진다. 예전에 4륜구동 자동차와 오토바이로 지나왔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는다. 목장터에서 천황산과 재약산 사이 안부인 천황재(970m)까지는 1.2km여서 중간중간 끌바를 하더라도 갈 만하다.

천황재에서 쉬고 있던 많은 등산객들은 갑자기 나타난 자전거에 감탄과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2004년 천황산 정상에 자전거를 메고 올랐을 때, 그 후 신불산 정상에서 영축산을 향해 다운힐을 시작할 때 등산객들 반응은 정말 대단했다. 지금은 엄두도 못 낼 일이다.

생물상회 이후 길 상태는 크게 나빠진다. 물골이 패이거나 큰돌이 드러난 곳이 많다. 전방의 나무 뒤가 옛 목장 터다

   

목장 터는 수풀과 억새로 완전히 뒤덮였다. 뒤쪽으로 재약산이 보이고, 오른쪽에 오목한 분지가 천황재(970m)다

 

평탄한 억새밭을 이룬 천황재. 정면으로 내려가면 표충사로 이어진다

이제 이번 여정의 최고 난관인 사자평 가는 길로 접어든다. 2004년 자전거로 통과한 이후 처음이라 길 사정을 모르고 사자평 억새밭이 어떤 상태인지도 몰라 조금은 불안하다. 2004년에도 중간중간 길이 끊어지고 물골이 패여 노면은 최악이었지만 임도 정도의 노폭은 유지하고 있었고 컨트롤을 잘 하면 라이딩이 가능했다.

역시, 천황재 입구 삼거리부터 길은 거친 싱글이라 라이딩이 어려운 구간이 적지 않다. 그나마 노면 보수를 해서 개울에는 작은 목교가 놓여 있고 망가진 노면에는 목재를 박아 놓았다.

주암계곡과 사자평길이 나뉘는 주암삼거리에는 작은 쉼터를 갖춘 간이매점이 있다. 휴일에만 문을 여는 듯, 인적이 없고 수많은 리본만이 나부낀다. 그래도 여기까지 왔다면 사자평은 눈앞이다. 노면은 한층 좋아지고 완만한 내리막이며, 골짜기에는 목교를 놓아 사자평 입구까지 금방이다.

원래 사자평은 천황산과 재약산 중턱 해발 750~1000m 일원 약 100만평에 달하는 억새고원지대를 통칭했다. 하지만 지금은 천황산 일대의 목장과 억새밭이 거의 사라져 재약산 동남쪽에 남은 억새지대로 의미가 축소된 것 같다. 그마저 억새밭 풍광은 예전과는 딴 판이다. 이 높은 산상 억새밭마저 마치 도시 야산처럼 너무나 인공적으로 고이 가꿔져 있어 깜짝 놀랐다.

천황재에서 사자평 가는 길. 자동차가 다녔던 길이 20여년 만에 이렇게 변했다    

간이매점이 있는 주암삼거리. 산악회 리본이 가득 달려 있는 매점 앞으로 해서 왼쪽으로 가야 사자평 방향이다 

억새밭 초입에는 표충사 명의로 오토바이와 자전거 출입금지 팻말이 붙었다. 사자평 일원은 표충사 소유여서 옛날에도 환경보호를 이유로 고사리마을을 소개(疏開)시킨 것으로 아는데, 어쨌든 땅 주인의 요청이니 자전거는 내려서 끌고 간다.

밀양시 명의의 안내문에는 ‘재약산 사자평 억새길’이라고 표기되어 있으며 억새밭 곳곳에 전망대와 쉼터가 조성되어 있다. 솔직히 이런 인공적 가미 때문에 원래의 광활하고 자연 그대로였던 사자평 이미지는 많이 퇴색했다. 서울 도심에 있는 하늘공원 억새밭이나 다를 것이 없다. 억새밭 면적도 10만평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42년 전 처음 찾았을 때, 별천지 같은 억새고원에는 소가 자유롭게 방목되고 고사리마을에는 아이들 뛰노는 소리와 밥 짓는 연기가 오르던 그런 목가풍은 찾을 길이 없다.

돌아 나오는 도중 천황재 입구에서 70대 초반의 두 라이더를 만났다. 평범한 하드테일로 여기까지 오르다니 대단한 분들이다. 부산에서 왔다는 두 분은 천황재에 자전거를 두고 재약산을 넘어 사자평을 다녀올 예정이라고 한다. 그 중 한분은 천황산 정상까지 자전거로 오른 적이 있고 히말라야 안나푸르나 서킷도 자전거로 다녀왔다고 했다. 안나푸르나 서킷은 최고고도가 해발 5,416m에 달하는, 자전거투어의 끝판왕 코스여서 더 감탄했다.

작은 골짜기를 건너는 아치형 목교가 나오면 사자평 억새밭이 멀지 않았다

* 기사 전문과 코스지도, 고도표, gpx 파일은 자전거생활투어(www.bltour.net)를 참조하세요

저작권자 © 자전거생활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