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자, 자전거여!

날자, 자전거여!
좌충우돌, 자전거 유학 3년의 단상

우연한 계기로 일본으로 자전거 유학을 떠나온 지 어느덧 3년이 지나 모든 과정을 마치고 3월 12일 졸업을 앞두고 있다. 힘겹게 배운 일본어, 연필 스케치로 남긴 일기 3권 그리고 매일이 보람차고 즐겁던 학교생활은 내 자전거 인생에서 또 다른 황금기였다. 그 사이 방학을 이용해 일본 전국을 자전거로 여행했고, 이제 졸업식을 마치면 도쿄를 출발해 시모노세키~부산~낙동강~한강을 거쳐 중랑천 변의 집까지 직접 만든 자전거 ‘바다미’를 타고 갈 것이다. 자, 다시 새로운 출발이다!

필자가 제작한 ‘바다미’

 

2015년 무더운 여름 어디선가 샘물 같은 시원한 소식을 들었다. 일본에 자전거학교가 있단다. 자전거학교 하면 우리나라에도 여기저기 있지만 프레임을 만드는, 말하자면 전문 빌더를 양성하는 곳은 아시아에서 이 학교가 유일하다는 것이다.
깊은 우물의 얼음물을 끼얹듯 가슴속에서 뭔가가 꿈틀한다. 지금은 국내의 자전거 생산이 거의 초토화 되었지만 한때 세계 자전거시장에서 이름을 날렸던 한국 자전거산업의 역군(?)이었던 젊은 날의 추억은 업계에 계속 남아 있는 한 사람으로서 언제나 첫사랑 같은 가슴 아프고 안타까운 추억으로 자리하고 있다. 그 빛바랜 추억을 다시 컬러풀한 동영상으로 그것도 실시간으로 만들 수 있다니 이거야말로 좋아서 춤이라도 한판 추어야 되지 않겠는가!

 

연간 120만대를 생산해 미국에 수출하던 시절의 코렉스 공장 통근버스. 벌써 30년 전 일이다
일본어 스피치대회 시상식(앞줄 맨오른쪽이 필자)

 

청춘을 재점화하다
살아가면서 한해 한해가 다 중요하지만 1987년은 내 인생의 큰 전환점이 되는 해였다. 그 해 금숙과 결혼도 하고 결혼 3일전에 회사가 부도가 나서 실업자가 되어 생활고를 해결하기 위해 우연히 들어가게 된 회사가 코렉스였다.
마침 그해에 미국의 머레이 오하이오사와 합작하여 동양최대의 자전거공장을 준공하고 연간 120만대를 생산해 전량 미국으로 수출하고 있었다. 그 당시 미국 자전거시장이 연간 900만대 정도였으니 미국 거리의 자전거 8대 중 한대가 한국산 자전거였던 셈이다. 지금 우리나라 자전거시장이 100만대에도 못 미치는 점을 감안해 보면 그 규모를 상상할 수 있으리라.   
당시 공장에는 800여명의 직원이 근무했고 내가 생산관리를 맡았던 가공·용접반은 4개반에 180여명이 다이아몬드(자전거 프레임)를 만드느라 현장은 용접 연기가 언제나 자욱하게 깔려 있었다. 잔업을 끝낸 늦은 시간에도 포장마차에서 한잔을 같이 하기도 했는데 해방 후에는 원자재가 부족해 드럼통을 쪼개서 그 철판으로 파이프를 말아 프레임을 만들었다는 늙은 반장의 무용담이 아직도 머리에 남아 있다.
도쿄에 가면 전통 방식인 황동용접으로 철 프레임 제작 기술을 전수해주는 학교가 있다니 가슴이 뛰고 오매불망할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그 학교의 정식 명칭은 도쿄 사이클 디자인 전문학교란다. 줄여서 TCD! 멋지다! 가고 싶다! 두근두근….

베이스캠프론
생각이 정리되고 마음을 굳히고 나니 이제 현실적인 벽들이 하나둘 가로막기 시작한다. 우선 10월부터 3개월 단기반으로 일본어 새벽반에 등록했다. 하지만 공부하기 좋은 가을은 술 마시기도 딱 좋은 계절이다. 저녁 술자리가 즐거울수록 새벽의 히라가나는 멀어진다. 호랑이를 잡으려면 호랑이 굴로 뛰어들라 했던가. 아무래도 일본 현지로 가서 홀로 공부하는 수밖에 없을 것 같았다.
유학원에서 상담해 보니 일본에서 3년간 유학하려면 학비와 생활비 등 경비가 상당하다. 다행히 은행을 털면, 아니 적금을 깨면 그럭저럭 될 것 같았다. 이제 가장 중요한 마지막 관문이 남았다. 집사람 설득이다. 처음에는 농담처럼 귓등으로 넘기다가 어? 어? 하기만 한다. 딸이 미국으로 유학 가 있는 판에 당신마저 유투 브루투스?! 그래도 든든한 아들과 꼬리 흔드는 기동이가 옆에 있지 않는가는 어째 좀 설득력이 약하다.
그래서 생각해 낸 것이 이른바 ‘베이스캠프론’이다. 등산도 같이 다니고 얼마 전 같이 본 등산영화에서 힌트를 얻었다. 나는 정말 당신과 같이 에베레스트 정상에 가고 싶다. 하지만 같이 갔다가는 둘 다 잘못될 수도 있지 않겠는가. 그 험난한 등정을 위해서는 후방의 든든한 베이스캠프가 필수더라. 영화에서도 본 것처럼. 그러니 이번에는 당신이 베이스캠프가 되어 가정도 지키고 내친김에 우리나라(?)도 좀 맡아 주십사 했다. 다음에는 역할을 바꿔 당신이 주인공하도록 밀어주겠다는 공약도 남발했다. 역시 우리 금숙이 최고다. 그런 금숙이와 결혼한 나는 최고의 행운아다. 재벌회장인들 열일을 제쳐두고 3년을 유유자적할 수 있겠는가!

멀고도 험한 왕초보의 길
2016년 1월 10일 일본 나리타공항에 도착했다. 역시 공항 바깥에선 겨울 북풍이 칼날되어 쌩쌩거리고 있다. 40여년 전 빡빡머리에 멀뚱멀뚱 들어섰던 황토빛 논산훈련장이 떠오른다. 나긋나긋한 안내원의 멘트도 나에겐 소음일 뿐이다. 그래도 입을 크게 벌려 숨을 들이키며 마음을 다잡아본다. 자전거가 나를 데리고 왔으니 지가 책임지겠지.
돌이켜보니 일본의 첫걸음도 1992년 봄 오사카의 시마노 본사 출장으로 시작되었다. 나를 태우고 현해탄을 건너온 저 비행기의 발명자인 라이트 형제도 자전거 수리공 아니었던가. 사람은 책을 만들고 어쩌고 하는 것처럼 ‘사람은 자전거를 조립하고 자전거는 인간을 개조한다?’ 그래 기왕 일본까지 왔으니 열심히 제대로 해보자.
다음날 하라주쿠의 오모테산도 끝자락에 있는 아오야마 일본어학교에서 간단 테스트 후에 제일 초급인 V클래스를 배정받았다. 학교는 ‘청산’이라는 이름만 멋질 뿐 30여년의 역사는 있을지 몰라도 낡은 건물에 교실만 다닥다닥한 시끌벅적한 시장통이다. 그래도 연꽃은 그 더러운 진흙탕에서 꽃대를 올리지 않던가. 나중에 알았지만 근처에 진짜 아오야마학원 대학이란 근사한 대학교가 있었다. TCD하고도 멀지 않아 가끔 구내식당을 이용하곤 했는데 푸른 숲에 고풍스런 건물들이 지성의 풍경을 자아낸다.
아무튼 첫시간에 20여명이 차례로 자기소개를 시작한다. 인사, 이름, 국적, 나이 이 간단한 것도 일본어로 하려니 참 버겁다. 중국, 대만, 베트남, 필리핀 등 이렇게 다양한 민족과 비빔밥이 되어보는 것도 처음이고 신기하다. 그리고 대부분이 싱싱한 19세다. 그래서 나도 19세라고 소개했다. 어제 저녁 산책을 하면서 나름 원칙을 정했다. 연식이 좀 되었다고 꼰대처럼 보이지 말자. 그래서 먼저 인사하자. 잘 웃자. 30분 전에 준비하고 맨 앞자리에 앉자. 무엇이든 먼저 하자. 이 낯선 일본에서도 세 마디만 잘 하면 자다가도 떡을 얻어먹는다. 오하요고자이마스, 아리가토고자이마스, 스미마센!
정말 열심히 한다. 아니 학교에 가는 게 이렇게 재미있을 수 없다. 아는 한자가 나오면 반갑고 비슷한 문화에 신기해하기도 한다. 할일이라고는 공부밖에 없다. ‘자전거는 멈추면 쓰러진다’는 제목으로 웅변대회에서 입상도 한다. 봄방학 때 따로 공부하여 월반도 한다. 실제 꿈속에서도 공부를 하거나 일본어를 하기도 한다.
헬멧을 쓰고 복도를 지나가면 애들이 수근거린다. 자전거에 미쳐 일본까지 온 늙은이라고. 외국생활에 찌든 유학생들에게 조그마한 웃음을 자아내게 할 수만 있다면 한순간의 쪽팔림이야 괜찮다. 콩알같이 조그만 몽골 여학생이 용감하게 다가와서 몇 살이냐고 묻는다. 물론 19살이다.
8월에는 후지산에 올라 일출을 보면서 막걸리로 축배를 들었다. 그리고 일본열도를 정복하기로 한다. 당근 자전거로! 3776m의 일본 최고봉을 올랐지만 정말 재미없는 산이다. 그냥 쭈~욱 오르막에 나무도 없는 흙산이다. 그래서 역시 후지산은 멀리서 바라보는 게 좋다고 하는가 보다. 100미터 미녀처럼. 그보다는 도쿄도의 최고봉 쿠모토리산(2017m)을 적극 추천한다.
아무튼 그해 12월에 JLPT 2급에 턱걸이를 하고 3월의 졸업식에서는 우수상과 개근상을 받아 2관왕이 되었다. 상금 6만엔까지 챙기고…. 아이고 또 자랑질.

혼자지만 결코 외롭진 않다
<작은 것이 아름답다>는 책도 있지만 일본이야말로 여기에 딱 어울린다. 아무 것도 아닌 것을 귀하고 소중하게 여기고 모든 걸 작고 앙증스럽게 만든다. 일본어 학원을 정하고 자전거 통학을 감안해 10여km 떨어진 나카노에 숙소를 정했다.
한국인 전용 기숙사인데 내 방은 제일 작은 1인용이다. 3평이 채 되지 않는 공간에 냉장고·옷장·TV·책상·화장실 겸 욕탕·침대 등이 빼곡하다. 침대 다리에 벽돌을 받쳐 침대 밑 공간도 널찍한 창고로 변신한다. 앞으로 3년 동안 지낼 보금자리이기에 그냥 썰렁하게 둘 순 없지 않은가. 학교를 파하고 집으로 오는 길에 자전거로 골목을 누비면서 들린 갤러리의 공짜 엽서, 자전거 쇼나 잡지의 자전거 사진과 영화 포스터 등을 모아 벽에 다닥다닥 붙여 보니 그럴 듯 하다.
냉난방기 환풍구 앞의 만국기 학은 기계를 켜면 너울너울 날개짓을 한다. 경륜장에서 가끔 열리는 벼룩시장에서 자전거 미니어처와 뱃지, 희귀 부품, 우표 등 자전거 관련 소품을 사들이고 틈틈이 만든 자전거 시계와 학교에서 만든 프레임과 포크, 스템 등을 천장까지 매달아 놓으니 내 컨셉을 설명할 필요가 없다. 문을 열고 딱 들어서면 자전거 오타쿠(매니아) 공간이 펼쳐지는 것이다.

일본어 학원 쫑파티. 대부분 19세 전후여서 나도 19세라고 우겼다
도쿄 사이클 디자인 전문학교(TCD) 졸업생은 도쿄 시내 갤러리에서 졸업작품전을 열어 일반에 공개한다. 올해 졸업작품전 포스터
오키나와 여행 갔을 때 동행한 유석이(왼쪽)와 함께. 가운데는 현지에서 만난 일본인
검은 정장차림으로 엄숙한 분위기에서 진행된 TCD 입학식. 여느 대학교 입학식보다 더 진중했다

 


연필 스케치에 도전 
일본에 와서 새로 시작한 취미가 연필 스케치다. 옆방 젊은이한테 기타를 새로 배워 볼까 하다가 그것도 잘못하면 꼰대 민폐가 될 것 같아 혼자서 할 수 있는 걸 찾았다. 손바닥만한 노트를 사서 핸드폰 속의 사진을 보면서 끄적거리는 것이다. 그러다보니 일본적인 카툰이나 캐리커처 등의 재미있는 소재를 찾아 자전거로 이 골목 저 골목의 이를 잡고 다닌다. 매일 한편씩 그리려면 그만큼 많이 돌아다녀야 하고 소재에 대한 에피소드도 자연스럽게 알게 된다.
예를 들면 일본 만엔 지폐의 주인공은 후쿠자와 유기치이고 그가 이런 인물이구나 하고 공부하게 되는 식이다. 노트의 한면은 그림을 그리고 한면은 일본어로 일기를 쓰기로 했다. 소재 찾는 시간을 제외한 순수 글·그림 작업은 하루 2시간 정도 소요된다. 거의 1년 정도 노트 3권을 꽉 채우고 나니 이제는 웬만한 스케치에 자신이 붙었다. 황궁이나 공원에 가면 스케치북에 수채화를 그리고 계시는 어르신들을 보면 봄날 햇볕의 따스한 여유로움이 절로 느껴진다. 그래서 이제는 수채화를 해볼까 아니면 좀 더 정교하고 섬세한 펜화에 도전할까 고민 중이다. 물론 그동안 익힌 실력은 TCD에서도 유감없이 발휘하고 있다.

연필 스케치를 배워 용띠인 아내 생일에 선물해준 그림. 스케치 일기만 노트 3권이 넘고 자신감이 붙어 혼자서 즐기는 새 취미가 됐다
그동안 타온 ‘구르미’의 설계도
하라주쿠역의 기념 스탬프. 순환코스인 야마노테선을 따라 역마다 스탬프를 찍어보기도 했다

 


백의종군 길에 허다한 호칭 
남자는 명함이 없어지면 자신감도 같이 없어진다 했던가. 사장이라는 흔하디흔한 호칭을 한국에 두고 백의종군(?)으로 일본에 와서 꽤 많은 호칭을 얻었다. 학교에 가면 당연 학생이니까 “기무 상” “기무 쿤” “태진 상”이다. 한국 학생을 만나면 일반 명사 “아저씨”이고 20대인데도 간 큰 녀석은 “형님” “큰 형님”이라고 부르는데 왠지 고맙다. 그 용감한 몽골 여자애는 어느날 나한테 “할아버지” 한다. 안 돼! 그건… 오빠라고 불러, 오케이?
그중에 제일 황당한 호칭은 당연 “선생님”이다. 첫날 신주쿠역에서 기숙사의 이동욱 사장을 만나 택시로 이동 중에 호칭 얘기가 나왔다. 본인이 사장이니 사장이라 할 수도 없고 형님 하자니 어째 거시기하고…. “선생님이 어떠신지요? 선배란 의미가 있기도 하구요….” 생초보 학생더러 선생님이라니. 새우를 가리켜 고래라 하는 꼴이다. 그래도 나카노에 도착할 때까지 대안이 없어 선생님으로 굳어졌다.
얼마 뒤에는 이사장 부부와 친해져서 매일 저녁을 같이 했다. 말하자면 자취비를 내고는 하숙을 한 셈이다. 자리가 사람을 만들고 호칭이 업무 수준을 결정한다는 말이 생각난다. 아무튼 선생님처럼 솔선수범 모범을 보여야지 해도 언제나 뒤끝이 찜찜하다.
그러다 진미식당의 ‘정희마마’가 사고(?)를 쳤다. 식당에 단골이 되면서 주변 일본인들과도 일면식을 터기 시작한다. 따라서 “기무 센세이”의 영토도 커지면서 사람들의 의문도 커져간다. 선생, 선생 하는데 어떤 선생인거냐? 통 크고 인심 좋은 정희마마가 뻥을 크게 내질렀다. “교수를 가르치는 선생이다(어쩔래!).” 내가 안절부절 하는데 “한국에서 사장도 했고 자전거 업계에 그렇게 오래 계셨다면 그 분야에서는 전문가로서 대학교수들한테 강의할 수도 있잖아요” 한다. 그 후 시부야 학교에선 “학생 기무 쿤”이지만 나카노 나와바리에선 당당한 “기무 센세이”이다. 

자전거로 해가 뜨고 자전거로 달이 지다
아오야마 학원의 자랑스런(?) 모범생으로 교장의 추천서를 쥐고 달려간 도쿄 사이클 디자인 전문학교(TCD)의 입학시험 및 면접은 20분만에 끝났다. 2018년 4월 5일 TCD를 비롯한 쥬얼리, 가방, 구두, 시계 등의 분야 신입생 입학식이 거행되었다. ‘거행’이란 단어를 쓴 것은 모두 정장차림에 분위기란 놈이 무겁게 앉아 있는 모습이 마치 장례식 풍경 느낌이어서다.
학교생활에서는 인사철저, 70% 이상 출석률 관리, 연간 31학점 취득을 강조한다. 히코 미즈노학원은 미즈노 이사장이 40여년 전에 쥬얼리로 터전을 마련했고, TCD는 2012년 최근에 개설한 막내분야라 할 수 있다. 그동안 400명이 졸업하여 브리지스톤 등 자전거 업계나 개인 자전거 빌더로 활동 중이란다. 그중 한국인은 18명으로 일본기업에서 활동하거나 한국에서 업계에서 혹은 빌더로 열심이란다. 2019년 현재 재학생은 졸업을 앞둔 3학년 18명, 2학년 39명, 2학년 진학반 33명, 1학년 94명 하여 총 184명이다. 한국인은 7명이며 중국, 대만인 등 외국인 약간명을 제외한 대부분은 일본인이다.

홋카이도 최북단이자 일본 최북단 땅끝인 소야미사키에서

 

현직 ‘자전거 장인’이 강의   
TCD 과정은 2년 코스와 3년 코스가 있다. 수업 커리큘럼은 크게 프레임 빌딩, 메인터넌스, 디자인 및 설계의 3분야다. 프레임 빌딩 시간에는 파이프 가공기술과 선반, 밀링머신 등의 가공기계 조작도 실습한다. 또한 용접협회에서 황동용접 시 가스안전관리 등에 대해 16시간 교육후 시험까지 치른다.
개별 지정석에는 프레임 지그, 용접기, 바이스 등이 배치되어 있다. 소재는 크롬 몰리브덴 합금강으로 전통적인 황동용접으로 파이프를 연결하는 방식이다. 초기에는 간단한 파이프 손가공과 용접을 시작으로 핸들스템, 리어 캐리어, 프론트 포크를 거쳐 최종 프레임을 완성한다. 1학년 때는 700c 사이클 프레임을, 2학년 때는 27.5인치 MTB 프레임을 러그레스로 황동 본용접 후 덧씌우기 용접으로 강도를 확보하여 만든다. 이것이 완료되면 자신이 직접 디자인과 설계를 한 자전거를 만들어 시승 가능까지의 시험을 통과해야 한다.
3년 코스의 졸업생들은 별도의 시내 전시장에서 졸업작품전을 열어 일반인들의 평가도 받는다. 교수진은 전임강사와 외부강사로 구성되어 있다. 2005년에 시작되어 이제 그 유명세를 떨치고 있는 북아메리카 수제 자전거쇼(NAHBS)에서 몇차례 입상한 케르빔의 곤노 선생 그리고 경륜선수들의 열광적인 신뢰를 받고 있는 스트라다의 무라야마 선생 등 현업에서 실력이 검증된 ‘자전거 장인’들이 외부강사로 구성되어 있다. 무라야마 선생은 동갑이라 수업이 있는 날에는 항상 점심을 같이 했다. 수업 중에도 옆에서 시연도 해주고 상담도 해주는 다정다감한 친구선생이다. 반갑다, 친구야!

흥미진진한 메인터넌스(정비) 수업
전체 수업의 40%를 차지하는 메인터넌스 수업은 흥미진진하다. 자전거 역사를 배우고 마마차리(여성용 생활차)나 일반 자전거의 분해·조립을 통해 가장 기초가 되는 원리를 이해한다. 로드바이크, MTB 등 고급자전거의 분해·조립에 사용되는 전용공구와 각 부품의 토크 수치까지 체크하면 1년이 지나간다.
상급반이 되면 크로스바이크, 전기자전거, BMX, 아동차, 픽시, 사이클로크로스 등 온갖 종류의 자전거를 시간 내에 완벽하게 분해·청소·조립을 마치는 테스트를 거쳐야 한다. 또한 서스펜션 포크와 유압 디스크 브레이크 블리딩, Di2 장착 등 주요 부품들의 내부도 해부한다.
시마노는 물론 스램과 캄파놀로 등 유명 컴포넌트의 특징과 차이점을 실물을 통해 배운다. 새롭게 진화하는 자전거 기술의 속도와 기발한 아이디어에 절로 혀가 휘둘러진다.
휠세트의 구름성은 자전거의 승차감을 좌우한다. 먼저 휠 좌우의 상황을 고려한 JIS식과 이탈리안식 등에 따라 스포크를 엮어서 상하, 좌우, 밸런스, 텐션 등이 만족할 때까지 반복 연습한다.
기본적인 펑크 수리를 끝내면 로드바이크의 튜블러 타이어 탈착과 인기 상승중인 MTB의 튜브리스 타이어를 끼우느라 손금이 닳을 지경이다. 아무튼 현재 지구에서 달리는 모든 자전거를 섭렵하는 느낌이다. 또한 대리점 개설 및 운영요령, 업계의 프로세스와 규모, 셰어 자전거의 현주소, 자전거 NGO 활동 전문가 초청강연 등 소프트한 부문도 양념처럼 포함된다.

천장까지 프레임을 걸어놓은 필자의 방
벽에는 온갖 엽서와 사진, 그림 따위를 붙여놓았다. 누가 보아도 ‘자전거 오타쿠’ 방이다
프레임 빌더의 산실인 실습장. 개별 지정석에는 프레임 지그와 용접기, 바이스 등이 배치되어 있다
학교 축제 때 숙소 주인인 이사장 부부와 함께
메인터넌스(정비) 수업 중에. 로드와 MTB는 물론 생활자전거와 BMX, 사이클로크로스 등 모든 장르의 자전거를 다룬다

 

디자인 및 설계 
또 한 분야가 디자인 및 설계 수업이다. 평소에 컴퓨터와 사이가 좋지 않아 전문용어로 ‘컴맹’인 나에게는 이 수업시간이 난감하고 지루하다. 그나마 일주일에 목요일 오전과 금요일 오후로 비교적 짧아서 다행이다.
컴퓨터 전용교실에서 컴퓨터를 켜서 선생이 하는대로 커서를 옮기면서 클릭만 하면 되는데, 그것도 손만 들면 친절한 선생이 쪼르륵 달려와 클릭 클릭해주는데 이렇게 간단한 작업을 왜 못하는지… 바보 멍텅구리란 생각이 들자 처량함이 밀려온다. 특히 1학년 때는 한국어가 통하는 클라스메이트가 없어 정말 난감했다.
라이노 프로그램이 실행되는 걸 보면 손으로 몇 시간 그릴 것을 단 몇초로 해결되니 그야말로 ‘매직’이다. 허나 명령어가 일본어이고 무엇보다 원시인의 피가 흐르는지 컴퓨터 앞에만 앉으면 하품이 절로 나온다. 손을 자꾸 드는 것도 민망하여 포기하고 있으면 옆자리의 오사카 출신 후루하시양이 풀무질을 해줘서 헤드뱃지 디자인 과제는 그럭저럭 제출했다. 이후에도 심봉사 젖동냥하듯이 유석, 현수, 재현이를 괴롭혔다. 나중에는 방안지에 직접 도면을 그리고 유니폼은 그림을 그려 색연필로 칠한 후 그걸 스캔해서 프레젠테이션을 마쳤다. 선생도 할 수 없는지 웃고 있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그 정글에 타잔이 한명뿐이었다는 것이다.^^

프레임을 용접하는 필자. 크롬몰리 튜빙을 전통적인 황동용접으로 연결한다
용접 시범을 보여주는 곤노 선생. 그는 북아메리카 수제 자전거쇼(NAHBS)에서 몇차례 입상한 장인이다
경륜선수들의 열광적인 신뢰를 받고 있는 스트라다의 무라야마 선생은 필자와 동갑이라 자주 식사를 같이 하며 친구가 되었다
휠 빌딩 모습
황동용접으로 만든 스템

 


3년간 퍼펙트 개근, 학교가 너무 즐거웠다 
베이스캠프론으로 시작된 3년의 일본 자전거 유학생활도 막을 내리고 정리할 시간이다. 조금 센 지진만 있어도 자전거가 와르르 쏟아질 보금자리에서 눈을 뜨고, 구르미와 함께 햇빛 쏟아지는 신주쿠 거리를 달려 일착으로 자전거가 가득한 교실에 든다. 조금 뒤 자전거가 좋아 이 학교를 선택한 학생들의 목소리가 들떠있다. 젊은 나이인데도 해박한 자전거 지식으로 완전무장한 하마나카 선생이 교실에 들면 긴장과 설레임이 교차한다.
학교를 파하면 다시 구르미의 페달을 밟으며 등줄기의 땀을 만끽한다. 일본의 3대 명장인 오다 노부나가는 매일 새벽 말을 타고 근처의 절 약수터를 들렀다고 한다. 갈 때는 오늘 무엇을 할 것인가, 올 때는 그 일을 이렇게 해야지 생각했단다. 나는 매일 자전거로 TCD를 오가면서 오늘 배울 것과 배운 것을 다시 익히고 있다. 공자의 3락 중 하나인 “배우고 때로 익히면 이 또한 즐겁지 아니한가”를 실천하고 있는 것이다.
그동안 30여년을 자전거와 함께 했다는 것은 행운이고 특히 일본의 3년은 축복이라 할 만큼 내 인생의 황금기였다고 자부하고 싶다. 모든 것을 말이 아닌 행동으로 즉, 직접 만들면서 아이디어를 얻을 때는 정말 기쁘다. 아이디어는 머리가 아닌 손가락에서 나오는 것이다.
집에 돌아와 종일의 용접 땀과 자전거의 땀 즉 노동과 운동의 땀범벅을 씻어낼 때는 시원함과 뿌듯함이 느껴진다. 학교 수업이 기대되고 학교생활이 이렇게 즐거울 수 없다. 그래서 3년 연속 100% 출석율이다. 그것도 지각·조퇴 없는 그야말로 퍼팩트다. 물론 학점은 편식이 아닌 A, B, C, D 골고루이며 권총은 차지 않아 모두 이수한 셈이다.

필자가 그린 바다미의 개념 스케치
일본 최고봉 후지산(3776m) 정상에도 올랐다
공항은 ‘돌아가는 삼각지?’ 집사람은 서울로, 딸은 뉴욕으로, 나는 도쿄로…

 

도쿄에서 서울까지, 내가 만든 자전거로!
한국에 있을 때 큐슈로 자전거여행을 다녀왔는데 일본 유학 중에는 오키나와, 홋카이도, 시코쿠, 그리고 작년 여름의 혼슈 북부지역을 달려서 ‘일본정복’이 눈앞에 다가왔다. 3월 12일 졸업식을 마치고 나면 도쿄를 출발하여 나고야, 오사카, 쿄토, 히로시마를 거쳐 시모노세키에 도착하여 페리에 오를 것이다. 그때가 3월 30일.
부산에 도착하면 연어처럼 낙동강를 거슬러 이화령을 넘고 한강을 따라 중랑천이 유유한 집에 도착할 것이다. 도쿄에서 서울까지… 그래서 좀 특별한 자전거를 만들었다. 지금 동거동락했던 ‘구르미’의 신체를 이식하여 ‘구르미 주니어’를 만들기로 한 것이다. 따라서 프레임 지오메트리는 구르미와 똑 같은 26인치 휠에 16인치 사이즈이고 포크도 같은 각도와 크기인 리지드 포크에 용접면이 그대로 드러나는 섹시한(?) 클리어코팅을 한다. 그리고 패니어를 다는 리어 캐리어는 황금색을 입혔다.
모든 과정을 내가 직접 톱질하고 용접하여 다듬고 페인팅해서 네이밍한 뽈락표 수제 자전거이다. 그리하여 그 이름도 당당한 바다미(風)인 것이다(원래는 바람 풍이지만 혀 짧은 훈장님의 발음으로 바담 풍… 그래서 바다미가 탄생). 자, 출발 앞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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