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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대양을 주름잡던 작은 거인-포르투갈 공화국 제1편5대양을 주름잡던 작은 거인, 낭만의 항구에서 되살아나다

포르투갈 공화국(Republica Portuguesa) 제1편 
5대양을 주름잡던 작은 거인, 낭만의 항구에서 되살아나다


인구 1000만의 작은 나라지만 아직도 전 세계 3억명이 같은 말을 사용하는 나라, 포르투갈은 진정 작은 거인이었다. 최초로 대항해시대를 열어 세계의 바다를 주름잡았고 거대한 식민지를 개척했다. 이후 스페인과 영국, 프랑스 등에 식민지경쟁에서 밀려났고, 근자에는 지도자를 잘못 만나 서유럽 최빈국 신세를 면치 못하고 있다. 하지만 해변에는 눈부시게 아름다운 항구가 있고 거리에는 예술과 서정의 향기가 넘쳐난다

 

포르투 도루 강변에 줄지어 정박한 외인운반선 하벨루스 뒤로 포르투의 랜드마크 동 루이스 1세 다리가 웅장하다

 

국가 개요

수도 : 리스본(Lisbon, Lisboa) 

면   적 : 9만2000㎢
인구 : 약 1030만 명

1인당 GDP : USD 19,850 (한국 27,600 스페인 27,520)
종교 : 로만가톨릭99% 공용어 : 포르투갈어
통화 : 유로

 

도루 강변

 

포르투갈은 유럽 최서단(最西端)에 위치한 작은 나라다. 작은 대륙이라 불리는 이베리아 반도에 딱 두 나라만 ‘사이좋게’ 존재한다. 동쪽과 북쪽으로는 스페인과 국경을 마주하고 서쪽과 남쪽으로는 대서양에 면해있다. 지브롤터 해협을 사이에 두고 아프리카 대륙과도 마주보고 있다.
영토는 스페인의 1/5 정도이고, 인구 역시 1/5에 불과하다. 그렇다고 스페인의 변방쯤으로 생각한다면 오산이다. 일찍이 해양강국으로 스페인과 어깨를 겨루며 세계 최대의 식민영토를 호령하는 번영을 누렸다. ‘작은 거인’이란 표현이 딱 들어맞는 경우다. 포르투갈이 유독 유럽 밖의 대서양으로 일찌감치 눈을 돌린 것은 스페인(당시는 카스티야 왕국)이라는 높은 벽에 막혀있었기 때문이다.



숙명의 라이벌 
‘이웃한 나라끼리는 서로 사이가 좋을 수 없다’는 철칙이다. 이 두 나라도 예외는 아니었다. 바다를 두고 사사건건 충돌했다. 미지의 바다를 개척해 식민지를 더 많이 차지하기 위해 두 나라는 사활을 걸었다. 급기야 1494년 교황 알렉산더 6세가 중재에 나서, 스페인의 작은 도시 토르테시야스(Tordesillas)에서 ‘평화협정’을 체결했다. 역사에서는 이를 토르테시야스 조약이라 부른다. 골자는 아프리카 서쪽 카보베테르 섬으로부터 약 1500km 떨어진 지점에 일직선을 긋고 그 기준선 서쪽은 스페인이 차지하고, 동쪽은 포르투갈이 차지하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한 세기도 지나기 전에 포르투갈은 스페인의 치하로 들어가고 만다. 60년 후 독립은 하지만 프랑스의 침공 등 국내외 정치가 불안했다. 그 와중인 18세기 중반, 대지진의 재앙까지 덮쳐 수도 리스본의 2/3가 파괴되는 불운을 맞았다. 


지도자 운(運)이 없는 나라
독재자 살라자르(Oliveira Salazar)가 정권을 잡아 1932년부터 철권통치를 시작했다. 긴 세월 염증을 느낀 군부는 1974년 ‘카네이션 혁명’을 일으켜 살라자르의 후계자를 축출시켰다. 그간 아프리카의 앙골라, 모잠비크 등지에서 시대착오적인 식민지 전쟁으로 민초의 삶은 피폐해질 대로 피폐해져 있었다. ‘식민지보다 우리 생활이 더 어렵다’는 국민적 불만이 팽배해 있었다.
독재 잔재를 청산해 국민들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았지만 좌파정부는 다시 한 번 시대에 뒤떨어진 잘못된 선택을 하게 된다. 가난한 서민을 위해 부를 나눈다는 그럴듯한 명분으로 주요 산업시설과 대기업을 국유화하는 사회주의체제로 전환했지만, 그것은 돌이킬 수 없는 과오였다. 뒤늦은 1989년, 헌법을 개정하여 자유민주주의 ‘시장경제’ 체제로 선회하고는 경제발전에 안간힘을 쓰고 있다. 1998년 유로화를 도입하며 EU 회원국이 되어 오늘에 이르렀다.
빛나는 역사와 훌륭한 민족이 지도자 잘못 만나 ‘후진기어’를 넣음으로써 변방국가로 전락, 생활수준은 현재 서방유럽국가 중 최하위 수준에 머무르고 있다. 



나는 ‘현장주의 자’
젊음도 회사일도 제2의 인생도 다 ‘현장’에 답이 있다. 지금까지 살아온 내 삶의 지론(至論)이다. 이번 스페인, 포르투갈 여행은 한때의 영화를 뒤로하고 변방국가(유럽에서)로 밀려난 현장을 몸소 보고 느끼기 위해서였다. 
내가 초등학생일 때만 해도 춘궁기 혹은 보릿고개란 말을 귀가 따갑도록 들었다.
그 무렵 어느 초봄, 나는 선생님에게 “가난한데 왜 X구멍이 찢어집니까?”라는 ‘당돌한 질문’을 한 적이 있었다. 평정심을 잃지 않고 담담하게 설명해주던 선생님의 비감어린 표정을 나는 아직도 기억한다. ‘초근목피’란 내가 최초로 듣고 이해한 사자성어였다.
그때 함포고복하던 미얀마(버마), 필리핀, 태국, 심지어 북한까지… 지금 다 어디에 있나. 국가 지도자란 무엇이고 리더십이란 무엇인가. 그리고 대중은 무엇이며 대중은 우매하기만 한 것인가.
산티아고에서 N13 도로를 타고 포르투(Porto)로 내려오는 안장 위에서 나는 스스로 던진 질문에 빠져들고 있었다.
집중력이 흐트러져 차선으로 들어가 위험한 순간이 몇 번이나 있었다. 나의 잘못이었지만 포르투갈에서는 자전거 전용도로를 찾아보기 어려웠다. 대형트럭들은 ‘자전거쯤이야’ 하는 듯 사정없이 길옆으로 몰아붙였다. 지나온 스페인보다 자전거문화가 한수 아래임을 아는데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러나 어쩌랴, 이것도 여행의 일부인 것을….



아, 옛날이여
포르투갈의 역사는 BC 750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겔트 족이 이베리아반도에 정착하면서부터다. 이후 그리스, 페니키아, 카르타고 인들의 침략에 시달렸다. 기원전 2세기경에는 강대했던 로마제국의 식민지 즉, 속주(屬州, 프로빈키아)로 편입되었다.
이때 로마인들은 도로, 수도교 등 사회 기반시설을 건설했을 뿐 아니라 포도를 재배해 와인 만드는 법도 전파했다. 8세기 경 북아프리카의 이슬람 우마이야 왕조(Umayyad Dynasty)가 통치를 시작했으나 기독교와 유대교 등 타종교를 포용했기 때문에 큰 갈등 없이 상호 공존하며 번영했다.
12세기 들어 포르투갈 인들은 강력한 레콘키스타(Reconquista, 국토회복운동)로 이슬람 세력을 몰아내는데 성공했다. 옆 나라 스페인은 1492년에야 나스리 왕조(Nasrids Dynasty)의 마지막 술탄 보압딜(Boabdil)의 항복을 받고 그라나다의 알람브라 궁전을 접수한 것에 비하면 훨씬 앞섰다.
15세기 들어 훌륭한 지도자 주앙 1세가 등장했다. 북아프리카 마리니드 왕조(Marinids Dynasty)의 거점도시 세우타(Ceuta) 정복을 기점으로 대항해 시대를 열어 영토(식민지)를 늘리고 해상무역을 통해 부를 축척했다. 주앙 1세의 뒤를 이어 엔히크 왕이 대항해시대를 꽃피우며 해양국가 포르투갈의 명성을 반석위에 올려놓았다.



아직도 3억 명이나 쓰는 언어 
긴 역사의 흐름에 비추어 이런 호시절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1580년 스페인의 알바 공작이 이끄는 펠리페 2세의 군대가 쳐들어와 국권을 빼앗고 스페인에 복속되고 만다. 그러나 이 두 국가의 합병은 일본이 조선을 병탄한 것과는 비교할 수 없다. 유럽의 여러 왕가 중 한 개의 왕통(王統) 만 바뀌었을 뿐 국가의 형태나 국민들의 생활은 크게 달라지지 않는 것이 유럽의 역사다.
대항해시대 바다를 주름잡던 제해권을 네덜란드를 비롯 서유럽에 넘겨주니 포르투갈의 국운은 석양에 물들기 시작했다. 이무렵 스페인도 ‘무적함대’라 큰소리쳤지만 영국의 해적 드레이크(Frances Drake)에 패하면서 같은 길을 걷게 된다.
포르투갈은 자국의 100배가 넘는 식민영토가 있었다. 1822년 브라질 독립을 필두로 식민제국은 붕괴의 길을 걷는다. 1961년에는 ‘인도 속의 포르투갈‘이라 불리던 고아(Goa)가 인도에 귀속되고, 1975년에는 동티모르가 독립한다. 그외 아프리카 식민지들도 1970년대에 모두 독립했다.
1999년, 마지막으로 마카오가 중국으로 귀속되면서 1415년 북아프리카 세우타(현재는 스페인 령) 점령으로 시작된 포르투갈의 식민 역사는 막을 내렸다. 근 600년 동안의 식민 후유증은 메아리로 남았다. 포르투갈어를 아직도 공용어로 사용하는 사람들은 전 세계에 3억 명에 이른다. 나라 수는 9개국. 포르투갈을 비롯해 브라질, 앙골라, 동티모르, 모잠비크, 기니, 기니비사우, 산토 에프린시페, 카보베르데 등이다.

 

포르투 번화가 산타 카트리나에서 만난 중국여행객들
포르투에서 만난 포르투갈 여인. 대체로 친절하고 동양인에 호의적이었다. 서로 주소를 교환했다

 

과거의 도시, 포르투(Porto)
포르투갈 여행은 이 나라 제2의 도시 포르투에서 시작했다. 스페인 여행의 대미를 장식했던, 산티아고 순례길의 종점인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에서 멀지 않은 곳이다. 그러니까 북에서 수도 리스보아(리스본)를 향해 남진(南進)을 원칙으로 하며 파티마(Fatima, 성모 발현지) 등 가볼만한 곳은 잠깐 ‘이탈’을 하기로 여정을 정했다.
포르투는 항구를 뜻하는 포트(Port)에서 유래된 지명이다. 나라이름인 포르투갈을 줄인 말이 아니다. ‘포르투갈’은 오래전 로마시대부터 라틴어 ‘포르투스 칼레’에서 연유된 것이다.
도루 강(Rio Douro) 하구이자 대서양이 시작되는 곳에 위치한 포르투는 무역을 통해 일찍이 번성했다. 그후 이슬람 세력의 지배를 받다가 ‘국토회복’ 후 기독교가 번성하며 바다를 향한 지도자들이 나왔다. 그러나 대항해 시대가 저물며 포르투의 발전도 멈추었다. 덕분에(?) 고색창연한 건물과 성당이 많이 남아 있어 옛 시절을 회고하고 있다. 무엇보다 항구도시에 걸맞게 ‘항해왕자’라 불리는 엔히크의 출생지이다.
‘부자는 망해도 삼대는 간다’는 말처럼 포르투는 볼거리가 많아 여행의 흥미는 쏠쏠했다. 요즈음 스페인은 산티아고 순례자를 비롯 관광객이 폭발적으로 늘고 있다. 그 ‘낙수효과’가 작은 나라 포르투갈에도 봇물처럼 쏟아지고 있다. 순례길의 종착지에서 이곳이 가까운 것도 큰 요인 중의 하나일 것이다. 요즘 ‘뜨고 있는’ 포르투를 보지 않고서는 포르투갈을 여행했다고 말할 수 없기에….

 

시청사가 있는 리베르다드 광장. 청사가 박믈관 뺨칠 정도로 아름답다

 

술과 그림과, 그리고 석양의 도루 강
포르투는 여행자를 강력하게 유혹하는 두 가지가 있다. 프랑스 와인에 비견되는 독특한 맛의 포르투 와인과 보는 이의 눈길을 사로잡는 아줄레주 화(Azulejo 畵)라 불리는 독특한 타일 예술이 그것이다.
여기에 나는 한 가지 더 추가하고 싶다. 바로 도루강변의 서정적인 풍광이다. 배경은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카이스 다 히베이라(Cais Da Riberia) 지구이다. 파스텔 톤 건물은 석양빛에 빈티지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그러면 줄지어선 노천카페와 해산물 레스토랑이 문을 열며 연인들이 모여든다.
혹자는 이런 말을 했다. “낭만의 도시라면 프랑스에 파리가 있고, 체코는 프라하를 떠올리듯 포르투갈에는 포르투가 있다”라고. 나 역시 지금까지 유럽을 여행하며 ‘강추’ 유럽의 3대 아름다운 소도시로 체코의 체스키 크룸로프(Cesky Krumlov), 벨지움의 브루게(Brugge), 노르웨이의 베르겐(Bergen)을 꼽아왔다. 그러나 여기 와서 마음이 바뀌었다. 이제 3대가 아니라 4대로 포르투를 추가해야만 할 것 같다.



포르투 와인의 역사
도시의 이름만큼이나 같은 이름의 술이 세계적으로 알려졌다. 부드러우면서도 강한 풍미와 달콤함이 특징이다.
도루 강은 스페인에서 발원하여 대서양과 마주한 포루투까지 험준한 협곡을 따라 장장 770km의 유장한 흐름을 이어간다. 빌라 노바 데 가이아(Vila Nova De Gaia)라 불리는 이 일대에 약 100km에 걸쳐 와이너리가 펼쳐져 있다. 원래 이 지역은 인간의 접근을 허락하지 않을 정도의 급경사에다 뜨거운 기후, 석회암반 지대였다. 중국에 기상천외한 계단식 논이 있듯, 여기는 계단식 포도원이 별스럽다. 오늘날 세계적 명성의 와인이 나오기까지는 포르투갈 인들의 땀과 노력이 있었다.
본격적으로 포도를 재배하기 시작한 시기는 12세기로 본다. 프랑스 귀족 출신인 앙리 부르고뉴가 프랑스에서 포도 종자를 처음 들여와 술을 빚었지만, 정작 성가(聲價)를 올리는 데는 영국이 한몫 거들었다. 

 

가이아 지역의 와인 하우스

 

영국인이 사랑하는 셰리주의 유래
와인의 품질을 결정하는 요소는 크게 4가지로 구분한다. 포도 품종, 토양(생산지), 기후(생산연도), 양조기술이 그것이다.  포르투 와인의 제조공법은 특이하고 번거롭다. 와인의 알콜 함량이 6~8%에 이를 때 발효를 중단시키고 브랜디를 섞는다. 이때 비율은 4대1이다. 그런 다음 다시 오크 통 속에 넣어 2차 발효시킨다. 통상 이 과정이 5년 정도 걸린다.
일명 ‘강화 와인’이라 불리는 포르투 와인은 다른 와인보다 도수(20% 내외)가 높을 뿐 아니라 당도도 높다. 그래서 식사 중에 마시지 않고 식전이나 식후 디저트용으로 마시는 것이 보통이다.
스페인 ‘셰리 와인’도 이와 비슷하다. 그 이유는 영국인들의 입맛에 맞추기 위해서였다. 지난달 스페인 남부를 여행할 때다. 지브롤터 해협 인근의 헤레스 데 라 프론테라(Jerez De La Frontera)라는  긴 이름의 도시를 들린 적이 있다. 우리에게는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스페인 와인의 집산지다. 인구 2만 정도의 작은 규모였지만 보데가(Bodega, 산화를 위해 지상에 설치된 와인 저장소)라 불리는 양조장이 30여 곳이나 있었다. 그래서 포르투 와인과 셰리 와인을 일컬어 세계 2대 강화 와인이라 부른다.
한 가지 재미있는 사실은 영국인들이 즐기는 셰리주가 여기서 유래했다는 것이다. 17세기 영국이 프랑스와 전쟁을 할 때, 자국 와인 소비량의 대부분을 이곳에서 나오는 ‘헤레스 와인’에 의존했다. 영국의 수입업자들은 수송도중 변질을 막기 위해 독한 브랜디를 섞었다. 지역 이름인 헤레스(Jerez)를 영국인들이 자기네 식인 셰리(Sherry)로 발음하면서 셰리주가 탄생했다는 것이다. 



세계 최대 코르크 생산국
와인과 코르크는 불가분의 관계이다. 1972년, 대량의 호주산 포도주가 불량 코르크 마개로 인해 변질되어 크게 문제가 된 적이 있었다. 이때 포르투갈의 코르크 제조업자가 의도적으로 저질의 코르크를 호주에 판매했다는 의심을 받았다. 호주측 주장은 와인 경쟁자이자 최대 코르크 수출국인 포르투갈이 호주의 싸구려 포도주의 수출을 억제하기 위해서였다고 볼멘소리를 했다. 이 일화는 와인과 코르크가 떼려야 떨어지지 않는 관계임을 단적으로 말해준다.
포도주를 보관할 때는 코르크 마개가 건조해지지 않게 눕혀두는 것은 상식이다. 코르크도 장기간 두면 건조해진다. 그러면 치밀한 조직이 느슨해져 미량의 공기라도 유입되면 포도주가 산패(酸敗)되어 버린다.
전 세계에서 팔리는 와인은 연간 약 200억 병으로 추산한다. 이중 약 80%는 천연 코르크 마개로 봉한다. 코르크 마개의 원료는 코르크참나무(Quercus Suber)인데 가장 질 좋은 나무는 포르투갈이 원조다. 이베리아 반도의 토양 때문인지 스페인도 코르크참나무를 많이 재배한다. 그래도 포르투갈이 코르크의 최대 산지로 전 세계 생산량의 50% 이상을 차지한다. 당연 포르투갈은 코르크 마개 생산 1위이자 이 나라 주요 수출품중 하나이다. 생산된 코르크의 60%가 와인 병마개로 사용된다.
와인 마개 외에도 코르크의 용도는 다양하다. 가볍고 불에 강하며 치밀한 조직으로 고급주택의 벽이나 바닥, 천장 등의 단열재, 방음재로도 많이 사용된다. 그 외의 용도로는 신발 바닥, 야구공, 크리켓 공, 배드민턴의 셔틀콕, 헬멧, 클러치 등에 유용하게 쓰인다. 



세계적인 미교(美橋) 중의 하나
동 루이스 1세 다리(Ponte Dom Luis1)는 포르투의 ‘랜드마크’이다. 포르투 중심부와 도루 강 건너 와인 촌(村) 가이아를 연결하는 다섯 개의 다리 중 으뜸이다. 복층식 구조로 위는 열차가 다니고 아래는 차도와 인도가 있다. 인도는 자전거 통행이 가능했다.
나는 첫눈에 파리의 에펠탑과 비슷하다고 생각했다. 구조역학적으로 ‘트러스 아치 (truss arch)’구조물이었기 때문이다. ‘철의 마법사’ 에펠이 아니고서는 100여 년 전에 저렇게 철교를 설계할 사람이 없다는 확신이 들었다. 아니나 다를까, 에펠이 설립한 에펠 사(社) 소속의 세리그(Theophlle Seyrig)가 1879년 설계공모에 당선되어 1886년에 완공되었다.
아름답다고 알려진 영국의 타워브리지나 미국의 골든게이트 브리지, 호주의 하버 브리지에 못지않다. 개통 시기로 보아도 가장 오래되었으니 자연스레 항구도시 포르투의 간판 구조물로 자리 잡았다.
어스름 저녁 무렵 다리에 불이 켜지니 강물에 불빛이 일렁인다. 감미로운 와인과 카페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이 여수(旅愁)를 자극한다. 누가 포르투를 유럽에서 가장 아름다운 낭만의 항구도시라 했나….
몇 년 전 여행한 헝가리의 추억을 떠올렸다. 야경으로 유명한 부다페스트(Budapest)에서 석양이 질 때 겔레르트(Gellert) 언덕에 올라 내려다본 다뉴브 강의 정경을 잊을 수 없다.
다뉴브 강으로 갈라진 부다 지역과 페스트 지역을 연결하는 세체니 다리(Szechenyi Bridge),  이곳의 동 루이스 1세 다리와 ‘난형난제’일 것만 같다.

 

어둠이 내리는 동 루이스 1세 다리
부다페스트를 관통하는 다뉴브강. 야경이 유명하다

 

술꾼에게는 포르투 관광 1번지
빌라 노바 데 가이아(Villa Nova Gaia)는 ‘포르투 관광의 1번지’라 불리는 지역이다. 단, 술을 즐기는 사람의 경우에 말이다. 포르투는 도루 강을 가로지르는 동 루이스 1세 다리를 중심으로 양안(兩岸)이 나눠져 있다. 모든 관공서와 유적이 있는 포르투 중심부와 와인 저장고(Wine House), 와인 바가 늘어선 빌라 노바 데 가이아 지역이다. 현지인들은 그냥 기이아라 불렀다. 여기서 나는 지나가는 사람 서너 명에게 이 지역의 매력이 무엇인지 물었다(낯선 도시에 가면 현지인이나 여행자들에게 던지는 나의 상투적인 질문이다).
아니나 다를까, 돌아오는 대답은 대개 “포르투 와인을 맛보기 위해서 왔지요.”였다. 포르투에 사는 사람조차 그런 대답을 했다. 가이아에서 여기저기 기웃거리니 한나절이 훌쩍 가버렸다. 세계적으로 제법 이름 있는 포르투 와인업체들의 총 집합소이기 때문이다. 마음에 드는 샵에 들어가 와인을 한 병 사서 강변 잔디밭에서 마셔도 좋고, 출출하다면 레스토랑에 들어가 음악과 함께 한 끼 해결해도 ‘낭만 만점’이다. 
가이아 지역의 대표적 와인으로는 칼렘(Calem)과 상데망(Sandeman), 테일러스(Tayor's) 등이 있는데 이름에서부터 영국 냄새가 풍긴다.



애주가의 자격
여행지마다 그 나라(지방) 특유의 음식을 맛보듯 술 또한 예외가 아니다. 주로 맥주나 와인은 조금씩 거의 의무적(?)으로 마셔보는데, 술이 음식을 따라간다는 ‘식주궁합설(食酒宮合說)’에 대해 나는 대체로 공감하는 편이다. 이 ‘설’은 내 경험상 만든 조어(造語)이니 사전에는 없는 말이다.
나는 체질적으로 술을 많이 마시지는 못한다. 하지만 여행 중에는 조금씩이나마 자주 마시기 때문에 ‘여행 중 애주가’로 자처한다. 왜냐하면 힙 플라스크(hip flask, 휴대용 작은 술통)는 여행 짐을 꾸릴 때 빠지는 법이 없기 때문이다. 텐트 속, 홀로 잠 못 이루는 밤엔 코냑(좀 비싸더라도 헤네시 코냑)을 나이트 캡 정도의 소량으로 마시면 숙면에 도움이 되곤 했다.
어떤 이는 나에게 이렇게 물었다. “무거운 짐 가방을 달고 하루 종일 자전거를 타는데 밤에 잠이 잘 안 온다니요?” 이것은 ‘모르시는 말씀’이다. 홀로 여행은 외로움과 두려움의 연속이다. 특히 밤에는.
공식 캠핑장이 아닌, 폐가 근처나 다리 밑에서 야영을 할 때가 있다. 야생동물이 수시로 텐트주위를 맴돌기도 했다. 한번은 들쥐가 텐트 밑으로 파고든 적도 있었다(그 녀석도 외로웠나). 이럴 땐 오만 잡생각이 떠올라 불면의 긴긴밤을 보내곤 했다. 이런 경우를 대비해 수면유도제 몇 알은 상비약 주머니에 넣어 다닌다.



일대가 다 ‘세계문화유산’
나는 포르투 와인의 품질을 평가할 정도는 못되지만, 여운이 남는 것이 있었다. 과일 향 풍기는 감미로운 핑크빛 와인인 루비(Ruby)가 바로 그것이다. 달콤한 유혹에 빠져 홀짝홀짝 마시다간 대취할 공산이 큰 와인이었다. 술맛도 좋지만, 무엇보다 가이아 지구에서 도루 강 건너 보이는 히베이라 지구의 경관을 잊을 수 없다.
14세기부터 생기기 시작했다니 포르투에서는 가장 오래된 지역이다. 좁은 골목 사이사이로 어깨를 맞대고 서있는 형형색색의 파스텔 톤, 창(窓) 많은 건물들이 마치 레고 블럭을 쌓아 만든 것 같은 주택들이다. 독특한 외관으로 인해 마을 전체가 다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강변에는 하벨루스(rabelos)라 불리는 포르투 와인을 실어 나르는 작은 배가 도루 강에 한가로이 떠있다. 포르투 크루즈(Porto Cruz)라 쓰인 배위에는 오크통이 실려 있고 검은 망토를 뒤집어쓰고 와인 잔을 들고 있는 ‘상데망 신사’ 모습도 보인다.
‘달 밝은 밤에 이태백이 저 배에 올라탄다면…’ 이런 엉뚱한 생각도 해보았다. 이 멋진 광경을 내 둔필(鈍筆)로는 형용할 수 없어 답답할 따름이다. 



수채화로 다시 살아난 히베이라(Ribeira) 풍광 
나는 그림을 그리는 친구가 한 명 있다. 그는 최기화 화백(畵伯)이다. 40년 지기(知己)이기도 한 그는 대우 무역부문의 사장까지 지내고 은퇴했다. 말하자면 전 직장의 오랜 동료이다. 넉넉한 품성과 유머 감각, 남을 배려하는 마음, 그리고 술을 즐기는 호방한 성격의 소유자이기도 하다. 그런 그가 요즘은 그림 그리기에 많은 시간을 할애한다며, 어느 잡지에 실린 작품을 보여주었다. 상당 수준에 올랐음을 알 수 있었다.
의외였다. 그에게 이런 섬세한 면이 있는 것을 평소 전혀 알지 못했다. 인생 후반전에 들어선 동료 중에 의외의 면에서 두각을 나타내는 경우가 종종 있다. 그간 생존을 위한 삶에 압도되어 침잠되었던 ‘꿈’이 서서히 기지개를 펴기 때문이다.
어느 날, 그에게서 전화가 왔다.
“풍경화를 그리려는데 멋진 이국적인 도심이나 풍광 사진 없습니까?”
“최 화백이야말로 역마살이 나 못지않을 텐데….”
“나는 비즈니스로는 많이 다녔으나 정작 제대로 된 사진은 없어요.”
나는 주저 없이 도루 강변에서 찍은 사진을 보냈다. 그리고 몇 달이라는 시간이 흐른 지난여름, 그에게서 초청장이 날아들었다. 성북동 모 화랑에서 전시회를 연다는 것이었다. 날짜에 맞춰 화랑에 들어서니 그의 수작(秀作)들 중에 익숙한 작품 <포르투 항구, water color on canvas, 57×39cm, 2018>이 눈에 확 들어왔다. 다름 아닌 내가 보낸 사진 속 풍광이었다.
나는 미소 지으며 “술을 즐기는 최 화백이 와인 오크통이 실린 하벨루스 사진을 골랐네요” 하고는 서로 파안대소했다.

 

포르투 와인을 실은 배와 강건너 보이는 히베이라 지구는 대표적 경관이다
벼룩시장에 나온 아줄레주
델프트 도기(벼룩시장)
렐루서점 내부계단
전시회장에서 최기화 화백과 함께. 5번 사진이 그림의 배경이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서점’
포르투에서 대표적 서점인 렐루 서점(Livraria Lello)의 별칭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서점’이다. 미(美)에 순위를 정하는 것은 어폐가 있을 수 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공감한다면 그렇게 굳어지는 것이 상례이기도 하다. 영국의 <가디언> 지가 선정한 ‘세계 10대 서점’에 뽑혔다. 건물은 20세기 초에 유행한 아르누보(Are Nouveau, ‘새로운 예술’이란 뜻) 양식이다.
내부는 화려한 장식이 눈길을 끈다. 고급스러운 목재의 질감을 나타내는데 실은 콘크리트에 나무 색을 입힌 것이다. 당시 포르투갈 경제 사정으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고 한다.
천장 스테인드글라스를 통해 들어오는 자연 채광 기법이 고풍스러우면서도 우아하다. 2층으로 올라가는 붉은색 계단은 육체파 여배우의 S라인 같은 곡선미가 돋보인다. 붉은 색은 영화제에서 보는 ‘레드 카펫’을 연상시켜 화려하다. 실제로 이 건물은 완성 초기 포르투갈 귀족들의 연회 장소였다.
1906년 렐루 가(家)에서 서점으로 오픈하여 지금까지 운영하고 있다. 이 서점의 특징은 신간과 헌책을 함께 팔고 있다는 점이다. 2층 조그마한 공간에 간이 카페가 있어 쉬어가며 책을 고를 수 있어 좋았다. 하긴 우리 교보문고 광화문점에도 휴식 공간은 충분하니까.
마룻바닥을 따라 책 수레를 끌 수 있는 철로 모양의 트랙이 만들어져 있는 것도 특이했다. 종이책이 사라지고 있는 요즈음, 이 ‘재래서점’은 사람들로 발 디딜 틈이 없었다. 비록 대부분이 관광객일지라도 내겐 신선한 충격이었다.
그래서일까, 4유로의 입장료를 내야한다. 책을 사면 이 금액이 책값에서 차감된다. 서점을 상징하는 기념품코너도 있는데 거기서는 입장료 차감이 적용되지 않는다. 참으로 절묘한 ‘도서 마케팅’이다. 서점을〈해리포터〉영화 세트장으로 착각하는지〈해리포터〉시리즈를 구입하는 관광객도 꽤 눈에 들어왔다. 여기서 산 책을 자녀들에게 선물한다면 ‘마법서’처럼 두고두고 잊지 못할 기념품이 될 것이다.
이 서점을 세계적으로 알린 것은 <해리포터> 시리즈의 저자 조앤 롤링(Joanne Rowling, 영국)의 공이 크다. 그녀는 젊은 날, 이곳 포르투에서 영어 교사를 하며 지냈다. 책을 좋아했기 때문에 자연 이 서점에 많이 드나들었다고 한다. 그때, ‘호그와트 마법학교(Hogwarts school of witchcraft wizadry)’ 계단은 여기 2층으로 올라가는 붉은 계단에서 영감을 받았다고 회상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렐루 서점을 ‘해리포터 서점’이라 부르곤 한다.
포르투는 롤링에게 애증이 교차하는 곳이다. 여기서 아란테스란 포르투갈 TV기자를 만나 사랑에 빠졌다. 바로 결혼해 귀여운 딸도 낳았지만 행복은 오래가지 않았다. 



전통의 하버드 대학 졸업축사
‘커멘스’는 ‘시작하다’란 뜻이지만 동시에 ‘졸업하다’란 의미도 있다. 세계의 영재들이 모인 미국 하버드대학. 이 학교의 오랜 전통인 ‘커멘스먼트 어드레스(commencement address, 졸업축사)’는 아무나 할 수 없다. 권력과 재력, 명망을 모두 갖추었다고 되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몇 년 전 졸업식장 연단에 조앤 롤링이 섰다.
“여러분이 하버드대학 졸업생이라는 사실은 실패에 익숙하지 않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성공에 대한 열망만큼이나 실패에 대한 공포가 여러분 앞날의 행동을 좌우할겁니다. 인생에서 몇 번의 실패는 피할 수 없죠. 이것을 아는 것이 진정한 재능이고 그 어떤 자격증보다 가치가 있습니다.”
이렇게 말하고는 자기 자신의 스토리로 축사를 이어 갔다.
“내가 제일 두려워하던 실패가 현실이 되었을 때 오히려 나는 자유로워 질 수 있었습니다. 실패했지만 나는 살아있었고, 사랑하는 딸이 있고, 낡은 타이프라이터와 풍부한 상상력을 가지고 있었죠. 가장 밑바닥까지 내려갔던 내가 새로운 출발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실패가 나의 삶에서 불필요한 것을 제거해주었기 때문입니다. 실패가 두려워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은 가장 큰 패배입니다. 삶이란 애당초 성공보다 실패가 더 많은 그런 것이니까요.”



세계를 홀린 조앤 롤링, 그녀는 누구인가?
1965년 영국 웨일즈에서 태어났다. 어릴 땐 상상력이 풍부한 아이였다. 그런 자식을 위해 부모님은 “책을 많이 읽어주었고, 책 사는 데는 돈을 아끼지 않으셨다”고 롤링은 회고했다. 성년이 되어 옥스퍼드대학을 지망했지만 낙방하고 엑세터대학에서 불문학과를 졸업하고 프랑스 유학도 다녀왔다. 엠네스티(국제사면위원회)에서 직장생활을 시작했지만 적응하기 힘들었다. 현실과 괴리된 몽상가였기 때문이다.
포르투로 건너가 구한 잡이 고교 영어강사였다. 이즈음 포르투갈인 아란테스를 만나 1년 만에 결혼했고 1년1개월 살다 헤어졌다. 속전속결이었다. 겨우 4개월 된 딸을 두고서. 정확한 이유은 두 사람만이 알겠지만, 판타지 중간계를 유영(遊泳)하는 그녀가 ‘하우스 와이프’로 살기는 무척 힘들었을 것이다. 
이제는 포르투에 있을 이유가 없었다. 갓난쟁이를 들쳐 안고 3년여 만에 고국에 돌아왔으나 무일푼이었다. 겨우 친구에게서 500파운드를 빌려 임대아파트를 얻고, 월 50파운드의 정부보조금으로 근근이 생활했다. ‘생활’보다는 연명(延命)이란 표현이 정확할 것 같다. 한마디로 가난에 찌든 20대 후반의 싱글 맘이었다. 우울증까지 와 자살을 시도하려했다. 끝없는 추락의 나날들이었다. 

 

하버드대 졸업식 축사 때의 조앤 롤링

 


더 이상 내려갈 곳이 없는 그때!
막장까지 내려간 어느 날, 그녀는 정신을 차리고 “내가 사랑하는 딸을 두고 이럴 수는 없다”며 모든 것을 잊고 혼신의 힘을 다해 글을 쓰기 시작했다. 아이를 재우고 나서 또는 유모차를 끌고 공원을 산책할 때도 글을 썼다. 그녀는 “악조건 아래 나는 늘 정신 나간 사람처럼 써내려갔다.”라고 말했다. 이렇게 해서 1997년 <해리포터와 마법사의 돌> 제1탄이 세상에 나왔다. 출간 즉시 선풍적인 인기를 끌기 시작했다. 곧이어 전 세계 67개국의 언어로 번역되어 팔려나갔다. 소설은 세계를 ‘판타지’ 속으로 빠트렸다. 영화도 세계도처에서 선풍을 일으켰다.
부와 명예가 동시에 찾아왔다. 제1탄 이후 7탄 <해리포터와 죽음의 성물>까지 책, 영화 모두 세계적 대박이었다. 인류역사상 성서 다음으로 많이 팔린 책이란 수식어가 따라다녔다. 그간 벌어들인 돈은 약 6억 파운드, 한화 1조 원 가량 된다. 책과 영화의 로얄티는 계속 들어오니 지금은 훨씬 늘어났을 것이다. 포브스지(誌) 선정 세계부호 <500위> 안에 들며 영국 여왕보다 더 큰 부자가 되었다.
세계적 인기작가이고 엄청난 부를 축적했다고 하버드대학에서 졸업축사를 부탁했을까. 결코 아닐 것이다. 스스로 삶을 바꾸는 힘은 우리 내면에 존재한다는 것을 온몸으로 통찰한 조앤 롤링.
성공의 정의는 없다. 하지만 나는 성공한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과의 차이는, 삶의 길목에서 어려움의 절정을 맞았을 때, 가던 길을 포기하고 타협하는 사람과 설령 실패에 이를지라도 자신의 꿈을 향해 뚜벅뚜벅 가는 사람. 바로 이런 차이 아닐까.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역’
렐루 서점에 이어 포르투의 중앙역인 상 벤투 역(Estacao Sao Bento)의 별칭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역’이다. ‘포르투에는 웬 세계최고가 이리 많지…’ 하는 조금은 심드렁한 심사로 역에 도착했다. 서점과는 지근거리에 있었다.
오래된 수도원 터에 당대의 건축가 마르케스 다 실바(Marques Da Silva)가 설계했다. 20세기 초 카를로스 1세가 집권할 때다. 역은 건축물보다 내부 장식으로 명성을 얻었다. 기차역이지만 관광명소로 더 잘 알려져 있다. 난생 처음 보는 독특한 화법(畵法)이라 탄성이 절로 나왔다. 역시 명불허전(名不虛傳)이었다. 흰색과 청색의 조화는 물론 이음매도 식별할 수 없어 그냥 한 폭으로 대형 그림이었다. 나는 이 역이야말로 ‘아름다운 역’ 대신에 ‘독특한 역’이라고 말하고 싶다. 그림 아니, 타일마다 역사에 등장하는 주요사건과 인물이니 ‘역사미술박물관’이라 불러도 손색없을 것 같다.
이것이 바로 아줄레주 화인데 역 내부 벽면 거의 전체를 덮고 있다. 당대 최고의 아줄레주 화가인 조르지 콜라수(Jorge Colaco)가 12년에 걸쳐 2만여 장의 타일에 그린 것이다.

 

상 벤투역 내부벽면의 아줄레주 화

 

 

아줄레주 화
아줄레주 그림은 유독 포르투갈에서 꽃피웠다. 화병에서부터 각종 건물의 벽면 장식까지 다양한 문양과 그림이 퍼져나갔다. 18세기는 그 절정기였다. 아줄레주의 규모가 커지며 부호들은 대저택을 이것으로 온통 장식할 정도였다. 그러니 많은 전문 화가들이 생겨나며 원근법, 인물과 풍경 등의 묘사가 보다 정교해졌다. 
아줄레주는 포르투갈의 전통 타일을 말하지만 실은 아랍이 ‘오리진’이다. 식민 지배시절의 산물이다. 아랍어로 아즈 줄레이(Az zulayj)는 ‘빤짝이는 판판한 작은 돌’, 즉 10cm 내외의 유약 바른 타일을 말한다. 저렴한 재료인 진흙을 구워 다양한 형태의 건축자재로 쓸 수 있어 일찍이 이베리아 반도를 비롯 이탈리아 등 지중해 국가들로 퍼져나갔다. 우리나라도 1950년대 중반부터 부유층은 ‘타이루 집’을 선호했다. 당시 “나에게 100만원이 생긴다면, 타이루 집 짓고 행복하게 살테야~” 란 노래까지 유행했으니까.



‘델프트 블루’의 추억
블루… 어디서 본 듯한 푸른색이다. 그렇다! 델프트 블루! 역사(驛舍) 벽면 그림을 감상하다가 예의 나의 버릇인 의식의 흐름을 타고 생각은 네덜란드로 날아가 델프트(Delft)라는 작은 도시에 멈추었다.
아담한 소도시이지만 역사의 향기가 가득한 그곳. ‘국제법의 아버지’라 불리는 휴고 그로티우스(Hugo Grotius)의 고향이고,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를 그린 화가 얀 베르메르(Jan Vermeer)의 활동 무대이기도 했다. 거기서 ‘델프트 블루(Delft Blue)’가 탄생했다. 흰색과 푸른색의 조화랄까, 우윳빛 바탕의 도기나 타일에 청색물감으로 무늬나 그림을 그리고 유약을 발라 구운 것이다. 접시, 화병, 식기, 타일 등등 다양한 제품들을 만나볼 수 있었다.
17세기부터 내려오는 전통 공예품인데 중국에서 들여온 자기를 보고 벤치마킹 한 것이다. ‘오리지날’보다 더 미적으로나 양적으로 다양하게 만들어 당시 유럽인들의 생활에 깊숙이 파고들었다.



자기가 영어로 ‘차이나’ 가 된 이유
포르투갈이 대항해 시대를 열었다면, 네덜란드는 대항해 시대의 열매를 향유했다. 향신료 시장을 개척하기 위해 동인도회사를 설립하고 중국, 동남아시아, 일본 등과 교역을 시작했다. 거점으로는 바타비아(지금의 자카르타), 나가사키 등이 있었다. <하멜 표류기>를 쓴 헨드릭 하멜이 이 회사 소속의 직원이었다. 주지하는 것과 같이 그는 1653년, 바타비아를 떠나 대만을 들러 나가사키를 향해 가던 중 태풍을 만나 제주도에 표착, 13년 동안 조선에서 억류생활을 하다 탈출했다.
이때 교역품으로는 향신료가 주종을 이루었지만, 중국(명나라)에서 청화백자(靑華白磁)를 비롯해 비단, 차 등도 많이 들여와 고가에 팔려나갔다. 계란껍질 만큼이나 얇은 것이 있을 만큼 정교한 중국 자기는 수세기 동안 세계가 탐내는 물건이었다. 15세기에서 19세기까지 유럽으로 수입된 중국자기는 3천만점 정도로 추산하니, 그만큼 많은 부(富)가 중국으로 흘러 들어갔다. 중국은 이미 10세기 이전부터 자기를 만들기 시작했다. 그들만의 노하우가 있었다. 불의 온도, 흙의 배합, 유약칠 등은 비밀에 부쳤다. 유럽은 이 비법을 빼내기 위해 절치부심했다.
명의 청화백자는 유럽에서 차이나 웨어(Chinaware)로 불렸다. ‘중국’과 ‘청화백자’는 동격(同格)이었다. 오늘날까지도 자기제품을 ‘중국(China)’이라고 부르는 것은 이 때문이다.
상벤투 역에서 나와  볼사 궁전(Palacio da Bolsa)으로 향했다. 그곳에 가면 ‘항해 왕 엔히크(Infante Dom Henrique)’의 흔적을 만날 수 있을 것이다. 포르투는 그의 고향땅 아닌가!
15세기, 그가 활짝 연 대항해 시대의 문. 서부 아프리카의 곡물해안(Grain Coast), 황금해안(Gold Coast), 상아해안(Ivory Coast), 노예해안(Slave Coast)을 따라 희망봉(Cape of Good Hope)까지 항로를 개척했던 포르투갈 인들의 목숨 건 도전정신도 교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 어서 가보자! 나는 뛰는 가슴을 진정하고는 차분히 페달을 돌리기 시작했다. 

 


차백성 편집위원  cbs6127@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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