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학 천방지축④

농토 vs 사막
인간이 지금 사용하는 농토, 신이 미래를 예비하는 사막

우한 코로나바이러스의 세계적인 창궐로 개방사회와 자유무역의 뿌리가 흔들리고 있다. 식량자급률이 20% 밖에 되지 않는 우리나라는 대부분의 곡물을 수입에 의존하기 때문에 보호무역주의가 드세어지면 심각한 식량난에 봉착할 수밖에 없다. 이 시점에서 농토와 흙 그리고 불모의 땅으로 생각되는 사막의 역설을 생각해본다

 

우한 코로나바이러스라는 중국폐렴(‘코로나19’ 같은 원천희석 목적의 용어는 싫다)이 창궐하여 모두가 어려움을 겪고 있는 지금, 본란을 통해 우한 코로나바이러스에 대해 다루기에는 상당히 두려운 게 있다. 알레르기에 가까울 정도로 예민하게 관심을 가졌기에 나름의 생각은 있는 편인데, 원고를 제출한지 최소한 보름 뒤에 인쇄·배포되므로 그 사이에 세상이 어떻게 변할지 알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한 코로나바이러스에 대하여 상식적으로 판단 가능한 최소한의 사항을 짚어보면서 이야기의 실마리를 풀어보자면 이렇다. 즉, 우한 코로나바이러스 감염 위협이 가중되는 가운데 또 다른 2차적 위협이 도사리고 있으니, 그것은 그 동안의 교류차단에 따른 각종 산업체계의 마비로 인하여 원상회복에 상당한 시일을 요할 것이라는 점과 그에 따른 경기불황이다. 그 중에서도 석유 같은 에너지 문제도 그렇지만 물과 식량의 문제가 가장 무서울 것이다. 여름철에 남반구로 피신한 이 바이러스가 겨울철에 다시 재창궐하는 3차적 위협이 되어 돌아오는 것보다 이런 2차적 위협이 더 무서운 것은 아무리 감염을 잘 피해도 굶주림을 피하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1인당 농지, 한국 90평 미국 1400평
그래서 말인데 ‘구름떡 먹고 안개똥 싸는’ 식의 뜬금없는 화두 같이 들릴지 모르지만, 요즘 같은 때 생각해 볼 문제가 과연 우리나라의 농지는 얼마나 될까 하는 거다. 
아들이 미국에 갈 일이 있을 때 미국 중서부 대평원의 농지모습을 항공기에서 내려다보며 찍어달라고 할 정도로 필자는 농지에 관심이 많기도 하다. 얼마 전 우리나라의 농지가 줄어들었다는 기사를 보고 우리가 모르고 넘어가기엔 뒤통수를 맞을 수도 있는 무서운 현실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과  마침 우한 코로나바이러스가 창궐한 상태여서 따져볼 가치가 있는 문제라고 본다.
들쭉날쭉하여 정확하진 않으나 대략의 농지통계를 제시하자면 이렇다. 

▪ 우리나라는 인구 0.5억에 농지는 1.5만㎢
(총 45억평, 1인당 농지 90평, 1인당 논 50평)
▪ 중국은 인구 14억에 농지는 110만㎢
(우리보다 인구 28배, 농지 73배, 1인당 농지 235평)
▪ 미국은 인구 3.3억에 농지는 154만㎢
(우리보다 인구 6.5배, 농지 103배, 1인당 농지 1400평)

사라져가는 농지 
우리나라는 40년 전 인구 4천만일 때 국토면적의 21%였던 농지가 인구 5천만이 된 지금은 오히려 15% 밖에 안 된다. 즉, 인구의 4분의 1인 천만 명이 더 늘어날 동안 농지의 4분의 1이 사라진 것이다. 그것도 식량자원이 생산되는 논 위주로 서울시 면적의 10배에 해당하는 농지가 사라졌다. 이 때문에 우리나라의 1인당 논 면적은 50평에 불과하고, 쌀만 가지고 먹고 산다면 식량자급은 2달 밖에 못하는 형편이다. 
인도조차도 20세기 후반에 필사적으로 매달려서 겨우 식량자급을 이루었다. 아마도 이모작 지역이기에 같은 농지면적이라도 연간소출이 높았던 이유도 있지만, 중국에 버금가는 인구 때문에 만성적인 기아를 극복하는 것이 국가시책의 최우선이었기 때문이다. 
반면, 자급만 해야 한다면 굶어죽을 게 당연한 우리나라에서 “탄수화물이 비만의 주범”이라는 해괴한 건강철학이 유행할 정도로 배부른 이유는 다름 아닌 자유무역질서 하에서 국제시장에서 저가로 곡물도입이 가능하다는 점과 우리의 뛰어난 공업생산력 때문이다. 그런데 자유무역의 종말을 알리는 보호무역주의가 발호하는 마당에 각종 파업으로 스스로 산업기반을 상당히 훼손하고, 이번 우한 코로나바이러스로 다시 국제교류가 더욱 차단되는 사태를 보면 농지면적 문제는 그냥 두고 볼 일이 아니다. 

식량수입국 중국  
중국은 문화혁명으로 3800만이 죽기 전에 1950년대에 식량부족으로 굶어죽은 사람이 4000만 명이라고 한다. 그러나 사막화를 감수하면서까지 강행한 지속적인 경지면적의 확대로 40년 전에는 농지면적이 약 160만㎢로 세계 1위였으나, 등소평의 개혁개방 이후 점차 산업화·도시화 되면서 한반도 면적의 2배가 넘는 50만㎢  이상의 농지가 사라졌다. 
그마나 남은 농지마저도 곡류·두류·서류 같은 식량작물보다는 화훼·원예 같은 상업작물 재배지로 탈바꿈하면서 식량자급국가에서 식량수입국가로 전락했다. 이에 다수확 벼품종 개발과 해외농지확보(남미, 중동, 수단, 니제르, 마다가스카르 등)에 열을 올리고 있으나, 식생활 수준의 향상에 따른 육류섭취의 증가로 인해 식량 이외에도 콩과 옥수수 같은 사료곡물의 수입에 엄청난 지출을 해야 하는 형편이다. 

세계최대의 곡물수출국 미국 
미국의 경우, 남북전쟁이라는 내전기간 중에도 북군 지역인 중서부 대평원에서 곡물을 수확했고, 그 수확물 중 3,800만 명분의 식량에 해당하는 밀을 유럽에 수출할 정도로 농업강국이다. 한마디로 손자병법조차 먹혀들지 않는 나라다. 
미국의 40년 전 농지는 130만㎢로 당시 중국의 160만㎢보다 작았으나, 이후 170만㎢까지 불어났다가 이민에 따른 인구증가와 도시화 때문에 뉴욕 주 면적보다 더 크게 줄어들어 현재는 154만㎢ 정도다. 이 때문에 200%에 육박하던 예전의 식량자급률이 현재는 다소 떨어진 130% 정도이나, 기후변화에 따른 작황의 기복이 다른 나라보다 적기 때문에 여전히 세계최대의 곡물수출국이다. 게다가 흑토지대 같은 대평원의 토양에다 콩 재배와 3포 농업(경작지의 3분의 1은 휴한지로, 3분의 1은 가을에 파종해서 초여름에 수확할 수 있는 곡물을 심은 추파지(秋播地), 나머지 3분의 1은 늦은 봄에 파종해서 8·9월에 수확할 수 있는 새로운 곡물을 심는 춘파지(春播地)로 활용하는 농업)을 통하여 우수한 토질을 유지하고 있으며, 예전만큼은 아니지만 여전히 유휴농지를 운용하고 있다. 

 

미국은 잉여농산물로 농가 도산, 소련과 중국은 기근 
재미있는 것은 중국이 50~60년대에 대량의 아사자가 속출할 때, 미국은 32만㎢(한반도 면적은 22만㎢)의 농지를 유휴지로 놀리면서도 잉여곡물을 못 팔아서 농가가 도산한다고 난리였다. 결국 미국은 소형농가의 도산으로 농가인구 비중이 절반으로 줄어들면서 농가의 규모가 대형화되어 70년대쯤에는 유휴경작지가 26만㎢ 줄어들었다. 
웃기는 건 70년대 닉슨 대통령 시절, 소련이 흉작을 숨기고 모든 공작을 다 동원하여 미국의 잉여곡물을 사들이는 바람에 미국의 식료품 가격이 인상되어 결국 유휴농지 26만㎢도 경작을 하게 되었으며, 그게 지금까지 과잉생산으로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것이다. 여기에다 프랑스, 브라질, 호주 같은 식량수출 경쟁자까지 끼어드는 바람에 곡물가격이 오르지 않았다고 한다. 
그럼 50~60년대에 중국은 왜 미국의 식량을 수입하지 않고 굶어 죽었나? 외화도 없었지만 공산당체제의 열등성 노출에 따른 권력의 불안감과 함께 적에게 생존을 코 꿰이지 않겠다는 식량안보·식량주권 때문이다. 즉, 리카도의 비교우위론조차 정치적 적대관계 국가 간에는 먹히지 않는다. 
우리의 평상시 식량자급률은 20%인 반면, 의외로 60%나 되는 북한에서 아사자가 나오는 것도 비슷한 이유일 것이다. 
  
식량이 부족한데도… 
이러한 농지관련 문제를 보면, 아직도 농업선생님이 아닌 국어선생님을 통하여 가난한 시인의 유교적 몽상을 벗어나지 못한 소규모 빈농체제를 강요하는 각종 제도와 의식구조, 유기농 무농약 같은 환경을 빙자한 비효율적 생산구조를 방치하기엔 우리의 처지가 너무나 답답하다. 언제까지 생산성 낮은 일반미의 맛을 예찬하고, 언제까지 농지잠식의 최선봉인 전원형 주택을 예찬할 것인지 생각해 볼 일이다. 우리가 굶주림을 면한 지는 겨우 반세기 밖에 안 되었고, 배부른 현재의 상황도 실상에 있어서는 식량이 모자라는 상태임을 상기해야 한다는 말이다. 
 
진짜 기름이 되는 ‘기름진’ 땅 
농지의 양적인 측면에 대한 답답한 고민은 이 정도만 하고, 농토의 질적인 측면에 대해서 조금 재미난 생각을 해보자.
농지의 생산성은 기후문제가 아니라면 토양에 함유된 각종 유기물과 무기염에 의해 결정된다는 것은 누구나 알 것이다. 흔히들 ‘지력(地力)’이란 말로 표현하는데, 재미난 것은 비옥도(肥沃度)라고도 하는 이러한 지력이 석유와 관계가 있다는 것이다.
생산성이 높은 땅, 즉 비옥한 농지를 두고 우리는 습관처럼 ‘기름진 땅’이라고 한다. 왜 하필 ‘기름’이라는 표현을 쓸까? 이는 나중에 석유가 되기 때문이다. 
육지의 경우 물이 얕게 고인 곳의 바닥과 주변에 유기물이 퇴적되어 거무튀튀한 펄이 형성되어 비릿한 찰흙으로 이루어진 땅을 볼 수 있다. 갈대가 우거진 질퍽한 습지의 흙을 연상하면 될 것이다. 바다는 연근해의 개펄이나 해류가 거의 없는 해저 또한 이와 비슷한 현상을 보인다. 
이러한 토양에는 탄소 같은 유기물 함유량이 굉장히 높다. 유기물 함유 토양이 지표를 이루는 저평한 곳은 흑토지대라고 하여 각 대륙별로 세계적인 곡창지대를 형성하고 있다. 이러한 토양이 퇴적되어 암석이 되면 그게 바로 구들장에 쓰는 셰일(shale)이다. 셰일은 지각· 깊은 곳에서 지열과 압력으로 인하여 함유된 유기물이 변성된 탄화수소류를 생성하는데 이런 셰일층을 시추· ․파쇄하여 직접 추출한 탄화수소류가 바로 셰일가스․석유다. 이런 셰일층이 지각운동으로 인하여 배사(背斜)구조를 이루고 여기에 생긴 공동(空洞)에 셰일층에서 빠져나온 탄화수소류가 액체나 기체 형태로 고이면 이것이 곧 석유와 천연가스가 된다.
어쨌든 기름진 땅인 옥토가 결국 유전이 된다. 그런데, 우리 조상들은 어떻게 석유의 생성과정을 알았기에 생산성이 높은 땅을 두고 ‘기름지다’는 표현을 한 것일까? 게다가 한자로 비옥(肥沃)이란 말에도 살찔 비(肥)를 넣어서 지방과 관련시킨 것도 신묘하다.

흙의 가치   
그러면 이렇게 귀중한 농지를 구성하는 흙에 관해 알아봄으로써 농지문제의 외연을 넓혀보는 것도 의미 있으리라. 비포장도로가 드문 요즈음, 흙길에 대해 우선 한마디 보태본다. 
흙길은 너무 많이 이용하면 여기저기 꺼지고 침식되어 보기 싫고, 너무 방치하면 잡초로 우거져서 보기 싫어진다. 그만큼 흙이란 존재가 인간 모르게 침식되지 않으려는 속성을 가졌기 때문이다. 역사적으로 봐도 인간이 짓밟고 나면 여지없이 수반되는 게 ‘흙의 침식’이었다. 
만일 우리나라 땅이 전부 설악산 같은 바위투성이라면 과연 어떻게 살 수 있을까? 그저 흙이 공짜로 있으니까 암벽이 위대해 보이는 것이고, 그 때문에 산수화의 단골 소재로 맨날 바위기둥 같은 산만 그리는데, 흙이 없다면 그게 좋아 보일까? 흙에 대한 필자의 집착 때문인지 몰라도 농업보다 흙의 침식을 더 가속화하는 오프로드 운전 같은 것을 매우 경멸하는 편이다. 그보다는 덜하지만 그래도 MTB로 산길을 달릴 때, 한번 쯤 바퀴가 내딛고 있는 땅의 침식에 관해 생각을 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토양침식의 가장 큰 원인은 농업? 
그러면 흙의 침식을 가장 촉진하는 인간의 행위는 무엇일까? 
요즘처럼 환경 어쩌고 하는 사람들이 많은 세상에 가장 믿기 싫은 사실 중 하나가 흙의 침식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것은 농업이라는 것이다. 가령, 그리스-발칸 지역에 돌이 많은 것도 실은 인간의 경작에 따른 침식 때문이라는 주장이 있던데 필자도 그때부터 토양의 보존에 대해 각별한 의식이 생겼다. 
어떤 농학자는 경사도가 높은 곳은 삼림으로 토양을 보존하고, 경사도가 낮은 지역 위주로 경작을 하되 저평하고 광활한 대지에서 행하는 조방농업보다 협소한 땅에서나마 집약적으로 행하는 계단식 농업이 토양침식 방지에 더 좋다고 한다. 땅을 깊이 갈아엎는 심경법보다는 얕게 갈아엎는 천경(淺耕)법이나 아예 땅을 갈지 않는 무경(無耕)법이 토양의 침식방지와 영양보호에 훨씬 좋다고 하는데, 이중에 무경법은 도무지 설득이 안 되어 선진국 농촌에서도 씨알이 잘 안 먹힌다고 한다. 
필자가 생각해도 무경법으로는 토양의 침식방지와 영양보호에는 좋을지 몰라도, 땅이 단단해져서 작물의 뿌리가 잘 내리지 못할 뿐 아니라 파종 후의 조류에 따른 피해 때문에 곤란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흙의 생성과정 
그럼 이렇게 소중한 흙은 어떻게 생길까? 풍화에 의하여 생긴다고는 하지만, 영국에서 관찰한 그 속도는 침식속도의 100분의 1에도 못 미쳤다. 분명히 풍화에 의한 것은 맞는데, 그 생성속도가 이렇게 느리다? 뭐가 잘못된 것일까? 
필자는 2018 평창동계올림픽조직위원회에서 근무한 적이 있다. 그 당시 대관령에서 생활했는데, 다른 건 몰라도 참으로 특이한 것을 발견한 게 있다. 다른 지역에 현격하게 비교가 될 정도로 그 지역의 암석들이 대부분 부실했다. 손으로 꼭 쥐면 으스러지는 게 많았다. 
왜 그럴까? 암석은 우리가 초등학교 때 배운 석영, 장석, 운모 같은 각자 서로 다른 성분으로 된 결정끼리의 융합체이다보니 팽창계수가 서로 다르기 마련이고, 그렇다면 이러한 팽창과 수축이 반복되면 그 융합에 균열이 발생하여 박리가 일어날 수밖에 없다. 따라서 서해안 지역에선 분명이 단단한 차돌이어야 할 돌이 한겨울에 기온이 극히 낮아 연간기온차가 큰 대관령에서는 암석의 구성물질 간의 박리가 일어나 푸석푸석해질 수밖에 없다.
이렇게 볼 때, 암석과 달리 토양은 지질학적 산물이라기보다는 기상학적 산물이라고 할 수 있다. 화산을 통하여 용암과 함께 화산재가 나오면서 이 또한 토양의 원천이 되기도 하지만, 대부분의 토양은 화성암이든 퇴적암이든 간에 기온차 때문에 암석구성 성분 간의 팽창계수 차이로 박리되어 생겨난다.
 
사막은 흙 공장
얼마 전에 아내와 무슨 얘기를 하다가, 문득 낙타가 원래 극지방이 원산지이고 넓적한 발바닥도 원래 사막이 아닌 눈밭에 빠지지 않기 위한 거라는 얘기가 나왔다. 그래서인지 그날따라 ‘사막’이란 단어가 생각났다. 사막의 가치 말이다. 
사막이라고 하면 사람들은 건조한 하늘과 뜨거운 기온 때문에 태양광을 곧잘 떠올릴 것이다. 그러나 나는 토양을 생산하는 ‘흙 공장’이라는 표현이 어울린다고 생각한다. 무슨 까닭이냐고?
앞에서 말한 기온의 변동에 따른 팽창계수 차이로 박리가 일어나려면 팽창계수 자체가 커야 한다. 팽창계수가 큰 경우는 극지방이나 고산지방처럼 기온은 비록 낮을지라도 절대온도(K)로 환산하면 분모가 작기에 분수의 차이가 크게 되는 경우, 그리고 사막처럼 기온이 높더라도 일교차가 아주 큰 곳은 분자의 차이가 커서 분수 차이가 커지는 경우 두 가지라고 본다. 따라서 온화한 곳에서는 토양이 생성되기 어렵고, 그저 퇴적된 토양이라서 농사짓기에 좋다는 것뿐이다. 
그렇다면 극지방이나 고산지대에 비하여 면적이 큰 광대한 사막이야말로 가장 흙을 많이 생산하는 곳이라는 결론이 나온다. 그래서 말인데, 만일 기후변화로 사막에 비가 내린다면 그곳보다 더 살기 좋은 곳이 있을까? 
모래 같은 척박한 토양은 식물이 자라기 시작하면서 차차 유기물이 생성․퇴적되어 저절로 찰진 흙으로 변하여 농사짓기에 좋고 거주하기에 좋은 곳으로 바뀌는 걸 상상해보라. 
그러고 보면 사막은 미래의 풍요를 위해 신이 만들어 준 현재의 여백이 아닐까? 신이 보이지 않는 손으로 흙을 만들 동안 인간이 잠깐 비워두어야 할 장소 말이다. 그래서 다른 논자들과는 달리 필자는 사막이 없으면 인간의 미래는 없다고 본다. 지금의 불모상태를 예비된 축복으로 소중히 받아들이고 감사해야 한다고 말하고 싶다. 
신이 인간에게 말했다. 
“너희들은 사막을 잠시 비워두어라. 장차 너희들에게 필요한 흙을 미리 만들어주기 위함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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