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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전거 탄 민족영웅 엄복동의 일대기  
<자전차왕 엄복동>  3·1절 개봉


영화 <자전차왕 엄복동>이 오는 3·1절 개봉한다. 2017년 시작된 영화의 촬영은 일찌감치 끝났지만 영화특성상 개봉을 미뤄 올해 100주년 3·1절에 맞춰 개봉하게 되었다. 정지훈, 강소라, 이범수 등이 열연하는 <자전차왕 엄복동>은 일제강점기 자전거 대회를 통해 민족의 영웅으로 떠오른 엄복동 선수의 이야기를 다룬다. 일제의 탄압에 맞서 자전거로 국민의식을 고취시키며 당당히 싸워온 인물, 엄복동 선수에 대해 미리 알아본다면 영화관람이 더욱 즐거울 것이다 

떴다 보아라 안창남 비행기
내려다보아라 엄복동 자전거

간다 못 간다 얼마나 울었나
정거장 마당이 한강수 되거라
싫거든 두어라 너 하나뿐이냐
산 넘어 산이 있고 (좋다)
강 건너 강이 있다

 

엄복동

 

1920년대에 즐겨 불렸던 민요다. 경기민요 ‘청춘가’의 가사에 당시 민족의 영웅으로 떠오른 안창남과 엄복동의 이름을 넣어 불렀던 노래다. 우리나라 최초로 비행기를 타고 하늘을 날며 과학기술을 강조했던 안창남과 더불어 아시아최고의 자전거 선수 엄복동을 기리는 노래다. 당시 대중가요처럼 애창될 만큼 엄복동이라는 이름을 모르는 사람은 이 땅에 없었다. 


1913년 첫 우승
엄복동은 1913년 3월에 열린 ‘육군기념제 자전거경주연합대회’에서 처음으로 우승을 차지하고 같은 해 4월 열린 ‘전조선자전차경기대회’에서 이름을 떨치게 된다. 이 경기는 조선의 선수뿐 아니라 일본에서도 내로라하는 선수 7명이 참가해 양국간의 자존심 대결로 비화된 상황이었다.
일본선수들은 서울 한복판에서 카퍼레이드까지 펼치는 등 주최사와 일본상점들의 적극적인 후원과 지지를 받았다. 조선의 한 신문사는 이 대회에서 우리도 조선인 선수들을 적극 후원해야 한다고 호소하는가 하면 패배한다면 민족의 대수치가 될 것이라고 언급하는 등 자전거대회에 대한 양국간의 관심이 굉장히 고조되었다.
용산 연병장에서 열린 대회 당일, 경기를 응원하기 위해 몰려든 사람들의 행렬이 용산 연병장에서 남대문까지 이어졌다고 한다. 10만명의 인파가 몰린 대회에서 엄복동은 일류선수 경기에 황수복과 함께 참가한다. 경기 초반부터 엄복동은 페이스를 높여 일본선수들을 제쳤고 그 페이스를 끝까지 유지해 1등을 차지한다. 엄복동은 일약 국민의 영웅으로 발돋움하는 영광을 누리게 된다. 함께 출전한 황수복 역시 3등으로 결승선을 통과해 그 기쁨을 더했다. 엄복동은 이후로도 ‘전조선자전거경주대회’, ‘추계자전거대회’ 등 여러 대회에서도 우승을 휩쓸기에 이른다. 이로써 자전거는 엄복동이라는 이름과 함께 당대최고의 국민스포츠로 자리매김하게 된다.



우승기 사건
엄복동에 관해 가장 자주 회자되는 이야기로 우승기 사건이 있다. 당시의 정치적 상황으로 미뤄볼 때 엄복동이 출전하는 대회는 대부분 한·일전 양상을 보였다. 일제 탄압에 대한 적대적 감정이 극에 달해있던 당시의 상황에서 엄복동의 활약은 가뭄에 단비 같은 존재였다. 하지만 엄복동에 대한 이러한 관심을 분노로 폭발하게 만든 것이 바로 1920년 벌어진 우승기 사건이다.
1920년 5월 경복궁에서 열린 시민운동회는 여러 가지 종목이 개최되었는데 그중에서도 엄복동이 출전하는 자전거 경기가 초미의 관심사였다. 경회루 앞에서 열린 자전거 경기를 보기 위해 경회루는 물론, 광화문 앞에서부터 수많은 인파가 몰렸다.
이날 자전거 경기에는 조선, 일본, 중국 등지에서 70여명이 출전했고 엄복동과 일본의 모리시타 마사카즈(森下正一)가 강력한 우승후보로 거론되었다. 엄복동은 결승전에서 줄곧 선두를 유지하며 달리고 있었다. 이대로라면 우승은 확실한 상황. 하지만 경기가 막바지에 이르자 심판이 별안간 경기를 중지한다. 해가 졌다는 어처구니없는 이유였다(당시 경기를 중지하기 직전 모리시타가 넘어지고 뒤따르던 일본선수들도 함께 넘어져 패배가 확실해지자 경기를 중단한 것이라는 이야기도 있다).
이에 분개한 엄복동은 경기 운영진을 찾아가, “이것은 내가 1등 하는 걸 막으려는 수법이오. 이까짓 우승기는 뒀다가 뭐하려는 것이오?”라고 일갈하며 우승기를 꺾어 던져버렸다. 그러자 주변 일본인 관중들이 우르르 몰려들어 엄복동을 집단구타하기에 이른다. 이를 목격한 조선인 관중들은 ‘엄복동이 맞아죽는다!’며 구타당하는 엄복동을 구하고자 운동장에 난입한다. 아수라장이 된 경기장은 한참동안이나 조선인과 일본인의 난투가 벌어졌고 출동한 경찰에 의해 해산된다.

 

엄복동 동상
실제 엄복동 선수(우)와 <자전차왕 엄복동>에서 엄복동 역을 맡은 배우 정지훈이 등장한 포스터

 

우승기 사건, 통쾌한 역전으로 설욕하다
우승기 사건이 벌어진 후 엄복동은 장충단에서 열린 경기(1922년 추정)로 다시 한 번 우승기를 탈환하고자 한다. 하지만 이전까지의 경기가 늘 그렇듯 번번이 일본 선수들의 견제가 집착에 가까운 수준에 도달하자 엄복동은 전략을 바꿨다. 초반부터 높은 페이스로 후발주자들을 따돌리는 것이 아니라 후반의 일발 역전을 노린 것.
엄복동은 최종 결승에서 여느 때와는 다르게 8명 중 8위로 달리고 있었다. 이날 경기는 운동장 40바퀴를 도는 경기로, 종반인 30바퀴째에도 엄복동은 최후미를 달리고 있었다. 하지만 엄복동은 10바퀴가 남은 이때 승부를 걸었다. 그는 남은 10바퀴에서 앞서 달리던 선수들을 모두 제치는 통쾌한 역전극으로 당당히 우승을 차지했다. 이후부터 이 주법은 그의 전매특허처럼 여겨지게 되었고 관중들은 그가 후반에 안장에서 엉덩이를 떼면, ‘일어난다’ ‘올라간다’고 외치며 응원하게 되었다.
그는 또 다시 영웅으로 떠올랐으나, 이에 대한 견제도 더욱 심해져 1922년 상주에서 열린 대회에서는 일본 선수의 심한 견제로 중상을 입기까지 했다.



다롄 대회 우승, 아시아 최정점에 오르다
엄복동은 조선뿐 아니라 아시아에서도 자전거 최강자의 위치에 올랐다. 중국 다롄에서 열린 대회에서의 우승이 이를 말해준다. 1923년 중국에서 열린 국제 자전거 대회에는 조선인은 물론 중국인, 일본인 등 아시아 각국의 내로라하는 선수들이 출전했다.
  이 대회에서 엄복동은 70바퀴를 도는 경기 초반부터 페이스를 올려 후미와의 거리를 벌렸다. 엄복동은 단 한차례도 선두를 내주지 않은 채 우승해 위상을 드높였다. 당시 조선인들은 일제의 탄압을 피해 연해주 등지로 이주한 이들이 많았다. 다롄 역시 마찬가지로 동포들이 많아 엄복동의 소식을 들은 이들은 모두 이 경기를 관람하기 위해 구름처럼 모여들었고 타지에서 목도한 엄복동의 우승은 이들의 자긍심과 애국심을 고취시키기에 충분했다.



서른다섯에 은퇴
그는 서른다섯까지 자전거 위에서 활약하다가 은퇴했다. 하지만 이후로도 자전거경기가 열리기만 하면 모든 이들이 엄복동의 이름을 부르는 통에 1932년 41세의 나이로 다시 경기에 나서기도 했다. 선수로서는 고령이었지만 그 대회에서조차 그는 당당히 1만m 1위를 차지하는 기염을 토한다.
엄복동의 활약으로 자전거는 가장 인기있는 스포츠 종목이 되었고, 대한민국은 해방을 맞았다. 하지만 그의 말년은 그리 순탄치 않았다. 그는 해방 후 경기도 동두천 일대에서 생계를 꾸려갔다고 전해진다. 당시 운동선수들은 인기와 명성에 비해 수입이 넉넉지 못했기에 은퇴 후의 삶은 어려웠다고 한다. 그러다 1950년 발발한 6·25 전쟁 중에 폭격을 맞아 1951년 사망했다는 설이 유력하게 전해진다.
  이후 엄복동을 기리기 위해 1977년 엄복동배 전국사이클대회가 개최되었고, 1987년에는 의정부시청에 그의 동상이 세워졌다. 또 1983년 광복절 특집극으로 ‘자전거왕 엄복동’이 방영되기도 했다. 현재는 그의 손자 엄재룡 씨가 ‘팀 엄복동’, ‘엄복동 재단’ 등을 꾸려 할아버지를 기리는 사업을 펼치고 있다. 

 

엄복동의 실제 자전거. 1910년대 초에 제작된 영국 러지사의 위트워스 모델로 등록문화재 제466호다

 

자전차왕 엄복동
올해의 3·1절은 100주년을 맞는다. 일제의 탄압에 저항하고자 했던 민족의 한 맺힌 외침이 100년에 이른 것이다. 그런 암울한 일제침탈의 시대에 엄복동은 자신만의 방법으로 독립운동을 펼쳤다.
영화 <자전차왕 엄복동>이 드디어 개봉한다. 예고편도 공개되지 않아 엄복동을 어떻게 그려내고 있을까 내심 걱정되기도 한다. 시대적 영웅이었던 엄복동의 위업을 기리고 당시 최고의 인기 스포츠였던 자전거에 대한 관심을 환기시키는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  

 


최웅섭 기자  heavycolumn@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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