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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madic-경주 남산에서의 탈속 일순간깊은 골 험한 산에, 그 많은 탑과 불상의 뜻은

경주 남산에서의 탈속 일순간
깊은 골 험한 산에, 그 많은 탑과 불상의 뜻은


텅 빈 산에 돌출한 바위는 탑의 기단이 되고 불상의 좌대가 되어 거대한 조산(造山)을 이루었다. 경주 남산… 높이 500m도 되지 않는 이 산을 30년이나 다니고 있지만 여전히 가보지 못한 골짜기와 능선이 지천이다. 마침 세상이 텅 빈 시절, 설잠 김시습의 행적을 따라 남산 용장골로 접어든다. 속진을 가소롭게 하는 탑과 불상을 찾아 헤매는 탈속의 산행

 

경주 남산 용장골(茸長谷)로 들어서는 심사가 500여년 전 어느 순간과 겹친다. 설잠(雪岑, 김시습의 법호)은 15세기 중반의 어느 날 이 골짜기로 찾아들었다. 어릴 때부터 천재로 소문 나 세종의 귀에까지 들어가 장래를 촉망받던 그는 왜 반승반유(半僧半儒)의 행색을 하고 이 멀고 외진 산골로 왔을까. 
김시습은 수양대군이 조카 단종을 몰아내고 왕위를 찬탈하자 읽던 책을 집어던지고 관직에 미련을 버린 채 세상을 등지게 된다. 상식과 도덕이 망가진, 즉 도(道)가 없는 시대에는 조용히 물러나 은인자중 자기수양에 힘쓰는 것이 예로부터 군자의 덕목이었다. 2500년 전 중국 주나라 무왕이 당시 천제이던 은나라 주왕을 토벌하자 은나라 산하 고죽국의 왕자이던 백이와 숙제는 천하의 가치가 전도되었다며 함께 수양산에 들어가 은거한 것이 전형적인 선례다. 상례와 합법을 뜻하는 일상의 道가 무너졌을 때는 세상에 나가봐야 자기기만이든 위선이든 허위의 가면을 쓰지 않으면 생존이 어렵다. 스스로에게 정직한 사람이라면 견디기 힘든 일이다. 

설잠의 흔적 따라, 바람서리 맞으면서도 천수백년을 버티고 선, 인간화 된 바위들을 만나러 용잠골을 오른다.

절터 147곳, 불상 160기, 석탑 82기의 산
남산은 북쪽의 금오봉(468m)과 남쪽의 고위봉(494m) 두 봉우리를 중심으로 이름이 붙은 골짜기만 60개가 흘러내린다. 이 정도 높이의 산에 이렇게 많은 골짜기와 능선을 거느린 곳은 드물다. 그 중에서도 용장골은 금오봉과 고위봉에서 흘러나온 숱한 골들을 모아 서쪽으로 흐르는, 남산에서 가장 큰 계곡이다. 설잠이 7년을 머물며 최초의 한문소설집 <금오신화>를 쓴 곳이 용장골 최상류에 있던 은적암이다. 금오신화의 금오(金鰲)가 금오산에서 따왔음은 명백하다. 전통가요 ‘신라의 달밤’에 나오는 ‘고요한 달빛 어린 금오산 기슭에서~’의 그 금오산이기도 하다. 설잠은 용장사에 있었다고도 하나 그가 남긴 시편을 보면 마주보는 용장사와 은적암을 오가며 지낸 듯하다.  
골짜기 하류는 큰 산을 방불할 정도로 물이 많다. 암벽 아래로 암반이 질펀하고 거암이 뒹구는 계곡은 설악의 한 자락 같다. 곳곳에 절터와 불상의 흔적이 남아 있는데 불상은 더러 박물관으로 옮겨져 안내문만 남았다. 남산 전체에서 발견된 절터가 147곳, 불상 106기, 석탑 82기, 왕릉이 14곳이나 된다. 평균하면 골짜기마다 3곳의 절이 있었다는 뜻이고, 용장골에서만 18곳의 절터가 발견되었으니 전성기에는 목탁과 염불소리가 산을 울리고 그윽한 향 내음이 숲을 뒤덮었을 것이다. 한마디로 신라인의 삶과 죽음, 영고성쇠가 이 산에 집약되어 있다. 
골을 버리고 능선으로 올라타 가파른 경사를 한동안 오르면 이윽고 조망이 트이면서 거암을 기단으로 삼아 허공에 뜬 듯, 고도감이 헌칠한 곳에 이른다. 바위 틈새의 평지에 목 없는 불상이 원형의 3층 대좌에 앉아 서쪽을 바라보는 모습이 갑자기 들이닥쳐 일순 놀란다. 아무런 보호장치 없이 이렇게 산중에 방치되듯 노출된 불상이라니. 조각기법은 훌륭한데 목이 없는 채로 서방정토를 바라보는 모습이 어쩐지 처연하다.    

 

언제, 누가, 왜   
대개의 사찰이나 암자는 아무리 산비탈이라도 평지를 다져서 터를 잡고 물을 구하기 쉬운 골짜기를 가까이 두기 마련인데 용장사는 골짜기에서 한참 올라선 산등성이 위에, 그것도 커다란 바위 위에 위태롭다. 바위의 자연단차를 이용해 가장 아래쪽에 3층 대좌에 앉은 삼륜대석불좌상이 있다. 4.6m의 높이로 보아 <삼국유사>에 나오는 미륵장륙상으로 추정된다(丈六은 16척을 뜻함). <삼국유사>에는 법상종의 개조 대현스님이 염불을 하며 이 불상 주위를 돌면 불상도 함께 얼굴을 돌렸다고 전한다. 목이 없는 것은 불교를 억압한 조선조 유생들의 소행일 것이다. 좌상 옆 바위에는 완성도가 높은 마애여래좌상이 새겨져 있다. 
불상에서 뒤편 바위로 더 올라가면 바닥을 받치고 선 거암 전체, 아니 산자락 전체를 기단 삼아 천하를 내려다보는 삼층석탑이 우뚝하다. 탑 높이는 4.5m밖에 되지 않으나 산체와 바위를 기단삼은 것까지 포함하면 구상의 스케일과 위용이 대단하다. 이 탑 하나로 남산 전체가 사원의 경내로 품어지는, 절묘한 포석이다. 고도는 약 360m로 마주보이는 고위봉과 어깨를 나란히 한다. 남산에는 돌출한 산등성이에 세워진 이런 탑이 몇 곳 더 있는데 입지와 위용에서 용장사 삼층석탑이 으뜸이다. 
남산 골골마다 그 수많은 불상과 석탑 중에 용장사의 탑과 불상은 예술적 완성도에서 가장 뛰어난 편에 든다. 나머지 탑과 불상은 조각기법과 완성도가 들쭉날쭉이고 조악한 경우도 많은데 이는 전문 장인이 아니라 일반인이 새겼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면 언제, 누가, 무슨 이유로 이런 작업을 해냈을까. 길이 거칠고 음식을 수급하기도 어려운 이 산 속에서, 몇 달은 걸렸을 그 힘든 일을 왜 했을까.  

전쟁의 시대 
금오봉 정상을 거쳐 바로 서쪽의 약수골로 접어든다. 급사면의 산길을 조금 내려가면 약수골 상류에 남산에서 가장 큰 마애불이 숨어 있다. 반듯한 자연암을 깎아서 새긴 몸체는 높이가 8.6m에 달하는 거구다. 머리는 다른 돌로 새겨서 얹어두었으나 사라지고 없어 몸체만 남았다. 머릿돌을 고의로 굴려버렸다면 저 아래 골짜기 어딘가에 있지 않을까. 
이 큰 불상을 새기려면 비계를 가공하거나 밧줄을 타고 작업해야 한다. 보통 난공사가 아니었을 것이다. 이 산에 그 숱한 불상과 석탑, 절터는 결국 어떤 절박함을 대변하는 것이 분명하다. 상당수의 유물과 유적은 7세기 전후의 것으로 추정되는데, 이때는 바로 고구려, 백제, 신라가 하루가 멀다 하고 전투를 벌이던 삼국통일 전쟁기와 겹친다. 최약체이자 인구도 적던 신라는 국민개병제가 당연시되어 가족 중 전장에 나가 있지 않은 집이 드물었을 것이다. 화랑도에서 보듯 노블레스 오블리주가 제도화되어 있던 신라는 왕공귀족이면 병역을 면제받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전투에 앞장서야 하는 의무감을 졌다. 결국 신라가 통일전쟁의 최종승자가 되는데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은 바로 이 노블레스 오블리주, 화랑도 덕분이었다. 
평민과 귀족을 가리지 않고 전쟁터에 나간 자식 혹은 남편의 무사귀환을 위해 신라인들은 불교에 의탁했고, 여기 서라벌 지척의 남산 골골마다 탑과 불상을 세우며 간절한 기원을 올렸을 것이다. 그 간절함, 절박함이 이 깊고 험한 산에서 그 단단한 화강암을 조각하게 만든 힘의 원천이 아니었을까. 시간을 초월한 석탑과 불상만 덩그러니 선 텅 빈 산길에서 누군가의 아들, 누군가의 남편을 위해 올리는 간절한 기도의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진신석가가 살던 골짜기 
약수골과 용장골 사이에는 비파골이 흐른다. 이름부터 매혹적인 이 골짜기는 진신석가(실물로 나타난 석가모니불)의 전설이 내려온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효소왕은 삼국통일에 도움을 준 당 황실을 위해 망덕사를 세우고 699년 친히 거동해 낙성회를 열었다. 이때 남루한 행색의 승려가 재에 참가하기를 원하자 왕은 말석을 허락했다. 재가 파할 즈음 왕이 어느 절에 머무는지 묻자 승려는 비파암이라고 답했다. 
왕은 농담조로 “이제 가거든 국왕이 친히 공양하는 재를 받았다고 말하지 마시오” 하자, 승려는 “폐하도 진신석가에게 공양했다는 것을 말하지 마시오” 하고는 몸을 솟구쳐 남쪽으로 가버렸다. 왕이 놀라 절을 하고 사람을 시켜 찾게 했더니 비파골 바위 위에 지팡이와 바릿대를 두고 사라진 후였다. 이를 듣고 왕은 비파바위 아래에 석가사를 세우고 그의 자취가 사라진 곳에는 불무사(佛無寺)를 세웠다고 한다. 두 절은 폐사되고 지팡이와 바릿대도 찾을 길이 없지만 지금도 골짜기 어디선가 석가모니가 나타난다 해도 이상하지 않을 곳은 남산뿐일 것이다.  밝힌건대, 나는 불교신자가 아니며 석가모니를 위대한 철학자로 볼 뿐이다.   
비파골 중간 즈음에 있는 폐사지가 불무사지로 추정되며, 흩어졌던 폐탑재를 모아 능선 위에 3층 석탑을 복원해 놓았다. 산 아래에서 용장사 석탑은 보이지 않아도 이 비파골 석탑은 산중턱에 우뚝 선 모습이 선명하다. 
비파골 아래에서 하룻밤을 묵으며 석탑을, 남산을 올려다본다. 나는 무슨 간절한 소망이 있어 이 산을 왔는가. 커다란 객사를 독차지 하고 한잔 술에 시름을 달래니 어느 샌가 달이 휘영청 밝다. 내일은 어느 골짜기를 헤매일지, 그냥 아침에 훌쩍 떠날지 번민한다. 백이와 숙제, 설잠이여, 부디 이제는 후배를 그만 내시라. 


김병훈 발행인  soolmeee@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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