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산맥이 기를 다해 주저앉는 어간에서 경안천은 출발한다. 와우정사에 드러누운 부처님이나, 물줄기의 정수리에 눌러 앉은 문수보살이나 해실 골짜기가 범상하지 않다는 것은 알고 계시리라. 세월이 가다보니 인구 100만을 넘긴 용인이나, 서울의 동남쪽 관문, 땅금 비싼 광주(廣州)나 어여쁘고 오래된 이름 김량(金良)과 경안(京安)을 잃어버리긴 매한가지다. 오염의 강을 털고 이제 수도권의 물 창고 팔당댐으로 가는 물 한 바가지라도 더 보태는 경안천, 이 겨울 강물이 얼지도 못하고 주저앉은 습원에 철새가 분주하다

글 조용연(여행작가)
 취재 지원 : 김용선 
 기술·용품협찬 : 태능한성바이크(02-971-7206)

태국 스님도 추위 피해 떠난 와우정사
한 겨울의 골짜기가 춥지 않은 곳이 있을까만 곱등고개 아래는 장갑을 끼고 자전거를 잡은 손이 시렸다. 광주산맥이 맥이 빠질 때쯤 해서 문수봉이 솟아 있고, 바래산이 골짜기를 만든 해실리 골짜기에서 경안천은 시작된다. 
백두대간 속리산에서 북으로 치솟아 오른 산줄기들이 용인·수원·광주의 올망졸망한 산들을 만드는 분기점에 용인이 있다. 수원보다 어림잡아 80m가 높아 용인엔 겨울이 오래 머물다 간다는 말이 허풍이 아니겠다. 지대가 높으니 당연 분수령이다. 산 너머 양지에선 동으로 복하천이, 남으로는 청미천이 길을 떠난다. 동백에서 오산천이, 이동에서 진위천이, 수지에서 탄천이 용인을 재빨리 벗어나니 온전히 용인을 훑고 가는 강은 경안천 뿐이다.
자전거를 흔쾌히 끌고 나와 동행해준 친구 선치복이 고맙다. 그의 완주에 방해될까봐 산모퉁이 하나 돌면 만나는 와우정사도 못 들린다.
와우정사는 보통 절이 아니다. 고구려로 거슬러 올라가는 불교 열반종의 본산이다. 1970년에 실향민인 해암해곡 삼장법사 김해근이 중흥하였다. 절에서 만나는 어마어마한 부처님 좌상은 물론, 인도에서 모셔와 법당에 드러누워 계신 향나무 부처님은 목불로서 기네스북에 올라있다. 세계 140개 나라와 교류하고 있는 불구(佛具)를 비롯한 징표는 박물관을 차려도 될 어마어마한 양이다. 태국의 관광객에겐 빼놓을 수 없는 성지다. 몇 해 전 겨울, 마당을 쓸던 주지 해월스님은 말했다. “지금은 동남아에서 수행하러온 스님들도 모두 본국으로 돌아갔지. 봄이 되면 다시 올거구만. 추워서 못 견뎌….” 스님이 오래전 인기 있던 라디오 연속방송극 ‘김삿갓 북한방랑기’의 작가였다는 사실도 아는 사람이 그다지 많지 않다.
추운데도 할아버지들의 자전거는 강둑길을 찾는다. 그저 도랑에 불과한 강의 들머리 양옆에 자전거전용도로를 만든 걸 보면 용인시가 그래도 곳간이 넉넉한 게 아닐까.


100만 도시 용인, 김량장이 그립다
페달질이 익을 때쯤 용인시내에 들어선다. 여전히 경안천은 조그만 냇가다. 둔치는 공들여 만든 조형물이 심심찮다. GS수퍼마켓 자리가 옛 김량장역 터다. 김량장은 경전철역으로 살아났으나 사어(死語)에 가까운 이름이다. 고려와 조선시대에 김령역참이 있었고, 김령장이 있었다 하니 김량이라는 사람이 처음 장(場)을 세웠다는 설은 신빙성이 떨어진다. 
수원에서 출발하여 여주로 가던 수여선 협궤열차는 지금의 동백동이 있는 어정역을 지나 힘겹게 큰메주고개를 넘어 삼가역에서 한숨 돌리고는 김량장역에 들어왔었다. 바로 100여 미터 앞을 애물단지 용인경전철이 지나간다. 며칠 전 신문에는 의정부 경전철이 파산직전이라고 말했다. 7,785억원의 배상금을 갚느라 5,153억원을 빚을 내서(지방채 발행) 떠안은 용인경전철이 택한 방식으로 또 빚을 내서 경전철을 인수하여 계속 굴러가게 할 것이라 했다. 
모두가 열병처럼 번지던, 황금알을 낳을 거라는 경전철 건설의 열풍 속에서 생겨난, 웃지 못 할 상황이다. 그래도 누적탑승자 2천만 명 돌파기념 이벤트가 한창이니 이제와 어쩌겠는가. 차라리 철도청이 수여선 철도부지라도 팔아먹지 말고 그대로 유지했더라면 수원역에서 에버랜드까지는 멸종된 협궤열차를 타고 들어올 수 있는 관광명물이라도 만들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부질없는 상상도 해본다.
한때 경안천을 죽은 강으로 만들었던 오염의 주범은 급격히 늘어나기 시작한 공장들이었다. 주민들의 부족한 인식도 한몫 했으나 이내 잘못을 깨달았다. 이제 용인은 인구가 100만 명을 넘어섰다(100만1,467명, 2016년 11월말). 시청 청사를 호화롭게 지었다고 난리를 치던 언론과 시민들도 시민공간으로 상당 부분 개방한 탓에 불만이 쑥 들어갔다. 성남시도 따라서 청사를 지었고, 나머지 자치단체들도 부담을 조금은 던 듯이 보인다. 역대 용인시장들은 줄줄이 불명예 제대(?)를 했고, 경력만 보고 기꺼이 찍어준 나 같은 사람들은 꼴이 우습게 되어버렸다.
그런 생각 하다보면 우울해 지니 시시껄렁한 얘기나 하나 할까. 동네 이름이다. 용인시 유방동, 옛 용인읍 유방리, 지금 영동고속도로 용인IC가 있는 동네다. 지금 지나가는 곳이다. 버드나무 숲 유림(柳林)리와 방축(坊築)리가 합해진 거라고 해도 유방의 이름은 둥글게 솟아올라 눈앞을 어지럽힌다. 유림동으로 덮어보려 하지만 참 희한하게도 에로틱한 이미지의 지명은 숨이 질기다. 유방교에 흔적이 남아 있다. 동네 이름 개명이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니지만 마을주민들이 서둘러 바꾸려들지는 않는다. 예천 지보면이 그렇고, 파주 발랑동이 그렇다. 한자의 뜻까지 갈 것도 없다. 다산과 풍요의 상징이 여체를 예술로 승화시키는 건 동서고금이 마찬가지니까.
마침 용인시는 ‘태교도시 용인’을 사업으로 내 걸었다. 세계 최초라고 자랑한다. 그렇다면 유방동의 역할과 살려야할 명분은 더욱 뚜렷해진다. 모유수유 운동까지 해야 할 참이다. 웃자고 하는 얘기다.
그러나 ‘태교도시 용인’을 아이템으로 잡은 상상력은 우연이 아니다. 조선조 후기 용인에서 태어나 용인에 묻힌 한 여인 ‘이 사주당’(1739-1821)이 쓴 한권의 책 <태교신기>에서 비롯된다. 사임당 신씨 식으로 좀 거룩하게 말해서 사주당 이씨는 여성이 아무래도 제 위치 찾기 어렵던 시대에 군자처럼 지식인으로 학문을 하면서도, 부모봉양, 자식건사, 남편 내조까지를 두루 잘한 슈퍼 여인이다. 실존의 역사를 스토리텔링 위에 산업으로까지 연결시키려는 노력이 지자체를 더 돋보이게 한다. ‘살아 진천, 죽어 용인(生居鎭川 死居龍仁)’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다시 태어난 ‘생거(生居) 용인’이다.
둔전역을 지나면서는 갈대를 심어놓은 둔치길이 자전거와 숨바꼭질을 한다. 전혀 지루할 틈이 없다. 심심하면 한 대씩 지나가는 경전철도 에버랜드역으로 가려고 강을 건넌다. 
자연농원이 촌스러워 ‘에버랜드’로 바꾼 것은 시대가 그렇게 강요했기 때문이다. 포곡면 땅 1/3에 들어선 450만평의 땅이 자연농원이다. 산비알마다 밤나무를 심은 호암 이병철 회장이 에버랜드가 한류의 성지가 되리라고 생각이야 했겠는가마는 그 혜안은 참 우뚝 솟은 별이다. 포곡은 경안천에 창포가 워낙 많이 자라서 포곡(蒲谷)이라 했다는 설과, 경안천이 면의 한 가운데를 지나가기에 포곡(浦谷)이라 했다는 설이 있으나 지금이야 어디 창포가 있으랴.
포곡을 지나면서 강폭을 조금씩 늘려가지만 강둑길은 어설프게 끊어진다. 한창 공사가 진행 중인 곳도 있다. 강둑이 이어진다는 것은 사람에게 비로소 강물과 하나 된다는 말이다. 사람은 둘러 가야할 때 강물은 저만치 혼자 가버리고 만다. 강물이 무정한 게 아니라 사람의 유정(有情)을 방해한 무정(無情) 탓이다. 
갈담리 응검들 마을은 온통 동네가 공장으로 뒤죽박죽이다. 설계된 공단이 아니라 공터라고 생긴 곳에는 하물며 창고라도 구겨 넣어서 골목길이 숨바꼭질한다. ‘자연부락공단’이란 신조어를 만들어야 할 판이다. 수지구 상현동의 꼬불꼬불한 골목길로 연결된 아파트 단지를 닮았다. 행정이 현실을 뒤따라도 못가 헝클어진 바둑판이다.


그리워할 선현이 있어 부럽다, 모현(慕賢)
왕산교에 이르면 모현면 소재지다. 한국외국어대학교 용인캠퍼스가 들어선지 30년이 넘었으나 학교 앞 캠퍼스촌은 썰렁하다. 정부시책에 따라 몸피가 늘어난 서울 시내 대학들은 어쩔 수 없이 떠나야하는 운명 속에서 용인이 최적지였다. 엎어지면 코 닿는 수도의 자장(磁場圈)에 자리를 트는 것은 ‘지방화’라는 포장지만 뒤집어쓴 임시변통이었다. 이제는 도시의 한가운데가 되었지만 경희대가 그랬고, 경기대도 그랬다. 명지대도, 용인대도, 강남대도 40km 백리 반경을 절대 넘기지 않으려 애썼다. 골프장으로 가는 길 사이사이에 절묘하게도 들어섰다. 하기야 30년 전의 용인 하고도 이 후미진 모현은 시골도 그런 시골이 없었다. 지금이야 빨간색 급행버스가 광화문과 이 산골짝을 시점과 종점으로 이어준다. 서울의 확장이지 지방화는 더욱 아니었다.
모현면은 이름이 아주 젊잖다. 교육적이다. 자존심 센 한국외대가 들어올 만하다. 오래전 이름이 모현촌면(慕賢村面)인 것을 보면 모현은 누군가를 숭모하거나 흠모하는 동네다. 모현면 능원리에 묻힌 포은(圃隱) 정몽주 선생이 숭모의 그분이라고 향토지는 말한다. 지조를 지킨 개성 선죽교의 참변, 국사 시간에 아무리 졸았다 해도 잊을 수 없는 조선조 창건의 역성혁명에 맞선 충신이다. 개성 근처에 묻혀 있던 선생을 고향 영천으로 이장하던 중 명정(銘旌)이 바람에 날아가 주저앉은 곳이 바로 현재의 묘소 자리였단다. 레이크사이드 골프장 동코스에서 북동쪽으로 보이는 문수산 아래다.   또 한 사람, 삼학사에 드는 오달제도 바로 오산리에 묻혀있다. 참 잊고 지나갈 뻔 했다. 역시 오산리 천주교공원묘원에 영면하고 계신 김수환 추기경이다. 마지막 가시면서 각막까지 이 세상에 남겨주고 가신 하나님의 사제, 이 시대의 큰 어른이자 참으로 존경받는 성직자가 계시니 모현의 정신은 용인에 내일까지도 길게 이어지게 되었다.

전통시장과 동네로나마 남은 경안, 참 예쁜 이름
왕산교를 가로질러 북으로 가는 강둑길은 넓은 강폭만큼이나 시원스럽다. 광주시내로 들어간다. 낮이 되자 추위가 조금은 누그러진 때문인지 자전거들이 둔치로 놀러 나왔다. 광주라는 말을 입에 올릴 때마다 옛 이름 경안이 아깝다. 경안은 용인 시내 김량장처럼 아예 중앙동으로 개명해 버린 것은 아니다. 잔치국수가 맛있다는 경안시장에도, 경안동에도 ‘경안’ 그 이름이 남아있다. 그나마 중부고속도로 괄호안 경안요금소도 사라졌다. 전라도 광주와 구별하자고 ‘경기광주’ 사자성어가 되었다. 
빛 고을 광주(光州)와 너를 벌 광주(廣州)를 한글로는 절대 구분이 불가능하다. 한글전용을 법으로 정하고 있으니 전라도 광주나 경기도 광주나 관형사를 쓰지 않고는 절대 알 수 없는 이름이다. 최근에 개통한 광주-원주 고속도로 광고는 민자고속도로답게 귀에 딱지가 앉을 정도로 라디오 광고를 해댄다. 어설픈 성우의 발음은 ‘쾅주-원주 고속도로’로 강원도가 더 가까워졌다고 알려준다. 그 성우의 발음은 거의 울음에 가까운 정도로 ‘쾅주’라고 광주를 강조하고 있어서 나는 차라리 ‘경기도 광주’는 발음경제학적으로도 문제가 있으니 차라리 ‘광주’라고 쓰고 ‘쾅주’라고 읽어야 서로 헛갈리지 않을까 상상도 해본다. 아니다. 경안-원주 고속도로라고 했더라면 경기도라는 설명을 안 붙여서 좋고, 예쁜 이름도 되살아났을 텐데….
광주(廣州)가 넓은 땅이긴 했다. 지금의 성남시 전역은 광주군 대왕면, 돌마면, 낙생면이었고, 서울 강남의 역삼동, 삼성동 코엑스 일대가 광주군 언주면이었다. 광진교 건너가기 전 천호동 일대도, 하남시가 된 동부읍도 모두 광주땅이었으나 이제 다 떼어주고 말았으니 넓은 벌 광주(廣州)라 하기도 뭣하다. 차라리 경안시로 했으면 얼마나 예쁘고 유서 깊은 이름이겠는가.
  338번 지방도로 접어들어 쌍령교를 건너면 강둑길은 아예 없다. 강물이 발아래로 보인다. 초월읍이다. 초월면이 입에 밴 세월도 결국은 경부고속도로와 3번 국도를 중심으로 동네마다 빼곡이 들어찬 공장과 창고들 덕분에 늘어난 인구를 이기지는 못했다. 낭만적인 이름의 흔적을 찾으려 해봤자 소용이 없다.


이름 석 자금자탑 학원의 추억
생뚱맞게 ‘000학원’ 간판이 가로 막는다. 이름 하여 기숙학원이다. 스스로 자유를 유보했거나아니면 부모의 강권으로 1년간 유폐된 생활이다. 그래도 흐르는 강물에 지친 눈도 식히고, 무심한 강물의 의미도 떠올리며 공부하라고 이리 경치가 좋은 곳에 자리를 잡은 건지도 모른다.    이들 학원들도 서울 4대문 안에서 학원을 모조리 쫓아낸 강제이주의 한 파편이다. 1970년대 초, 우리가 방학을 이용하여 서울 학원의 족집게 공부 맛을 좀 보려고 들락거리던 곳은 종로2가 뒷골목 공평동의 학원들이었다. 그때도 일류 학원들은 단과로 듣는 뜨내기손님은 사절이었다. 종로학원과 대성학원은 대학입시만큼 이나 선발고사가 까다로워 재수생도 거들먹거렸다. 1년 농사를 지어봤자 쭉정이가 될 부류들은 아예 ‘출입사절’이었다. 그래도 여름·겨울 방학 한 철에 등록하는 촌놈들을 받아주는 학원은 어김없이 이름이 석자였다. 금자탑학원과 상아탑학원의 단과반은 300~400명씩 때려 넣고 왕왕거리는 스피커를 통해 ‘성문종합영어’나, ‘수학의 정석’을 기초부터 초스피드로 몰아 붙였다. 여름과 겨울방학을 거의 다 투자했건만 모의고사는 별반 성적이 올라붙지 못했다. 후기대학이라도 간 게 천만다행이었다. 재수를 해봤자 ‘내 실력은 내가 안다’는 포기는 얼마나 현명했던가.
벌써 무갑사거리다. 몇 해 전 우연히 길에서 손을 들기에 태워준 촌로는 대파를 6,000평씩 짓는 대농이었다. 토란을 3,000평씩 지어 추석 녘에 가락시장에 경매로 내다팔았다. 흙 묻은 장화를 신은 자신을 태워주었다고 그 고마움으로 계절이 바뀔 때면 채소 갖다 먹으라고 전화해 오는 이종일(77) 씨를 한번 보고가도 좋으련만 벌써 해가 기운다. 겨울 해는 도무지 쓸 데가 없다. 토마토축제가 열리는 정지리 일대는 긴 겨울잠을 잔다. 
‘경안천습지생태공원’은 경안천에서 가장 넉넉한 자연친화 공간이다. 강둑에 세워진 조류관찰보호대 언저리는 사람들까지 겨울의 보호색과 완전히 닮아 전혀 어색하지 않다. 눈이 얼어붙은 데크로는 계절에 관계없이 찾는 이들이 끊이지 않으니 심심할 여가가 없다.

붕어찜과 광주분원서울사람들 드라이브 코스
광동사거리에서 직진한다. 자연스러우려면 좌회전하여 광동교로 나가야 강물을 만날 수 있으나 이미 걸음을 멈춘 경안천은 팔당호의 일부가 되고 만 터다. 게다가 서울을 비롯한 수도권 남부의 상수원이다보니 호반으로도 길이 없다. 온통 삼면이 산이고 그나마 트여있던 강남·송파·강동의 벌판은 서울에 떼어먹힌 지 오래다. 경안천 언저리에 붙어있던 논밭전지도 팔당호에 죄다 수몰되고 보니, 남종면 분원 사람들 해먹고 살 일이라는 게 서울의 한가한 나들이객에게 붕어찜 해서 파는 것 밖에 더 있었겠냐는 말이 엄살은 아니다.
분원은 조선조 ‘사옹원 분원백자번조소’가 남종면에 있어서 유래된 이름이다. 6개면 30개리 340여개의 가마터가 조선왕실의 백자와 분청사기를 만들었으니 얼마나 큰 규모였는가. 이 또한 여주가 조선총독부 관요로서 주로 생활 자기를 생산했고, 이천 도자기가 청자를 중심으로 현대에 들어와 마케팅에 성공하여 이름을 먼저 날린 것에 비하면 젊잖게 뒤처진 감이 있다. 
언덕길을 헐떡이며 올라온 것도 팔당호의 거대한 몸피를 보여주는 합수머리가 분원이기 때문이다. 날이 어둡다 벌써. 겨울 해 믿고 있다간 큰일 난다는 말도 엄살이 아니다.

겨울 없는 색문을 찾다가
  
겨울을 내다보니 뿌옇다
잔망스런 한숨이 가린 시야다
겨울이 눈동자를 얼려서도 아니다
너나 없이 없는 색에 눈이 풀려서다
  
일렬의 동행이 그랬다
혼자의 호주머니가 그랬다
나목들이 저마다 키득거리는 게 그랬다
없는 색 검정만으로 우리는 하나 되었다
  
시인 구중서의 ‘안’으로 들어가 보면
겨울 ‘밖’으로 가는 길이 보일까 하여
쪽문을 기웃거려도 겨울조차 잠겼다
  
봄이 와서야 시인이 ‘안’에서 손짓할까
없는 색 다 털고 오라할까 
없는 색 다 입고 오라할까
끝나기 오 분 전 열어젖힌 영화관 검정 속에
시인은 그 ‘안’에 여즉 있기나 한 걸까
  
겨울 문을 못 찾아 내가 시인이라고 했다
이미 ‘겨울 안’을 깨고 나온 시인이라 했다
육촌만도 못한 내 시는 봄 쑥 한 자 옆에나 서 볼라나
손등이 터진 채로 얼어 바스라 질지도 모르지
없는 색 검정을 닮은 채로
혼자 웅크려 곱사등이로
  
* 경안천이 팔당호에 안기기 직전에 ‘경안천습지생태공원’을 만난다. 이 고장이 낳은 시인 구중서의 시 한편 ‘안으로 들어가기’가 한 줄기 복음이자, 경책이다. 온통 색깔이 배제된 겨울 깊은 골에 시인은 겨울 속으로 들어가야 봄이 보인다고 말한다. 눈이 멀어 쪽문도 못 찾는 내게 시인이 손짓해도 소용없었다. 내가 시인인 체 하다 아마 봄을 맞고 말지도 모르겠다. 봄 쑥이나 냉이만도 못한 제 목숨 그냥 절멸하거나, 절뚝거리며 이 강둑에 나타날지도 모르겠다.(*)

풍경에 건네는 말(60) by 조용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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