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비의 날개 사이로 흐르다, 함평의 두 강

안개에 덮인 고막원천의 발원지는 깊다. 젊은 군인들의 함성이 들리는 상무대의 깊은 골짜기에서 함평벌의 또 다른 강 고막원천이 시작된다. 눈이 많이 내리는 곳이라 했다. 따뜻한 남도의 언저리가 아니었다. 언덕을 뒤덮고 있는 사과밭이 춥다는 증명서다. 들판의 온기가 밀어 올려 만든 안개가 아침 내내 동무했다. 영산강으로 가는 두 개의 국가하천 고막원천과 함평천은 호남의 들판을 더욱 윤기 나게 하는 정맥이다. 나비와 곤충으로 사람들의 동심을 잡아 모으는 함평의 색깔은 이 겨울에도 화사한 봄빛을 떠올리는 것이 어렵지 않다

글/사진 조용연(여행작가)

들판의 온기가 겨울 한기를 밀어 올려 안개를 만들었다. 겨울철 강둑길은 남도가 아니면 자전거가 달려가기 어렵다. 눈이라도 온다 치면 그 눈이 녹길 기다려서는 하세월(何歲月)이다.
함평이나 장성도 쉬이 들리기 어려울진대, 상무대는 태청산(593m)의 고봉이 확실히 병풍을 쳐준 깊은 골 아래에 만들어져있다. 광주 송정시대를 마감한 상무대가 옮겨 올만한 지세다.
차를 길섶에 대고 자전거를 꺼낸다. 군인들의 함성이 들리는 듯도 하다.

상무대의 군가가 들리는 듯
산 언덕길을 타고 내려가는 한겨울 아침이 차갑다. 사과 과수원이 이어진다. 남도의 사과밭이라. 어쩐 일일까. 영남의 사과밭들은 대구, 영천도 이미 날이 뜨거워져 점차 북상하여 이제 평가받는 사과의 주산지가 강원도 정선·영월 이러는 판인데 장성에 사과가 잘 된다는 것은 이곳이 일교차가 크다는 말 아닌가. 장성에는 정읍이 그러하듯 눈이 많이 내린다 했다. 서해를 건너온 북서풍이 장성의 높은 산지에 부딪히면서 만들어내는 백설이다. 사과의 남방한계선에 장성이 있나보다. 삼서에서 월야로 내려가는 강둑길옆 파헤쳐진 야산 허리춤에는 황토가 선명하다 못해 검붉기까지 하다. 해남 황산의 황토, 그 대지의 영양을 다 빨아먹고 자란 고구마의 빛깔과 맛이 전라도를 그리워하게 하는 한 가지 이유다. 
황토빛을 색상으로 표현하는 일은 어렵고도 쓸 데 없는 일이다. 그냥 황토 그 빛깔이다.
4차로 국도가 뚫려 모두들 죽어라 달려가는 다리 교각 아래에 졸듯이 해바라기나 하고 있는 낡은 다리를 눈여겨보는 건 자전거를 타고 가는, 할 일없는 과객(過客)이나 하는 일이다.
수해교(水海橋), 해수가 아니라 수해교인 걸로 보아 바다로 가는 물길이렸다. 개펄이 싱싱한 바다가 멀지 않다는 얘기다. 그 징표를 확인하는 데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요즈음 다리의 이름표는 청동이 돈 된다고 남몰래 눈알을 빼내듯이 죄다 파버려 그 내력도 이름도 알 길이 없지만 시멘트에 음각된 글자는 세월에 풍화되어도 흐릿한 시간을 증거한다.
  
점자를 더듬어 보듯 만져본다
‘檀紀 四二八八年’, 이즈음 사람들에겐 낯선 ‘단기’다. ‘쌍팔년’이다. 이 자조의 냄새가 물씬 풍기는 호칭에는 ‘1955년도’라는 6·25 전란 후의 혼돈이 녹물처럼 배어있다. 쌍팔년이라는 분기점은 자유당을 말하고, 피부로 느끼는 현대사와 옛날을 가르마 타는 한 시점의 갈림길이다. ‘응답하라 1988’이 아무리 물살을 거슬러 올라가도 쌍팔년을 넘기는 쉽지 않다. 거기는 동족상잔(同族相殘)의 비극 속에 오로지 ‘목숨을 부지해야한다’는 절박한 본능밖에 그 무엇이 있었겠는가. 그런 상징부호는 자전거여행에서나 만날 수 있는 또 다른 감회다.
산지(山地)가 7할이 넘는 이 땅에서 함평은 산이 4할 남짓하니 들판이 넓은 고장이다. 그래도 쌍팔년도 언저리에서 태어난 자손들을 먹이고 입히고, 공부시키기에 땅뙈기는 좁았다. 
내 친구 후석(厚錫)이 그랬다. 시골에선 예사 공부머리가 아니어서 대학을 서울로 오긴 왔으나 ‘시월유신’으로 얼룩진 캠퍼스라이프는 곤궁한 자취생활을 배경으로 한다. 뻔한 농투성이 아버지의 곳간에서 월사금 만들기도 허리 휘는 사정을 잘 알기에 도시락 반찬이라야 멸치 꽁다리에 고추장이 그나마 만만했다. 물들인 군복을 교복처럼 입고 다니던, 가난한 대학생의 단벌 구제품은 이 들판에서 엎드려 허리가 굽어버린 아버지 엄니의 괴춤에서 나온 피땀이었다.    최종 문턱까지 가서 주저앉은 행정고시의 과락 때문에 공군장교를 선택해 떠날 수밖에 없었던 그의 70년대도 이 들판에서 보낸 향토장학금의 은덕이 크다. 웬만한 집안에서 두어 해만 더 밀어주었어도 그는 고위관료가 되었을 텐데. 

함평농고가 함평골프고등학교가 된 것은
월야면을 못미처 강둑길 옆 논은 개답 중이었다. 토질을 위해서가 아니라 수억 년을 퇴적한 모래를 건져 먹기 위한 세척작업이 진행 중이었다. 오랜 세월 지금의 함평천보다 훨씬 넓게 범람원을 형성하면서 모래의 퇴적이 이루어져 왔다는 얘기다. 모래 위에 깔린 개흙, 점토질은 겨울여행자를 고달프게 한다. 바퀴 사이로, 체인과 크랭크로 밀려들어와 엉겨 붙는 흙은 ‘너를 결코 놓아주지 않으리라’는 듯 바퀴를 제자리에 멈춰 세운다. 힘으로 돌아갈 페달이 아니다.
겨울이 예상보다 따뜻하면 이런 낭패를 본다. 바퀴와 체인 사이에서 합창하는 모래알의 서걱거림을 들으면서 걸어 나오는 들판길은 생각보다 길었다.
월야면이다. 뜬금없이 함평의 이름들은 조금은 예술적이라는 생각을 했다. 월야, 해보, 손불, 나산, 엄다, 학다리, 등등…. 애정을 가지고 보니 그런 것일까.
겨울인데도 곳곳에 잔디밭이다. 논에 잔디를 심었다. 누구를 잡고 물어볼 사람조차 없는데 마침 저 멀리 한 노인이 논두렁에서 소피를 보고 있다. 한참을 기다려도 그가 바지춤을 올리는 모양세가 아니다. 나이란 그렇다. 장터걸에서 “애들은 가라”고 익살을 부리던, 뜨내기 약장수가 하는 말은 환갑을 넘어봐야 실감한다. 어디 살찔 데가 없어 그놈의 전립선에까지 군살이 붙는단 말인가. 
“어르신, 저 논에 왜 잔디를 심었는가요?”
“아, 저그요오~, 저그도 잔디농사요. 팔라고 심었제.” 잠시 실례한 것이 들켰나싶어 을씨년스러워하며 답했다.
“그럼 어르신도 잔디 좀 심었어요?”
“물론이제. 나도 심었제. 지난 가을에 화딱지 낭게 다 캐버렸어라.”
“아니, 캐다니요. 놔뒀다 팔면 되잖아요?”
“아이고 이 양반아, 잔디도 1년 농사여. 1년에 한번은 캐서 팔아야 한당게. 안 그러믄 잡초밭 되어부러. 비료 값에 품삯 하면 뭐 남는 것도 없어. 평당 12,000원 썩 할 쩍어야 노다지지. 요즘은 2,000원까지 내려오기도 한당게. 그래도 팔려야 말이제, 저 사람네들은 내년 봄을 보는 것이제.”
“잔디농사는 채소농사나 마찬가지네요?”
“그렇제, 맞아요이”
“그럼 무슨 농사를 지으세요?”
“그냥 논농사 쪼끔 짓지. 양도나 하고 새끼들 조금씩 나놔 줄라고요.”
노인의 한숨을 뒤로하고 달려가는 강둑으로는 지금이 한 겨울로 가는 게 아니라 봄이 다가오는 느낌이다.

한때 날렸던 이름 나산 ,  고막원천변 마을
사정교를 건너와 ‘함평생활유물전시관’을 지나면 한적한 강변을 지나게 된다. 석벽단애 아래로 난 길은 홍수가 지면 물에 잠기는 습지다. 그러기에 분위기는 더욱 고즈넉하다. 그 길도 잠시, 이내 나산면 소재지다. 
‘나산(羅山)’은 한 시대의 맨손 성공신화를 쓴 한 사업가에 의해 전 국민이 아는 고유명사였다. 과거형으로 쓰는 것은 ‘나산’은 이미 오래 전에 성공의 이름표를 반납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대단한 성공이었다. 18세에 단돈 2,700원을 들고 상경한 국졸의 청년 안병균이 공사판을 전전하고, 짜장면집을 열고, 일식집을 운영하며 터득한 세상은 그에게 기회를 열어 주었다. 북창동 ‘초원의 집’과 화신백화점 뒤 ‘무랑루즈’ 같은 극장식당의 성공은 여성의류라는 새로운 기성복시장으로 그를 이끈다. ‘조이너스’와 ‘꼼빠니아’는 젊은 여인들의 날개가 되었다. 종합소득세 전국1위의 자리는 그에게 영예였을까, 독배였을까. 무리한 사업 확장은 IMF라는 암초를 넘지 못하고 그를 재벌의 무대에서 끌어내렸다. 
성공한 사람들이 그 지긋지긋하게 가난한 고향을 잊지 못하는 것은 고향의 정기(精氣)가 그를 키웠다고 믿기 때문일 것이다. 아산(峨山) 정주영 회장이 북녘 고향 통천 땅 아산을 자신의 호(號)로 만들어 소중하게 남긴 것이나, 안회장이 함평 땅 나산면 고향을 그룹의 이름으로 새겨 넣은 것도 같은 맥락일 것이다.

고막원천 석교 다리 아래까지 고깃배가
바퀴를 잡아끄는 진흙이 강둑길에도 막아선다. 바닥만 파면 포클레인 삽으로 한 덩어리가 된 회청색 점토가 들판에서 기다리고 있다. 그래도 갈 수밖에 없다. 고막천 석교(보물1372호)에 이르러 그 내력을 알겠다. 이 곳 사람들은 ‘똑다리’라 불렀다. 믿어지지 않을 만큼 얕아진 수심이지만 1960년대까지 소금과 생선 배는 영산강을 거슬러 석교 아래까지 올라와 장을 열었다.
고려 원종 때(1273년), 무안 법천사의 도승 고막대사가 강을 못 건너가는 마을사람들을 위해 도술로 놓았다는 전설의 다리는 보통 축조 기술이 아니었다. 서울의 한양대학교 뒤편 중랑천에 놓인 살곶이다리와 비슷한 ‘널다리’다. 목조 가구를 못하나 없이 만드는 결구(이음새구조)방식이면서도 800년을 무탈하게 지내온 다리였다. 하지만 일제 때 보수공사를 한답시고 뜯어내다가 홍수로 2/3가 유실되고, 그저 원형의 맛만 보여주는 이 돌다리는 오래 버려진 보물이다. 예산이 내려와 보수를 시작하는지 담장을 쳐서 가까이 가볼 수도 없으니 알 길이 없다.
이제 영산강이다. 강가로 난 호젓한 강둑길도 자동차의 진입을 허용하기 위해 온통 파헤쳐져 있다. 더러는 이런 한적한 정취를 지닌 강, 사행하는 영산강의 갈대밭을 힘들어도 오겠다는 사람들만을 위해 그대로 두어도 좋으련만 기어이 소란스런 길을 내고야 만다.
월호리 고갯길을 넘자, 야구훈련에 열중인 선수들이 보인다. 산으로 둘러싸인 함지박 터에 자리잡은 ‘기아타이거스 함평야구장’이다. 함평이 겨울 훈련에도 지장이 없는 최적지라는 말이다.

학교인가 학다리인가
동강교에서 영산강을 버리고 다시 작은 강을 거슬러 오른다. 함평천이다. 지도는 함평까지 40여 리가 남았다고 말한다. 강둑을 휘휘 둘러 호남선 철길을 지나 학교(鶴橋)에 이르는 길은 지루할 새가 없다. 변변한 놀이조차 없었던 어릴 적, ‘학교역’은 영월의 ‘마차역’과 함께 지도 찾기 놀이에 자주 등장하던 호남선 역이다. 이제는 ‘함평역’으로 바뀌었다. 1960년대까지 학교역에서 함평읍까지 20리 남짓한 길에 협궤기동열차가 중간에 두 역(화산, 동창)을 서고, 하루 9왕복을 다녔다는 사실을 기억하는 이도 다들 사라져 간다. 그 길은 넓은 국도가 되어 자동차 차지다. 
학교(鶴橋)는 외지 사람들에게는 ‘학다리고등학교’로 알려졌었다. 1970년대 학다리고등학교는 전국웅변대회를 휩쓸고, 공부를 뛰어나게 잘한 인재들도 더러 있었다. ‘학(鶴)의 다리’란 느낌을 가진, 조금은 시골냄새 물씬 나는 이 이름이 유독 교육기관에만 붙여진 이유를 오늘 여기 와서 보니 알겠다. ‘학다리고등학교’를 촌스럽다고 이 마을의 고상한(?) 한자이름 ‘학교’로 고치자니 ‘학교고등학교’가 되고 ‘학교중학교’가 되어버리니 어쩔 수 없이 붙인, 정(情)이 묻어나는 이름인 게다.

나비축제로 대박이 난 함평 ,  그 마케팅
함평을 멀리서 반기는 것은 나비의 형상을 한 다리다. 함평은 전형적인 농촌이다. 명창 임방울이 잘 부른, 판소리 단가 ‘호남가’의 첫 소절이 ‘함평 천지 늙은 몸이…’로 시작하는 것만 봐도 함평은 허리 펼 새 없이 평생을 산 농투성이의 무대다. 농촌의 퇴락을 딛고 일어선 ‘함평수변공원’은 ‘함평엑스포공원’과 함께 봄이면 꽃으로 활짝 피어날 것이다. 
올해 18회째를 맞은 ‘함평나비축제’는 문자 그대로 대박축제의 대명사다. 이 축제의 성공요인을 학자들이 분석한 책이 나올 정도로 자치단체장의 혜안은 절대적이다. ‘성공을 위한 끝없는 미완성의 조화’, ‘기업가 정신과 브랜드 마케팅 전략의 성공’이라는 찬사는 무색하지 않다. 확고한 비전을 제시한 자치단체장의 상상력이 이룬 땀의 결정이다. 33ha에 이르는 부지에서 우리나라에 서식하는 4과 70여종의 나비가 봄을 즐기고, 관광객은 이를 완상(玩賞)한다. 이 겨울은 그 봄의 나른한, 나비의 유영을 기다리는 휴지기(休止期)다. 나비가 불러내는 봄의 왈츠에 맞춰 동심을 손잡고, 어른들도 유년의 기억을 끌어낸다. 
함평읍내를 지나 대동저수지에 이르는 시오리길도 들판이다. 자연에 날아다니는 나비로는 사철 외지 손님을 이끌 수 없어 ‘함평자연생태공원’을 만들어 놓은 곳도 대동저수지 호반이다. 거기 곁에는 곤충은 물론 파충류, 양서류까지를 포함하여 사철 즐길 수 있는 볼거리(양서·파충류생태공원)를 만들었다. 뱀들이 대가리를 바짝 쳐들고 환영하는 혓바닥을 보고 즐거워하는 이즈음 아이들은 어른들에겐 난해하다. 하지만 어른도 얼굴을 손바닥으로 가리고 손가락 틈새로 뱀을 본다. 그 징그러운 ‘비암(뱀)’의 혀 놀림을 보면서 생각한다. 저놈은 하나님이 경계한 사탄일까? 포복의 천형(天刑)을 받은 죄수일까?

공민왕이 서해를 바라보던 군유산 그 자락
유채꽃이나 자운영 같은 봄꽃만으로 성에 안찬 함평군은 국화축제까지 이어 붙여 일년 내내 볼거리를 찾는 사람들을 함평으로 유혹한다. 함평한우까지 가세하니 눈과 입이 두루 즐거운 일이다. 봄날 함평나비 축제는 초고속으로 눈길조차 주지 않고 지나가던 KTX마저도 함평역에 불러 세운다.
함평의 서북쪽에서 영광과 경계를 이루는 군유산(403m)이 함평천의 발원지다. 고려 공민왕이 서해의 낙조를 감상했다는 군유산은 이 정도 높이면 명산의 반열에 든다. 바다로 일망무제다. 그 아래 동정저수지가 물을 모아 함평천지로 가는 점호를 하는 보충대다. 날이 어두워져 페달이 무겁다. 

 참고자료
1. 한국의 발견, 한반도와 한국사람, 전라남도편, 뿌리깊은나무, 1989
2. ‘나산그룹 안병균 회장의 인생드라마’ 중앙일보, 1998. 1. 15
3. ‌<함평나비축제성공요인에 관한 연구> 이재광 등 5인 공저,  페이퍼로드, 2009
4. ‘호남가’, 한국전통연희 사전
5. 한국하천일람, 국토교통부,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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