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라시아 대륙의 끝, 여정의 끝

포르투갈 공화국(Republica Portuguesa) 제5편
육지가 끝나는 곳에 바다가 시작되나니… 
유라시아 대륙의 끝, 여정의 끝

머물수록 볼거리가 샘솟는 리스본을 뒤로 하고 유럽의 땅끝 ‘호카 곶’을 향해 최후의 페달링에 나선다. 해발 140m 절벽 위에서 마주친 대서양은 광막하고 대단히 거칠다. 영원히 지구를 떠받치는 형벌을 받은 아틀라스의 절망 위에 저 아득한 미지의 세계를 향해 처음으로 모험을 떠난 포르투갈 인들의 용기에 다시금 감동이 밀려온다. 우리에게도 바다는 여전히 기회다. “저 바다는 미지의 세계에 대한 공포로 가득하다. 하지만 도전하지 않는 자는 잡을 수 없다. 나가자 바다로!”

단애(斷崖)의 연속인 대서양 해변길

 

나는 여행을 계획할 때마다 행하는 오래된 습관이 있다. 떠나기 수 개월 전부터 여행할 나라의 자료를 구하고 스터디하는 일이다. 이 준비는 학창시절 공부처럼 ‘복습보다는 예습이 효과 있다’는 말이 아직도 유효하다고 믿기 때문이다. 진부한 표현이지만 ‘여행은 아는 만큼 보인다’는 철칙이다.
‘알기’ 위해서는 시간이 많이 소요되는데 실제 여행보다 이 기간이 더 설레고 즐겁다. 이는 전문가든 아니든 별반 차이가 없을 것이다.
구하는 자료란 역사, 정치, 지리, 문학, 음악, 미술, 스포츠, 신화, 사건, 전쟁, 인물, 영화, 소설, 건축 등을 말한다. 이 정도는 그 나라의 ‘총망라’다. 그 중에서도 우리의 관심사나 우리와의 관계, 그리고 나의 버킷리스트(bucket list)에 주안점을 둔다.
“떠나고 싶을 때 떠나라” 든지 “비우고 떠나야 많이 담아온다” 등의 카피가 인구에 회자되던 때가 있었다. 나는 그 유행어에 동의할 수 없고 앞으로도 할 수 없을 것만 같다. 

호카 곶


‘힐링’으로서의 독서
포르투갈 여행을 앞두고 나의 ‘웹서핑’에 소설 한권이 걸려들었다. <리스본행 야간열차, Night Train To Lisbon>, 작가는 파스칼 메르시어(Pascal Mercier, 1944~  )였다. ‘야간열차’가 주는 이미지에서 아가다 크리스티의 <오리엔트 특급살인>처럼 리스본 관련 ‘사건소설’인줄 알았다. 보다보니 유럽 문학의 현대고전이라 할 만큼 심오하고 난해한 면이 있다. 솔직히 말해 재미는 없다. 그러나 타성에 젖어 살면서 간과하기 쉬운 ‘내안의 나를 찾아 떠나는 여행’의 가능성을 제시한 측면에서 흥미를 끌었다. 작가는 이렇게 쓰고 있다.
“우리는 우리 삶의 일부만 경험하며 살아가고 있다. 그러나 나머지 부분도 큰 의미를 지닌다. 의식적으로 인식하지 못해도 우리 삶에 색깔을 입혀주고 멜로디를 연주해주는 것은 그 부분이다. 즉, 그 부분이 어떻게 구현되는가에 따라 삶이 만족하게 흘러 갈 수도 있다.”
흔히들 인생을 여행에 비유한다. 인생이란 여행은 출발점도 도착점도 나의 선택이 아니다. 여정도, 길 위에서 만나는 사람조차도 내가 정할 수 없다. 내가 바꿀 수 있는 것이란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그러나 단 한 가지, 내가 온전히 할 수 있는 것은 여행길 위에서 ‘내 안의 나를 찾아내는 것’이다. 이 책은 가이드북 개념이 아니라서 포르투갈 여행에는 별 도움이 되지 않을지라도 ‘긴 인생 여행길’에 많은 도움이 될 것 같았다.
책은 정보도 주지만 지혜와 통찰을 얻는 수단이기도 하다. 더 나아가 치열한 삶 속에서 상처 입은 마음을 위로하고 때론 치료도 해준다. ‘독서 치유법’은 힐링의 좋은 방법이기도 하다.
“내면의 소리에 귀를 기울여라!”
이 책은 나로 하여금 두 사람의 현자(賢者)를 떠올리게 했다. 먼저 스위스의 심리학자 융(Carl G Jung, 1875~1961)이다. 그는 콤플렉스, 페르소나(persona, 가면을 쓴 인격), 내향성, 외향성 등의 심리학적 개념을 정리했다. 또한 서구학자답지 않게 불교나 심오한 동양철학에도 조예가 깊었다. 

“Your vision will become clear only when you can look into your own heart.
Who looks outside dream, who looks inside awakes.
당신의 관점은 스스로의 마음을 들여다 볼 때만 뚜렷해진다. 
밖을 내다보는 자는 꿈을 꾸지만 안을 들여다보는 자는 깨닫는다.”

그의 주장은 “내면의 소리에 귀를 기울여라”로 집약된다. 그러면서 융은 나를 세 가지―본성의 나, 남이 바라보는 나, 내가 되고 싶은 나로 구분했다. 이 세 가지 속성의 나가 서로 연결고리를 가지고 보완적으로 상황에 따라 에너지를 집중시켰다가 흩어져 진정한 나의 삶이 완성된다는 것이다. 이때 나는 어떤 삶을 살지 자신이 선택해야 한다.
또 다른 사람은 오래 전에 이미 인간의 심성을 동물에 빗대 꿰뚫어본 노예출신의 이솝(Aesop, BC 6세기경)이다. 그는 이런 말을 남겼다.
“어떤 나로 살 것인가. 현실의 노예가 되어 나를 보지 못한, 혹은 외면하는 나의 모습은 없는지는 스스로 깨달아야만 한다. 운명은 인간에게 두 가지 길을 제시했다. 하나는 자유의 길로 시작은 힘들지만 갈수록 평평해 견디기 쉽다. 또 다른 길은 노예의 길로 처음은 들판처럼 평평하지만 갈수록 험난하여 큰 고통이 따른다.”

동명(同名)의 제목으로 영화로 개봉되어 잔잔한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칼 융. 원래 정신과 의사로 프로이트와 더불어 인간심리분석의 선구자였다

 

오래된 ‘달동네’ 알파마 지구
리스본 시는 10개 이상의 행정구역으로 구분되어있다. 짧은 시간 내에 리스본을 파악하기 위해 최소 3~4개 지구는 꼭 가보아야 한다고 판단했다. 며칠 전 다녀온 벨렝 지구를 제외하면 알파마(Alfama) 지구(地區)와 바이샤(Baixa) 지구가 공략 대상이다.
먼저 알파마 지구는 리스본에서는 가장 오래된 지역으로, 이슬람 통치기에 아랍인들이 모여 살던 곳이었다. 알파마란 아랍어인 'Al-hama'에서 온 것으로 '뜨거운 물'이라는 뜻이며 이 지역에서는 아직도 물이 솟아 나오는 것을 볼 수 있다고 한다.
지금은 리스본의 ‘달동네’로 대표적인 빈민가이다. 좁고 꼬불꼬불한 중세 그대로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불과 얼마 전까지 이 일대 골목길에 사창가가 존재했다고 한다. 구각(舊殼)을 벗으려는 듯, 인적 없는 빈집과 재개발 공사현장이 많아 거리는 어수선했다. 
내가 묵은 숙소는 인도인이 운영하는 ‘시티 센터 호스텔’이었다. ‘물타니’라는 지배인은 내가 외출할 때마다 “밤늦게 혼자 다니는 것은 삼가세요”라고 충고했다. 몇 번 농담을 주고받았을 뿐인데, 고객이기보다는 같은 동양계라 우호의 표현이라 생각했다.
그의 말대로  밤늦은 ‘귀가’ 때면 거리의 여인들이 유혹의 눈길을 보내왔지만 적극적이지는 않았다. 조심은 해야겠지만 우범지역의 낌새는 느낄 수 없었다. 나는 이지역이야말로 리스본 서민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직접 보고 느낄 수 있는 최적의 장소란 생각이 들었다.

리스본 최고의 전망대
알파마 지구는 1755년 리스본 대지진 때 피해가 거의 없었다. 건물들이 견고한 암반위에 세워졌기 때문이다. 고지대여서 쓰나미도 비껴갔다.
대표적인 유적은 상 조르제 성(Castelo de San Jorge 城). 리스본에서 가장 높은 곳으로 최고의 전망을 자랑한다. 그러니 올라가는 길이 만만치 않았다. 전기자전거가 아니었다면 정말 올라가기 힘들었을 것이다. 이 지역에서 BC 300년경으로 추정되는 철기시대의 유물이 출토된 적이 있다. 오래전에 이렇게 높은 곳에 어떻게 사람들이 군집해 살았는지 상상하기도 어려웠다.
반면 외부 침략에 방어하기는 유리했고 포위당하더라도 물이 솟아나오니 오래 견딜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장점으로 아랍 정복자들은 이곳에 왕궁을 짓고 포르투갈을 지배했다. 국토수복 후에도 포르투갈 왕들이 그 자리에 그대로 들어앉았다.
옛 성터는 넓었지만 자전거를 입구에 맡기고 들어왔으므로 걸어 다닐 수밖에 없다. 높은 언덕에 자리 잡은 덕에 리스본 사위(四圍)가 다 눈에 들어온다. 여기는 입장료 내고 들어오지만 무료인 그라샤 전망대나 산타 루시아 전망대도 조망이 좋다.
성의 이름은 영국의 수호성인 세인트 조지(Saint Jorge)에서 따왔다. 1371년 포르투갈의 캐서린 공주와 영국의 찰스 왕자와의 결혼 즈음에 이 성을 바쳤기 때문이다.
 

과거 상 조르지 성을 방어하던 중세의 대포. 이 성은 전망대로서도 손색없다
밤의 리스본

 

‘엥그리아 성당 짓기?’
상 조르제 성을 향해 올라가다보면 웅장한 건물이 시선을 잡아끈다. 19세기에 선포된 바로크 양식의 국립 판테온(Panteao National)이다. 판테온이란 고대 로마 때 신들에게 바치는 공간, 즉 신전을 말한다. 현재 로마에 있는 ‘오리지널 판테온’은 AD 125년 히드리아누스 황제 집권 시 지은 건물이다. 신에 가까이 간 죽은 자들을 위한 공간이니 얼마나 공을 들여 지었을까. 로마 여행 때 들러본 감흥이 아직도 남아있다.
이곳은 로마 것만은 못하지만 수려한 외관에 크기 또한 보는 이를 압도한다. 현재 역대 왕이나 근대에 들어서는 대통령, 유명 작가나 ‘국민 파두가수’라 불리는 아말리아 로드리게스까지 안치되어있다.
고지대에 건물도 워낙 커 최상층 발코니는 알파마 일대의 경관을 360도 조망할 수 있다. 원래 이 건물은 16세기 후반 강력한 마누엘 왕의 딸 마리아가 요청해 성당으로 짓기 시작했다. 이름은 산타 엥그라시아 성당(Igreja de Santa Engracia). 건물 완공에 300여년이 걸렸으니 사연도 많았다. 규모가 웅장하고 건축미가 아름답기는 하지만 타 종교의 비난과 재정적 어려움, 설계변경 등으로 많은 우여곡절을 겪었다. 그래서 포르투갈 사람들은 해도 해도 마무리가 잘 안 되는 일을 가리켜 ‘산타 엥그리시아 성당 짓기’라는 자조적 표현까지 생겨났다고 한다.

판테온. 원래는 성당이었다

 

리스본 최대 번화가
바이샤 지구는 7개의 언덕으로 이루어진 리스본에서 유일하게 평지이다. 당연 대지진 때 대부분 파괴되어 도시계획으로 다시 태어난 곳이다. 그래서일까, 레스토랑과 노천카페, 기념품 숍, 숙박시설 등이 밀집해 살아 숨쉬는 번화가를 이루고 있다.
호시우&피게이라 광장은 서울의 광화문이나 종로통처럼 리스본의 중심광장이다. 리스본을 방문하는 여행객이라면 한두 번쯤은 거쳐 가는 곳이다. 원래 이름은 동 페드루 4세 광장(Placa de Pedro IV)인데 보통 ‘호시우 광장’이라 부른다.
지척의 거리에 주앙1세의 청동기마상이 있는 곳이 피게이라 광장(Placa da Pigueira)이 있다. 중세시대 여기서 종교재판을 열어 ‘마녀’를 화형했다. 공개 종교재판이란 종교에 대한 경각심을 높이기위해 대중이 많이 모이는 곳에서 했다.  
광장 바로 인근에 오페라하우스와 호시우 기차역이 있다. 과거 귀족들이 살았던 부티 나는 주택과 카페, 레스토랑이 줄지어 있다. 그러니 자연 관광객이 들끓고, 관광객은 물론 그들을 노리는 소매치기, 집시들도 보인다. 그들에겐 ‘리스본에서 최고로 물 좋은 곳’일 것이다. 아프리카나 중동에서 난민이 유입되고 나라 살림은 팍팍하니 소매치기나 ‘거리의 여인’이 생겨날 수밖에 없다. 이들은 자전거 여행자나 동양인 여행자를 ‘밥’이라 생각하니, 나야말로 ‘최고의 식사’ 대상이다. 긴장의 끈을 늦춰서는 안 되겠다(하나 더 보태면 붐비는 트램, 특히 28번은 특별한 주의를 요한다). 
광장 중앙에서 시원스레 물을 뿜어내는 분수가 마음을 편안하게 해준다. 바닥은 S라인 곡선미가 돋보이는 ‘칼사다 포르투게사’ 방식이다. 파도라고 느끼는 사람은 현기증을 일으키지 않을까 싶다.

리스본 최대 번화가에서 코메르시우 광장으로 들어오는 개선문. 위에는 전망대가 있다
좌측 반쯤 보이는 건물이 리스본 대성당, 중앙이 리스본의 명물 트램, 우측은 툭툭이 택시(tuk tuk의 ’오리진’은 동남아시아인 듯)
산타 쥬스타 엘리베이터(Elavator de Santa Justa). 1902년 운행을 시작할 때는 증기의 힘을 이용했다. 45m 높이로 특히 야경이 멋지다
리스본의 벼룩시장. 그들은 도둑시장(Feira da ladra)이라 부른다(설마 장물거래소는 아니겠지?)

 

이베리아 반도에서 가장 긴 강
테주 강(Rio Tejo)은 스페인 중부에서 발원하여 장장 1008km를 달려와 여기서 대서양으로 흘러나간다(스페인의 고도, 톨레도를 휘감아 도는 강이 ‘타호 강’이었는데 지금 생각하니 그것은 스페인식 발음이었다).
강폭도 리스본 일대에 이르러 2km가 넘을 정도로 넓다. 그 위를 가로지르는 멋진 다리가 놓여있다. ‘4월25일 다리(Ponte 25 de Abril)’ 이름이 특이해 궁금증이 일었다. 원래는 ‘살라자르 다리’였는데, 혁명으로 독재정권을 축출한 거사 일로 다리이름으로 바꾸어 버렸다. 제주도의 ‘5·16 도로’인 셈이다.
거사 당일 군인들의 총구에 시민들이 카네이션을 달아줬기 때문에 일명 ‘카네이션 다리’라고도 부른다. 구조는 현수교(트러스아치교)로 샌프란시스코에 있는 금문교와 흡사하지만 길이가 2274m로 금문교보다 500m 정도 짧다. 북부의 항구도시 포르투(Porto)의 동 루이스 다리와 함께 미국의 같은 설계회사의 작품이다.
저 멀리 보이는 110m 높이의 두 팔 벌린 그리스도 상(Christo Rei)은 브라질 리우 데 자네이로에 있는 ‘리우의 예수상(Christo Rendentor)’과 거의 같은 형상으로 서로 마주보고 있다고 한다. 같은 방향을 응시해야 더 설득력이 있지 않을까 싶지만 그것은 나의 생각이다.
리우의 것은 포르투갈로부터 독립 100주년을 기념해 1931년 건립했다. 그러나 이곳의 상은 1959년, 2차 세계대전의 피해를 비껴간 것에 대한 감사의 의미로 세웠다. 예수 신앙심에 관한한 포르투갈을 따라갈 나라가 없다.

장군 아닌 탐험가를 환영하던 ‘개선문’
아우구스타 거리는 매력 만점이다. 호시우 광장과 피게이라 광장 사이에 있는 직선으로 이어진 보행자 전용도로를 말한다. 거리 양쪽으로 유명 브랜드숍과 기념품 가게가 끝없이 늘어서있다. 한마디로 포르투갈 최대 쇼핑가다.
거리에서는 행인의 발길을 멈추게 하는 예술공연이 다양하게 펼쳐지고 있다. 나는 유럽여행 중에 거리의 악사나 ‘퍼포먼스’를 잠시라고 듣거나 볼 경우, 동전을 주는 습관이 있다. 나에게는 작지만 받는 이는 크게 생각하리라 짐작하기 때문이다. 가끔 악사에게는 신청곡을 청할 때도 있다. 거절당한 적은 없다. 더욱 신명이 나서 연주했다. 그럴 땐 보너스 격으로 지폐를 주기도 한다.
번화가가 끝나는 곳에 승리의 아치라 불리는 웅장한 ‘개선문’이 서있다. 아르코 다 루아 아우구스타 문(Arco da Rua Augusta 門) 즉, 주 출입문 격이다. 상단에는 마리아 1세가 폼발 후작과 바스쿠 다가마에게 월계관을 씌워주는 조각상이 장식하고 있다. 대항해 시대에 수많은 탐험가들이 개선장군처럼 환영받던 문인데 지금은 나를 비롯 많은 여행객들이 드나들고 있다.
개선문을 통과하면 코메르시우 광장(Placa do Comercio)이 펼쳐진다. 리스본의 대표적 광장으로 상당히 넓다. 원래 마누엘 궁전이 있었으나 대지진 때 파괴되자 재건하지 않고 벌판이란 의미의 ‘그냥 광장’으로 두었다. 다만, 폼발 후작과 함께 도시 재건을 지휘한 호세 1세의 기마상이 중앙에 독야청청 서 있다. 모스크바의 붉은 광장에 버금갈까, 바로 테주 강과 연결되니 더 넓어 보인다.

테주 강에서 떠오른 대동강
하구(河口)이다 보니 어디가 강이고 어디가 바다인지 모르겠다. 불과 몇 분 전까지 발 디딜 틈 없던 번화가, 이제는 마음을 착 가라앉게 만드는 서정적 경관이 펼쳐지는 강변이다.
강둑에 앉아 드넓은 강을 하염없이 바라보며 이 생각 저 생각으로 모처럼 한가한 시간을 보내며 여독을 풀었다. 역시 ‘물’은 운치가 있어 사람의 마음을 정화시켜준다. 500여년 전부터 포르투갈인들은 이 물길을 통해 미지의 바다로 나갔다. 그때의 먼 바다 항해는 지금의 우주여행만큼이나 두려웠을 것이다. 다 가마, 디아스, 카브랄 등의 탐험가는 살아 돌아와 지금도 명성을 떨치고 있지만 이름 없이 불귀의 객이 된 사람도 무수히 많았으리라.
평범한 포르투갈 아낙들은 이 자리에서 돈 벌러 나간 지아비를 한없이 기다렸을 것이다. 돌아오지 못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기다림에 지쳐 돌이 된 아낙네, ‘망부석(望夫石)’이란 우리 표현, 얼마나 멋진가. 그러나 포르투갈의 과장법도 만만치 않다. 시인 페소아(Fernando Pessoa)는 “바다는 우리의 눈물”이라 표현했다. 
그들은 가슴깊이 맺힌 슬픔을 파두(fado)란 형태로 절창을 토해냈다. 그러나 섬세한 한국인의 정서는 시각적, 청각적, 감각적으로 이렇게 노래했다. 마치 한 폭의 잘 그려진 그림을 보는 듯 생생하다. 나는 도도히 흘러가는 강을 응시하며, 고려시대 남호 정지상(南湖 鄭知常)의 <送人, 임을 보내며>을 나직이 읊조렸다.

雨歇長堤草色多(우헐장제초색다)   비 갠 긴 강 둑에 풀빛이 짙어지는데
送君南浦動悲歌(송군남포동비가)   슬픈 노래를 부르며 남포에서 임을 보냈네 
大同江水何時盡(대동강수하시진)   대동강 저 물이 언제 마르겠는가  
別淚年年添綠波(별루년년첨록파)   해마다 내가 이곳에 와 눈물을 뿌리니…

 

4월 25일 다리, 저 멀리 대형 그리스도 상이 보인다


자전거 타는 부부와 서민식당을 찾아서 
강변에서 자전거 타는 부부를 만나 사진을 부탁했다. 나의 원칙은 자전거를 탄다면 ‘일단 안심’이다. 남자 팔엔 문신이 있었지만 부부가 같이 타니 나는 완전 ‘무장해제’를 하고 카메라를 맡겼다. 서로 사진을 찍고, 찍어주다 보니 정(?)이 들어 벤치에 앉아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이런 저런 담소를 나누었다. 나의 여행담이 주를 이뤘지만 그들도 ‘여행자가 본 포르투갈’에 관심이 많았다.
조안나와 알렉스로 40대 후반 정도의 평범한 포르투갈인 부부였다. 생활자전거로 테주 강변에서 가끔 라이딩을 즐긴다고 했다. 그들도 역시 자전거 여행자인 나에게 마음을 놓은 듯 했다.
스페인에서도 느꼈지만 서구인들은 여행자(불편에 처한 사람)가 요청하면 도와주는 것을 생활의 큰 덕목으로 여기고 성실히 도와준다. 나는 이것을 오랜 여행을 통해 체득한 ‘요청의 힘’이라 말하고 싶다. 한편 그들 또한 자전거여행을 했거나 앞으로 할 계획을 가지고 있으리라 추측해본다.
좋은 기회였다. 리스본에서 포르투갈 전통음식, 바칼라우를 먹어보려했는데 알렉스 부부를 만났으니 말이다. 바칼라우란 대구로 만든 요리를 통칭해 부르는 이름이다. 내가 가지고 있는 여행 가이드북에 의하면 파두(fado)를 감상하며 바칼라우 요리를 먹는다면 최소 30유로(약 3만8500원). 여기에 포르투 셰리 와인이라도 한잔하고 팁까지 포함하면 40~50유로는 예상해야 했다.
해도 기울어 어느덧 어둠이 내리려 할 때 내가 제안을 했다. 바이샤 지구에서 바칼라우 요리 잘하는 집을 알려주면 “저녁은 내가 쏘겠다”고 했다. 조건은 관광객들이 잘 가지 않고 ‘리스보너’들이 잘 가는 ‘동네 맛집’이라 했다. 나의속셈은 가격도 저렴하면서 서민들과 북적거리며 같이 먹는 경험을 해보고 싶었다.

조안나와 알렉스 부부
현지인 부부와 함께한 바칼라우 저녁식사

 

300가지가 넘는 바칼라우(Bacalhau) 요리!
알렉스는 흔쾌히 동의했다. 부부를 따라 골목 안에 자리 잡은 식당 여러 군데를 들렀으나 모두 만원이었다. 그럴 때마다 슬쩍 면면을 보니 거의 현지인이었다. 나는, 알렉스가 내 의도를 알아 차렸구나 안심하고는 군말 없이 따라다니다가 어느 한집에 찾아들었다. 4인 테이블이 8개인 크지 않은 식당이었다. 알렉스 부부는 내게 바칼라우에 대해 잘 설명해주었다.
대구는 포르투갈의 ‘국민생선’이다. 그러니 최대 명절인 부활절과 크리스마스에 빠지는 법이 없는 음식이라 했다. 대구로 만들 수 있는 요리가 300가지가 넘는다고 하니 포르투갈 인들의 ‘대구사랑’은 놀랍다(나는 즐겨먹는 고등어로 10가지 이상의 요리를 말할 자신이 없다).
그런데 더 놀라운 것은 대구가 포르투갈 근해에서 잡히지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기후 변화로 안 잡히는 것이 아니라 오래전부터 먼 바다, 즉 북해에서 가져온 것을 소금에 절여 즐겨 먹었던 것이다. 대항해시대부터 원양에 대비한 생선 갈무리 비법이 지금까지 내려오는 것으로 짐작했다. 말하자면 우리의 ‘안동 간고등어’인 셈인데, 일명 ‘간잽이(鹽藏師, 장사)’의 염도 및 숙성기간에 따라 맛이 달라진다. 그러나 포르투갈 식은 염장한 대구를 물에 불려 염기를 얼마나 빼느냐에 맛이 달라진다고 했다.
우리 셋은 모두 바칼라우 아사두(Bacalhau assado)를 주문했다. 이것은 염장대구를 올리브 오일과 마늘을 넣고 오븐에 구운 다음, 감자 칩이나 삶은 감자, 채소나 올리브 몇 알을 곁들인 가장 심플한 대중적인 요리였다.
염장이니 만치 선도나 맛을 기대할 순 없었지만 현지인과 함께 현지사람들이 즐겨먹는 음식을 먹는 것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식대도 셋이 50유로였으니 적당했다. 다만, 물에 불려 염도를 많이 제거해 달랬는데도, 무척 짜서 그날 밤 물을 많이 들이켜 화장실에 들락날락 하느라 잠을 설쳤다.

기독교 정신을 구현하는 성당?
리스본에는 크고 작은 성당이 정말 셀 수 없을 정도로 많다. 인구대비 성당의 숫자는 유럽에서 아마 최고일 것 같다. 모두 나름대로 역사적 사연을 간직해 내려오겠지만 내가 본 이 성당은 잊혀지지 않는다. 호시우 광장 인근에 있는 상 도밍고 성당(Igreja de San Domigos)이다.
들어서는 순간 어둠침침한 내부와 곧 무너질 것만 같은 기둥을 보고는 발길을 돌리고 싶을 정도였다. 그래도 몇몇 사람들이 진지하게 예배를 드리고 있어 마음이 놓였다. 흑인 신자도 있고 성당 주변에도 흑인들이 많이 눈에 띄었다. 알고 보니 앙골라나 모잠비크 등 과거 식민지 출신의 성직자가 근무한다고 했다.
이 성당은  대지진 때 반파되었고 비교적 최근인 1959년에 또 큰 화재를 겪었다. 문제는 지진 당시 상처투성이의 기둥 위에 파괴된 천장만 새로 올리고 나머지는 그대로였다. 그리고 화재시의 그을음도 군데군데 눈에 띄었다. 비관론자는 상처뿐인 ‘비극의 성당’이라 하겠지만 나는 재앙 속에서 굳건히 버틴 ‘기적의 성당’이라 말하고 싶다. 교인들에겐 성당건물 자체만으로도 희망의 증거가 될 듯싶다.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성스러움이 배가되는 것 같아 숙연한 마음이 들었다. 이스탄불의 아야 소피아 성당-지진 많은 터키에서 수백 년, 더구나 교주(기독교에서 이슬람교)가 바뀌는 극적인 상황 속에서 웅장한 돔 형태 그대로 자태를 유지하듯이.

상 도밍고 성당. 리스본 유일의 흑인 성직자들이 있는 곳
카몽이스의 석관. 제로니무스 수도원 성당에 바스쿠 다 가마와 나란히 누워있으니 그의 위상을 단적으로 말해준다

 

포르투갈 인들의 미적 감각
유럽의 도시를 여행하다보면 아름답고 웅장한 건물은 거의 ‘잘나가던 시절’에 세워진 것이라 봐도 무방하다. 포르투갈도 마찬가지였다. 15세기 대항해 시대가 가져다준 풍요로움을 맘껏 누렸다. 이 시기에 건축가, 조각가, 화가, 시인 등 각 분야에서 예술을 꽃피웠다. 이때부터 ‘학습된’ 포르투갈 인들의 독특한 미적 감각은 아직도 계승되고 있다. 

마누엘리노(Manuelino) 양식 : 포르투갈에서만 볼 수 있는 독특한 건축양식이다. 이름 그대로 마누엘 1세 재위기간(1495~1521)에 널리 유행했다. 그는 여러 대륙에 걸쳐 영토를 소유한 것은 고대 로마의 카이사르, 그리스도교를 전파하는 의무감은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후예라 생각했다. 또한 건축물이 권력의 강한 메시지를 전하는데 효과적인 수단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의 스타일은 주로 궁전, 성당, 미술관, 박물관, 왕가 문장(紋章) 등에 적용했는데 대표적인 것은 제로니무스 수도원과 벨렝 탑이다(본지 2019년 4월호 p172 참조). 이들 또한 전세계에 그리스도교를 전파하겠다는 의지를 보여주는 상징물이기도 했다. 발견의 시대(Age of Discoveries)에 걸맞게 소재는 바다관련 밧줄, 닻, 혼천의, 산호 등이며 그리스도 기사단 십자가도 빠지지 않았다.

화려한 마누엘리노 건축양식

 

아줄레주 : 푸른빛을 지닌 포르투갈 전통 타일이다. 스페인을 거쳐 온 이슬람 문화의 유물이라는 설이 유력한데 15세기 주로 안달루시아 지방에서 수입되었다. 저렴한 재료인 점성이 강한 진흙을 사용하여 다양한 형태를 만들어낼 수 있고 또 내구성이 길다. 여름엔 더위를 막아주고 겨울엔 습기를 차단한다.
대서양 연안, 지중해성 기후에 적합한 건축 장식용 자재이다. 기능성만이 아니고 아줄레주화(畵)란 미술 분야의 한 장르로 발전해왔다. 타일을 구운 뒤 유약을 바르고 그 위에 직접 붓으로 그림을 그리는 방식이다. 반면 테라코타(terra cotta)란 진흙을 구운 뒤 유약을 바르지 않고 그대로 내·외장재로 쓰는 경우도 있다. 바닥에다 설치하는 테라조 타일(terrazzo tile, 속칭 도끼다시) 등은 이탈리아로 퍼져 나갔지만 모두 포르투갈 어근(語根)이다.
어쨌든 리스본이나 포르투 등 대도시뿐 아니라 작은 작은 마을에서도 멋스럽게 장식한 아줄레주 화를 쉽게 만날 수 있다. 성당, 궁전, 미술관, 박물관에서 개인주택 담벽에 이르기까지 쓰임새가 다양하기 때문이다.

아줄레주 화(畵)

 

칼사다 포르투게사(Calcada Portuguesa) : 포르투갈 식 독특한 도로포장 방법으로 길이나 마을 광장, 산책로, 유적지등 어디서 볼 수 있다. 마카오의 대표적 광장이나 브라질 코파카바나 해변 길도 칼사다 포르투게사 방식이다. 꼭 과거 지배시대의 영향만이라고는 볼 수 없다. 미적으로 사람의 눈을 끌기 때문이다. 요즘 모든 것이 기계화되고 디지털화 되는 시대에 이 공법만은 일일이 수작업으로 해야 한다. 자전거 제조공정이 아무리 자동화되어도 바퀴에 끼는 스포크(살)만큼은 사람 손에 의해 조립되듯이.
먼저 포장할 바닥의 수평을 잡는다. 그다음 무늬대로 돌을 바닥에 배열하고 흙과 모래로 돌과 돌 사이를 메운다. 그 위에 물을 뿌려 흙 입자 사이사이 미세한 공극(空隙)을 메워주면 단단해진다(미세한 모래해변에 차가 지나가도 바퀴 흔적이 잘 남지 않는 경우와 같은 원리다). 이때 나무 메나 무거운 롤러로 눌러주면 끝이다. 마지막 단계는 시간이다. 보행자의 몫이란 말이다.
미적으로 구불구불한 파도모양을 만들기도 하고 꽃무늬, 직선, 사선, 이방연속 무늬, 사방연속 무늬 등 갖가지 기교를 부린다. 글자를 넣어 공원의 설립연도나 가게 앞엔 상호명을 표시하기도 한다. 이런 방식의 포장에 대해 포르투갈 특유의 미적 표현은 인정하지만 인건비로 인한 코스트 상승에 반대의견이 많다고 한다.  

호시우 광장의 분수 그라고 칼사다 포르투게사의 바닥포장 문양
일반 그릇 가게인데, 외관이 지나가는 나의 자전거를 멈추게 했다. 포르투갈인들의 미적 감각이 돋보인다
신트라에 남아있는 전형적인 아랍식 휴게소. 물이 귀한 중동사막이지만 아랍식 건축의 특징은 물이 풍부하다

 

전쟁기념관을 찾아서
‘인류의 역사는 전쟁의 역사와 궤를 같이 한다’는 말이 있다. 그래서 어느 나라를 가나 나는 전쟁기념관이나 전쟁 관련 인물을 거의 빼지 않고 찾아보는 편이다. 그런 의미에서, 벨렝 지구에 있는 전쟁기념관(Museo do Combente)을 찾았다. 입구에 걸린 커다란 세계지도 위에 이런 글귀가 쓰여 있었다.
<Portuguese Empire On The 20th Century, 20세기 포르투갈 제국의 현황>, 잘나가던 호시절의 달콤한 추억을 회상이라도 하려는 것일까. 세계지도 곳곳에 포르투갈 국기가 꽂혀있다. 기념관 뜰 중앙에 독특한 형태의 기하학적 도형의 기념비가 눈길을 끈다. 다름 아닌 식민지 전쟁에서 숨진 사람들을 추모하는 기념비다. 그리고 보니 이곳은 ‘식민지 전쟁 기념관’이라 해야 맞을 것 같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면서, 제국주의 시대 유럽 국가들에 의해 통치되던 아프리카 국가들이 하나둘 독립의 봇물을 이루었다. 그러나 포르투갈만은 예외였다. 식민지 의존도가 높아서였을까, 아니면 시대의 흐름을 파악하지 못해서였을까. 어쨌든 포르투갈 정부는 아프리카 식민지를 비롯 몇 개국의 자치령 독립을 허용하지 않았다. 이로 인해 식민지에서 다양한 형태의 무장 독립운동이 일어났고, 파병된 포르투갈 군과 충돌이 발생, 유혈사태가 벌어졌다.
대표적인 국가로는 앙골라와 모잠비크였다. 그러나 1974년 본국에서 쿠데타가 발생 살라자르 정권이 전복되자 독립을 허용하고 포르투갈은 철수하고 만다. 허나 60~70년대 구소련으로부터 꾸준히 지원받은 종족과 미국을 비롯 서유럽에서 지원 받은 종족 간의 갈등은 이념 문제까지 겹쳐, 내전양상으로 번져 무고한 사람들이 많이 죽었다. 인도 역시 영국이 철수하자 내전으로 많은 사람이 죽고 파키스탄이 분리 독립한 경우와 비슷했다.

전쟁기념관 안에 있는 식민지 전쟁 기념비(combetentes do ultramar)

 

바이런이 극찬한 마을
리스본을 주마간산 격이나마 돌아보았다. 머물면 머물수록 더 볼 것이 나올 것만 같다. ‘역사의 고도’ 로마에 가면 이런 말이 떠돈다. “하루 동안 로마를 보면 거의 다 본 것이요, 일주일이면 조금 본 것이요, 한 달이면 거의 본 것이 없다.” 지금 내가 바로 그런 심정이다.
“아쉬움을 남기고 떠나자…”하며 리스본 교외를 공략하기 위해 페달을 돌렸다. 그곳엔 포르투갈 여정, 아니 이베리아 반도 전여정의 종착지가 나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아름다운 해변 마을 카스카이스(Cascais)를 거쳐 신트라(Sintra)에 도착했다. 영국의 계관시인(桂冠詩人) 바이런(Gorge Byron, 1788~1824)은 이곳 신트라의 풍경에 매료되어 친구에게 이런 편지를 보냈다.
“신트라 일대 마을은 아마도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울 것이다. 위대한 에덴동산에 있는 만큼 나는 행복하다네.”
신트라 왕궁(Placio National de Sintra)은 포르투갈에서 유일하게 남아있는 중세의 대규모 유적이다. 레콘키스타 이후 포르투갈 왕실이 차지했다. 리모델링은 했으나 곳곳에 이슬람 문화가 깊게 스며있다. 상주(常住)는 하지 않았지만 전염병을 피하거나 여름휴가에 사용했으니 리스본에 있는 왕궁의 별장 역할이었다.

무어인의 성터에 올라
왕궁에서 보이는 산정상의 성터가 아득하다. 미시령만큼은 안 되어도 해발 500m 고지. ‘벨로스타 맥스’가 아니었다면 그냥 밑에서 보는 것으로 만족했을지도 모른다.
마지막 피치로 생각하고 ‘업힐’을 시작했다. 상의가 흠뻑 젖도록 땀을 빼고서야 정상부근 매표소에 도착했다.
구비 도는 코너마다 관광객을 실은 버스와 마주치니 극도로 신경을 써야만 했다. 잠시 애마와 이별을 하고 도보로 성터 정상에 오르니 일망무제! 비행기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는 기분이다. 역시 모든 인간사 땀을 흘려야 열매가 있다. 태양보다 달을 숭배했던 신트라(‘달의 산’이란 뜻)의 무어인들, 그들은 세라산 정상에 요새를 세우고 적들의 공격에 대비했다.
요새란 8세기에 건설한 ‘무어인의 성(Castelo dos Mouros 城)’이다. 1147년 포르투갈의 국토수복으로 이슬람 시대는 막을 내렸다. 그래도 300여년 간 무어인들은 이 고지대에 성을 쌓고 포르투갈 인들의 공격에 대비했다. 돌아보니 빗물을 가두어 두는 집수정, 화강암 바위에 구멍을 뚫어 곡식을 저장하는 사일로 등 만반의 대비태세를 알 수 있었다.

페나 궁전. 원래는 제로니무스 수도회 수도원이었는데 19세기에 개조했다


‘거인의 바다’를 향하여
신트라와 작별하고 대륙이 ‘끝나는 곳’을 향해 페달을 밟기 시작했다. ‘그 바다’가 보고 싶었다. 바로 땅끝 마을에서 시작되는 바다, 대서양(大西洋, Atlantic Ocean)이다. 이 바다는 포르투갈과는 뗄 수 없는 숙명적 관계이다.
크기는 세계에서 두 번째로 태평양 다음이고, 면적은 지구 표면의 20% 정도로 유럽+아시아+아프리카+남아메리카 대륙 모두 들어가고도 남을 정도로 광대하다.
영어 이름인 ‘아틀란틱 오션‘은 어떻게 생겨났을까. 아틀라스(Atlas)는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거인이다. 그는 제왕신 제우스로부터 영겁의 가혹한 벌, 하늘과 땅 사이를 받치는 기둥을 이고 있는 벌을 받는 중이다.
어느 날 메두사(Medusa)를 살해하고 도망친 영웅 페르세우스 (Perseus)는 아틀라스에게 보호해줄 것을 부탁했지만 거절당한다. 화가 난 페르세우스는 아틀라스에게 선물을 주는 척하면서 자루에서 선물 대신 메두사의 머리를 끄집어냈다. 그러자 아틀라스는 그 자리에서 금방 돌로 변했다. 그리고는 제우스의 명령에 따라 하늘에 닿을 때까지 크는 거인이 되어 이 세상 서쪽 끝, '아프리카' 서북단에 솟아 있는 아틀라스 산이 되었다. 그 앞의 넓은 바다는 ‘아틀라스의 바다’ 즉, 아틀란틱 오션이라 부르게 되었다.
포르투갈 사람들은 이 바다를 두려워하면서도 동경했다. 바다 끝에 있는 지옥입구 폭포에 떨어지거나 적도를 지나가면 까맣게 타죽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지구가 둥글다는 사실은 물론 아프리카 대륙 자체를 거의 모르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불굴의 의지로 수십 차례 시도 끝에 아프리카 최남단 희망봉을 돌아 동양으로부터 막대한 부를 가져와 유럽의 패자로 군림했다.


“세상의 끝을 보고 싶다!”
저 멀리 탑 위의 십자가가 눈에 들어왔다. 애마와 함께 호카 곶(Cabo da Roca)에 발을 딛는 순간, 내 몸엔 전율이 일었다. 오금이 저리는 아찔한 절벽 아래로 대서양의 파도가 거칠게 포효하는, 경외스런 풍경이 펼쳐졌기 때문이다. 게다가 몸을 가눌 수 없을 정도로 강한 바람이 불어왔다. 일대는 강풍을 이겨내고 살아남은 키 작은 초목, 막사국(莫邪菊)이란 들꽃만 널려있다.
사람들은 ‘경계’에서 의미를 찾는 것을 좋아한다. 물리적으로 가장 극단적인 개념인 최고로 높은, 가장 긴, 가장 먼저, 세계 최대, 가장 북쪽 등 말이다. 나는 이것을 한계(limit)를 뛰어넘으려는 인간의 원초적 욕망으로 본다. 이곳은 고대 로마시대부터 전설처럼 내려온 '땅의 끝'이라 불리었다. 
TV 프로그램 ‘꽃보다 할배’에서 신구가 ‘세상의 끝을 보고 싶다’며 일행과 떨어져 혼자서 다녀온 곳-이것이 전파를 타면서 우리에게 알려지는데 큰 기여를 했다. 그런데 세상의 끝이나 대륙의 끝은 지극히 유럽 중심의 사고방식에서 나온 말이다. 호카 곶의 정확한 의미는 포르투갈의 서쪽 땅끝 마을이고, 더 ‘극적’으로 표현하면 유라시아 대륙의 최서단(最西端)이다.
삭막하긴 하지만, 가장 적확한 표현은 좌표 즉, ‘북위 38도47분, 동경 9도30분, 고도 140m’이다.
유라시아 대륙의 끝, 여정의 끝
대서양을 향한 큰 십자가 탑 하단에 이런 문구가 음각되어 있다

“Onde a terra a cabo e o mar comerca,
육지가 끝나는 곳에 바다가 시작되나니”

영어로 번역하면 ‘Where the land ends, the sea begins’가 될 것이다. 대항해 시대를 연 엔리케 왕자의 포부가 담긴 시로 당대의 문인 카몽이스(Luis Vaz de Camões, 1524~1580)의 작품이다. 지극히 당연한 내용, 선문답 같은 짧은 구절에 많은 의미가 함축되어있는 것만 같다. ‘글 심은 짧을수록 강하다’를 절감한다.
탁 트인 대서양을 보니 무언가 잡힐 듯 말듯 떠오르는 생각이 있다. 국경의 반 이상이 스페인에 막혀 포르투갈 인들이 뻗어 나갈 길은 서쪽 바다 밖에 없다.
대서양은 거칠다. 지중해처럼 온화하고 잔잔한 바다는 아니었다. ‘잔잔한 바다는 훌륭한 선원을 키우지 못한다’는 서구의 격언이 있다. 이를 실천이라도 하듯 500여 년 전 당시 포르투갈의 리더는 ‘세상의 끝’에서 외쳤다. 그의 사자후는 시공을 초월하여 현재 대한민국 땅에서도 유효할 것만 같다.
“저 바다는 미지의 세계에 대한 공포로 가득하다. 하지만 새로운 세상에 대한 도전, 그리고 그것은 엄청난 기회를 제공해줄 것이다. 이제 더 이상 물러 설 곳은 없다. 도전하지 않는 자는 잡을 수 없다. 나가자 바다로!”  

무어인의 성터에 올라. 아직도 자랑스럽게 ‘아랍기’를 게양해 놓고 있다
반갑다! 카보다 호카 가는 길의 어지러운 이정표
유라시아 대륙의 최서단인 호카 곶
“아떼 로구, 리스보아!(Ate logo, Lisbon, 리스본이여,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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