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르투갈은 15세기 대항해시대 개막의 주역인 엔히크(엔리케) 왕자의 나라다.

포르투갈 공화국(Republica Portuguesa) 제2편 
세계사를 바꾼 항해왕 엔히크의 나라, 하지만 중국에는 정화가, 신라는 장보고가 먼저 있었다

포르투갈은 15세기 대항해시대 개막의 주역인 엔히크(엔리케) 왕자의 나라다. 대서양항로를 개척해 아프리카, 인도, 동아시아까지 진출해 향신료 무역으로 부국을 일궜다. 하지만 아프리카 노예무역도 시작되어 인류사에 씻을 수 없는 잔혹극을 빚기도 했다. 엔히크보다 1세기나 앞서 중국 명나라에서는 정화가 거대 선단을 이끌고 아프리카까지 다녀왔지만 민간이 아니라 관이 이끈 한계로 금세 막을 내리고 말았다. 정화보다 600년이나 앞선 신라 때는 장보고가 동아시아의 바다를 주름잡기도 했다 

 

 

볼사 궁전은 19세기 중반, 여왕 마리아 2세가 왕권의 권위를 높이기 위해 웅장한 신고전주의 양식으로 지었다. 외관은 투박하지만 내부, 특히 무도장인 아랍 홀(Salao Arabe)은 당시의 풍요로움과 사치의 극치를 보여준다.
건축가 구스타보가 그라나다에 있는 알람브라 궁전에서 영감을 받아 실내장식을 했다고 한다. 이 궁전은 후에는 증권거래소와 상공회의소 건물로 사용되었다. 내가 여기에 온 이유는 다름 아닌 건물 앞에 우뚝 선 엔리케 왕자를 만나기 위해서였다.

‘내비게이터’ 엔히크 
우리에게도 잘 알려진 포르투갈 출신의 세계적 축구스타 호날두(Cristiano Ronaldo)는 몇 년 전 대단한 상을 2개나 받았다. 하나는 FIFA에서 주는 ‘올해의 선수상(The Ballon d'or)’이고, 다른 하나는 포르투갈의 최고 국가훈장인 ‘The Order of Prince Henry’였다. 이 헨리왕자(Infante Dom Henrique, 포르투갈어는 엔히크, 스페인어는 엔리케)가 누구이기에 국가 최고훈장의 주인공이 되었을까.
유럽 역사상 ‘바닷길’을 발견하는데 선구적 역할을 한 국가는 포르투갈이다. 15세기부터 약 150년간 목숨을 담보한 탐험 정신으로 아프리카를 비롯 동아시아에 이르기까지 미지의 바닷길을 개척해 나갔다. 그 선두에 엔히크 왕자가 있었다. 후에 그는 왕이 되었지만 영국을 비롯한 유럽 국가들은 그의 젊은 시절 업적을 높이 기려 ‘항해왕자 헨리(Prince the Navigater Henry, 1394~1460)’라 부른다.
나는 이 사실에 대해 짚고 넘어갈 것이 있다. 미지의 항해 즉, ‘발견’이나 ‘탐험’이란 서구인들의 관점이다. 사실 그런 말 자체가 어불성설인데 역사는 강자의 전유물로 이해하는 수밖에  없다.
정작 ‘탐험을 당한’ 국가나 ‘발견 당한’ 민족들은 오래전부터 존재해왔고 ‘발견’ 때문에 고난의 모진 역사가 시작되었을 뿐이다. 조상대대로 살아오던 땅, 사람 그리고 산물(産物)은 사정없이 수탈당했다. 그도 모자라 ‘탐험 국가’는 그 땅을 자랑스러운 식민 영토로 차지해버렸다. 그리고는 총 칼로 피지배자를 마음껏 유린하는 악행을 저질렀다. 이것이 인권이니 인본주의를 부르짖었던 서구 제국의 식민지 잔혹사이다.
 

리스본에 있는 ‘발견기념탑’. 엔히크 왕자 사후 500년을 기념해 1960년에 완공되었다. 맨 선두는 엔히크 왕자, 그 뒤의 사람들은 포르투갈을 빛낸 항해사 또는 탐험가들이다

 

“세우타(Ceuta)를 점령하라!”
1415년, 리스보아(리스본) 항구. 200여 척의 전함이 집결했다.
“선수를 남으로 돌리고 전진하라!” 기함에서 포르투갈 국왕 주앙 1세의 명령이 떨어졌다. 배에는 그의 장성한 세 왕자 ― 장남 두아르테, 차남 페드루, 삼남 엔히크가 타고 있었다. 왕실의 귀족들도 거의 참전, 포르투갈은 이 전투에 나라의 명운을 걸었다.
공격 목표는 북아프리카의 모로코 세우타였다. 당시 그곳은 이슬람세계의 무역 중심지이자 스페인 남부에 버티고 있던 그라나다 왕국, 나스리 왕조의 생명줄이기도 했다.
8월 21일 새벽, 포르투갈 함대는 방어 요새를 향해 일제히 포탄을 퍼부었다. 그리고는 세 왕자를 필두로 상륙작전을 전개, 단숨에 성안으로 진격, 불과 13시간 만에 세우타를 함락시켰다. 가장 용감하게 싸운 장수는 삼남 엔히크였다.
왕은 귀국하며 그를 세우타 총독에 임명했다. 유럽과 가장 가까운 아프리카의 세우타, 그것이 비극의 씨앗이었다. 전리품은 엔리케가 처음 보는 신기한 물건들이 많았다. 대상(隊商)들이 사하라사막 남쪽과 멀리 인도, 중국 등에서 가져온 것들로 후추, 생강, 계피, 정향(丁香, clove), 육두구(肉荳蔲, nutmeg) 같은 향신료와 비단, 양탄자, 금, 은, 도자기, 상아 등이었다. 
엔히크가 가장 눈독을 들인 것은 다름 아닌 향신료였다. 이런 물건들을 취급하는 상점이 2만4천 곳이나 있었다니 당시 세우타가 얼마나 번성한 도시였는지 짐작할 수 있다. 하지만 엔히케의 점령 후 대상들은 당연 발길을 끊고 말았으니, 이제는 포르투갈이 직접 나서서 구해야했다.

조선 기술 향상에 진력
4년의 세우타 통치를 마치고 귀국한 엔히크는 포르투갈 남부 해안가 사그레스(Sagres)란 곳에 성을 쌓고 항해 연구소 및 조선소를 세웠다. 말하자면 해양 탐험의 전진기지였다. 여기서 해도(海圖)를 제작하고 사분의(四分儀) 같은 원양항해 기구를 만들었다. 무엇보다 그의 제일 큰 업적은 조선기술 발전에 진력했다는 것이다. 그때까지 잔잔한 지중해를 오가던 장삿배들은 미지의 먼 바다를 탐험하기에는 적합지 않았다. 대서양은 강풍이 자주 몰아쳐 험악했다. 맞바람을 뚫고 거친 파도를 헤쳐 나갈 수 있는 배가 필요했다. 그런 고심 끝에 만든 것이 캐러벨 선(caravel 船)이다.
길이 20m, 폭 8m, 50톤 정도의 작은 배지만 획기적 진전이었다. 물에 잠기는 흘수(吃水)가 얕아 해안을 따라 항해하기 적당하고 삼각돛을 달아 맞바람에도 전진 할 수 있었다. 여기서 한 단계 더 ‘업그레이드’ 시킨 것이 캐랙선(carrack 船)이었다. 이 배는 맞바람을 비켜가는 삼각돛과 뒷바람을 받는 사각 돛을 장착했다. 대형선이라 많은 인원과 식량은 물론 대포까지 장착할 수 있었다.

포교와 교역의 쌍두마차
포르투갈이 목숨을 걸고 대서양에 진출한 목적은 교역과 기독교 포교였다. 당시 유럽에서는 종교개혁으로 프로테스탄트가 ‘득세’ 하자 가톨릭이 위기에 봉착했다. 사우디아라비아 사막에서 생겨난 이슬람교는 불과 100년 사이에 북아프리카를 석권하고 지브롤터 해협을 건너 이베리아반도까지 맹렬한 기세로 퍼졌다. 그러나 프랑스의 완강한 저항으로 피레네 산맥을 넘지는 못했다.
원래 군대에서도 신참이 군기가 세듯, 뒤늦게 유럽 기독교권에 편입된 포르투갈과 스페인이 가톨릭 전파에 총대를 메게 되었다. 한 예로 동남아시아는 물론 멀리 일본까지 선교사를 파견해 포교를 했다. 과거 일본 큐슈를 여행할 때  포르투갈 예수교회기념관에 들린 기억이 떠올랐다. 
일본이 말하는 최초의 기독교 전래 기록은 1549년 8월 15일 프란시스코 자비에르 신부가 큐슈 남단의 가고시마(鹿兒島)에 도착한 날로부터 친다. 자비에르는 사쓰마(현재의 기고시마 현) 번주의 허가를 얻고 포교를 시작했다. 불과 30여년 만에 선교사 75명에 교회 수는 200개, 신도는 15만여 명이 넘는 큰 성과를 거두었다. 당시 문화적인 전통이 전혀 다른 일본에서 ‘기리시탄(크리스찬)’이 먹혀들어간 이유는 교리의 설득력보다는 서구 신부의 인간성과 모범적인 행동 때문이었다. 타락한 불교 승려에 대한 염증도 큰 이유 중의 하나였다.
서구의 신기한 문물과 새로운 지식도 신도 확장에 큰 몫을 담당했다. 일본인들은 새로운 것에 유달리 호기심이 많은 민족 아닌가. 대표적인 것으로 빵(포르투갈어는 ‘판’)과 뎀뿌라(튀김, 포르투갈어 tempora 그대로임) 그리고 뎃뽀(鐵砲) 즉, 조총(鳥銃)이었다. 포르투갈 상인으로부터 구입한 총열이 긴 장총 두 자루가 50년 후 동아시아의 세력 판도를 바꿀 줄은 그땐 아무도 몰랐다.
오다 노부나가를 주축으로 모방의 귀재 일본인들은 이 신기한 물건을 수십, 수백 번 분해와 결합, 연구 끝에 양산(量産) 체제에 들어갔다. 이것으로 전국시대(戰國時代)를 조기에 끝내고 통일을 이룬 도요토미 히데요시. 뎃뽀를 철석같이 믿은 그의 헛된 야망은 1592년 조선을 침공, 중국과 멀리 인도까지 넘보았다.

 

볼사 궁전 앞에 우뚝 서 있는 엔히크 상. 그는 포르투에서 태어났다

 

향신료 무역과 벤처 기업
위험이나 모험이 따르더라도 높은 수익이 예상되는 사업에 진출하는 기업을 벤처기업이라고 한다. 그것이 성공하려면 신기술과 더불어 결단력(모험심)이 필요하다. 그렇다면 벤처기업은 근래에 생겨난 기업형태가 아니었을 것이다. 역사상 어느 시대에나 첨단기술과 결단력은 늘 있어야만 했으니까.
500여 년 전인 15세기, 포르투갈 상인들은 벤처정신을 보여준 벤처기업의 효시였다. 지금은 ‘벤처’라고 해도 생명이 걸린 위험을 감수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 시대 대서양에 진출하는 선원과 상인들은 목숨을 걸어야만 했다.
당시의 ‘벤처 아이템’ 1호는 향신료(香辛料, spice)였다. 흔히 향신료하면 향료와 더불어 음식의 맛을 더하는 양념 정도로 알지만 그때의 목적은 육류의 저장이었다. 그러니 사치품이 아니라 필수품이었다. 그런데 이것들은 풍토나 기후로 보아 유럽에서 재배가 불가능했고 주요 산지로는 아프리카 일부지역과 인도를 비롯한 동남아시아였다. 지금이야 향신료가 마켓에 널려있지만 중세 유럽에서는 그 분량에 해당하는 금값과 맞바꿀 정도로 값비싼 수입품이었다. 그때는 이것을 약국에서 팔았다. 손님이 사러오면 한여름에도 창문을 꼭꼭 닫았다고 한다. 왜냐하면 바람에 날려 가면 큰 낭패였기 때문이다.
포르투갈보다 늦게 대서양에 진출한 스페인은 마음이 급했다. 지중해 항로는 이탈리아 도시국가들에게 자리를 내주고 포르투갈에게도 밀릴 판이었다. 이때 이탈리아 제노아 출신의 항해사 콜럼버스가 제 발로 이사벨 여왕을 찾아왔다. 이슬람의 마지막 술탄 보압딜로부터 항복을 받은 그해, 1492년이었다.
콜럼버스는 새 항로 개척에서 얻어지는 수입(주로 향신료)의 1/8을 갖는 조건으로 여왕과 계약을 맺었다. 그러나 알다시피 그가 발견한 것은 유럽세계에 알려지지 않은 땅, 아메리카 대륙이었다. 향신료가 아무리 고가라 하지만 팔아야 돈이 되는데 그들은 신대륙에서 금과 은을 가져왔으니 돈을 수입한 것이나 마찬가지 결과였다. 어쨌거나 두 나라 다 향신료 무역로를 개척하려한 것이 대항해시대를 연 단초가 되었다.

욕망의 확대재생산
인간의 욕망은 끝이 없다. 15세기 새로운 바닷길이 열리고 그에 따른 ‘새로운 땅’이 생기자, 문명이 급속히 발달하기 시작했다. 고로 유럽사회는 많은 인력이 필요했다. 이때부터 아프리카는 노동력, 노예의 공급처가 되었다. 포르투갈은 대항해시대 초기부터 미개한 아프리카인을 노예로 삼고자 공을 들였다. 한마디로 향신료수입과 더불어 노예무역은 큰 돈벌이 사업으로 급부상했다.
16세기 중엽부터 포르투갈이 브라질에 대규모 사탕수수 플랜트를 건설하면서 노예 수요가 급증하자 아프리카 노예들로 충당했다. 이를 본 영국, 프랑스, 네덜란드, 이탈리아, 벨기에 등 유럽 각 나라들은 죽은 코끼리에 몰려드는 하이에나 마냥 경쟁적으로 달려들었다. 이때부터 아프리카 대륙은 유럽제국에 의해 만신창이가 되고 말았다.
국가 간 경쟁이 심화되면서 노예송출 규모는 커졌다. 특히 신작물의 재배지로 부상한 서인도제도로 향하는 노예의 수가 격증했다. 이무렵 북아메리카 버지니아와 켄터키로도 노예가 유입되었는데 주로 담배와 목화 생산에 노역을 담당했다.
대항해시대부터 19세기 초까지 아프리카에서 유럽이나 아메리카로 떠난 노예의 수는 1500만 명 정도로 추정한다. 

 

 

세상에서 가장 잔인한 교역품
항해 도중 사망한 노예의 수는 승선자의 10% 내외로 본다. 엄청 높은 수치다. 질병이나 기아, 자살이 많았지만 작은 배에 ‘과적’을 해 풍랑을 만나면 선박의 안전을 위해 노예를 결박한 채 화물처럼 바다에 던져버렸다. 그런 다음 유럽에 도착해 보험회사에 ‘클레임’을 청구해 보상을 받았다. 나는 교회를 다니고 하느님을 신봉하는 인간들이 어찌 이런 일을 수백 년간 자행했는지 의문이다. 
‘덜 깨인 죄’로 노예사냥꾼에게 잡혀 가족과 생이별해 노예로 팔려나갔다. 고대에 노예란 패자, 즉 승자의 전리품이었다. 찬란한 그리스와 로마문명의 뒤안길에는 이들의 피와 땀과 눈물이 있었다. 그것은 아주 먼 옛일이니 논외로 치자.  
유럽사회에 계몽주의 사상을 확립하고 민주주의 삼권분립의 법률체계를 기초한 몽테스키외(프랑스, 1689~1755)는 위대한 계몽사상가로 존경받는 인물이다. 그런 그가 아프리카 노예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유럽 민족은 토지를 개척하기 위해 노예를 부릴 의무가 있다. 그들의 코는 너무 납작하여 그들을 동정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신은 고결한 영혼을 새까만 육체 속에 깃들이게 했다고 도저히 생각되지 않는다. 만약 우리가 그들을 인간이라고 생각한다면 우리는 기독교인이 아니라는 의심을 받을 것이다.”
대개의 사람들은 이런 유럽인들의 ‘잔혹성’을 책으로 습득한 관념적인 것이다. 하지만 나는 실제 내 눈과 귀로 체험한 적이 있다.

내가 근무했던 ‘라고스’라는 곳
나는 1976년 건설회사에 신입사원으로 입사했다. 이듬해부터 10여 년을 아프리카 여러 나라에서 근무했다. 그중 3년을 ‘블랙 아프리카의 종주국’이라 불리는 나이지리아의 수도 라고스 지사(支社)에서 건설관련 일을 했다.
1983년으로 기억한다. 그해 어느 날, 한국에서 오는 건설기자재 통관을 위해 항구에 나갔다가 노예박물관을 방문한 적이 있다. 이제는 세월이 많이 흘러 기억이 아련하지만, 그때의 상황을 차분히 더듬어본다.
동행자는 나와 같은 사무실에서 근무하는 조수 ‘오다마’란 나이지리아 북부 하우사 족(族) 출신이었다. 박물관 위치는 라고스 항구 근처 아파파(Apapa)란 지역이었다. 이 라고스 일대 바다가 과거 ‘노예해안’이라는 오욕(汚辱)의 지명이지만, 그래도 이런 박물관이 존재한다는 것만으로도 내겐 놀라움의 대상이었다.
나는 학창시절 역사, 지리에 흥미가 있었고 성적도 괜찮은 편이었다(다른 과목에 비해서이니 오해 없기 바란다). 그때 세계지리 시간에 배운 서부 아프리카 해안의 지명들이 노예해안, 상아해안, 황금해안, 후추해안, 곡물해안 등이었다. 이 ‘5대 해안’에 대해 “참, 이름도 특이하구나…” 하며 의문을 품어왔기 때문에 ‘버킷리스트(Bucket List)’ 대상지로 기록해 놓았다.
세월이 흘러 내가 성년이 되어 드디어 이곳 노예해안에 있는 노예박물관을 찾았으니 그날의 감회는 실로 주체하기 힘들 정도였다.

라구스가 ‘라고스’로 되었다.
건물은 낡고 허름했으며 내부 역시 어둡고 초라했다. 족쇄, 쇠사슬, 채찍, 그물 등 몇 가지 섬뜩한 도구들과 사진들이었다. 지금도 잊혀 지지 않는 사진은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전라(全裸)로 경매 판매대(臺)에 서있는 것이었다. 그리고 노예역사의 개요가 적힌 판넬이었다.
눈에 확 들어 온 판넬의 문구가 아직도 기억에 남는다. 건장한 노예 250명을 경매한다는 포스터(안내문)였다. ‘To be sold Negroes 250’로 시작되었는데, ‘천연두에 걸리지 않도록(danger of being infected with the Small-Pox)’ 세심한 주의를 기울였다는 문구도 있었다.
잠시 후, 요루바 족(族)인 박물관 학예사가 나와 반갑게 인사하며 친절한 설명을 해주었다. 그도 그럴 것이 아무도 잘 찾아오지 않는 이곳을 동양인이 찾아와 ‘노예의 역사’에 관심이 있다고 했으니 말이다.
1472년에 유럽인 최초로 포르투갈 인들이 들어왔고 1498년에 바스코 다 가마의 대규모 탐험단이 이곳 라고스 땅을 밟았으며, 그들은 지명을 자국(自國) 남단에 있는 항구 라구스(Lagos의 포르투갈 식 발음)의 이름을 그대로 붙여버렸다고 했다. 그리고는 ‘뭐 좀 빼앗아 갈 것이 없나…’ 살펴보니 바로 ‘인간’ 즉 맷집좋은 노예 감들이었다.
나이지리아 종족은 크게 세 가지로 나뉜다. 체구는 작지만 머리회전이 빠른 요루바(Yoruba) 족, 북부 밀림지대에 사는 덩치 크고 우직한 하우사(Hausa) 족, 비아프라 내전(內戰)으로 많은 피해를 당한 이보(Ibo) 족이다. 이 세 종족은 생김새는 물론 언어, 풍습, 역사, 종교 등 모든 것이 판이했다. 그러니 서로 사이좋을 턱이 없다. 영민한 포르투갈 인들이 이것을 놓칠 리가 없었다. 내가 근무하던 라고스 지사만 해도 현지인을 고용할 때 세 부족을 골고루 썼으니까.

처음 본 ‘개구기’의 추억
포르투갈 상인들은 요루바족을 ‘앞잡이’로 내세워 하우사족을 붙잡아왔다. 짐승 사냥을 하듯 투승(投繩)이나 투망(投網)을 썼다고 했다.
포르투갈 인들은 라고스 항구에 무역선을 대 놓고 ‘신체검사’를 마친 노예들을 요루바족에게 적절한 대가를 지불하고 실어 나르기만 하면 되었다.
학예사는 노예의 가격기준에 대해 설명했다. 우선 육안으로 대충 건강 상태 등을 살펴보고 탈락 여부를 결정했다. 그 다음은 정밀검사로 ‘기대여명’이 관건이었다. 주민등록증(?)이 없는 그들의 나이 판별은 어떻게 했을까. 치아의 개수와 그 상태로 ‘향후 얼마나 더 살지’를 어림잡았다고 했다. 학예사는 “이것으로 노예의 입을 강제로 벌려 구강을 살펴보았지요.” 하며 엿장수 낡은 가위 비슷한 개구기(開口器, mouth gag)를 보여주었다. 내 얼굴은 더 이상 실색(失色)할 것도 없이 창백해졌다. 다시 한 번 과거 유럽인들의 잔혹성을 느끼며 씁쓸한 얼굴로 박물관을 나왔다,
일단 두 바퀴 나그네는 ‘수난의 아프리카 역사기행’은 차후로 유보하고 포르투갈 기행에 전념키로 한다.
 

 

서양과 동양의 ‘과거사 신경전’
지난 2005년 중국은 정화(鄭和, 1371~1435)의 남해 대원정 600주년 기념일을 선포했다. “중국은 육상대국이자 해양대국”이라며 대대적인 행사를 벌였다. 관련 세미나는 물론 곳곳에 대형 기념물을 만들고 우표를 발행하는 등 관심을 끌기 위해 다양한 이벤트로 홍보에 열을 올렸다. 마치 포르투갈의 ‘500주년 기념식’을 비웃기라도 하듯. 그 몇 년 전인 1998년, 포르투갈은 바스코 다 가마의 인도항로 발견 500주년 행사를 성대히 열어 축하한 적이 있었다.
“닫힌 것은 죽고 열린 것은 산다.” 남해 대원정의 주역 정화 제독의 말이다. 중국 역사에서 예외적으로 바다에 나섰던 시기가 ‘잠깐’ 있었다. 그 시기는 포르투갈이나 스페인보다 무려 한 세기나 앞섰다.
그러니까 15세기 초, 명나라는 대항해 시대를 열었다. 몽골의 원나라를 타도하고 들어선 신생국 명나라. 오랜 이민족의 지배가 끝나고 한족 제국이 들어섰다는 것을 만방에 알려 조공을 받고 싶었다.
명의 영락제(永樂帝, 재위 1403~1424)는 환관 정화로 하여금 1405년에서 1433년까지 일곱 차례에 걸쳐 동남아시아에서 동 아프리카까지 항해하며 무역 길을 열게 만들었다. 우리는 항해가라면 당연 콜럼버스나 바스코 다 가마, 마젤란 등 서구인들을 떠올리는데 정화에 대해 잘 살펴보면 이런 고정관념은 산산이 깨지고 만다.
1492년, 콜럼버스의 기함 산타 마리아호는 길이 27m 폭 9m로 200톤 정도인데 비해 한세기 앞서 정화가 타고 갔던 ‘서양취보선(西洋取寶船, ’서양에서 보물을 가져 온다‘는 뜻)’은 길이 120m, 폭 40m, 1500톤 급이었으니 말이다.
“1421년은 중국이 세계를 발견한 해”
선단의 규모에서도  단 3척으로 떠난 콜럼버스와는 비교대상이 아니었다. <명실록>에 의하면 1407년 서양으로 사신을 보낼 준비를 하면서 249척의 배를 완성했고, 1408년에 48척, 1419년에는 41척을 완성했으니 정화를 위해 총 343척이 건조되었다. 배의 재질은 철을 사용하지 않은 순수 목선이었다.
나는 이 대목에서 ‘목선을 이렇게 크게 만들어 많은 사람을 태워 바람의 힘만으로 수천 km를 항해할 수 있었을까?’라는 의문을 지울 수 없다
어쨌든 그들은 습기에 강해 잘 썩지 않는 소나무를 주로 사용했다. 그리고 배에는 ‘적군의 돛을 불태우기 위한 화약과 적군을 살상할 쇠못이 가득 든 포탄을 실었다’라고 실록은 쓰고 있다. 3차 원정 때는 실제로 전투가 벌어졌다. 실론(스리랑카)왕이 신하 국이 되는 책봉을 거부하자 정화는 기습공격으로 왕궁을 함락, 왕을 인질로 잡아왔다.
1차 세계대전 전까지 정화의 대규모 항해선단에 필적하는 것은 어디에도 찾아볼 수 없다고 한다. 중국식 과장인가 하며 쉽게 믿기지 않지만 역사적 자료들이 방증하고 있으니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영국의 항해 관련 저술가 개빈 멘지스(Gavin Menzies, 1937~)는 <1421년은 중국이 세계를 발견한 해>라는 저서를 통해 “정화가 콜럼버스보다 71년 앞서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했다”며 그 때의 항해지도와 미국에 당시 선박의 잔해가 존재한다는 증거까지 내놓았다.
2탄 격인 <1434>라는 책에서는 “중국 황제의 공식 사절단이 1434년에 이탈리아를 방문, 교황 유게니우스 4세를 알현할 때 지리학, 천문학, 인쇄술 등의 다양한 서적을 전해주었다. 그 귀중한 지식들은 유럽전역으로 퍼져 다빈치, 코페르니쿠스, 갈릴레오 같은 천재들의 업적과 르네상스시대를 꽃피우는 밑거름이 되었다“고 멘지스는 주장하고 있다. 그의 설이 다 맞다고는 할 수 없지만 상당 부분 신빙성이 있는 것은 사실(史實)이다. 

정화는 누구인가?
<뉴욕타임스>는 1999년 밀레니엄 특별 기획을 통해 정화를 동서 교류의 상징적 인물로 선정했다. 정화는 운남성 출신으로 원래 성은 마(馬) 씨였다. 무함마드에서 유래된 이름으로 이슬람계였다. 당시엔 보기 드물게 키가 7자(약 2m)인 거구였다고 한다. 명나라의 3대 황제 영락제의 황위쟁탈 과정에서 환관으로 발탁되어 정씨 성을 하사받았다. 그 후 환관의 최고 직위인 태감(太監)의 자리까지 올랐다.
당시 인도양의 교역로는 이슬람계 상인들이 장악하고 있었으므로 아랍을 잘 아는 그가 적임자였다. 당시 영락제의 위세는 대단해 ‘세상의 모든 국가는 짐에게 조공을 바쳐야한다’고 생각했다.
1405년, 정화는 첫 원정에 나섰다. 수백 척의 배에 선원, 군인, 상인, 통역사, 의사 등 2만7000여명을 동원, 28년간 7차례의 ‘바다의 비단길’을 개척했다.
1차에서 3차는 말라카 해협에서 인도 캘리컷, 4~7차는 페르시아 만에서 동부 아프리카연안까지 돌면서 외교관계를 맺고 각국사절을 데리고 왔고, 30여개 국과 조공무역에 성공했다. 무역상의 실리는 물론 명나라의 위세를 떨친 결과를 가져왔다. 이때 조공품으로 아프리카 기린을 가져왔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특히 동남아시아 일대는 남 중국인들에게 친숙해져 이들이 남방으로 진출하는 사례가 급증했고, 이것이 바로 오늘날 동남아시아에 무수히 살고 있는 화교(華僑)의 기원이 되었다.

“세상의 중심, 우리가 ‘지대물박’ 한데”
정화의 원양항해는 1498년 바스코 다 가마의 인도항로 개척보다 93년이나 앞섰다.
유럽은 민간상인들이 항해에 먼저 나섰고, 중국은 관(官) 주도였다. 이런 점에서 볼 때 동서양의 원양원정 성격은 사뭇 달랐다. 유럽인들은 무역에 대한 열망, 즉 개인적 부의 축적이 동기였고 나아가 다른 세계를 알기 위함이었다. 반면 중국의 항해는 정치적인 의도에서 출발하였고 세계를 알려는 목적보다는 중화세계를 알리려는 목적이 컸다.
하지만 바다의 영웅 정화는 600년간 잊혀진 인물이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정화가 7차 항해를 마치고 귀환했을 때 그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원양항해 금지라는 청천벽력 같은 명령이었다.
“중국 자체가 지대물박(地大物博, ‘넓은 땅에 산물이 풍부하다’는 뜻)한데 원거리 항해 같은 국력낭비는 마땅히 중단해야한다”는 이유였다. 곧바로 정화는 난징 사령관으로 좌천되었고 그가 이끌던 거대함선 3500척은 양자강 선박 계류장에서 서서히 썩어갔다. 영락제가 죽은 뒤 환관 세력과 라이벌 관계였던 문신(文臣)들이 해양 무역을 금지시킨 것이다. 몇 년 후에는 민간이 배를 건조하는 것을 국법으로 금지시켰으며, 1525년 모든 원양 선박을 폐기해 버렸다.
스스로 해양대국의 지위를 내려놓은 셈이다. 예일대학의 폴 케네디 교수는 <강대국의 흥망사>에서 “명이 바다를 포기한 것은, 세계 패권을 유럽에 넘겨준 결과를 가져왔고, 이는 다시 중국 문명을 몰락시킨 요인이 되었다”고 주장했다. 내가 따져보니 이렇게 되는데 채 300년이 걸리지 않았다.
중국은 뒤늦게 지나간 역사의 오류를 깨달았다. 후진타오의 정책을 계승한 시진핑 정부는 ‘중국의 미래는 바다로 나아가는데 있다’며 항공모함, 잠수함 건조에 박차를 가하는 등 강력한 해양굴기(海洋屈起) 정책을 펴고 있다. 근래에 미국은 물론 일본, 베트남, 필리핀 등과 영해주권을 놓고 첨예한 신경전을 벌리는 것이 바로 이 때문이다.
나의 사견이지만, 현재 중국의 성장 잠재력으로 볼 때 ‘해양굴기’가 완료되면 세계사적 대변화가 일어날 것이니 우리도 서둘러 대응책을 마련해야만 한다.

두 해양 강국의 안목
세계지도에서 우리나라를 보면 중국대륙 한 귀퉁이에 달랑 매달려있는 작은 ‘혹’에 불과하다. 땅덩어리가 작다고 비관할 필요는 없다.
나는 관점을 한번 바꾸어보았다. 세계지도를 거꾸로 즉 물구나무를 세워보면 이 ‘혹’은 태평양으로 향하는 허브 중의 허브가 된다. 한마디로 한반도는 해양의 관점에서 보면 ‘명당’인 셈이다. 우리는 이 땅에 살면서도 이 명당의 진가를 모르고 있다. 다음 두 나라 사례는 이를 웅변으로 말해주고 있다.
한때 세계의 바다를 주름잡았던 영국, 바다를 제패함으로써 세계를 경영하려 들었다. 그들은 고종 22년인 1885년, 고흥반도에서 남쪽으로 40km 떨어진 거문도를 강점했다. 전함 6척과 수송선 2척, 1000여명의 수병을 2년여 주둔시켰다. 당시로는 적지 않은 병력이었다.
러시아의 남진정책을 견제한다는 명분이었지만 영국은 한반도가 지정학적으로 동아시아의 최고 군사 요충지임을 이미 간파하고 있었다. 마치 스페인 남단에 있는 조그마한 ‘혹’, 지브롤터(면적 7㎢의 암산, 영국령)처럼 말이다.
섬나라 일본 역시 제주도를 동아시아의 군사전략적 요충으로 이해했다. 일제강점기에 제주 주민을 강제 동원, 비행장(일명 ‘알뜨르 비행장’)을 건설해 1937년 중일 전쟁 때 여기서 폭격기가 중국을 향해 발진했다.
철근 콘크리트 격납고를 어찌나 견고하게 만들어놓았는지 지금도 멀쩡하게 남아있다. 또 해안선을 따라 방어포대 진지도 절묘한 곳에 구축해놓아 지금도 거의 원형 그대로다. 1945년 8월, 일제는 무조건 항복을 선언하면서도 조선의 제주도만은 ‘미련’이 있었다는 일화가 전해온다.
이제는 바다로 눈을 돌려야 할 때!
제주도에, 일부의 반대를 무릅쓰고 해군기지를 만든 것은 정책의 탁견이다. 시간이 걸리더라도 더 보완하고 확장해 동북아의 최고 요충지로 만들어 주변국 누구도 대한민국 바다를 넘볼 수 없게 해야 한다.
제주도뿐만이 아니다. 서해의 주요 도서, 동해의 울릉도, 독도는 말할 것도 없다.
한국의 조선기술과 건조능력은 자타가 공인하는 세계 최고이다.
삼면이 바다인 우리는 당연 바다로 나아가야한다. 왜 북한을 경유하는 대륙철도를 천문학적인 돈을 들여 서둘러 만들려는지 나는 정말 이해할 수 없다. 13시간 걸리는 비행기도 지루하기 짝이 없는데 일주일을 걸려 런던, 파리, 암스테르담을 왜 간단 말인가.
유람삼아 ‘낭만의 시베리아 횡단열차’를 이용하듯, 몇 명은 있을지 모른다. 화차(wagon)의 용량으로 보아 물동량을 처리하는데 열차 화물운송은 큰 득이 없다. 바다가 정답이다. 해양강국의 기치를 걸고 바다로 뻗어나가야 한다. 이는 대한민국의 지정학적인 숙명이다.

 

 

우리도 이런 인물이 있었다!
‘해외에 나가면 다 애국자가 된다’는 말이 있다. 나는  바스코 다 가마보다 7년 앞서고, 정화보다 600여 년이나 앞선 우리 선조 한명을 상기했다. 9세기에 완도 청해진을 중심으로 동아시아 바다를 주름잡았던 인물, ‘해신(海神)’ 또는 ‘해상왕’이라 불리는 장보고(張保皐 ?~846)이다.
본명은 궁복(弓福)으로 무예에 뛰어나 청년시절 중국 당나라로 건너가 서주(徐州) 무령군(武寧軍) 간부 즉, 고급장교가 되었다. 당시 그 지역에는 신라인이 많이 살고 있어 중국인들은 ‘신라방’이라 불렀다. 이들의 대부분은 내륙 수운을 이용한 교역에 종사했고 일부는 신라, 일본을 왕래한 대규모 국제 무역상까지 있었다. 이들을 노리는 중국인 화적(火賊, 약탈할 때 꼭 불을 질렀다함)과 해적이 재물을 약탈하며 신라인들을 죽이거나 노예로 팔아넘겼다.
이런 상황을 접한 장보고는 분개했다. 어디에 호소할 곳도 없으니 스스로 해양권을 지키는 독자 세력을 구축하는 방법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한반도와 가까운 산동반도와 수운의 요충지인 소주를 양대 거점으로 해양기지를 만들었다. 828년, 이를 인지한 신라 흥덕왕은 장보고를 불렀다. 그리고는 청해진 대사(靑海鎭 大使)라는 새로운 관직을 하사하며 그를 중용했다.
이제는 공식적으로 거점을 구축하고 해적무리를 소탕했다. 동(東)중국해 일대의 해상권 장악은 물론 신라, 일본을 잇는 국제무역을 주도해나갔다. 사람이 모여들자 자연 도시는 번성하기 시작했다. 9세기 중엽까지 청해진은 국제해상무역의 중심지였다.
이 무렵 장보고는 산동성 문등현(文登縣) 적산촌(赤山村)에 법화원(法華院)을 건립하고 이를 지원했다. 이 절은 상주 승려만 30명이고, 연 500석을 추수하는 장전(莊田)을 가진 큰절이었다. 이곳은 신라인들의 정신적인 중심지이자 장보고의 중국거점이었다. 중국은 지금도 이곳을 사적지로 보호하고 장보고 공덕비를 세우는 등 업적을 치하하고 있다. 한마디로 그는 1200년 전에 이미 ‘대 병력을 거느린 해군제독이자 글로벌 CEO’였다.
호사다마라고나 할까, 장보고는 강력한 군대와 부를 축적하여 동아시아의 주요세력으로 자리를 잡았지만 본의 아니게 신라 왕위계승분쟁에 휘말린다. 이 무렵 자객 염장(閻長)에게 암살당하고 만다. 아까운 죽음이었다. 이때가 846년이니 근 20년 ‘해상왕’의 시절을 누렸다.
그가 죽은 후에도 아들과 부장 이창진에 의해 청해진은 얼마간 유지되었지만 중앙토벌군의 공격을 받고 청해진은 완전 궤멸되고 만다. 몇 년 뒤인 851년 문성왕 13년, 신라조정은 주민들을 벽골군(碧骨郡, 지금의 전북 김제)으로 강제 이주시키고 청해진을 없애버렸다. 이로써 우리의 해상세력은 역사 속으로 사라졌지만 그 DNA는 충무공 이순신에게 전해져 나라를 지키는데 결정적 힘을 더했다.

 

코임브라가 멀지 않다. 마지막 피치를 올리자!

 

국내보다 국외에서 더 높은 평가 받아
당나라의 저명한 시인 두목(杜牧, 803~852)은 장보고를 가리켜 “인의지심이 충만하고 명견이 출중한 인물”이라고 평하면서 “나라에 저런 사람이 한사람이라도 있으면 그 나라는 결코 망하지 않는다”고 했다.
대륙에 기대어 사는 것을 당연시하고 그것을 숙명처럼 여기던 시대의 관점에서 보면 ‘미천한 뱃사람의 일탈’ 정도에 불과했다. 그러나 바다로 나가고 해양으로 뻗어가야 명당의 가치를 실현할 수 있는 오늘의 관점에서 보면 그는 시대를 앞서 내다본 위대한 선구자임에 틀림없다.
<열린 것이 닫힌 것을 이긴다>는 철칙이다. 우리도 자랑스러운 조상 장보고의 정신을 본받아 한반도에 갇힌 개구리가 아니라 대양으로 뻗는 용이 되어야 한다.
정화나 바스코 다 가마, 마젤란, 콜럼버스 등의 동서양 대항해가들은 모두 국가의 전폭적이 후원 속에 성공을 거두었다.
우리의 장보고는 어떠한가. 훌륭한 가문이 아닌 상인(常人) 출신이었다. 적수공권으로 시작해 부를 쌓았고 높은 지위에 올랐다. 그에 대한 나의 흠모는 새삼스러운 것은 아니지만 지구 반대편, 흘러간 과거의 해상 영화를 반추하는 포르투갈 땅에서 느끼는 감회는 콧날이 시큰할 정도로 각별했다. 
사이클 동호인들과 같이 달리다
포르투(Porto)와 아쉬운 작별을 하고 기수를 남쪽으로 돌렸다. 이른 아침, 구름이 낮게 드리운 항구를 뒤로하고 자전거에 올랐다.
오늘의 목표는 남쪽으로 약 120km 떨어진 코임브라(Coimbra)로 잡았다. 중세에 100여년 간 포르투갈의 수도였고, 이 나라 최고(最古)의 대학, 코임브라 대학(Velha Universidade)이 있는 곳이다.
대서양을 따라 해변도로가 쭉 뻗어있다. 탁 트인 바다를 보며 달릴 때는 온갖 시름이 사라져버린다. ‘이 맛에 자전거여행을 나오지’ 하며 해변길이 계속 이어지기를 바라는 간절한 심정으로 페달을 돌렸다.
시원한 대서양 바람에도 땀이 솟았으니 얼마나 세게 페달을 밟았을까. 작고 아담한 마을도 거의 다 지나쳐버렸다. 어둡기 전까지 코임브라에 도착해야 하니 마음이 바빴다.
아구다(Aguda)라는 해변마을을 지났을 때 한 무리의 사이클 그룹을 만났다. 장거리를 떠나는 듯 준비운동을 하고 있었다. 옷차림이나 자전거로 보아 전문가 그룹은 아닌 것 같았다. 호기심이 발동해 먼저 말을 걸었다.
“동호회 모임 같은데 어디까지 가시나요?”
“네, 직장 동료들로 남쪽으로 60km떨어진 아베이루(Aveiro)까지 갑니다. 가족들도 같이 가고요”
“한국에서 온 여행자입니다. 같이 라이딩 할 수 있을 까요?”
그들은 내 자전거 뒤에 달린 큼직한 포르투갈 국기에 호감을 표시하며,
“물론이죠. 그런데 짐이 많은 장거리 여행자 같은데 우리를 따라올 수 있을까요? 우리는 여직원들이 지원차량으로 따라오니 힘들면 타고 오세요.”
참 인정 많은 사람들이었다. 포르투갈은 우리와 한(限)의 정서를 공유하는 유럽에서 몇 안 되는 나라이기도 하다.
"걱정 마세요, 맨 뒤에서도 충분히 따라갈 수 있으니까요.”

 

 

짧은 만남 긴 여운
나는 오늘 일진이 참 좋다고 생각했다. 오늘의 목표 중 한 절반 거리 정도는 쉽게 해결할 수 있으니까. 방향만 같다면 누구라도 앞서거니 뒤서거니 같이 타면 힘이 덜 드는 것은 자전거여행의 기본.
또 다른 이유는 이제 곧 해변도로가 끝나고 마을과 마을을 연결하는 좁은 국도를 지나가야하는데, 노폭이 좁고 갓길이 없는 포르투갈의 국도는 위험했다. 양방향 차들이 교행(交行)할 때는 자전거에서 내려야할 정도로 ‘생명의 위협’를 느낀 적이 한 두 번이 아니었다. 이런 도로는 무리지어 달리면 훨씬 안전을 확보할 수 있어 좋다. 내 자전거의 중량은 55kg, 그들은 많아야 10kg 미만일 것이다.
나의 속셈은 그들이 아무리 날렵한 사이클이라도 나는 ‘Bafang’이 있지 않는가! ‘동호인들이니 평속 30km는 넘지 않을 것’이라고 판단했다. 내 예상대로 낡고 좁은 국도는 사이클도 별 수 없이 속도를 줄여야했다. 동호인들이라 휴식시간도 여러 번 가졌다. 간식도 같이 나누어먹으며 통성명도 하고 주소도 교환했다. 이러니 60km를 가는데 3시간이 넘게 걸렸다.
이제 헤어질 시간이 왔다. 그들은 온 길을 되돌아가야하고 나는 코임브라를 향해 계속 남진(南進)이다. 역시 포르투갈 사람들은 정이 많았다. ‘3시간의 정을 떼는데’  다들 몹시 서운한 표정이었다. 더구나 자전거를 좋아하는 사람끼리, 유유상종이란 말이 딱 들어맞는 경우였다. 지원차량으로 가져온 샌드위치를 다함께 모여 앉아 나누어 먹었다. 나를 포함해 소감도 돌아가며 다들 한 마디씩 했다. 전원 모여 단체사진을 찍었고 “가면서 드시라”며 런치박스까지 만들어주었다. 여기까지는 ‘우리식’이었지만, 헤어질 땐 서양식으로 일일이 ‘허그(hug)’로 석별의 정을 나누었다.
그들은 그 자리에 서서 내가 멀어져 사라질 때까지 손을 흔들어주었다.
대서양의 멋진 풍광도, 어둠이 내리는 포르투 항구의 여수(旅愁)도 인간에게서 느끼는 감동만 못하다. 이 감동의 에너지야 말로 내가 세계여행을 계속 할 수 있는 원동력이다. 훈훈한 추억을 한 아름 안고 다시 혼자가 되었다.
그래, 내일도 어디선가 나를 기다리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달려라! 애마야, 고도(古都) 속 젊음의 대학도시 코임브라를 향하여! 


협찬 : 벨로스타, 참좋은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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