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두(fado) 음률에 젖어 고도의 길목에서, 성모가 발현한 파티마 기적의 현장에서

포르투갈 공화국(Republica Portuguesa) 제3편
파두(fado) 음률에 젖어 
고도의 길목에서, 성모가 발현한 파티마 기적의 현장에서

코임브라는 1064년 무어인(이슬람교도)을 몰아내고 독립한 포르투갈의 첫 수도였다. 1260년 리스본으로 천도하기까지 약 200년 간 포르투갈의 중심지였다. 16세기 리스본에서 옮겨온 코임브라 대학교는 장장 700년의 역사를 자랑해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대학 중 하나로 검은 교복을 입는 특이한 전통을 계승하고 있다. 코임브라에서 리스본 가는 길목에 파티마(Fatima)가 있다. 1917년 7만명이 지켜보는 가운데 태양이 춤을 추고 성모 마리아가 발현했다는 기적의 현장에서 무신론적 실존주의자인 필자도 야간미사에 참석해 성호를 그었다

코임브라를 관통하는 몬데구 강변에서

 

현지 자전거 동호인들과 즐거운 시간을 뒤로하고 다시 혼자가 되었다. 홀로 밟는 페달은 힘들다. 오늘의 목적지 코임브라(Coimbra)가 유독 멀게 느껴진다. 1번 국도인  N-1은 갓길은 있으나 대형 트레일러들이 다반사로 침범해 들어와 위험했다.  그래서일까, 자전거로 가는 사람은 한명도 보지 못했다.
옆 나라 스페인은 국도 상에서 라이더들을 더러 만나 사진도 찍고 통성명도 했는데 포르투갈에서는 기대난망이다. 이 나라는 자전거 타는 사람을 위한 기본 인프라가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자전거 해외여행의 즐거움은, 첫째 현지 라이더들을 만나는 것, 둘째 현지에 여행 온 해외 라이더를 만나는 것 아닌가. 스페인을 거쳐 왔기 때문에 자연히 비교가 되는데, 포르투갈의 자전거 문화가 한 수 아래인 것은 부인할 수 없다.

고도(古都) 코임브라
인구 15만 정도의 코임브라는 포르투에서 남쪽으로 약 120km, 리스본에서 북쪽으로 200km 정도 떨어져 있다. 내륙에 자리 잡고 있으니 보수적인 북부지방과 개방적인 남부의 개성이 혼재하는 곳이다.
시 외곽에 진입하자 먼저 몬데구 강(Rio Mondego)이 나를 반긴다. 시원한 강바람을 맞으며 도심으로 향했다. 강변을 따라 오래된 건물들이 늘어서 있다.
도시의 기원은 로마인들이 건설한 코님브리가(Conimbriga)였다. 얼마 후 외적의 침입을 방어하기 위해 지대가 높은 이곳 코임브라로 옮겼다. 그러나 9세기 북아프리카 모로코에서 지브롤터 해협을 건너온 무어인(이슬람교도)들에게 정복당하고 만다. 1064년, 이민족을 몰아낸 기독교인들은 내륙 중앙에 위치한 이곳을 포르투갈 왕국의 수도로 정했다. 옆 나라 스페인은 땅이 넓어서 그런지 무려 400여년이 더 지나서야 이슬람을 몰아내는데 성공했다.
포르타쟁 광장(Largo da Portagem) 부근에 숙소를 잡았다. 시 중심부에 위치했지만 가격은 의외로 저렴했다. 대학도시라 크고 작은 숙소가 많은 때문이었다. 패니어를 떼어낸 단출한 행장으로 시내 주유에 나섰다.

코임브라의 중심부, 포스타쟁 광장
아이는 나라를 막론하고 다 천진난만하고 귀엽다
산타크루즈 수도원
망가 정원
수도원 내부. 아줄레주 장식이 아름답다

 

수도원에서 결혼식
시내 한복판에 자리 잡은 산타크루즈 수도원(Mosterio de Santa Cruz)은 코임브라의 자랑이자 주요 볼거리 중 하나다. 7세기부터 짓기 시작해 1131년 완공된 국가 판테온(Phanteon, 경배의 대상인 神殿이란 뜻)인데, 포르투갈 최초의 왕인 알폰수 엔히케스(Alfonso Henriquez)와 산초(Sancho) 1세의 무덤이 있다.
건물 정면뿐 아니라 내부도 아줄레주 타일로 장식해 무척 화려하고 아름답다. 수도원 뒤뜰은 망가 정원(Jardim da Manga)이라 하여 르네상스식으로 꾸며져 있다. 망가란 ‘소매’란 뜻으로 주앙 3세의 의복에서 형상을 따왔다고 전해진다.
수도원 앞은 분수가 있는 넓은(도심치고는) 광장이 있어 지친 여행자는 쉬어가기 딱 알맞은 곳이다. 내가 간 그날은 마침 성당에서 결혼식이 있었다. 분수 가에 자전거를 세워놓고 예식이 끝나고 나오는 신랑 신부와 담소를 하며 덕담도 건네고 기념사진도 함께 찍었다. 오늘의 주인공, 신부를 위해 하객들은 꽃과 쌀을 뿌렸다. ‘풍요’의 상징인 듯 했으나 주변 비둘기들을 위한 성찬이었다.

Just Married!
코임브라 대학의 설립자 동 디니스
교정에서 만난 브라질에서 온 교환교수. 브라질은 과거 포르투갈의 식민지여서 남미에서 유일하게 포르투갈어를 쓰고 있다
코임브라 벼룩시장
어둠이 내리는 코임브라

 

코임브라 대학교
‘바다에 강한 DNA’를 가진 포르투갈 인들은 1260년 리스본으로 천도(遷都)했다. 통치자 동 디니스(Dom Dinis)는 수도로서의 면모를 갖추기 위해 대학을 세웠다.  세월이 흘러 1537년 그곳에 있던 대학을 이곳 코임브라로 옮겼다. 오늘의 코임브라 대학(Universidade de Coimbra, UC)인데 리스본 시절까지 계산하면 개교 700년이 넘은 만큼 유럽에서도 오래된 대학교 중 한 곳으로 꼽는다.
나는 여행을 할 때 그 나라의 간판격인 대학은 거의 들러본다. 오랜 전통으로 나라의 문화나 정신세계를 선도해왔을 뿐만 아니라 훌륭한 지도자들을 많이 배출했기 때문이다. 더구나 코임브라는 일본의 교토처럼 과거에 수도였다니 더욱 구미가 당겼다.
중심거리 페레이라(Ferreira)를 지나 구시가지 좁은 골목길을 따라 언덕 정상에 오르니 대학교가 펼쳐진다. 후니쿨라(경사로를 오르는 미니 열차)가 하나뿐이어서 매일 걸어 통학하는 학생들은 따로 운동할 필요가 없을 것 같다.
대학 캠퍼스는 웅장하면서도 고색창연한 단과대학 건물들이 즐비하다. 이들 중에서도 15세기에서 18세기 사이에 세워진 구(舊) 대학(Velha Universidade)이 볼거리다. 코임브라 도서관, 시계탑, 라틴 회랑이 자리하고 있고 광장에는 학교를 리스본에서 코임브라로 옮겨온 동 주앙 3세의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특히 20만여 권의 고서를 보유하고 있는 코임브라 도서관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도서관’에 선정될 정도다. 일각에서는 이를 두고 대학 도서관이 지나치게 휘황찬란하고 화려해 면학(勉學)에 방해가 된다는 반론도 있다.
몇 년 전 미국 보스턴을 여행할 때 하버드대학 구내에 있는 희랍 신전 같은 와이드너 도서관(Widner Library)이 떠올랐다. 300만 권의 장서를 보유한 도서관이 대학의 성가를 올려줌은 물론이다. 그 정도는 아니지만 이 대학도 전체가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지정될 만큼 역사와 전통 그리고 건축미가 돋보인다.
2만 명의 학생이 재학 중이며, 포르투갈에서 가장 많은 유학생이 있고 한국 유학생 또한 많다고 한다. 

이 학교만의 특이한 전통
학생들의 오랜 전통중 하나는 교복이다. 세계적으로 이 대학만의 특이한 전통이라 할 수 있는데, 지금도 검은색 예복에 검은 넥타이를 맨다. 그리고 검은 망토를 걸치고 수업에 들어간다. 자유분방한 여타 대학, 특히 미국에서는 상상하기도 힘든 일이다.
<해리포터>의 작가 조앤 롤링은 젊은 날 포르투갈에 2년여 체류한 적이 있다. 그녀는 대학도시 코임브라에 관심이 많아 자주 들렀다. 그러던 어느날 학생들의 교복을 보고는〈해리포터〉에 나오는 ‘호그와트 마법학교’ 교복의 영감을 받았다고 한다.  교정을 이곳저곳 돌다보니, 한 여학생이 교복을 잘 차려 입고 같은 자리에 계속 서 있었다. 이를 보고 그냥 지나 칠 내가 아니지 않는가. 다가가 말을 걸었다.
“지금 뭐하고 있나요?”
“오후 휴강을 이용해 학교 기념품을 팔고 있습니다.”
“수익금으로 뭘 하려고요?”
“제 개인이 가지는 것이 아니고, 교복을 입은 만큼 내가 속한 클럽 활동을 위해 사용합니다. 조금 있으면 다른 친구와 ‘임무교대’할거예요.”
나는 즉시 지갑을 꺼내 학교 로고가 박힌 열쇠고리와 볼펜 등을 샀다. ‘사주었다’가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짐무게를 1g이라도 줄여야하는 나의 ‘평소답지 않은’ 행동이었다.
“오브리가두(감사합니다)!”를 연발하는 그녀에게 카메라를 대니 수줍은 미소를 짓는다.

전통 교복을 차려입고 알바중인 코임브라 대학생

 

내가 본 유럽 유수 대학들
코임브라 대학은 1290년 설립되었다. 현존하는 대학 중 세계에서 가장 오래 되었다고는 하나 그건 ‘그들의’ 이야기이다. ‘오래된 것만’을 따진다면 고려시대에 생긴, 서울 명륜동에 있는 성균관대학이 단연 세계 최고(最古)일 것이다. 내 생각은 긴 역사의 연속성은 말할 것도 없고, 자신의 나라와 인류 보편적 가치를 위해 유익한 인재를 많이 배출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전통을 자랑하는 유럽 대학들은 대략 13세기에서 16세기 사이에 설립되었다. 그간 유럽을 여행하며 찾아본 주요 고(古)대학들을 여기서 떠올렸다.
  
영국 런던 북쪽으로 80km 떨어진 곳에 있는 옥스퍼드 대학(Oxford University)은 13세기 초엽이다. 이 부근에 있는 케임브리지 대학(Cambridge University) 역시 비슷한 시기에 건립되었다. 이 두 학교에서 배출한 인재들은 영국은 물론 직, 간접적으로 전세계에 영향을 미칠 정도였다.

스웨덴 수도 스톡홀름 외곽에 있는 웁살라 대학(Uppsala Universitet)은 1477년  설립되었다. 알프레드 노벨이 명예박사학위를 받은 이래 8명의 노벨상 수상자를 배출했다. 식물학자 린네를 비롯, 물리학자 옹스트롬, 천문학자 셀시우스, 경제학자이자 정치가였던 전 유엔 사무총장 다그 함마슐드 등이 있다. 

스웨덴의 웁살라 대학교

 

네덜란드 레이던 대학교(Universiteit Leiden)는 1575년 설립되었다. 레이덴은 ‘저항의 도시‘라 불린다. 당시 지배자 스페인에게 시민들이 목숨을 걸고 극렬 저항해 독립을 쟁취했기 때문이다. 독립을 오래 기리고자 의견을 물으니, 시민들은 세금감면이냐 대학설립이냐 중 후자를 택했다. 설립에 이런 연유가 있었다. 졸업생으로는 철학자 데카르트와 화가 렘브란트, 미국의 6대 대통령 애덤스를 배출했고 아인슈타인이 초빙교수를 지낸 적이 있다.

네덜란드의 레이덴 대학교

 

이탈리아 볼로냐 대학(Universita di Bologna)은 명실 공히 유럽에서 가장 오래되었다. 1988년에 개교 900주년 기념식을 거행했으니 1088년 설립되었다. 2000년에는 세계 최초의 대학임을 강조하기 위해, 교명을 ‘알마 마테르 스투디오룸(Alma Mater Studiorum)’이라 바꾸었는데, '학문의 모교'라는 뜻이다. 이 학교 출신 주요 인물로는 작가 단테, 시인 파스콜리,  천문학자  코페르니쿠스, 화가 뒤러 등이 있다. 

독일에서 가장 오래된 하이델베르크 대학(Universitat Heidelberg)은 1368년 설립되었다. 이 학교 출신으로 작가 괴테, 철학자 헤겔 및 야스퍼스, 과학자 다임러 벤츠 등이 있다. 노벨상 수상자도 7명이나 배출했다. 제2차 세계대전 말기, 하이델베르크를 사랑했던 한 미국 공군 장성이 이 지역을 공습에서 제외해 참화를 면했다는 아름다운 일화가 있다. 영화〈황태자의 첫사랑>의 배경으로 등장했던 곳이어서 영화를 좋아하는 올드팬들에게는 추억의 장소이기도 하다. 

독일의 하이델베르크 대학교

 

스페인의 살라망카 대학(Universidad de Salamanca)은 1218년 설립되었다. 국운이 융성할 때인 16세기말까지 살라망카 대학은 볼로냐, 옥스퍼드 대학과 어깨를 겨루며 유럽에서 학문의 전당이었다. 콜럼버스가 미지의 바다를 향해 출항하기 전, 이 대학 지리학 교수들에게 자문을 구한 바 있다. 잉카제국(페루)을 무너뜨린 피사로와 더불어 아즈텍 왕국(멕시코)을 정복한 에르난 코르테스(Hernan Cortes) 역시 이 대학 출신이다. 

나는 실존주의자
나는 기독교 신자가 아니다. 그렇다고 불자도 아니다. 한마디로 종교적 믿음이 없는 무신론자이다. 종교는 인간을 구원할 수 없다고 믿는 사람이다. 과거에도 그랬고 앞으로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죽음의 공포 때문에 종교가 존재한다고 하지만 나는 그것도 믿지 않는다. 종교라는 이름으로 지금까지 인류가 흘린 피의 양을 계량이나 할 수 있을까. 지금 이 순간에도 세계 도처에서 살육이 자행되고 있다.
아무런 의미 없이 해는 뜨고 진다. 그 억겁의 시간 속에서 생명을 가진 모든 것들은 생멸(生滅)을 되풀이해 왔다. 그중 하나 인간도 예외 없다. 욕계화택(欲界火宅)에 살다가 호화로운 묘에 묻히나, 초가삼간에 살다 이름 없이 죽으나 한조각 먼지가 되어 대기 속으로 흩어지는 것은 마찬가지다. 영혼이 떠난 육신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사후(死後)에 천국에 가고, 극락정토에서 영원히 복록을 누린다는 것은 생명이 붙어있는 동안 인간이 만들어낸 관념 속에만 존재하는 이상향일 뿐이다. 신이 인간을 창조했다고 하지만, 그 신은 인간이 만들었다는 것이 나의 지론이다.

세계 3대 성모 발현지
“아니 보고 믿는 자, 진복자(眞福者)이니라!” 라는 말이 있다. “종교는 묻지도 말고 따지지도 말라, 믿음 그 자체다”는 말과 맥을 같이한다. 그런데 현 인간 세상에 천상의 성모가 실제 나타났다는 장소가 세군데 있다. 소위 ‘세계 3대 성모 발현지(聖母 發現地)’라고들 말하는데 이곳 포르투갈의 파티마(Fatima), 프랑스의 루르드(Lourdes), 멕시코의 과달루페(Guadalupe)가 그것이다. 시기적으로 파티마가 가장 최근이다.
나는 ‘인문학적 여행자’ 입장에서 '기독교 성지 1번지' 파티마를 들러보기로 했다. 왜냐하면 많은 포르투갈 가톨릭 교도들은 파티마가 20세기 중대한 종교적 사건 즉 기적이 생긴 성지로 굳게 믿고 있기 때문이다.
지난날 유럽 여행길에 찾아본, 사도 바울이 복음을 전파했다는 그리스의 코린토스(Corintos, ‘고린도 전서’의 고향)와 성인 프란체스코가 살았던 이탈리아의 아시시(Assisi)가 그랬다. 지나온 북(北) 스페인 산티아고 순례길 800km 주파도 역시 같은 맥락이었다.

인문학적 여행
인문학(人文學, humanities)은 인간의 근원문제인 죽음, 종교, 철학, 사상과 문화에 관해 탐구하는 학문이다. 이 학문 영역으로는 미술, 음악, 문학, 철학, 인문과학 등 광범위한 학문 영역이 포함된다.
나는 인문학이란 결국 인간이 어떻게 살고 어떻게 죽어야하는지에 관한 제반 해결책을 제시하리라 생각한다. 그래서 나는 ‘인문학적 기행’이란 기치를 내걸고 육신의 힘으로 두 바퀴를 저어 앞으로 나아간다.
<자전거생활>의 김병훈 발행인은 여행에 대해 이런 글을 쓴 적이 있다.
“여행, 곧 떠남의 궁극적인 형태는 죽음이다. 생명은 우주를 호흡하지만 언젠가는 모든 것을 버리고 떠나야하는 한계를 숙명으로 갖는다. 일상에서 벗어나는 여행은 모든 것을 버리고 떠나는 죽음과 맥이 닿아있다. 길고 힘든 여행을 다녀오면 세상이 달라 보이고 주어진 현실을 긍정하게 되며 다른 사람뿐 아니라 모든 존재를 배려하는 마음이 생긴다. 떠나는 경험을 통해 현실을 더욱 가치 있게 여기게 되는 것이다. 결국 잘 죽는다는 것은 언젠가 나 역시 영원의 길을 떠나야 한다는 것을 자각하는 것이며 곧 현실을 잘사는 길이 된다. 그래서 여행은 죽음의 연습이되 음울한 예습이 아닌 생을 긍정하는 자아 각성의 과정이다.”

파티마(Fatima)
파티마는 코임브라에서 90km 정도 되니 ‘하루거리’이다. 어차피 리스본을 향해 남진하는 방향에 있으니, 지나는 길에 들릴 요량으로 페달을 재촉했다. 귀국일이 얼마 안 남았으니 매사 더 조심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곳에서 일박하며 ‘일일 신자’로서 성모님의 가호(加護)를 빌어보기로 했다.
국도 N-110을 타고 계속 내려오다가 투마르(Tomar)란 곳에서 N-113으로 바꾸어 타고 파티마에 도착했다. 어둠이 내리려는 해질녘이었다. 숙소를 구하고는 외출을 서둘렀다. 혹시 여행자를 위한 야간 미사가 있는지도 궁금했다. 자전거는 숙소에 두고 걸음을 재촉해 파티마 대성당으로 향했다. 파티마는 아주 작은 도시이므로, 얼마 걷지 않아 눈앞에 탁 트인 광장이 전개되었다. 바로 파티마 대성당 앞에 있는, 30만을 수용할 수 있다는 코바 다 이리아(Cove da Iria) 광장이다.
파티마 대성당(Sanctuary of Our Lady of Fatima)은 1928년 짓기 시작해 1953년에 완공되었다. 외관은 성모를 상징하는 순백색이다. 이 건물을 중심으로 성모 마리아 발현 예배당(Capela das Apancoes), 성삼위일체 성당(Basilica da Trinade), 베를린 벽(Muro de Berlin) 등으로 ‘파티마 성지(聖地)’는 구성되어 있다.
광장 입구에 위치한 ‘베를린 벽’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두꺼운 유리로 둘러싸인 공간에 광개토대왕 비석만한 콘크리트 조각이 들어서있다. 과거 동, 서독을 갈랐던 장벽의 일부를 독일에 살던 포르투갈 이민자들이 보내온 것이다. 옆에 서있는 안내문에는 이렇게 씌어 있다.
“1961년 8월 23일 세워진 베를린 장벽은 1989년 11월 9일 무너졌다. 사람들을 자유의 길로 인도해주신 성모께 감사드린다.”
다음으로 찾은 곳은 성모가 나타난 바로 그 지점에 세워졌다는 ‘발현 예배당’이다. 마침 신부가 야간 미사를 집전하고 있었다. 그분의 강론을 알아들을 턱이 없지만 그저 경건한 마음으로 성호를 긋고는 신도 속으로 들어갔다. 예배당 옆에는 촛불을 봉헌하는 긴 대(臺)가 설치되어 있다. 어둠이 찾아온 성지의 촛불은 성스러움을 증폭시켜 주었다. 

베를린 장벽 기념물

 

 

1917년 5월 13일
파티마의 작은 마을, 목초지에 놀고 있던 세 목동들 머리 위로 번개와 같은 섬광이 내려치면서 아이들 앞에 있는 떡갈나무 위에 성모 마리아가 나타났다. 세 목동은 루시아 산투스(Lucia Santos, 10세)와 사촌동생 자신타(Jasinta, 7세) 그리고 프란치스쿠 마르투스(Francisco Martos, 9세)였다.
최고 연장자(?)였던 루시아는 후일, 당시 자신이 목격한 성모의 모습에 대해 “매우 아름다운 부인이었으며, 입은 옷은 반짝거리는 물이 채워진 수정 유리보다 더 강하고 밝은 빛을 쏟아내는 찬란한 것이었다. 옷은 발밑에까지 늘어뜨려졌으며 그 경계 부분은 별들로 장식되어 있었다. 나이는 열여섯 살 정도 되어 보였고 표현할 수 없이 아름다운, 천상의 빛으로 가득한 용모를 지니고 있었다. 하지만, 무엇인지 생각에 잠긴 듯한 슬픔도 배어 있었다. 가늘고 섬세한 그 부인의 손은 진주 같은 것으로 엮어진 묵주를 들고 가슴 부분에서 서로 맞잡고 있었다.”라고 회고했다.
성모는 아이들에게 기도를 많이 하고 매달 같은 날 같은 곳에 나오라고 말했다.  목동들은 6월과 7월에는 성모의 말을 따랐지만 8월에는 그럴 수 없었다. 발 없는 소문이 널리 퍼지자 정부 관리는 ‘유언비어의 최초 유포자’ 아이들을 감금하고 말았다. 그리고는 포르투갈을 분열시키려는 책동이라고 규정지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기적에 대한 강한 믿음으로, 아이들이 아닌 여러 성인들이 확인하기를 갈망했다. 

파티마의 기적
성모가 아이들에게 한 마지막 발현 약속 즉 그해 10월 13일, 내가 지금 서있는 바로 이 자리 코바 다 이리아(Cove da Iria)에서 ‘태양의 기적(Miracle of The Sun)’이라고 불리는 미증유(未曾有)의 현상이 일어났다. 목격자는 신문기자와 사진기자까지 포함해서 대략 7만 명 정도였다.
검은 구름이 하늘을 완전히 뒤덮자 곧바로 엄청난 비바람이 몰아쳤다. 그러다가 오후 1시경이 되자 하늘을 뒤덮은 먹구름은 사라지고, 비도 그쳤다. 그리고는 태양이 구름층을 뚫고 나와 묘한 은빛 원반처럼 회전하기 시작하였다.
루시아는 군중을 향해 소리쳤다. “태양을 보세요!” 
하늘에는 여러 성인이 나타났고, 태양은 불 바퀴처럼 빠르게 회전하면서 여러 가지 색깔의 광선들을 발산하며 지상을 물들였다. 잠시 후, 태양은 하늘을 가로질러 지그재그 모양으로 전진하면서 지상을 향해 엄청난 속도로 떨어졌다가 다시 제자리로 돌아갔다. 7만여 명의 대군중 앞에 휘황찬란한 빛을 발하며 성모가 나타났다. 아이들의 목격담이 거짓이 아니었음을 증명한 시간이었다. 

성모발현 기념표지판
기념품 판매점의 성모 마리아 상(像)들
성모발현 바로 그 자리에 세운 성당에서의 야간미사
촛불 봉헌대
파티마 대성당 광장에서

 

 

기적 이후
지상에 온 성모는 루시아에게 세 가지를 당부(예언)했다. 이 자리에 성당을 짓고 토요일에 가톨릭 의식의 하나인 성체와 죄인을 위해 끊임없이 기도할 것과, 로사리오(Rosario, 묵주기도)를 계속하면 러시아에 공산주의가 사라지고 평화가 찾아올 것이며,  교황이 암살을 피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성모가 발현한 1917년은 무수한 인명이 살상된 제1차 세계대전이 한창이었고, 러시아에서는 민중 혁명을 일어나 수백 년 내려오던 짜르(황제) 체제가 전도된 혼란기였다.
1989년 11월 9일, 독일을 갈라놓았던 베를린 장벽이 무너졌다. 그해 12월 고르바초프가 바티칸을 공식 방문하여 교황과의 역사적인 만남을 가졌으며, 1990년 소련은 바티칸과 외교 관계를 맺었다. 이듬해인 1991년에 소련이 붕괴하면서 동유럽은 마침내 공산주의 지배에서 해방됨으로써 ‘파티마의 메시지’가 이루어졌다. 
또 다른 예언, 파티마의 성모 축일인 1981년 5월 13일에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바티칸에서 괴한이 쏜 총에 맞는 불행한 일이 발생했다. 범인은 터키인 메흐멧 알리(Mehmed Ali)로 불과 3m 거리에서 저격당했으나 기적적으로 살았다.
건강을 회복한 교황은 그해 12월, 로마 레비비아 교도소로 자신을 쏜 범인을 찾아 갔다. 저격범과 대화를 나눈 교황은 “그와 나 사이에 오갔던 이야기는 둘만의 비밀로 남을 것이다. 나는 내게 총을 쏜 형제를 위하여 기도할 것이다. 나는 이미 진정으로 그를 용서했기 때문에.”라고 말하며 그에 대한 사면을 당국에 요청했다. 

드디어 교황청도…
교황은 파티마의 성모가 자신을 구해주었다고 믿고 자신의 복부를 관통한 총알을 파티마의 성모상에 봉헌하며 감사의 기도를 올렸다. 그는 2005년 향년 84세로 선종했다.
세 목동 중 두 명, 프란치스코(1908~1919)와 자신타(1910~1920)는 1919년에 크게 유행했던 스페인 독감으로 병사했다. 나는 이 대목에서 자애로운 성모님이 왜 이리도 일찍 데려갔는지 이해할 수 없다. 천상(天上) 어느 곳에 중용하려했는지, 그 분의 마음을 감히 내가 어찌 헤아릴 수 있으리오. 
2000년 교황청은 그들에게 시복(諡福, beatification)을 내렸다. 시복이란 가톨릭 교단에서 복자(The blessed)로 인정하는 것을 말한다. 당시 열 살이었던 루시아는 코임브라에 있는 깔멜 수도원으로 들어가 평생을 수녀로 살다 2005년 97세로 생을 마감했다. 현재 성인으로 추대하는 심사가 진행 중이라고 한다.
3F의 나라
포르투갈은 흔히 ‘3F의 나라’라고 말한다. Fatima, Football, Fado가 포르투갈을 대표하는 이미지란 말이다.
이 세 가지 F로 포르투갈인 성정의 큰 흐름을 파악 할 수 있다. 바꾸어 말하면 이들 생활에 근간을 이루는 세 요소이기도하다. 특히 종교(Fatima)에 관한한 자신을 가톨릭 교도라고 생각하는 포르투갈 인 비율이 85%를 넘는다. 이 수치는 서유럽 아니 세계에서 가장 높을 것이다. 이 수치와 신심(信心)은 ‘기적의 파티마 성모발현’과 필연의 관계라고 나는 생각한다. 
 

구(Football)
축구 비전문가인 나는 포르투갈 축구에 대해 잘 알지 못 할 뿐더러 논할 자격도 없다. 다만 귀동냥 눈동냥으로 세계적인 스타 호날두를 배출했고, 스페인과 더불어 유럽에서 축구에 관한 열정은 대단한 정도는 알고 있다.
실제로 축구는 팍팍한 그들의 삶에 빼놓을 수 없는 활력소이다. 축구 전문 일간지가 세 개나 되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실업률이니 세금 인상이니 하는 우울한 뉴스를 잠시 잊게 한다. 그리고 즐거움을 주고 매일 대화거리를 제공하며 연중 몇 번의 큰 대회가 국민을 뭉치게 만든다.
그러면 우리와 관련된 포르투갈 축구는 과거 어떤 ‘사연’이 있었을까. 얼마 전 미국의 CNN 방송이 ‘역대 최고의 월드컵 경기 10개’를 선정했다. 그중 하나가 1966년 런던 월드컵, 북한 대(對) 포르투갈 전이었다. 당시 북한 팀은 영국에 도착했을 때만 해도 “본선 진출로 만족한다”고 했다. 첫 조별 경기에서 소련에 3대 0으로 패한 것도 ‘예상되었다’고 평가했다.
하지만 두 번째 경기에서 칠레에 1대 1로 비긴 다음, 월드컵에서 두 번이나 우승한 이탈리아를 1대 0으로 꺾는 대파란을 일으켰다. 다음 상대는 조별경기 전승으로 월드컵 처음으로 본선에 진출한 포르투갈. 1966년 7월 23일, 리버풀 구장에 5만 천명의 관중이 꽉 들어찼다.
  

‘25분의 영광’
모두들 포르투갈의 승리를 낙관했다. 그러나 경기가 시작되자 그라운드의 양상은 관중들의 눈과 귀를 의심케 했고, 언론은 흥분한 나머지 평정심을 잃고 말았다. 경기 시작 후 1분, 22분, 25분에 북한이 선제 세골을 휘몰아친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쉽게 넘어질 포르투갈은 아니었다. 즉각 반격 태세에 돌입했다. ‘흑표범(Pantera Negra)’이라 불리는 식민지 모잠비크 태생의 에우제비오(Eusebio)의 눈이 빛나기 시작했다. 먹이를 향해 돌진하듯, 그의 발끝에서 대포알 같은 슈팅이 27분, 43분, 56분, 59분에 북한의 골망을 흔들었다. 스코어는 3대4.
종료 시간이 다가오자 북한은 비기기라도 하려고 무리수를 두다 80분에 PK를 내 주고 말았다. 북한은 ‘25분의 달콤한’ 시간을 누렸지만 지키지는 못했다. 결과는 3대5 역전패.
비록 졌지만 포르투갈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던 북한 축구. 런던 월드컵을 통해 세계에 알리는 계기가 되었고 우리에게도 큰 자극제가 되었다.

잊지 못 할 골 세레모니
36년이 흐른 2002년 서울 월드컵. 처음으로 우리가 호스트가 된 월드컵이기도 했고, 한국 축구는 히딩크라는 ‘명장’을 앞세우고 상승세를 타고 있었다.
출발이 좋았다. 조별 첫 경기, 유럽 팀 중 약체지만 대통령까지 응원 온 폴란드를  2-0으로 제압했다. 다음 미국과의 2차전에서는 PK를 놓쳤지만 1-1로 무승부를 거두며 16강 진출 가망을 살렸다. 조별리그 마지막 상대, 포르투갈과 비기기만 해도 16강에 진출할 수 있는 상황. 당시 그 경기에서 0-0으로 비겼더라면, 우리나라와 포르투갈은 나란히 본선에 진출할 수 있었다. 만약 우리가 이긴다면, 조 1위로 16강 진출 확정이었다.
전반전을 0-0으로 마치고, 후반전이 시작되자 타 구장 소식을 알았는지 포르투갈의 주 공격수 루이스 피구를 비롯 파울루 벤투(현 한국 국가대표팀 감독) 등은 ‘우리 비겨서 같이 16강에 나가자’는 듯 간절한 표정을 나는 그들의 얼굴에서 감지했다. 경기를 시청한 국민 모두가 ‘애절’하게 느꼈을 것이다. 그러나 승부의 세계는 냉엄한 것, 그리고 그 결과가 얼마나 엄중한 것인가!
축구는 흐름의 경기, 대세는 한국 쪽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드디어 박지성 선수에게 공이 날아왔다. 가슴으로 트래핑한 후 현란한 발놀림으로 상대 수비수를 따돌린 박지성은 체중을 실어 왼발 강슛을 날렸다. 얼마나 강했는지 키퍼 가랑이를 통과해 골망을 흔들었다. 환희의 골 세레모니는 전속력으로 달려가 ‘히딩크 감독 품에 덥썩 안기는 것’이었다. 성모 마리아가 아기 예수를 품듯…. 2002 월드컵을 통틀어 잊지 못할 명장면이었다. 종료 휘슬과 함께 한국은 1-0으로 승리. 포르투갈의 16강 진출은 좌절되었다. 2명 퇴장, 9명으로 치열하게 싸운 포르투갈 선수들은 고개를 숙이고 그라운드를 빠져나가 귀국 짐 보따리를 싸야만 했다.

파두(Fado)
프랑스에 샹송(chanson)이 있고, 이탈리아에 칸초네(canzone)가 있다면 포르투갈엔 파두가 있다. 발랄하고 경쾌한 두 나라의 음조와는 달리, 파두는 포르투갈 특유의 감정이 실린 우수에 찬 감정으로 부르는 노래이다. 아직 샹송만큼은 안 되지만 파두도 제법 국제적으로 알려졌다.
19세기 중반 리스본에서 제대로 된 형식을 갖추어 불리어졌다하나, 그 기원에 대해서는 정확히 알려진 바는 없다. ‘오리진’은 그보다 훨씬 더 세월을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는 것이 정설이다.
포르투갈 인의 정서를 나타내는 말 중에 ‘사우다드(saudade)’란 것이 있다. 그들도 명확히 정의하기 어려운 개념이라고 한다. 죽음, 이별, 그리움, 갈망, 동경 등의 총체적 의미로 대상은 사람일수도 있고 장소일 수도 있다. 굳이 우리말로 번역하기 어려우나 ‘한(恨)’에 근접한 표현이다. 유럽 여러 나라 중에서 우리의 ‘한의 정서’를 공유하는 나라는 유일하게 아일랜드뿐이라고 알고 있었는데 이제는 포르투갈을 추가해야만 할 것 같다.
파두 곡조에는 이 사우다드가 녹아있다. 파두의 원뜻은 ‘운명(영어의 fate)’이다. 단어에서 풍기듯 비극을 암시한다. 고통스러운 운명의 질곡, 멀리 떨어져 만날 수 없는 연인, 갈 수 없는 고향에 대한 암울한 향수 등의 감정이다.
15세기 포르투갈은 대항해 시대, 발견의 시대였다. 무수히 많은 선원, 탐험가들이 험악한 대서양을 향해 떠났다. 일확천금을 꿈꾸었지만 그것을 이룬 사람은 극소수이고 많은 사람들이 ‘불귀의 객’이 되었다. 떠나간 자는 바다에서 재회를 기약할 수 없는 불안한 세월을 보냈고, 남은 자는 육지에서 속절없는 기다림뿐이었다.
대항해 시대가 저문 후에도 많은 포르투갈 인들은 고향을 등졌다. 그래서 ‘이민의 나라’란 말까지 생겼다. 초기 이민자가 많이 간 곳은 17세기부터 정착한 식민지 브라질. 그 후에도 많은 사람들이 가난과 위정자의 압제를 피해 미국, 캐나다, 유럽으로 떠났다. 가버린 자는 그렇다 치더라도 포르투갈에 남아 삶을 영위하는 자는 고통이었다. 원래 이별이란 떠나는 자보다 남은 자의 고통이 큰 법이다.

리스본의 파두박물관
‘파두의 여왕’ 아말리아 호드리게스
포르투갈식 기타

 

 

전설의 파두 가수
보통 파두는 가수 한명이 서양 배 같이 생긴 12줄짜리 포르투갈 식 기타(Guitarra Portugesa)에 맞추어 부른다. 파디스타(fadista, 파두가수)가 두 명일 때는 한 명이 선창을 하면 다른 한 명은 경쟁을 하듯 다른 곡을 부른다. 그러니 이중창은 아니다.
파두는 세계음악에 기여한 공로로 2011년 UN 세계무형유산(Intangible Cultural Heritage)에 등재되었다.
멕시코 출신의 티시 이노호사(Tish Hinojosa)가 스페인어로 부른 <돈데 보이, Donde Voy, 나는 어디로 가야하나요>는 음조나 가사에서 파두와 맥을 같이 한다.  일본의 엔카(戀歌)는 서정성은 있으나 남녀의 이별을 주로 노래했으므로 파두와는 비교대상이 아니다.
포르투갈은 물론 세계적인 파두 가수 아말리아 호드리게스(Amalia Rodrigues, 1920~1999). 대표곡으로는 <암울한 숙명, Maldicao>이 여전히 회자된다. 제목부터가 가슴 저미는 슬픔을 암시하고 있다. 1940~50년대에 전성기를 누린 그녀는  ‘전설의 파두 가수’로 불리며 가난 속에서 노래로 금자탑을 이루었다. 그런 그녀가 세상을 뜨기 전 마지막으로 이런 의미심장한 말을 남겼다.
“내가 파두를 부르는 것이 아니라, 파두가 나를 부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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