확산되다보니 확정되어버린 오해

확산되다보니 확정되어버린 오해
천방지축(天方地軸)과 사농공상(士農工商)
 

‘천방지축’을 부정적인 의미로 쓰지만 본뜻은 경선과 위선처럼 지도상에 가상의 격자를 표시한 것을 말한다. 이것이 와전되어 심지어는 ‘천방지축마골피’ 같은 천민 성씨의 대명사가 되었다. 중국 춘추전국시대에 백성들의 생업유형에 기초하여 구분한 전시대비 국가동원체제가 ‘사농공상’인데 이를 신분의 서열로 만들어 상업을 천시하는 기풍을 초래했다. 이처럼 잘못 씌워진 오류의 프레임을 깨야만 공동의 지혜를 창출할 수 있다

글 김종성(자유기고가)

 

편집인 측에서 본란의 제목을 ‘잡학 천방지축’이라고 했는데, 사실 그 발단은 편집인과의 대화에서 잘못 알고 있는 어원에 대한 첫 예로 천방지축을 거론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번에는 천방지축을 비롯한 몇 가지 잘못된 통설과 관련된 이야기를 풀어볼까 한다. 

천민 성씨의 대명사?
먼저 천방지축(天方地軸)을 나무위키를 비롯한 인터넷사전에서 찾아보면, 대부분 철없이 날뛰는 것을 묘사한 말로 치부하였고, 심지어 이를 확대하여 ‘천방지축마골피’라는 말을 천민 성씨의 대명사로 들먹인다. 정말이지 이런 것을 보면 우리는 한번 오해의 바이러스를 심어놓으면 치료가 안 되는 증세에 빠져서 헤어 나오지 못하는 슬픈 민족이라는 생각이 든다.
나 자신도 천방지축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 한자를 보니 무슨 천문지리와 관련된 용어 같이 느껴져서 억지로 천구(天球) 상의 천정(天頂 : Zenith)과 천저(天底 : Nadir)로 대입해보려 했으나, 도저히 ‘하늘과 땅’의 관계로 여겨지지 않아 해답으로 볼 수 없었다. 그러다가 최근에 지도제작 관련 역사를 보다가 우연히 천방지축의 어원이 될 만한 내용을 알게 되어 이를 확신하는 것이다.
지도제작 역사에 있어서 두 가지 혁명적 사실이 있다면, 하나는 북쪽을 지도의 위쪽으로 설정하여 ‘방향’을 가늠할 수 있도록 한 것이고, 또 하나는 지금의 모눈종이처럼 경선(經線)과 위선(緯線) 같은 격자를 설정하여 지상을 표현함으로써 지도상에서 방향과 더불어 ‘거리’까지 가늠할 수 있게 한 것이다. 오묘하게도 모두 그 시초는 중국이다.
여기서, 방향과 거리를 가늠할 수 있도록 지도상에 가로세로로 그어놓은 관념상의 경위(經緯)선에 의하여 생긴 사각형을 바로 천방(天方)이라고 한다. 이는 하늘에서 본 관점으로 땅 위에 설정한 선이다. 사각형을 두고 방(方)이라는 말을 쓰는 것은 지금도 정방형․장방형이라고 하는 데서도 엿볼 수 있다.
지도를 그릴 때 바로 이 천방(天方)을 땅의 축선(地軸)으로 삼는 것을 두고 ‘천방지축(天方地軸)’이라고 한다. 결국 천방지축(天方地軸)이란 하늘에서 그은 관념상의 경위(經緯)선을 땅의 축선으로 삼는다는 뜻이다.
사실 영국 그리니치천문대에 간다고 북극에서 남극에 이르는 경도 0도선이 땅에 그어져 있는 것은 아니고, 적도지방에 간다고 지구 둘레 한 바퀴만한 위도 0도선이 그어져 있지도 않다. 다만 하늘에서 본 관념적인 선일 뿐이다. 비록 관념상의 선이지만 경위(經緯)선이 있는 지도와 없는 지도는 거리와 방향을 가늠하는데 있어서 천지 차이라는 것은 말 안 해도 알 것이다.
이러한 오묘한 이치는 모르면서 근성이 못된 사람들이 천민 성씨라는 속설로 퍼뜨렸는데, 우리나라 대부분의 천(千)씨는 하늘 천(天)자가 아니고, 지(池씨)는 땅 지(地)자가 아니므로 아무런 근거가 없다. 귀(貴)하려면 수가 적어야하고 천(賤)하다면 수가 많아야 하는데, 그런 식으로 몰아세운 천방지축의 숫자가 너무 적은 것은 뭘로 설명해야 할까? 또한 그런 오류를 합리화하려고 천민 이미지에 걸맞게 ‘철없이 날뛰는 것’으로 거짓해석을 주장하는 것을 보면, 엉뚱하게 확산되다가 강력하게 고착될까봐 무서울 지경이다. 

사농공상은 신분서열이 아니다   
비슷한 예로 사농공상(士農工商)이란 말도 그렇다. 춘추시대 제(濟)나라 환공이 패권을 잡는데 주도적으로 기여한 제나라의 책략가 관자(管子)가 백성들의 생업유형에 기초하여 구분한 전시대비 국가동원체제가 사농공상(士農工商)으로 전투, 군량, 물자, 수송을 의미하는 말이었다.
이렇게 심오한 사농공상(士農工商)이란 말이 우리나라에선 엉뚱하게 신분귀천의 서열로 악용되었는데, 이는 소작제에 기초한 경제구조 때문에 조세를 징수하기 쉬운 정주(定住)형 농업을 우선하고, 조세징수가 곤란한 이동(移動)형 상업을 억압하는데 그 목적이 있었다고 봐야 한다.
알고 보면 농자천하지대본야(農者天下之大本也)라는 말도 바로 농업이야말로 조세징수가 용이하기에 이를 장려하기 위하여 지어낸 감언이설이며, 우리가 흔히 비어로 쓰는 ‘상놈’이란 말도 바로 조세징수가 어려운 행상(行商)을 최하층으로 분류하여 배척한 데서 나온 말이다. 그래서 지금도 ‘장사꾼’식으로 상업을 비하하는 정서가 남아있는 것이다. 유태인과 완전히 반대되는 정서다. 원래 商은 고대에 군의 보급수송(치중)을 의미하는 말이었다.
사실 사(士)도 원래 장기판의 사(士)처럼 호위무사 즉 무사(武士)를 뜻하는데도 우리나라에선 글쟁이 선비(儒)에도 갖다 붙여 쓰게 되었다. 이는 비열한 교만이 빚어낸 잘못이다. 요즈음은 전부 선비 사(士)로 일괄해서 쓰는 추세인데, 정확한 쓰임새를 뜯어보면 이렇다.
‘士’는 원래 무사를 뜻한다. (하사, 중사, 상사, 안중근 의사, 사관학교…)
‘使’는 대리인이나 중개인을 뜻한다. (사신, 대사, 견당사…)
‘師’는 지식이 높은 사람이다. (의사, 간호사, 교사, 사범…)
의사에게 ‘선생님’이란 호칭을 붙이는 것도 실은 여기 스승 사(師)에서 나온 것으로 봐야 한다. 그런데 우리는 使를 써야할 변호사·세무사·변리사에도, 심지어는 師를 써야 할 의사와 간호사에게까지도 무조건 士로 쓰는 사례가 많은데, 이는 사농공상(士農工商)을 오용한 데서 비롯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원래 사림(士林)도 처음엔 무림(武林)이었지만, 집권하고 오래 안주하다보니 저절로 문약해져서 그냥 무사(士)=선비(儒)로 변질된 것으로 봐야 한다.
사농공상이 신분귀천의 서열이 아니라 국가동원체제를 의미하는 용어라면, 과연 신분귀천을 구분하는 용어는 무엇이었을까? 굳이 귀천에 따라 신분을 구분한 사례를 든다면, 王-公-士-人-民 순인데, 여기서 민(民)은 눈알을 빼버린 노예를 의미했다. 섬뜩하지 않은가. 

산수갑산, 한혈마 
또 다른 오류인 ‘산수갑산’과 ‘한혈마’에 대해서만 추가로 짚고 넘어가자. 조선시대 때 국토의 가장 오지(奧地)로 여긴 곳은 개마고원에 위치한 삼수(三水)군과 갑산(甲山)군이었다. 유배지로 유명하다고 하여 선비들에게 삼수갑산(三水甲山)은 극한환경을 뜻하는 시어처럼 쓰는 오지의 대명사로 각인되었다. 실제로 개마고원 북단에 위치한 삼수군은 한반도에서 서리가 가장 빨리 내리고 가장 추운 곳이다. 그런데, 이 삼수갑산이 어느 틈엔가 산수갑산(山水甲山)으로 변질되어 유통된 지 꽤나 오래되었다.
내 기억으로는 70~80년대 중학교 음악교과서의 가사 첫머리에 ‘산수갑산’으로 시작되는 노래가 있던데, 그게 계속 방치되다보니 정설처럼 받아들여서인지 음식점 이름에 많이 사용되었고, 특히 예전에 한창 인기를 누렸던 문희옥의 사투리디스코 ‘산수갑산 비둘기’에서 제목과 가사에 전부 산수갑산을 사용하면서 더욱 굳어져버린 듯하다. 그나마 아직은 삼수갑산(三水甲山)으로 바르게 아는 사람들이 인터넷에 이런 오류를 지적하는데, 메이저 언론들이 이를 지적하지 않으면 자칫 산수갑산(山水甲山)으로 고착될 위기에 처할 것이다.
한혈마(汗血馬)도 오해가 심각하다. 한혈마의 한자를 보면 땀(汗)+피(血)+말(馬)로서 “피땀을 흘리는 말”이라는 해석이 유포되었다. 지금의 투르크메니스탄 지역의 명마인데, 한혈마라는 말만 듣고는 피땀을 흘린다느니, 털이 붉다느니 식으로 끼워 맞추기 해석이 난무한다. 그 정도 해석으로 끝나면 다행인데, 거기에 맞춘 전설까지 만들다 못해 심지어 어디(거명하진 않겠다)서는 그곳의 상징 동물로 석상조각까지 만들어 놓은 곳이 있을 정도이니, 좀 과하다 싶다. 말은 땀을 배출하지 않는 동물이다.
혹자는 삼국지에 나오는 적토마를 두고 대입시키기도 하는데, 한혈마가 중국에 소개된 때는 전한 무제 때 장건에 의하여 월지국(우즈벡키스탄)에서 가져온 아할-테케(Ahal-Teke)라는 데서 어느 정도 연관성은 있을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 뜻을 정확하게 풀이하자면, ‘칸Khan(汗)의 혈통(血)을 지닌 말(馬)’이라는 뜻으로 ‘말 중의 왕’을 의미한다. 칭기즈칸을 성길사한(成吉思汗)이라고 할 때 칸(Khan)을 한자로 한(汗)으로 쓰는 것을 보면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이처럼 수정불가 수준으로 치닫고 있는 오해의 확산에 저항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잘못 씌워진 오류의 프레임을 깨야만 공동의 지혜를 창출할 수 있기 때문이다. 가령, 지금도 미국의 트럼프를 두고 ‘무식한 장사꾼’ 식의 왜곡된 사농공상 정서로 예단하여 비아냥거리는 사람이 많은데, 더 웃기는 것은 딴에는 똑똑하다는 언론들이 이러한 바람을 잡고 있는 것이다.
힐러리의 연설은 고졸 이상이어야 100% 이해를 하는 반면 트럼프의 연설은 초등학교 4학년 수준이면 이해할 정도로 수준 낮은 용어만 쓰기 때문에 트럼프가 무식하다는 식의 프레임을 씌운 모양인데, 이런 식으로 낮은 수준의 용어를 구사한 트럼프가 노린 것은 미국의 대졸인구가 28%밖에 안 되고 저학력의 블루칼라가 많다는 점에 착안한 것임을 간과한 것이다.
트럼프는 바빠서 하루에 4시간 밖에(?) 책을 못 본다고 하면서, 기자가 추천해 달라는 도서명을 즉석에서 10가지를 나열했는데, 그 중 첫 번째가 <손자병법>이었고 그 다음 상당수도 중국의 고서였다고 한다. 이러한 책략가임에도 눈치 채지 못하고 실체보다는 프레임에 입각하여 판단하는 우리의 수준으로 무얼 논하겠다는 것인가. 더구나 이런 책략가가 자기의 수를 읽히지 않으려 할 땐 대응방안이 없다. 최소한 인식이라도 바르게 해야 올바른 판단이라도 나올 것 아닌가. 오보를 인용하고 퍼뜨리는 건 오보를 창출한 것만큼 나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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