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제상 부인은 왜, 여기서 망부석이 되었나

치술부인과 두 딸의 영혼이 새가 되어 날아 들었다는 은을암 가는 길. 경사가 극심하다
치술부인과 두 딸의 영혼이 새가 되어 날아 들었다는 은을암 가는 길. 경사가 극심하다

고구려와 왜에 볼모로 잡혀있던 두 왕자를 구해내고 자신은 죽은, 신라의 박제상(朴堤上, 363~419)은 ‘만고충신’으로 떠받들어 졌으나 남겨진 가족은 기다림과 불안에 떨어야 했다. 박제상은 정사인 <삼국사기>는 물론 <삼국유사>와 <일본서기>에도 기록되어 있는 실존 인물로 사건 역시 실재했다.

<삼국사기>에는 박제상으로 나오지만 <삼국유사>에는 김제상으로 등장하며, 눌지왕의 명으로 고구려와 왜를 차례로 방문해 볼모로 있던 눌지왕의 동생 복호와 미사흔을 구해냈다. 하지만 왜에서 붙잡혀 처형당하고 만다. 아무리 왕명이라고 해도 신라의 시조 박혁거세의 후손이자 파사왕의 5세손 왕족인 그가 목숨을 바쳐 왕자를 구출해온 이유는 무엇일까.

박제상과 치술부인, 두 딸을 모시고 있는 치산서원. 치술령 서쪽에 있다

 

치산서원에 모셔진 박제상 영정

실성왕(재위 402~417)은 내물왕의 조카로, 내물왕이 죽자 태자 눌지가 너무 어려 대신 왕위에 올랐다. 실성왕은 등극하자말자 침략이 잦았던 왜를 위무하기 위해 수교를 맺고 내물왕의 아들 미사흔(未斯欣, 눌지의 동생)을 왜에 볼모로 보냈고, 412년에는 내물왕의 또 다른 아들 복호(卜好)마저 고구려로 인질을 보냈다. 여기에는 사연이 있는데, 내물왕 시절 실성왕은 9년 간이나 고구려에 인질로 가 있어서 그 복수로 내물왕의 두 아들을 고구려와 왜로 보냈던 것이다. 실성왕은 고구려군 마중을 나간 눌지마저 고구려인을 시켜 죽이려고 했다가 반대로 고구려군과 합세한 눌지의 반격으로 시해당하고 만다.

왕이 된 눌지는 가장 먼저 고구려와 왜에 인질로 가 있는 동생들을 구출하고 싶었다. 중신들이 적당한 인물로 양산지역(삽량주)의 간(干)으로 있던 박제상을 천거했다고 하지만, 박제상은 실성왕의 딸인 치술(鵄述)의 남편이어서 실성왕에 대한 눌지왕의 복수심이 그를 선택하게 한 것 아닌가 싶다. 눌지왕은 치술의 언니인 아로부인을 왕비로 둬서 박제상과는 동서지간이 되는데, 장인(실성왕)을 살해할 정도이니 정략결혼으로 봐야할 것이다. 이렇게 박제상의 불행 이면에는 몇 대에 걸친 왕실 내부의 원한관계가 얽혀 있었다.

치술부인과 두 딸 아기와 아경의 삼모녀상. 치산서원 옆 박제상기념관에 있다

치술령 정상에 세워진 신모사지 기념비. 오른쪽 뒤 나무 계단으로 내려가면 망부석이 있다   

박제상과 부인, 두 딸을 제향하는 치산서원이 울주 치술령(765m) 아래에 자리한 데는 슬픈 전설이 어려 있다. 박제상이 왜국으로 떠난 후 치술부인은 세 딸을 데리고 이 산에 올라 바다를 바라보며 통곡하다 숨져, 치술부인과 두 딸은 망부석이 되었고 세 모녀의 혼령은 새가 되어 남쪽 국수봉의 은을암 동굴로 들어갔다고 한다. 살아남은 둘째 딸 아영(阿榮)은 왜국에서 돌아온 미사흔의 부인이 되었다. 막내아들이 하나 있었는데 이가 거문고의 명수로 알려진 백결선생이라는 설이 있다. 이후 치술령 정상에 치술부인을 기리는 신모사(神母祠)가 세워졌고 지금도 신모사 기념비가 서 있다. 치(鵄)는 솔개를, 술(述)은 수리, 즉 높은 산을 의미해 치술령은 ‘새가 사는 높은 고개(산)’의 뜻이 된다.

치산서원에는 박제상을 모시는 충렬묘(忠烈廟), 치술부인(金校金氏)을 모신 신모사(神母祠), 두 딸 아기(阿奇)와 아경(阿慶)을 모신 쌍정려(雙旌閭) 사당이 있다. 사당에는 위패와 함께 영정이 걸려 있으며 바로 옆 기념관에는 박제상 관련 자료들이 전시되어 있다. 박제상을 ‘박씨 재상(宰相)’으로 오인하기 쉬운데 제상(堤上)은 이름이다.

치술령 정상 아래의 망부석. 오른쪽 바위면에 '望夫石' 글씨가 보인다

치산서원에 모셔진 치술부인 상. 상상화이겠지만 현실적 생동감이 느껴진다

치술령에서 치술부인과 함께 아버지를 그리워하다 숨진 아기와 아경 초상화

 

망부석 위에서 바라본 울산 시가지와 동해 

이제 박제상과 치술부인 그리고 두 딸의 슬픈 전설을 따라 치술령 여기저기를 오른다. 치술부인이 이곳으로 와서 동해를 바라본 것은 박제상이 이 일대를 통괄하는 삽량주(歃良州)를 다스려 익히 알고 있는 장소였기 때문일 것이다. 인근에 있는 천전리각석과 반구대암각화에 남은 글씨를 보면 신라 귀족이나 화랑이 이 일대로 자주 유람을 오기도 했는데 경주에서 가까운 입지도 이유의 하나일 것이다.

박제상유적지가 자리한 일대는 치술령과 국수봉(603m), 연화산(532m)으로 둘러싸인 지름 3km 정도의 분지다. 내부에 작은 구릉이 있기는 하나 마치 분화구처럼 완벽한 지형은 양구 펀치볼이나 합천 초계분지를 닮았다. 운석충돌구는 아닌 듯하고 펀치볼처럼 침식분지로 추정된다. 물이 빠져나가는 북서쪽 구미리의 수구(水口)는 좁은 협곡으로 이곳을 중심으로 분지 전체가 일종의 선상지처럼 완만한 경사면을 이루는 특이한 지형이다. 이름이 따로 없어 지명을 따 ‘두동분지’라고 부르기로 한다.

연화산에서 바라본 '두동분지'. 정면 봉우리가 치술령, 오른쪽은 은을암이 있는 국수봉이다. 두 산자락을 따라 다랑논이 길게 형성되어 있다  

박제상유적지에서 치술령 중턱 법왕사를 향해 오른다. 해발 400m, 훌쩍 높은 곳에 자리한 절은 고찰은 아니며 치술령 전설과도 관련이 없는 듯하다. 절 뒤편에 모셔놓은, 팔이 33개인 33관음상과 옆에 도열한 33기 관음상이 특별하다. 치술령은 법왕사에서 50분 정도 걸어 올라야 한다. 왕복 2시간을 잡아야 하니 별도의 등산으로 가는 것이 좋고, 여기에 실은 사진은 예전에 필자가 올라가서 찍은 것이다. 정상에는 신모사 기념비와 망부석이 있으며, 망부석에서는 울산 방면으로 동해가 훤히 보인다.

법왕사에서 150m 내려가면 왼쪽으로 국수봉 방면 임도가 나 있다. 기이한 침식분지를 바라보며 고도를 높여가면 길은 능선 위까지 올라갔다가 서낭재(325m)로 내려선다. 분지와 범서면을 연결하는 고갯길로 옛날에는 서낭당이 있었던 듯 하며, 정자(서낭정)도 서 있다.

치술령 중턱 해발 400m에 자리한 법왕사. 아래로 두동분지가 펼쳐지고 탑 뒤로 연화산이 보인다

 법왕사 33관음상. 조각기법이 뛰어나서 인상에 남는다

치술령 임도에서 서쪽으로 바라본 풍광. 가장 멀리 보이는 고봉은 고헌산(1034m)

두동분지와 연화산이 정면으로 내려다보인다

서낭재 직전에서 바라본 국수봉. 정상 왼쪽 아래 가파른 사면에 은을암이 있다. 월성원자력발전소가 멀지 않아 치술령과 국수봉 일대에는 송전탑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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