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소지향으로 알려진 일본, ‘확대지향’이던 때도 있었네

미니벨로 & 전철 타고 일본행(2)
나라와 교토의 충격
축소지향으로 알려진 일본확대지향이던 때도 있었네

이제부터 한반도 문화가 곳곳에 남아 있는 나라와 교토 여정이다. 아침부터 비가 내리고 안경다리까지 부러져 애를 먹었지만 호류지와 도다이지를 돌아보며 감격을 누렸다. 호류지 백제관음상의 미소에 은은하게 취하고, 도다이지 대불전과 대불의 거대함 앞에서는 ‘축소지향’으로만 알고 있던 일본관이 송두리째 흔들렸다. 이 모두에 한반도 도래인의 기술과 역량이 스며있다니 자부심과 아쉬움도 교차한다 

 

우리는 소위 말하는 글로벌 시대, 서로 영향을 주고 영향을 받는 시대에 살고 있다. 영향을 주고받았던 것은 비단 요즈음만이 아니라 옛날 옛적에도 있어왔음에 틀림없다. 압록강을 사이에 두고, 현해탄을 사이에 두고 오래 전부터 우리는 주변 나라들과 서로 영향을 주고 받아온 것이다.
나라(奈良)와 교토(京都) 지역은 한반도로부터 받은 흔적이 많이 남아있는 곳이다. 자전거여행은 천천히 가면서 속을 더 깊이 들여다보며 더 알차게 느낄 수 있을 것 같다.

생소하고 먼 길, 비는 계속 내리고…
지난밤에는 날씨가 걱정되어 몇 번이고 잠을 깼다. 날은 밝아오는데 내리는 비는 제법 굵고 금방 멈출 것 같지 않다. 여유 있게 짠 일정이 아니다 보니 비가 온다고 출발 자체를 포기할 수도 없고 늦추기도 어렵다. 비를 맞으며 나설 수밖에 없다. 설사 조금씩 오는 비라 할지라도 몇 시간을 계속해서 맞으면 그것도 만만하지가 않을 것이다. 배낭에 레인 커버를 씌우고 발목에 방수 스패츠를 차는 등 만반의 준비를 하고 호텔을 나선다.
비가 오니 안경에 자꾸 김이 서려 여간 불편한 것이 아니다. 라이딩하는데 지장이 없도록 자주 닦아주며 가는 수밖에 없다. 그렇게 하면서 아무 탈 없이 한참을 갔는데, 이번에는 비에 젖은 손이 미끄러지는 바람에 안경다리가 부러지고 말았다.

 안경을 벗은 채 맨눈으로 그냥 라이딩한다는 것은 불편한 것은 둘째 치고, 자칫 큰 화를 부를 수 있어 선글라스(도수를 넣은 안경)를 대신 낄 수밖에 없다. 그래도 불편하기는 매 한가지다. 수시로 길옆 민가의 처마나 고가다리 밑 등 비를 피할 수 있는 곳에서 지도를 보고 길을 확인하며 갈 수밖에 없다. 그러다 보니 속도가 느려지는 것은 당연하고 자주 길을 잘못 들기도 한다. 

오랜 기간 군생활을 했기에 지도를 가까이 할 수밖에 없는 환경이라 지도 한 장만 있으면 어두운 밤에도 길 찾는데 조금의 어려움도 없던 시절이 있었다. 그때는 지도를 보면 그 지역에서 자라는 나무 종류도 알 수 있었고, 물소리 새소리도 다 들을 수 있을 정도였는데, 비가 온다고 하지만 한낮에 이렇게 어려움을 겪다니…. 하기야, 이제는 그때의 력(力)이 다했을 것이고 나이도 있잖은가. 

어제 배낭 분실사고로 큰 어려움을 겪었으면, 오늘부터는 세세한 것 하나하나에 더욱 유의해야 하는데 그만 부주의로 인해 결국 안경사고까지 나고 만 것이다. 출발부터가 말썽이다. 그것도 비가 오는 중에…. 

‘일본의 고향’ , 나라(奈良)
오늘 답사하게 되는 나라(奈良) 지역은 교토와 더불어 일본 문화의 뿌리를 만날 수 있는 곳이다. 나라의 서쪽에 있는 헤이조쿄(平城京)에 일본 최초의 수도(710~784년)가 세워진 이후 천년 이상의 역사를 갖고 있어, 나라 현 어디를 가더라도 수많은 문화유적지를 만날 수 있다. 그래서 이곳을 ‘일본의 고향’이라고 일컫고 있다. 

동·서양 간 인류문명 교류의 통로인 ‘실크로드’ 중 ‘오아시스길’와 ‘바닷길(海路)’은 일본까지 연결되고, 이곳 나라지역이 실크로드의 동쪽 종착점이라는 연구가 많이 나오고 있다고 한다. 이 바닷길을 통해 멀리로는 페르시아, 중국, 인도로부터, 가까이로는 한반도로부터 많은 선진 문물이 흘러들어와 이곳에 ‘아스카문화’가 꽃피게 된 것이다. 당시 일본은 한반도에 있었던 삼국으로부터 고루 영향을 받았지만 아스카 문화를 이루는 데는 백제가 가장 큰 역할을 했다고 한다. 그들의 흔적을 오늘 여기저기에서 볼 수 있다는 기대감에 비를 맞으며 가는 길이지만 기분이 좋다.

비 내리고 안개가 자욱한 들판 길을 이리저리 헤맨 끝에 예상보다 많이 늦은 시간에 오늘 첫 방문지 ‘아스카데라(飛鳥寺)’에서 멀지않은 가시하라진구마에(橿原神宮前駅) 역에 도착한다. 우의를 입고 만반의 준비를 했다고 하지만 이미 몸은 흠뻑 젖은 상태다. 계획보다 시간이 많이 지체되어 여행 일정 전반을 조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오늘의 최초 일정은, 한반도로부터 전해진 불교의 흔적이 남아있는 나라 일대의 아스카데라, 호류지(法隆寺), 도다이지(東大寺) 세 곳을 둘러본 다음, 과거 일본의 또 다른 수도였던 교토(京都)까지 갈 예정이었다.

관람과 입장 가능 시간을 감안할 때 계획한 세 곳 전부를 둘러볼 수 있는 여건이 되지 못해 조정할 수밖에 없다(대부분의 관광지는 오전 9시부터 오후 5시까지 관람할 수 있음). ‘일본을 여행하면서 호류지 한 곳을 본 것만으로도 만족한다’라는 여행기를 여러 군데에서 읽은 적이 있어 이곳은 꼭 가보고 싶고, 세계에서 제일 큰 목조건물과 세계 최대의 청동불상이 있는 도다이지 또한 놓치고 싶지 않다. 그러면 결론은 난 것이다.  고민 끝에 일본 불교의 최초 시발점인 아스카데라를 빼고 나머지 두 곳이라도 제대로 관람하기로 한다. 

오늘 제일 먼저 찾아가려 했던 아스카데라는 596년에 완성된 일본 최초의 본격적인 사원으로, 백제계 소가노 우마코(蘇我馬子) 대신의 발원에 의하여 건립된 아스카(飛鳥)의 대표적 사찰 중의 하나이다. 가람의 배치와 출토물들로 미루어 한반도와의 깊은 관계를 보여주며, 한반도로부터 건너간 주지들의 노력으로 인해 일본에 불교를 전파하는 거점으로 큰 번영을 누렸던 곳이다. 지금은 전부 소실되고 자그마한 불당만 남아 그 옛날의 번영을 말해주고 있다고 한다.
 

일본 해군사관학교 생도들이 마침 도다이지 대불전을 참배하고 있다. 좌상임에도 높이가 16m에 달하는 대불은 실로 거대하다
높이 2m 정도에 호리호리한 몸매의 백제관음상
호류지(法隆寺). 금당과 5층탑. 뒤로는 사원의 정문격인 중문(中門)의 보수공사가 한창이다
대불전 내부의 나무기둥 구멍을 통과하면 1년 간 액운을 쫓고 무병장수 할 수 있다는 소문에 어른들도 무리해서 통과를 시도한다
자위대 간부 모집 현수막. 일본 자위대의 역할이 증대함에 따라 우수 간부를 확보하기 위한 노력이 엄청나다

 

호류지만은 제대로 보리라
호류지로 이동하기 위해 가시하라진구마에 역으로 다시 이동해서 기차를 탄다. 가시하라진구마에를 출발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츠츠이(茼井) 역에 도착한다. 호류지까지는 걸어서는 한참이 걸리지만 버스로는 10여분, 자전거로도 약 30분이면 충분히 닿을 수 있는 거리다. 버스 시간표를 보니 버스가 도착하려면 제법 기다려야 하기에 주변 경관도 구경할 겸 해서 자전거를 타고 이동하기로 한다. 

일본으로 여행오기 전에 유홍준 씨가 쓴 <나의 문화유산답사기-아스카, 나라編>을 읽었다. 그 책에서 “법륭사(호류지) 하나를 본 것으로도 이번 답사 여행을 대만족한다. 그 앞은 법륭사의 서막이고 그 다음은 법륭사의 여운이었다.”라는 저자의 소감을 읽고 호류지만큼은 시간을 충분히 갖고 반드시 보기로 했다. 아스카에서 싹튼 일본 고대 불교문화가 호류지에서 비로소 결실을 맺고 그 씨앗이 나라와 교토의 수많은 사찰의 건축과 조각을 낳았다는 것이다. 

이제는 날씨가 개기 시작해 파란 하늘이 모습을 드러냈을 뿐만 아니라, 호류지에 이르는 25번 도로는 차량도 많지 않고 복잡하지도 않아 자전거 타기에 최상의 여건이다. 지나는 길에서 만나는 정류소 간판들이 참 재미있다. 정류장들 모두가 ‘무슨무슨 마을 앞’이라 적혀있는 것이 아니라 ‘무슨무슨 절 앞’이라고 적혀있다. 그만큼 일본에서는 절이 생활의 중심이 되고 있구나 하는 것을 느낄 수가 있다. 

일본 시골의 한적함을 느끼며 한참을 달리노라니 호류지를 알리는 안내판이 나온다. 호류지 방향으로 접어드니 하늘을 찌를 만큼 높고 큰 아름드리 노송들이 길 양옆에 도열하고 있다. 노송들이 환영해주는 열병식이 끝나는 그 곳에 호류지의 시작을 알리는 정문인 ‘남대문’이 모습을 드러내며 반겨준다. 

호류지는 일본 나라현(奈良縣)에 있는 고찰로, 일본 불교 중흥의 시조이자 요메이 천황의 아들인 쇼토쿠 태자가 607년에 창건한 사원으로 아스카시대의 모습을 오늘날까지 전해주고 있는 대표적인 사찰 중의 하나이다. 사찰은 크게 금당(金堂)과 오중탑(五重塔)을 중심으로 하는 서원(西院), 몽전(夢殿)을 중심으로 하는 동원(東院)으로 나누어지며, 서원과 동원 중간의 뒤편에는 대보장원(大寶藏院)이라는 박물관이 있다. 

호류지 경내에 있는 수많은 보물들 중에 금당과 5층탑(5중탑)은 목조 건축물로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것이어서 1993년 일본 최초로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호류지 5중탑은 백제의 정림사지 5층 석탑과 매우 유사하다고 평가받고 있으며, 대보장원에는 백제관음상(百濟觀音像)과 함께 금당벽화 1~6호까지 모사도(模寫圖)가 전시되고 있다. 일본에 와서 처음 접하는 사찰의 탑과 건물의 규모가 이제껏 생각했던 것을 훌쩍 넘어선다.

자부심과 아쉬움의 교차지대
호류지 남대문 앞에 다다르니 젊은이 4명이 “김치”를 연발하며 사진을 찍고 있다. 얼른 다가가서 사진을 좀 찍어달라고 부탁하고 간단히 대화를 나눈다. 얼마 전 군대를 전역한 동기들끼리 전역을 기념해서 일본 속 한국의 흔적을 보기 위해 이곳에 들렀다고 한다. 호류지를 찾는 한국 관광객들 대부분은 세계 최고의 금당이나 5층탑보다는, 한반도에서 전해준 한국 문화의 흔적인 금당벽화와 백제관음을 보기 위해서 오는 경우가 훨씬 많다고 한다. 이곳에서 만난 그 청년들도, 나도 그런 생각이 깔려있어서 온 것이 틀림없다.

우리나라 사람 대부분은 고구려 승려 담징이 금당벽화인 ‘4불 정토도’를 그린 것으로 알고 있다. 이곳에 와서 내가 알게 된 바로는 좀 다른 의견이 있는 것 같다. 금당벽화는 호류지의 창건시기(607년)와 그 이후의 화재 발생 및 개축시기(670년의 화재 후 새로 건축), 담징의 생존시기(631년 사망) 등을 감안할 때 담징이 직접 그리지는 않았을 가능성이 많은 것 같다는 것이다. 그래서 금당벽화를 실제 그린 사람이 누구인지에 대해서는 당분간 수많은 논란이 있을 것으로 보인다. 

어쨌든 사불정토도는 경주의 석굴암, 중국의 원강석불과 함께 동양의 삼미(三美, 3대 미술품)로 꼽히고 있으며, 한국 문화의 영향을 받은 것만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아쉽게도 1949년 금당을 보수하던 중 발생한 화재로 인해 비천상을 제외하고는 모두가 불타 버리고 지금은 모사품만 남아있다.

대보장전에 보관된 백제관음상은 크기가 2m를 조금 넘는데 백제 귀화인이 만든 것으로 추정된다고 한다. 살짝 미소 짓는 모습이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숨을 멈추게 한다는 얘길 들었는데 정말이구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방문객이 많지 않아 대보장전 내부 중앙에 전시되어 있는 백제관음 앞에 혼자 조용히 앉아서 한참을 같이 한다. 어두움에 가까울 정도의 은은한 조명과 깊은 침묵 속에서, 어디에도 견줄 데 없을 것 같은 자태를 보이고 있는 백제관음을 보노라니 신비로움의 극치를 느낄 수 있는 것 같다.

소행성 이름이 된 한반도인
호류지 서원(西院) 대강당 옆에는 경당이란 곳이 있는데, 이곳에는 602년(백제 무왕 3년) 일본에 달력과 천문 지리서를 전해준 ‘관륵스님’의 像이 안치되어 있다. 관륵스님은 초기 일본 불교 교단을 효과적으로 통제하기 위해 승직제도를 체계화하는 등 많은 업적을 남겨 덕망 높은 스님으로 추앙받는다(사진촬영이 금지되어 사진을 찍을 수 없어서 안타깝다). 

1993년 도쿄천문대 후루카와 기이치로 교수는 자신이 발견한 소행성의 이름을 일본에 천문학을 전해준 ‘관륵’으로 명명하고 국제천문학회에 ‘4963 관륵(4963 Kanroku, 4963 칸로쿠)’라고 등록했다고 한다. 소행성의 이름은 발견한 천문학자의 요구에 따라 정해진다고 한다. 그간 한국 천문학자들이 발견한 소행성에는 주로 우리 역사상 주요 인물들의 이름(최무순, 장영실, 허준, 김정호 등)을 붙였다. 

일본 천문학자들도 일본 역사상 인물의 이름을 붙이는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일본에 영향을 미친 외국인의 이름을 붙이기도 한다(일본인이 발견한 소행성에 한국인 이름을 붙인 경우는 관륵 외 세종, 천문학자 나일성 등이 있다). 이런 면을 보면 배울만한 일본인들도 꽤 있구나 싶은 마음에 기분이 좋아진다.

금당벽화를 그린 주인공이 누구였던지 간에 초등학교 때부터 익히 알고 있던 사찰이라 꼭 한번 오고 싶었던 호류지를 직접 와보니 또 다른 느낌이 든다. 찾는 사람이 그렇게 많지 않아 다른 어떤 곳보다 조용한 가운데 이곳에서 큰 역할을 하였을 그 당시의 선조들을 생각해볼 수 있었다. 

 

도다이지 정문인 남대문과 사슴 떼
대불전 입구. 원래보다 30% 축소된 건물이라는데도 모든 것이 너무나 거대하다
남대문의 금강역사상은 키가 8m나 된다

 

도다이지(동대사) 가는 길
이제는 우리 선조들의 흔적이 배어있는 또 다른 곳, 나라(奈良) 도다이지(東大寺)를 향해 출발한다. 자전거로 여유롭게 호류지 역에 도착한 다음 기차를 타고 도다이지가 있는 나라까지 간다. 호류지에서 나라까지는 10km 정도밖에 되지 않아 자전거로도 그렇게 먼 거리는 아니다. 그러나 오전에 비가 오는 바람에 너무 많은 시간이 지나갔고, 도다이지를 둘러본 다음에는 오늘 숙박할 교토까지 가야하기에 기차를 타고 가기로 한다. 출발한지 10여분 만에 나라 역에 도착해 조금은 싱겁게 느껴진다.

나라 역에서 내려 도다이지를 향하는데 오전에 잠시 개었던 날씨가 다시 비를 뿌리기 시작한다. 원래 일본은 우리나라에 비해 비가 많다고 하지만 일기예보가 한번씩 틀려도 괜찮은데 맞아도 너무나 잘 맞는다. 여행할 때 가장 큰 복은 ‘날씨(기상) 복’이라는 얘기가 있는데, 그냥 하는 말이 아니구나 하는 것을 실감한다.
나라 역에서 도다이지로 가는 도중에 비도 피할 겸 해서 식사를 하기로 한다. 일본어라고는 인사말 정도 외에는 전혀 모르기 때문에 사진으로 된 메뉴판을 보고 주문을 한다. 가장 만만한 것이 우동류, 덮밥류, 도시락(벤또)이다. 그래도 오늘 오전에 고생한 것을 조금이라도 보상할 겸 해서 생선덮밥에 새우튀김을 추가로 시킨다. 옛날 서울 노량진 일대 학원가에나 있을법한 독서실 칸막이 책상과 같은 개인별 식탁에 앉아서 잘들도 먹는다. 아예 모르는 사람들끼리이니 식당 안은 너무나 조용하고 종업원들은 기계적으로 손님을 맞고 서빙도 한다. 주문한 식사가 나왔는데 먹음직스럽다. 식사를 하면서 오늘 이후의 일정에 대해 주욱 짚어본다. 교토는 워낙 넓고 볼거리도 많은 곳이라서 가용 시간을 감안해 선별해서 둘러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꽃사슴 군단의 환영
식사를 마치고 길을 나서지만 비가 그칠 것 같지 않아 어쩔 수 없이 비를 맞으며 도다이지로 페달을 굴린다. 나라 역에서 도다이지까지는 3km도 되지 않아 자전거로도 금방 닿는다. 중간에 있는 ‘긴테쓰 나라 역’을 지나면서부터 나무가 우거지고 잘 가꾸어진 나라공원을 만난다. 

나라공원을 거쳐 도다이지 가는 길은 비가 오는 가운데 수많은 관광객들로 붐비고, 또 환영(?) 나온 사슴 떼 때문에 복잡하다. 오늘처럼 비가 오는 날 이 정도의 관광객이 몰린다면 날씨가 좋을 때는 과히 터져나갈 정도가 아닐까 싶다. 그런 길을 자전거로 이동한다는 것은 불편하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다른 관광객들에게 불편을 줄 것 같아 내려서 끌고 걷는다. 

한 무리의 관광객이 꽃사슴(나라 市 공무원이라는 별명을 갖고 있다고 함)에게 먹이를 주며 사진을 찍느라고 야단들이다. 이곳 나라공원에 사슴이 많고, 나라 市의 상징이 꽃사슴인 줄은 알았지만 이렇게 많을지는 몰랐다(1200마리 정도란다). 그런데 꽃사슴의 모습이 이상하다. 아마 사람들의 안전을 위해서인지 뿔을 제거한 흔적이 있는 수사슴들이 꽤 많은 것 같다. 사슴의 최고 무기는 뭐니 뭐니 해도 날카로운 뿔이고 그 다음이 강력한 힘을 낼 수 있는 뒷발이다. 그런데 그 뿔을 무장해제 시켰으니 자존심은 물론 야성도 완전히 잃어가고 있는 것이 아닐까 싶다. 말 못하는 짐승이라고 못할 짓을 하는구나 생각하니 마음이 참으로 아프다. 

사슴은 풀이나 나무껍질, 나뭇가지, 어린 싹을 주식으로 해서 살아가야 하는데 관광객들이 나눠주는 과자(전병)를 먹으려고 사람에게 오히려 달려들기까지 하는 기현상을 볼 수 있다. 모든 생명체는 주식(主食)을 바꾸면 신체상 많은 변화가 불가피할 것이고, 야성도 잃어갈 것이다. 아니, 이미 잃었을 수도 있다고 생각하니 씁쓸한 생각이 든다. 도다이지를 포함해서 나라 시 전역에 사슴이 많은 이유는 근처에 ‘카스가타이샤’라느 신사가 있는데 거기 모셔진 신이 하늘에서 내려올 때 사슴을 타고 왔기 때문에 사슴을 신성시하고 있으며, 현재 나라 시의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어 있다고 한다. 

우리나라에는 각군 본부가 주둔하고 있는 계룡대란 곳이 있다. 이 부대는 꽤 넓은 공간을 점유하고 있으며, 울타리가 완벽하게 설치되어 있어 외부와 완전히 분리되어 있다. 이곳에도 꽤나 많은 꽃사슴을 방목하고 있는데, 부대와 충청남도에서는 적절한 개체수를 유지하기 위해 엄청난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계룡대의 꽃사슴은 뿔을 무장해제 당하지 않고 먹이도 풀과 나뭇가지 등을 먹고 있어서 도다이지 꽃사슴에 비하면 행복하다고 할 수 있겠다.

도다이지 입구에서 관광객을 환영해주고 있는 나라 시의 상징 꽃사슴 무리

 

아, 이게 진정 축소지향의 일본이란 말인가
꽃사슴을 보며 이런저런 것을 생각하며 걷다보니 걸음을 막는 건물 하나가 나타난다. 아니 이게 뭐지. 도다이지로 통하는 출입문인 남대문(南大門, 난다이몬)이란다. 높이가 무려 25.5m에 이르는 일본 최대의 산문(山門)으로 이것 역시 일본의 국보라고 한다. 우리나라의 아파트를 기준으로 하면 무려 10층 높이나 되니 내가 살고 있는 아파트의 베란다와 같은 높이다. 앞에 버티고 선 이 건물은 오늘 여행의 진짜 주인공이 아닌 조연(助演)일 뿐인데 그렇다면 대불전(大佛殿)은 도대체 얼마나 크다는 것인가. 그리고 그 안에 봉안되어 있는 대불(大佛)은 또 얼마나 크다는 것인가.

자전거를 주차장에 주차시키고 난 다음, 입장권을 사서 줄지어 도다이지 안으로 들어간다. 가랑비가 오고 있지만 관광객의 수는 결코 만만한 것이 아니다. 주말이나 날씨가 좋은 날에는 정말 엄청나겠다 생각하니 오히려 오늘처럼 비 오는 날이 여행하기에 더 호젓하고 좋을 수도 있겠구나 싶은 생각이 든다. 

출입구를 통과하니 저 멀리 본전이 보인다. 얼핏 보기에도 보통 규모가 아니다. 상상 밖의 자태를 보인다. 사진을 찍으려고 일행을 찾는가 하면 “김치”라고 하면서 사진을 찍는 한국 관광객들의 말소리와 웃음이 여기저기서 들린다. 그만큼 한국 관광객들이 많다는 것이다. 단독 여행을 하다 보면 셀카 말고는 제대로 된 개인사진이 그렇게 많지 않다. 이제껏 일본 관광객들에게 부탁하다 보니 말도 통하지 않아 불편한 점도 많았는데, 오늘은 좀 편하게 할 말 하면서 사진을 부탁할 수 있어서 편하기는 하다.

대불전을 향해 한발 한발 옮기면서 기대감에 바람을 넣는다. 세계 최대의 청동 불상인 ‘다이부츠(大佛)’가 모셔져 있는 세계 최대 규모의 목조 건물을 지금 바라보면서 다가가고 있는 것이다. 정말 엄청나게 크다, 그리고 엄청 높다. <축소지향의 일본인>이란 책을 읽은 적이 있는데 세계 최대의 불상과 대불전을 보니 우리가 뭘 잘못 배웠나, 뭘 잘못 들었나 싶고, 기존의 공간 개념과 감각을 뛰어넘는 크기는 가늠하기가 어렵다.

대불전 안에 모셔진 청동불상은 결가부좌한 좌상으로 높이만 16m이고 좌대를 포함하면 18m라고 한다. 이런 불상을 모시고 있는 대불전은 몇 번이나 소실되었던 것을 1709년에 재건했는데 정면이 57m, 옆면이 50m, 높이가 47m나 된다고 한다. 이것도 최초에 지었던 대불전에 비해 약 30% 정도를 줄인 규모라고 하니 원래의 모습을 헤아리기가 쉽지 않다. 어쨌든 이 엄청난 규모의 대불전과 청동대불을 한국계 도래인들이 주도하여 건립했다고 하니 참으로 자랑스러운 생각이 든다. 그러나 그냥 사람의 힘만으로 만들어진 불상이, 사람의 힘만으로 만들어진 대불전이 아니지 싶다. 다른 그 무엇이 없이는 그냥 지을 수 있는 규모가 아니지 않았을까 싶은 생각이 든다. 우리 선조들은 80m 높이의 황룡사 9층탑도 거뜬하게 만들었던 경험을 갖고 있지 않았던가.

 

교토의 서부에서 남북으로 흐르는 가쓰라 강. 우리나라 강둑길의 모습과 너무나 닮아 매우 친숙하다. 둑길에 봄의 전령 홍매화가 피었다

 

축소지향 vs 확대지향
1980년대 초에 먼저 일본어로 출판되었다가 나중에 한국어로 다시 나온 <축소지향의 일본인>(이어령 著)이라는 책이 있다. 책 제목만 보고도 내용을 대충 짐작할 수 있을 것 같지 않은가? ‘축소지향’이라는 키워드 하나만으로 일본인과 일본의 문화와 전통, 역사적 맥락을 일관되고 설득력 있게 꿰어낸 책이다. 일본과 한국에서 꽤나 많이 팔렸다. 

이 책에서는 일본사람들이 축소지향적으로 나아간 것을 많은 예를 들어가면서 얘기하고 있다. 중국과 한국에서 먼저 사용하기 시작한 부채를 접었다 폈다 할 수 있도록 만든 쥘부채, 영국의 장우산을 접이식 우산으로 만든 다음 그것을 또다시 원터치식의 자동 우산으로, 밥상을 축소하여 도시락(밴또)으로, 한 사람의 대략적인 이력을 요약하여 담은 명함, 자연의 산과 바다를 축소해서 집안 마당으로 들여온 정원 문화, 그것도 부족해서 방 안으로 가지고 들어온 분재나 꽃꽂이, 트랜지스터 라디오, 휴대용 리코더인 워커맨, 소형 승용차 등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예들이 있지 않은가.

그런데, 위와 같은 ‘축소지향의 문화’와는 달리 일본의 원래 문화는 거대한 문화적인 요소도 있었다고 한다. 그것을 증명하는 것 중의 하나가 지금 만나고 있는 47m 높이의 도다이지 대불전이고, 16m 높이의 청동대불이다. 이외에도 시네마현 이즈모타이샤(出雲大社) 신사의 (옛)본전 높이도 무려 48m나 되었고, 무엇보다 세계에서 가장 큰 능(陵)인 ‘닌토쿠료(仁德陵, 다이센 고분, 오사카, 前方後圓墳)’의 길이는 무려 486m나 된다. 

이런 사례들을 보더라도 일본 문화를 전적으로 축소지향으로만 볼 수는 없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렇게 확대지향적이던 것이 헤이안(平安) 시대(794~1185)부터 무로마치(室町) 시대(1336~1573)로 접어들면서 깎이고 축소되어 대륙 문화와는 구별되는 일본 문화가 만들어진 것이다. 어쨌든 이러한 축소지향적 문화는 일본을 세계 경제대국으로 끌어올린 요인이 되기도 한다.

확대지향일 때마다 실패한 일본
이렇게 축소지향으로 나가던 일본이 2번에 걸쳐서 대외로 확대지향으로 나간 적이 있는데 그때마다 일본은 실패를 겪었다. 이렇게 일본이 외부로 확대지향으로 나가던 당시 지향점에는 항상 만만한 상대(목표)인 한반도가 있었음을 우리는 기억해야만 한다.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임진왜란을 일으켜 한반도를 거쳐 중국대륙으로 나아가고자 한 것이나, 한국을 삼켜버리고 만주를 침략하면서부터 꿈꾸어온 ‘대동아공영권’을 완성하기 위한 행보는 더욱 빨라졌고 급기야는 태평양전쟁을 일으키게 된 것도 있지 않은가. 

일본은 ‘축소지향’ 때는 번영했지만, 그것이 성공하여 너무 순조로워지면 그것을 버리고 히데요시처럼 거대주의로 나갔던 것이다. 확대지향으로 향하면서 섬세함이 파괴되고, 판단력은 궤도를 벗어나 잔인성으로 변해간 것이다. 일본은 살 만해질 때 확대지향으로, 외부로 발걸음을 옮겼다는 것이다.
일본은 지금 기회만 있으면 밖으로 나가려 하고 있고, 나가고 있으며 그 걸음걸이도 점점 더 빨라지고 있다. 군사력의 규모가 점점 커지는 것은 물론, 질적으로도 엄청난 수준을 자랑할 만큼 군사강국의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일본에서 가장 가까운 나라가 우리나라임을 한시라도, 결코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도다이지를 둘러보고 빠져나오면서 뒤를 돌아보는데 대불전 앞 출입구에 있는 당파풍(唐破風)의 곡선 구조물에 정신이 번쩍 든다. 마치 쇼군의 투구를 닮은 것 같아서…. 

빗속의 교토행
이곳 나라지역도 제대로 여행을 즐기려면 며칠 여유를 가지고 봐야할 만큼 볼거리가 무궁무진하다. 도다이지에서 걸어서 10분 정도의 거리에 국립나라박물관이 있고, 일본의 왕실의 보물(쇼무천황의 유물)과 도다이지의 보물을 보관하는 창고인 정창원(正倉院, 쇼쇼인)도 바로 옆에 있다. 특히 정창원에는 신라장적(新羅帳籍)으로 부르는 신라민정문서가 보관되어 있어 관심을 가질만하지만 가야할 길도 멀고, 혹 있을지도 모를 다음 여행으로 미룬다. 그래도 나라 역으로 향하면서 잠깐의 여유가 있어서 코후쿠지(興福寺)도 들렀는데 보수공사 중이라 5층탑만을 볼 수 있었다.  

여행을 할 때는 여러 가지가 받쳐줘야 하지만 뭐니 뭐니 해도 날씨가 좋아야 하는데 아직도 비가 온다. 이제 오늘의 숙소가 있는 일본 최고의 고도 교토로 이동해야 한다. 나라에서 교토까지는 약 40km로 1시간이면 충분히 도착할 수 있다. 

오늘은 이른 아침부터 빗속에서의 여정이었고, 중간에 안경다리가 부러져 어려움을 겪었다. 그래서 일정을 크게 조정하여 호류지와 도다이지만이라도 여유를 가지고 볼 수 있어서 정말 다행이다. 이제는 이번 여행의 최대 방문지인 교토로 가는 것이다.

4~5세기경 한반도 도래인 하타씨가 교토 지역에 정착해 제방을 쌓고 다리를 놓아 도시를 만듦으로서 후일 교토가 일본의 수도가 될 수 있었다고 한다. 필자 뒤로 길이 154m의 목조 다리인 토게츠교가 보인다
일본식 정원의 아름다움을 감상하는데 비는 그다지 문제되지 않는다. 텐류지 마루에 걸터앉아서
웅장한 건물과 치밀하게 조영된 정원이 어울린 텐류지(天龍寺)

 

일본 최고의 여행지 ‘교토’에 입성
일본 전국에서 가장 문화적으로 뿌리가 깊고 풍성한 곳이 긴키지방(近畿地方)이고, 그 중에서도 교토(京都)는 역사와 문화적으로 볼거리가 풍부한 곳이다. 교토는 794년 간무천황이 도읍지로 정한 이래, 1185년 무사정권이 가마쿠라로 수도를 옮긴 200년을 제외하고는 일본 정치·문화의 중심지였다. 그래서 우리나라의 경주만큼이나 볼거리가 많은 역사도시로 비교된다.  

교토로 이동하는 열차는 마침 퇴근시간대라 많이 붐빈다. 그래도 자리를 잡을 수 있어서 편하게 간다. 앉아서 가노라니 눈꺼풀이 무거워지지만 차창 밖을 통해 일본의 시골 모습을 단편적으로나마 볼 수 있어 참 좋다.
교토에 도착하니 아직도 가랑비가 내리고 있고 구름이 많이 껴서 그런지 벌써 어두워지기 시작한다. JR 교토 역에 내리니 퇴근시간대이기도 하지만 대도시임을 실감할 정도로 엄청 복잡하고 붐빈다. 역을 나서니 정면에 131m 높이의 교토타워가 방향을 안내해준다. 서울에서는 남산이, 파리에서는 에펠탑이 도시의 기준점이 되고 있지 않은가. 이곳 교토 역시 배산임수의 평야지대에 위치하고 있어서 어디서든 교토타워가 잘 보인다. 교토타워가 기준점이 되기도 하거니와, 당나라 수도 장안을 모방해서 건설한 도시라 도시 전체의 도로망이 바둑판 모양으로 되어 있어 외국 관광객이라도 길 찾는데 그렇게 어려움이 없는 편이다.

교토 역에서 호텔까지는 비가 내리는 밤길을 자전거로 이동한다. 4km 정도밖에 되지 않지만 야간에다 초행길이라 조심조심해서 달린다. 어제 밤을 생각하면 오늘 밤은 아주 양반이다. 7시가 조금 지나 호텔에 무사히 잘 도착한다. 우선 간단하게 씻고 식사부터 하려고 낯선 교토 거리로 나선다.

자전거라야 교토를 깊이 본다
교토는 아주 평평한 평지일 뿐만 아니라 바둑판처럼 구획이 확실하게 정리되어 있어서 길 잃을 염려가 없다. 따라서 자전거로 여행하는 것이 제격이 아닐까 싶다. 대부분의 일본 관광지는 오전 9시에 문을 열고 오후 5시면 문을 닫는다. 한정된 관람시간을 최대한 확보하기 위해서는 일찍 숙소를 나서서 제일 먼 곳부터 여행을 시작하면 좋다. 가장 가까운 곳을 제일 나중에 보는 것으로 계획을 잡으면 큰 도움이 된다. 5시에 관람이 끝나고 나면 어두워지기 전 밝을 때 숙소로 돌아와 저녁을 먹고 쉴 수 있어서 매우 효율적이다.
관람 가능 시간이 한정되고 목적지로 이동하느라 길에서 허비하는 시간도 만만치 않기 때문에 점심은 가급적 페스트푸드로 해결하면 알차게 구경할 수 있다. 낮에 관광하면서 먹거리까지 즐긴다는 것은 조금 생각해볼만 문제다. 일본의 먹거리를 즐기는 것은 저녁시간을 잘 활용하면 충분하지 않을까 싶다.

교토처럼 평지에 형성된 도시에서는 자전거만큼 이동하기 좋은 수단은 없는 것 같다. 특히 호텔에서 멀지 않은 동쪽 3km 정도의 지점에는 가모 강(鴨川)이, 서쪽 6km 정도의 지점에는 가쓰라 강(桂川)이 남북으로 흐르고 있다. 이 두 강을 잘 이용하면 시내의 혼잡한 길을 피해서 관광명소에 편리하게 도달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일본 도심을 흐르는 강둑길에서의 라이딩을 즐길 수 있어서 더욱 좋다. 

교토의 동쪽을 흐르는 가모 강은 반듯하고 깔끔하게 잘 정비되어 있어 서울 한강변을 달리는 기분이 나는 반면, 서쪽을 흐르는 가쓰라 강 주변에는 농지가 많고 촌락으로 형성되어 있어 일본 시골 풍경을 마음껏 즐길 수 있어서 매우 자연스럽고 푸근하다. 두 강은 매우 대조적이지만 각자 나름의 운치가 있어 좋다. 
특별한 교토여행을 경험하고 싶다면 자전거가 단연 최고다. 교토의 대부분의 관광 명소가 교토 역을 기점으로 10km 내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에 명소까지 이동하면서 일본의 생활 모습까지 속속들이 볼 수 있기에 적극 추천하고 싶다. 북쪽으로 이동하는 것은 약간의 경사가 있으나 크게 걱정할 정도는 아니다. 나처럼 접이식 자전거를 직접 휴대하고 가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다. 일본은 세계적으로도 자전거 문화가 매우 발달한 나라일 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도시 요소요소에 자전거 대여소가 많고 하루에 1000엔부터이니 특별한 여행의 기분을 느끼고 싶다면 자전거여행을 적극 추천한다.

일본 국보 1호 목조미륵반가사유상이 전시되어 있는 코류지(廣隆寺) 신영보전
외벽이 화려한 금박으로 칠해져 있는 킨카쿠지(金閣寺)의 금각. 가장 많은 관람객이 몰렸다
코류지의 본전 역할을 하는 태자전 앞에 있는 중건비. ‘진하승이 창건했다’는 내용을 삭제한 흔적이 보인다

 

교토는 일본 역사의 뿌리이자 보물창고
아침 일찍 일어나 호텔에서 제공하는 식사를 하고 출발 준비를 한다. 그런데 밤새 내린 비가 아침까지도 멎지 않고 계속 내린다. 일기예보를 보니 오늘 하루 종일 비가 예보되고 있다. 이왕 이렇게 되었으니 비를 맞으면서 시작할 수밖에 없다.
오늘은 교토의 서쪽에 있는 가쓰라 강을 따라 북상하여 북서쪽 끝에 있는 토게츠교(渡月橋)를 거치고, 텐류지(天龍寺)로부터 료안지(龍安寺)와 킨카쿠지(金閣寺), 코류지(廣隆寺)를 차례로 관람할 계획이다. 

교토의 동·서에서 흐르는 두 강은 예로부터 자주 범람했다고 한다. 4~5세기경 한반도에서 건너온 하타씨가 교토 북서쪽인 ‘아라시야마 일대’(텐류지 일대)에 정착하여 살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들이 도시를 일구고 제방을 쌓고 다리를 놓고 한 것이 토게츠교이고 가쓰라 강 제방이다. 794년 교토가 일본의 수도가 될 수 있었던 것은 그 이전 300년 전부터 하타씨들에 의한 개척이 있었기 때문이었다는 점을 일본의 고대사는 인정하고 있다. 그래서 그런지 가쓰라 강을 따라 페달을 돌리는데 우리나라 남해안의 섬진강 어디쯤을 거슬러 올라오는 것 같은 참으로 묘한 기분이 든다.
토게츠교를 건너면 일본 명승 및 사적 1호로 지정된 정원이 있고 유네스코 세계유산에도 등재된 텐류지가 있고, 노노미야 신사와 연결되는 대나무 숲길을 따라 조성되어 있는 ‘사가노 죽림’을 거치고, 킨카쿠지를 들렀다가 료안지로 향한다. 

1975년 영국 엘리자베스 여왕이 일본을 방문했을 때 가장 일본적인 대표 장소로 이곳 료안지에 있는 석정(石庭)을 선정하여 다녀갔다고 한다. 1999년 한국 방문 시 가장 한국적인 풍광으로 안동 하회마을을 다녀갔던 것처럼 말이다. 

료안지의 석정은 참으로 고요하고, 정갈하고, 아름답고, 깊은 명상을 유도하는 절묘한 구조다. 석정은 약 80평 정도의 공간을 낮은 흙담으로 두르고 거기에 자잘한 백사(白沙)를 가득 깐 다음, 크기가 고만고만하고 잘 생기지도 않은 15개의 돌을 여기저기 배치해놓은 것이 전부다. 나무 한포기, 풀 한포기도 없고 물도 흐르지 않는다. 이 석정에서 느낄 수 있는 것은 고요함과 정적뿐이라고 하는데 그것을 느끼기엔 부족함이 많은 것 같다.

한반도 도래인이 세운 코류지
오전에 텐류지를 비롯해 사찰 몇 곳을 둘러보느라 시간이 많이 지나갔다. 이제는 한반도로부터 건너온 도래인의 후손 진하승이 창건한 오늘의 마지막 코스인 코류지로 향한다. 그곳에는 선조의 숨결이 묻어있는 일본 국보 1호인 ‘목조미륵반가사유상’이 있다.

코류지는 603년 한반도에서 이주해 온 하타씨의 자손인 ‘진하승’에 의해 창건된 씨사(氏寺)로서 교토에서 가장 오래된 사찰이다. 제일 오래된 사찰이기도 하지만, 일본 국보 1호인 목조미륵반가사유상(木造彌勒半跏思惟像)으로 유명하다. 어쨌든 교토를 찾는 우리나라 관광객들 대부분은 이 불상을 삼국시대 불상으로 알고 이를 보기 위해 코류지를 찾고 있다. 나도 그중의 한 사람으로서 반가사유상을 만나고 싶어서 이곳을 찾았다. 그런데 일본인들에게는 그렇게 매력적이지 않아서인지 다른 사찰들에 비해 코류지를 찾는 사람은 그렇게 많지 않았다. 날씨 영향도 있겠지만 내가 코류지를 찾았을 때 주차장에는 소형 승용차 몇 대만이 덩그렇게 서있을 정도로 썰렁했다. 

초기의 코류지는 경내에 아름다운 정원을 갖춘, 규모가 꽤 큰 사찰이었지만 메이지유신 때 폐불훼석(廢佛毁釋, 메이지 정부 초기 불교 사원과 승려들의 특권을 무너뜨리기 위해서 사원, 불경, 불상 등을 훼손한 사건)의 광풍을 피하지 못하고 많이 축소되었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현재의 코류지에는 다른 사찰에 견줄만한 빼어난 건축이나 아름다운 정원이 없고 단지 아스카, 나라, 헤이안, 가마쿠라 시대로부터 전해지는 다양한 불상들을 한 곳에서 볼 수 있어 사람들이 찾아오는 것 같다.

1975년 영국 엘리자베스 여왕이 방문했다는 료안지(龍安寺)의 석정(石庭)을 감상하는 관광객들

 

아! 목조미륵반가사유상
코류지는 1982년 ‘신영보전’을 짓고 이곳에 십이지신상을 필두로 보살과 천왕의 초상, 조각들과 함께 목조반가사유상을 전시하고 있다. 신영보전 내부는 꼭 필요한 곳에만 낮은 조명을 집중하고 있어 매우 은은한 분위기를 만들고 있다. 그 은은한 불빛 속에서도 가장 집중적으로 조명을 받는 주인공은 단연 목조반가사유상이다. 탄성이 절로 나온다. 신영보전의 중앙에 위치한 반가사유상 앞에서 걸음을 멈추고 불상을 찬찬히 감상해본다. 

일본에서 자란 지인의 얘기로는 공부할 때 코류지에 온 적이 몇 번 있었다고 한다. 그때마다 반가사유상의 아름다움에 취해(?) 3시간 이상을 머무르면서 벅찬 감흥을 느꼈다고 전해주었는데 충분히 이해가 간다. 언제 다시 이곳에 올 수 있겠느냐는 생각도 들지만 빡빡한 일정으로 움직여야 할 입장에서는 그럴 여건이 되지 못해 아쉽다. 

반가사유상 왼쪽에는 코류지를 지은 신라계 도래인 호족 진하승 부부의 상반신 목상도 함께 모셔져 있어 더욱 감격적이다. 반가사유상의 아름다움에 대해서는 독일 철학자 카를 야스퍼스가 “지상 모든 속박을 초월해 도달한 인간존재의 가장 청정하고 원만하고 영원한 모습”이라 예찬했다는데 그렇게 찬사할 만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신영보전을 나서면 태자전이 있다(코류지에는 본전이 없고 태자전이 그 역할을 대신함). 그 태자전 정면에는 1970년에 세운 코류지 중건비가 있다. 이 비석에는 코류지의 역사가 적혀 있는데 둘째 줄에 삭제·훼손된 흔적이 있다. 역사학자 유흥준에 의하면 그 글자는 ‘진하승이 창건했다’는 내용인데 삭제된 것이라고 한다. 평소에 보고 싶어 했던 목조미륵반가사유상을 만나고 기분 좋게 나오는데 코류지 중건비를 보니 뒷맛이 영 개운치가 않다. 손바닥으로 하늘의 해를 가리는 격이다. 이 같은 속 좁은 행동 하나만으로 일본인을 평가하기는 곤란하지만, 그 정도라면 아직 세계의 지도급 나라가 되기에는 몇 퍼센트 부족하지 않은가 싶다. 

오늘 계획한 일정은 모두 끝났다. 비가 오는 날씨였지만 그래도 시간을 잘 쪼개 알차게 돌아볼 수 있어서 기분이 좋다. 이제는 호텔로 돌아가 씻고 교토에서의 밤 시간을 즐겨야지 싶다. 호텔로 향하는 길도 5km 미만이라 부담이 없고, 이제는 일본에서 길 찾기 요령도 좀 생긴데다 자전거도 잘 나간다. 비도 그치고 해서인지 얼굴을 스치는 바람도 상큼하게 느껴진다. 아마 코류지에서 만난 목조미륵반가사유상의 미소를 닮고 싶어서 그런 기분이 드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다음호에 계속). 
 

어쩌면 나무로 이런 모습을 조각할 수 있을까. 깊은 사색에 빠진 그윽한 미소와 편안하고 우아한 자태는 볼수록 몰입하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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