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남자의 겨울 열차여행

세 남자의 겨울 열차여행
경강선 타고 강릉 가서 바다열차로 후진해변까지

방랑자는 겨울이라고 멈춰 있을 수 없다. 마침 서울~강릉 간 경강선 KTX가 개통되어 세 남자는 동해로 열차여행을 떠나기로 한다. 돌아올 때는 강원 내륙의 심심산골을 지나는 태백선을 타고 설경을 볼 것이다. 겨울 열차여행의 묘미는, 시베리아 횡단열차의 매혹과 같은 맥락이다. 안락한 실내에서 춥고 거친 풍경을 감상하는 이 극단의 대비는 여정의 감흥을 배가시킨다

 

“강릉 가서 뭐 할 건데요?” “거긴 액체밖에 없잖아요? 바다와 술, 그리고 눈물!”

 

“동해에 왔다!”

 

 

겨울 나그네…. 이 말 하나로 아득한 시선으로 미지의 세계를 상상하듯 복잡한 감정에 사로잡힌다. 옷깃을 잔뜩 세우고 외투자락은 바람에 펄럭이며 홀로 설원을 걸어가는 방랑자의 모습이 선명하게 이미지화된다. 고단한 여정, 고독한 정신세계 그러나 세속과 결별한 듯 동떨어진 세상을 경험하는 듯한 데서 느껴지는 별격의 경외감….
조금은 타협하자. 겨울 여행을 떠나고 싶지만 그렇게 힘겨운 원초적인 여정은 엄두가 나지 않는다. 대안은 겨울 열차여행…. ‘겨울 나그네’의 고단함만 덜어내고 서정성은 온전히 살리는 길로 열차여행 외에 또 있을까.
 

겨울 열차여행의 매혹
커다란 쇳덩이에 앉아 가는 열차여행에 낭만과 서정이 묻어나는 데는 이유가 있다. 흔히 가장 재미있는 구경거리는 불구경, 물구경, 싸움구경이라고 한다. 불, 물, 싸움 모두 연루된 당사자에게는 치명적인 위험이지만 한발 물러선 안전지대에서 볼 때는 가장 흥미롭다. 여행자들의 꿈인 시베리아 횡단열차도 안락한 실내에서 눈보라 몰아치는 툰드라의 광야를 바라보는 궁극의 대비 경험이 매혹의 본질이다. 그래서 여름이나 봄 가을이 아니라, 겨울 열차여행이 한층 흥미진진하고 매력적이다.    

여행수단으로서 열차는 자동차와 다르다. 언제든 갈 수 있는 화장실이 있고 서서 편안히 다닐 수 있는 넓은 실내는 집의 치환이다. 누가 운전해주는 대형 캠핑카를 타는 것과 비슷하다고나 할까.
또 하나. 영원한 평행선으로 달리는 레일을 따라 가는 것도 열차만의 특별함이다. 아무런 방해를 받지 않고 길을 독점하고, 시간에 구애되지 않으며, 안전에 대한 절대적인 신뢰감을 준다. 그래서 몸은 더욱 안락하고 마음은 평안하다.      
    
마침 열차여행을 떠날 명분이 생겼다. 서울~강릉 간 경강선 KTX가 12월 22일 개통한 것이다. 해가 바뀌어 한 살 더 먹은 무게감을 애써 동심으로 털어내려는 듯 50대 세 남자는 동해행 열차에 오른다.        

새 길은 새로운 풍경이다
우리가 보는 풍경은 언제나 길에서 보는 것이다. 그래서 새로운 길은 새로운 풍경을 의미한다. 자전거든, 자동차든 새 길이 뚫렸을 때 최대한 빨리 가보는 것도 그 길에서 만나는 새로운 경관을 보기 위해서다. 사람 얼굴이든, 자연지형이든 모든 입체는 보는 각도에 따라 다르고 각자 장단점과 특징, 매력을 지닌다. 익히 가본 곳이라도 다른 길에서 보는 경관은 또 다르고, 예전에 보았던 기억 위에 입체감을 보태준다.
양평을 지나자 KTX-산천 811 열차는 시속 200km로 속도를 높이면서 처음 보는 풍경 속으로 돌진한다. KTX 선로라도 산악이 많아 준고속으로 달리는 것인데, 300km를 경험한 눈에 200km는 그다지 빠르게 느껴지지 않는 감각의 사치에 빠져든다.   

산은 점점 높아지고 골은 깊어지는데 어느새 하얀 눈으로 얼어붙은 치악산(1288m)의 거대한 산체를 돌아 강원도로 접어들고 있다. 산이 많다 보니 자연히 터널도 지천이어서 차창은 흑과 백의 연속적인 돌변이다. 속도를 얻기 위해 철로를 직선화하면서 터널을 뚫느라 풍경을 잃은 것을 미처 몰랐다. 조금 과장하면 거의 지하철이다. 

마지막 대관령 터널은 압권이다. 해발 600m 진부에서 곧장 지하로 스며든 열차는 20.2km에 걸쳐 백두대간을 관통해 해발 100m의 강릉 외곽에서 지상으로 튀어 나온다. 터널은 장대한 다운힐인 셈인데 열차 중력만으로도 동해안은 저절로 닥쳐오겠다. 

새로 지은 강릉역은 조금 황량하다. 아직 시멘트와 페인트가 채 마르지 않은 생경한 느낌이랄까. 역전의 허술한 거리도 유럽 태생 KTX의 세련미와는 어딘가 어울리지 않는다. 다만 해양성기후로 서울보다 5~6도나 높은 포근한 기온은 아주 먼 곳으로 떠나온 듯 반갑다. 그래봐야 겨우 200km 벗어났을 뿐인데…. 

바다열차 타고 정동진에서 삼척까지
바다와 가장 가까운 역이라는 정동진역에서 바다열차를 타고 삼척으로 향한다. 바다를 향해 단층의 오페라 시트를 배치한 바다열차는 정동진~삼척 간 영동선 해안구간에서 운행하는 관광열차다. 기관차를 바꾸기 위해 안인역까지 올라갔다 내려와도 58km 정도인데 1시간20분에 걸쳐 천천히 달린다. 

비수기 평일인데도 열차는 만석이다. 예약하지 않았으면 맨앞 창가자리를 얻지 못했을 것이다.
맥주 한잔을 곁들이며 넓은 차창 밖으로 바라보는 동해는 눈과 몸 모두가 ‘안락한 쾌감’의 공감각적 풍요다. 

너무 알려져 번잡할 것 같은 추암을 지나 삼척해변역에서 내렸다. 하차 승객은 달랑 우리 셋뿐. 원래 이름은 후진해변인데 삼척해변으로 지명을 바꿔버렸다. ‘후진’이라는 이름을 부정적으로 생각했나 보다. 그런데 안타깝다. 절친한 내 친구는 오래 전 지도에서 이 ‘후진’ 이라는 이름만 보고 무작정 여행을 떠난 적이 있다고 했다. 한번 들으면 잊히지 않는데다 이 바쁘고 세련된 시대에 ‘후진’은 얼마나 소중한 아날로그적 자산인가. 여행작가 조용연 님이 “삼천포 이름을 버릴 게 아니라 ‘삼천포로 푹! 빠지세요’라고 카피를 쓰면 얼마나 홍보가 되겠는가”하고 정곡을 찔렀듯이, 후진 역시 “이 땅에서 가장 ‘후진’ 곳으로 오세요!” 했으면 더욱 인상적인 역발상이 되었을 것을…. 
 

야성미로 파도마저 무색하게 만들어버리는 겨울 해변의 이 ‘문제적’ 남자

 

돌아올 때는 태백선 무궁화호를 타고 내륙 산악지대의 설경을 감상 했다

 

편안히 앉아 거친 파도를 볼 수 있는 바다열차

 

 

태백선 눈꽃 기행
굳이 바다쪽으로 테라스가 있는 방을 잡고 우리는 어린 아이처럼 파도를 희롱하느라 발이 젖는 것도 몰랐다. 밤에는 싸구려 불꽃놀이로 파도와 무모한 대치전을 벌였다. 바다로 살며시 돌출한 지형이어서일까, 같은 동해라도 후진과 추암 일대의 파도는 남달랐다. 바람이 잔데도 대양에서 겹겹이 밀려든 파도는 상륙 직전에 동그랗게 허리를 꺾으며 포말로 부서지고 갯바위를 흠씬 두들기며 허공으로 비산했다. 이중문조차 쉽게 뚫고 들어온 파도소리는 밤새 고막을 자극하며 숙면을 방해했지만 선잠이라도 행복했다. 

제한된 시간을 최대한 늘려서 경험하는 방법은 천천히 움직이는 것이다. 돌아가는 길은 동해에서 청량리까지 장장 5시간이나 걸리는 태백선 무궁화 열차편이다. 함백산(1573m)을 비롯해 태백과 영월의 산악지대를 골짜기 따라 구불구불 통과해서 겨울산의 골계미를 감상하기 좋다.  

철길은 모두 전철화되어 도계에서 태백으로 올라갈 때 기관차를 앞뒤로 바꿔 달아 지그재그로 움직이던 인클라인 철도는 사라지고 없었다. 그래도 국내에서 가장 높은 추전역(855m)을 지나고, 전설상 민족의 성지이자 풍수지리적으로 최고의 명당이라는 자미원이 현실에 있는 자미원역도 거쳐간다. 제천에서 치악산 줄기를 넘어갈 때 지나는 ‘또아리굴’은 여전히 단선철도가 심연의 만곡을 그렸다. 

태백을 지날 때 바라본 눈 쌓인 함백산의 웅자와 추전역에서 마주보이는 매봉산 ‘바람의 언덕’ 풍력발전기, 함백역 뒤편으로 산자락을 하얗게 뒤덮은 고랭지채소밭, 또아리굴 전후에 보이는 치악산 남대봉 일원의 험악한 산세가 특별히 기억에 남는다. 

원주를 지나면 열차는 일상의 교통수단이 되어 직장인과 학생들로 붐빈다. 오랜만에 내려본 청량리역은 실로 상전벽해다. 지하철로 바꿔 타고 인파 속의 ‘행인 1, 2, 3’으로 각자 섞여들어갈 때 우리의 느낌은 똑 같았다.
‘지하철은 열차가 아니야….’ 

 

추암 옆 좁은 만으로 거세게 들이치는 파도. 허리를 꺾으며 포말로 비산하는 장쾌한 광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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