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여백
HOME TRAVEL
한국의 강둑길-영산강이 암물이라면 진짜 수물은 황룡강영산강이 암물이라면 진짜 수물은 황룡강

한국의 강둑길66 - 황룡강 ( 장성 · 광주 )
영산강이 암물이라면 진짜 수물은 황룡강


노령산맥 갈재를 넘으면 전라남도다. 높지 않으나 깊은 입암산과 백암산이 내장산국립공원 남쪽에 단풍골짜기를 내고, 천년 가람 백양사와 황룡강을 만들었다. 큰 도시 빛고을 광주의 언저리에서 그 위세에 눌릴법하면서도 ‘글이라 하면 어디 견줄 데가 없다’는 ‘문불여장성(文不如長城)’은 오래된 고을의 오늘을 지키는 자존심이다. 조선 제일의 이름 ‘홍길동’이 소설 속 주인공이 아니라 장성에서 태어난 실존인물이라는 것은 드러내고 자랑할 만한 이야기다. 황룡강을 담은 장성호 넉넉한 물이 남도 벌판을 적신다. 굳이 음양을 맞추려 영산강을 암물이라 한다면 진짜 수물은 풍요와 영검한 비늘이 번쩍이는 황룡강이 제격이리라

 

장성호에 담긴 황룡강 깊은 물에서 황룡은 오랜 시간 잠룡으로 지내다 승천할지도 모르겠다

 

 

기록을 연달아 갈아치운 찜통더위, 그 지독한 2018년 여름도 풀이 죽었다. 세월 앞에 사람만 장사 없는 게 아니다.
갈재 아래 호남고속도로 호남터널을 빠져나오면 남도의 벌판으로 한 걸음 더 내려선다. 황룡강을 찾아가는 길이다. 으뜸 단풍답게 내장산국립공원은 노령산맥 끝자락 햇볕 좋은 남쪽 골짜기에 단풍터널을 더 만들었다. 아직은 단풍이 익어가는 시간조차 품고 있는 중이다. 



암물 영산강에 걸 맞는 짝, 수물 황룡강
입암산 꼭대기에서 내장산을 되돌아보고 황룡강 물이 남으로 흐른다. 남창계곡이다. 전남대수련원이 여정의 기점이 된다. 성질이 제법 급한 계류가 또랑에 또랑또랑 하다. 황룡이란 작명도 그 울창한 수풀과 골짜기 사이에서 탄생했을 것이다. 장성은 물론, 광산·나주·함평까지 물을 나누어 주니 영산강이 암물이고 담양 용천이 수물이라는 전설과는 비할 바 없는 넉넉함이다. 담양호 품은 영산강이면, 장성호 안은 황룡강이야말로 암수가 궁합 맞는 진짜 수물이다. 

몸을 채 풀기도 전에 쌍봉교에서 좌로 1km를 돌아가면 ‘장성호문화예술공원’이다. 거대한 호수의 탄생에는 수몰의 아픔이 으레 가라앉아 있기 마련이다. 용궁이 된 장성 북상면은 지도상에 사라졌다. 북일(北一)도, 북이(北二)도, 북하(北下)도 다 살아 있는데 북상(北上)만 가고 없다. 수몰의 흔적 언저리에 문장의 고을답게 101개의 명문장과 선각의 얼을 바위에 되새겨 놓았다. 천년 금석문으로 글을 남겨 ‘문불여우천년장성(文不如又千年長城)’하려는 듯이.  “우리 청년시대에는 그 어떤 사랑보다도 더 강한 사랑이 있다. 바로 나라와 겨레에 바치는 뜨거운 사랑이다” 윤봉길 의사의 한 마디다. 손을 가지런히 모으고 천천히 글을 음미하다보면 반나절이 훌쩍 가도 모자란다.

입암산성 아래 습지를 지나온 물은 남창계곡 깊은 곳에서 벽계수가 된다(장성 북하)
황룡강 물을 담은 장성호는 멀리 광산·나주·함평까지 물길을 나눠준다(장성읍)

 

한국영화의 거인 임권택, 다시 만나다
‘임권택시네마테크’가 공원 안에 함께 있다. 장성군과 부산동서대 ‘임권택영화연구소’가 손잡고 만든 공간이다. ‘임권택’이란 이름만으로도 한국 사람은 설렌다. 한국영화사에서 그의 자리 때문이다. 그 얼굴을 한참이나 들여다본다.
임권택은 1934년 장성군 남면에서 태어났다. 그의 가난과 생존의 명제는 그 시대 사람들의 공통분모였다. 어눌해서 더 가슴에 와 닿는 그의 인생 속으로 걸어 들어간다. 열여덟 청년이 먹고 살기위해 고향을 떠난 시간이 6·25 전쟁이고, 도착한 공간이 피난지 부산이다. 너나없이 막노동을 하던 때, 군화장사를 하던 임권택은 “허드레 일을 좀 거들어 달라”기에 영화판에 발을 디딘다. 


“무지하게 열심히 일했어요. 쓸모없는 사람이라는 소리 듣지 않기 위해서, 그날그날 살아남기 위해서 일했지요.” 이보다 더 곡진하게 그의 삶을 설명할 수 있을까. “영화 일은 너무 재미있었지요. 조감독 5년 만에 감독 제의를 받았어요.” 그 후 10년 동안 50여 작품을 그의 말대로 ‘남작(濫作)’했다. 그 세월을 밑천으로 할리우드를 흉내 낼 수 없다는 현실에 아파한 저 편에 ‘한국적인 것’이 있었다.

<족보>(1978), <만다라>(1981)의 탄탄한 걸음에 이어 <서편제>는 단성사 한곳만으로 100만 관객을 돌파한다. 오늘날로 말하면 1000만 명을 훨씬 넘는 블록버스터였다. 칸 영화제에서 감독상을 수상한 <취화선>(2002)으로 정점을 찍었다. 불운한 조선의 천재 화가 장승업과 닮았다는 그, 영화 말고는 할 줄 아는 게 없어 평생 영화감독으로 살았다는 그, 숱한 유혹에도 ‘겁쟁이’라 이탈하지 않았다는 솔직함이 가슴에 파고든다. ‘전통·사랑·역사·길’이라는 4개의 테마로 걸어온 임권택의 자전적 다큐멘터리 영화가 관객이 없어도 어둠속에서 돌아간다. 가을볕 속으로 걸어 나오니 잔상이 가슴에 남아 뿌듯하다.

임권택 감독의 얼굴 앞에서 본 그의 영화인생 속 4대 테마 ‘전통·사랑·역사·길’은 참으로 무거운 시대의 짐이었다(장성 북하)
<태백산맥><내 마음의 풍금>을 찍은 영화마을, 이제 그런 정취는 복원불가다(장성 북일)

 

영산강 마른 물길, 장성호가 적신다
장성호조정경기훈련장을 지나 수성리서 부터 산허리로 임도가 잘 나있다. 호숫가로 따라가는 수변길은 물에 가까운 오솔길과 데크로 만들어져 한 여름에도 햇볕을 피할 수 있다. 2018년 6월, 물길 따라 깊숙이 돌아가야 하는 중간에 출렁다리가 놓여졌다. ‘옐로우 출렁다리’다. 두 마리의 황룡을 형상화한 154m의 보도현수형으로 유행하는 다리다.
트레킹코스는 걷는 이들의 몫으로 남겨두고 고도를 높인다. 가을을 재촉하는 비가 기어이 참지 못하고 비구름까지 함께 몰고 따라 온다. 4km 남짓한 임도가 주는 적막을 맘껏 즐길 수 있는 길이지만 나도 모르게 비에 쫓기는 발길이다. 


장성은 온통 노란색으로 칠했다. ‘옐로우 장성’이다. 황룡강에서 따온 이미지를 장성의 대표 색으로 정했다. 크레파스 속 ‘옐로우’와 ‘황색’은 상당한 거리가 있다. 옐로우는 노란색 개나리에 가깝지 전설 속 황룡의 빛나는 비늘, 그 번쩍거림과는 다른 색상이다. 차라리 황룡은 골든 드래건(Golden Dragon)으로 표현될 때 훨씬 더 싱싱하게 와 닿는다. 전설속의 동물인 용은 풍운의 조화를 마음대로 하고, 부귀영화를 가져다 줄 수 있는 영험한 매개다. 징그러운 뱀이 드디어 발이 달리고 하늘로 치솟아 오르는 그 기운을 통해 또 다른 세상을 꿈꾸게 한다. ‘개천에서 용 나왔다’는 간절한 꿈이 내 꿈이고 집안의 꿈이기에 긴 세월 이 땅의 마을이름에도 사내아이의 이름에도 그토록 많은 ‘용(龍)’자가 새겨졌다.

색깔을 전하는 우리말의 모호한 혼용은 삼색 신호등에서도 오래도록 이어졌다. 어릴 적 우리는 파란불일 때 횡단보도를 건너가라고 배웠다. 녹색신호등도 파란등 이었다. ‘푸른 초원’과 ‘푸른 하늘’은 색깔에 관한한 한 개의 형용사 속에서 각자 알아서 느껴야 하는 다른 단어다. 새로 다리를 만드는 김에 ‘옐로우 출렁다리’라 하지 않고 ‘황룡강 출렁다리’라고 표현했더라면 주탑의 색깔 이미지와 일치하는 명물이 되지 않을까 싶다.

남창계곡은 내장산국립공원의 남쪽으로 난 창이다(장성 북하)
가을을 불러들이는 비는 길에도 군데군데 ‘거울’을 만들어 놓았다(장성 북하)
가을빛이 선연할 때 이 길을 다시 오면 내장산 사촌쯤 되는 홍조가 반길 것이다. 모기, 날파리, 진드기 퇴치용 살포기를 설치해 놓은 관청의 배려 또한 고맙다(장성읍)
갑자기 몰아닥친 비바람, 황룡은 몰라도 이무기쯤은 나올 듯 음산해졌다(장성읍)
장성호반에 깊이 숨어 있는 수성마을에서 임도로 이어지는 산길이 시작된다(장성읍)

 

문불여장성, 자존심 강한 선비 고을
장성역 앞에 들어서면 도로 한가운데 한자로 ‘문불여장성(文不如長城)’이라 새긴 꽤 큰 자연석을 만난다. 장성 사람들의 오래된 자존심을 볼 수 있는 문구다. 원래 고종의 아버지 흥선대원군 이하응이 장성을 일러 안동과 함께 문장과 예의 고장이라고 칭송하고, 호남8불여(湖南八不如)를 말하는 가운데 ‘학문으로 말하자면 장성에 견줄 곳이 없다’고 한 말이다. 

역사적으로는 호남거유 기대승의 후손인 애꾸눈 기정진의 성리학이 높아서 ‘장안(서울)사람 눈 만개가 장성사람 눈 하나만도 못하다(長安萬目不如長城一目)’는 말이 있을 정도로 학문을 높이 샀다. 게다가 문묘배향 18위 가운데 유일하게 호남사람인 하서 김인후(1510~1560)의 위패가 모셔져 있는 필암서원은 대원군 서원철폐령 속에서도 드물게 남았다. 게다가 고산서원, 봉안서원까지 있었으니 지방교육기관으로서 문을 숭상하는 기풍은 다른 고을과 달랐다.

계속되는 일화는 다른 고장에서는 찾기 힘든 이야기 거리다. 오래 전, 어느 국회의원이 향리에 돌아와 지방어른들에게 술잔을 받으면서 예를 차린다고 공손히 받아 몸을 뒤로 돌려 마셨더니 어른들이 미간을 찌푸렸다는 것이다. ‘술은 두 손으로 공손히 받되 꼿꼿이 앉아 마시는 것’이 선비의 예라는 것이었다. ‘비굴한 겸손은 용납하지 않는다’는 깊은 뜻이다.

전라도 유림(儒林)을 말할 때, ‘광장나창(光長羅昌)’이란 말이 전해 내려온다. 광주·장성·나주·창평의 유림이 세다는 뜻이다. “삼성삼평(三城三平 : 장성·보성·곡성·함평·남평·창평) 사람 앉은 자리에는 풀도 안 난다.” “장성 사람은 고춧가루 서 말 먹고도 재채기 한번 안한다.”는 독한 말도 실은 꼿꼿한 선비정신과 타협할 줄 모르는 기상을 높이 산 말이다.

송산유원지를 바라보면서 제법 강다운 몸피를 자랑하는 황룡강(광주 광산)

 

코미디언 김병조, 그냥 웃기기만 한 게 아니다
장성을 지나면서 배추머리 김병조를 빼놓을 수 없다. 김병조는 몸으로 하는 코미디의 쇠퇴와 입으로 하는 개그 전성시대의 가교역할을 한 희극인이다. 그가 장성사람이다. 그의 코미디 상당 부분은 한자를 풀어쓰거나 고사성어를 희극적으로 해석하면서도 교훈을 주는 데 할애했다. 그야말로 속이 꽉 찬 코미디였다. ‘문불여장성’의 선비정신이 녹아 있어 남달랐다.

그의 낙향은 그냥 은퇴가 아니었다. 고희를 앞둔 그는 지금도 조선대 평생교육원 특임교수로 후학들을 가르친다. ‘김병조의 마음공부’라는 과목이다. 그가 중앙대 연극영화학과에서 갈고 닦은 기본기에다 타고난 끼가 어디 가랴만 촌철살인의 해학과 풍자는 인생의 지침서로서 <명심보감>을 새롭게 해석한다. 반백이 된 머리, 한쪽 눈이 실명된 아픔 속에서도 그는 마라톤으로 체중을 감량하면서 “배추가 시래기가 되었다.”는 유머를 잃지 않는다. 

7대 종손인 그는 어려서부터 신동으로 소문났다. 서당 훈장이던 아버지의 가르침이 그의 평생 밑천이 되었다. 웃기는 무대에서 번쩍이는 재치는 장안을 사로잡던 입담이었다. 인기도 영화도 물거품이라는 사실 앞에 명심보감의 속뜻을 구절구절 되뇌었을 것이다.

“세상살이는 행복과 불행의 반복이다.” “마음이 편해지려면 아래를 봐라.” “행세하던 동네 앙숙이 23마지기 논을 가지고 뻐기길래 나는 24마지기 논을 샀다.” 그러면서 분수로 푸는 인생론은 여전히 이어진다. “5/4란 가분수는 4를 가지고 5로 발전하려고 노력하라. 3/4이란 진분수는 4를 가지면 3을 써라.”는 교훈을 뽑아내 설파한다. 닮고 싶은 인생 2모작의 희극인 김병조, 그는 그냥 웃기기만 한 게 아님이 틀림없다.


광주 송정, 다시 영산강을 만나다
장성읍내서 점심을 먹고 나오니 세차던 비가 더 남쪽으로 떠났다. 비 개인 늦여름, 뭉게구름을 따라가는 강둑길은 드문 길손을 반긴다. 이따금 지나간 사람들이 무심하던 시간 속에서 풀은 혼자 자랐다. 칡넝쿨은 조심성 따윈 애당초 없다. 자기의 영토 안으로 들어와 똬리를 틀고 있는 자전거길을 올라타고 왕성한 생장을 과시한다. 

송산유원지를 지나면서 광주의 서쪽 광산구의 아파트 군락이 하얀빛으로 먼 시선의 끝을 채색하고 있다. 아주 짧은 몇 구간의 단절로 황룡강은 영산강으로 이어지는 국가하천의 훌륭한 연결을 끝맺음하지 못했다. 정치의 단절이 행정의 외면으로 드러난 길을 자동차의 위협 속에 그냥 달릴 뿐이다. 거기에 무슨 여유나 낭만은 사치다.    

날렵한 두 바퀴들이 스쳐 지나가며 고갤 까닥여 인사하는 우리만의 해방구, 자전거 전용로로 서둘러 들어선다. 어등산 자락에 자리 잡은 호남대 광산캠퍼스 앞을 지나간다. 참으로 존경했던 상사, 부족한 나를 더 없이 아껴주었던 웃어른, 경찰을 떠나 DJ정부 시절 국정원2차장을 잠시하며 발을 걸친 ‘도청사건’의 책임을 끝내 남에게 미루지 못한 그의 ‘양심’이 떠오른다. 어쩌면 그의 마지막 자리가 호남대 총장만 아니었더라면, 후학을 가르치는 자리에만 있지 않았더라도 스스로 생을 마감하는 극단을 선택하지 않았을 런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우울해 진다. 

다시 먹구름이 밀려온다. 강 건너 ‘평동산단’과 ‘광주송정역’으로 가는 기차를 볼 사이도 없이 광주공항 활주로 끝을 지난다. 비가 난폭하다. 피할 데 없는 강변을 힘껏 달린다. 한 줄기 비도 못견뎌하는 게 사람인가. 믿을 데라곤 다리 밑인데 아직도 멀다. 이미 영산강을 만나고도 재회 인사조차 못하고 한참을 달려왔다. 빛고을의 환영사인가, 무지개가 떴다.

 

홍길동, 그는 소설 밖에 살아있다
다음날, 상경하는 길에 황룡강 지류인 통안천을 따라 ‘홍길동테마파크’에 들른다. 장성의 큰 자랑거리가 홍길동이다. 홍길동이란 이름 석 자는 익명 또는 견본 이름 자리에 두루 쓰인다. 나이트클럽 웨이터의 뻔한 가명에도 ‘홍길동’은 차출된다. 소설과 만화영화 속 이미지가 너무나 강력해서 우리는 홍길동을 ‘정의의 사도’로 여긴다.

그런 홍길동이 역사의 실존인물로 장성에서 발굴되었다. 남양홍씨 가문의 아들이나 족보에 ‘일동’과 ‘귀동’만 있을 뿐 그는 ‘아비를 아비라 부르지 못하는 신세’라 오르지 못했다고 한다.
연산군일기는 활빈당으로 무장 투쟁하던 홍길동이 ‘관군의 토벌작전으로 생포되어 태형(笞刑)으로 죽었다’고 적고 있다. 문경새재, 홍주(홍성)와 공주까지 무대로 활약해 명종 때 임꺽정, 숙종 때 장길산과 함께 ‘조선조 3대 도적’으로 꼽히는 홍길동이니 조정마저 골치 아파하는 만만치 않은 역도(逆徒)였음에 틀림없다. 그러나 허균의 소설에서 실제인물보다 더 의적(義賊)으로 그려진 것은 홍길동이 하급관리들의 묵인 아래 활약한 무용담에 민초의 카타르시스가 광범위하게 퍼져 있었고, 신출귀몰하는 초인적인 분신술, 바람술법과 퇴마술을 가진 구원의 손길을 갈급해하는 허기진 백성이 있었기 때문이다. 


테마파크 안에는 구전되어 오던 홍길동의 생가터에 우물까지 복원되어 있다. 1440년생(세종22년) 홍길동은 오늘날 장성군 황룡면 아치실 마을 태생이다. 급기야 소설 속 율도국을 찾아 떠난 홍길동이 정착한 곳이 오키나와이고 그 땅의 민중영웅 ’홍가와라‘가 바로 홍길동이라는 주장까지 나왔다. 어디까지가 진실인지 여부는 내겐 중요하지 않다. 들인 돈 만큼 재미를 보지 못한다는 비판에도 불구하고 ‘홍길동축제’는 장성 제1의 축제이고, 홍길동을 허구의 세계에서 끄집어낸 공로는 장성사람들 몫이다.

폐교된 옛 황룡초등학교 자리에 들어선 홍길동테마공원은 한옥스테이와 야영장까지 운영하며 관광객을 끌어 모으려고 애쓰지만 어쩐지 허술한 구석이 엿보인다. 신동우 화백의 ‘풍운아 홍길동’이든 3D 애니메이션 속 홍길동의 초롱한 눈망울이든 이 땅을 위해 더 빛나야 한다. 다만 홍길동이 정의로운 활빈당일지라도 ‘편가르기’로 선동하는 의적의 외길을 가지는 말아야 한다.

‘홍길동테마공원’은 홍길동을 소설 속 허구의 주인공이 아니라 실존인물로 부활시켰다(장성 황룡)
나비로 만든 의자, 잠시 휴식에도 예술적 감각이 고려되어 있다(광주 광산)


축령산 편백림과 ‘내 마음의 풍금’
다시 서북쪽으로 시오리를 올라가면 전국최대의 조림성공지로 부각된 ‘축령산편백숲’이다. 장성군 서삼면 모암리 산에 면적이 325만5235㎡(약 97만평)이니 여의도보다 좀 더 크다. 국유림과 사유림을 합치면 779헥타르( 약 235만평)를 조림했다. 이는 순전히 1987년 고인이 된 춘원 임종국 선생이 고창과 경계를 이루는 축령산 자락에 1956년부터 21년간 조림해온 열정과 선견지명 덕분이다. 

6 · 25전쟁 직후, 입에 풀칠하기도 허덕거리던 시절에 빚까지 내어서 국유지 헐벗은 땅에 편백을 심기 시작한 그를 다들 미쳤다고 했다. ‘푸른 숲은 후손에 물려줄 소중한 유산’이라는 신념으로 버틴 세월이었다. 다행히 2002년에는 산림청이 남의 손에 넘어간 숲을 사들여 ‘임종국조림지’로 이름 짓고, 이 보배는 <숲의 명예전당>에 헌정되었다. 2005년에야 고인은 그가 심은 편백숲 속에 이장되어 영원히 잠들어 있다. 

장성의 또 다른 아이콘이 된 이 숲은 2016년 ‘장성편백힐링특구’로 지정되었다. 편백숲 서북쪽 끝자락 북일면 문암리 금곡마을에 영화 <내 마음의 풍금> 촬영지로 유명한 ‘영화마을’이 있다. 원래 임권택 감독이 <태백산맥>의 촬영지로 발굴한 장소였다. 이후 김수용 감독의 <침향>, MBC 드라마 <왕초> 등이 촬영되었으나 더는 전도연이 동생을 포대기로 엎고 학교를 가려고 뛰어내려오던 언덕길의 풍정은 찾을 길이 없다. 촬영 현장마다 초가지붕을 재현해 놓았으나 생뚱맞고 국적불명의 개량기와가 마을 전체를 뒤덮고 있어 을씨년스럽기 짝이 없다. 이 또한 이 시대의 산골 풍경이라면 어쩔 수 없는 시공(時空) 속의 한 장면이 될 수밖에 달리 무슨 수가 있겠는가. 

송산교를 지나면 멀리 빛고을 광주의 서부 광산이 보인다(광주 광산)
축령산편백림, 자전거를 두고 걸어도 좋은 길. 비안개는 몽환의 보조 장치다(장성 북일)

 

 

 

 

조용연 편집위원  choyy@nate.com

<저작권자 © 자전거생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조용연 편집위원의 다른기사 보기
icon인기기사
기사 댓글 0
전체보기
첫번째 댓글을 남겨주세요.
Back to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